합 1: 6 사납고 성급한 백성 - 합 1: 7 자기들에서 나오며
합 1: 6 사납고 성급한 백성 -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
하나님이 지금 하박국에게 하나님의 일에 악인을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악한 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이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행한다는 말이므로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주로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물으면 선지자나 믿음의 조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셨고 스데반을 사용하셨고 바울을 사용하셨다.
그 사람들을 왜 사용하셨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절실히 믿었을뿐만 아니라 신앙의 열정이 있었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꼭 그들처럼 의로운 사람만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신다는 말씀이다. 갈대아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그 당시에 매우 악했던 사람들이었다.
유다 백성이 행한 죄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사람들의 악행은 잔인했다.
그런 사실은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다.
얼마나 악한지 "사납고 성급한 백성"이라고 했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사납고 성급한 백성이 살인하는 장면을 보면 뜸을 들이지 않고 단칼에 죽입니다. 눈에 띄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입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유혈이 낭자합니다.
2]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그리고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자들이다. 강탈을 스스럼없이 자행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다. 주저함 없이 성급한 백성이다.
3]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갈대아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세딤'은 앗수르 서판에 의하면 '칼두'(Kaldu)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두는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옆에 페르시아만과 바벨론 남단 중간에 위치한 나라였고, 도시가 거의 없었다.
그곳 거민들은 소규모의 농축업과 수렵으로 생활했으며, 앗수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R. L. Smith).
그러다가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B.C.625년에 니느웨를 점령하여 갈대아 왕조를 창건하였고,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에 이르러서는 바벨론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IDB).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갈대아인들은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훌의 아들 게셋의 후손이었다.
* 창 22: 20-24 – 나훌의 후손 - 20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21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24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을 통해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실 경우가 많이 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곧 죽는다고 하면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의아해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악한 자가 지배할 것이다'라고 하면 점점 더 믿기가 힘들어진다. 실제로 이 세상을 악한 자가 지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을 말하면서 저 사람은 언제쯤 죽을까라고 다들 궁금해했지만 아주 오래 살았다. 이처럼 악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오래 사는 것은 아니다.
합 1: 7 자기들에서 나오며 -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
본 절에서는 앞에서 언급된 침략자의 모습을 보다 생생하고 상세하게 묘사한다.
갈대아 사람들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사람을 다스리는 통치권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착각하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포악하고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열국들을 지배하고 다스렸다.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자기를 믿고 당당하다. 고개를 바짝 세우고 다닙니다. 교만의 극치에 삽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은 자기 잘난 맛에 살게 되어있다.
1] 두렵고
두려움에는 나름 의식이 있다. 이 의식은 나의 마음, 내가 가장 확신하는 신념, 그리고 결국 내 행동을 자원으로 작동한다.
두려움이 지니는 감정적인 요소들을 보면 두려움은 소극적인 태도(무관심-거리감-분노), 공격(통제적 행동-위협- 좌절), 열정(용기-동기-만족과 행복)의 형태로 우리의 삶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1) 환경에 대한 두려움
* 창 15: 12 -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 신 28: 67 -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 대하 29: 8 -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하시고 내버리사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라.
(2) 실패에 대한 두려움
* 창 15: 16 -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 대하 17: 10 - 여호와께서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
(3) 직면에 대한 두려움
* 창 15: 14 -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 삼상 11: 7 -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직면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또한 어마어마한 분노를 안고 있다. 자신의 경계가 어디인지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분노를 안고 있다.
이 외에도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 두려움은 두려움을 조정하는 일을 담당하는 우리 뇌 속의 편도위(amygdalic part)에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절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졌고, 이것을 바꿀 수는 없다.
2] 무서우며
위협이나 위험이나 두려움을 주어 마음이 떨리는 상태에 있다. 또는, (어떤 존재나 대상이)사람에게 위협이나 위험이나 두려움을 주는 상태에 있다. 두렵다.
3] 당당함
자기 자신의 실력, 자신이 쌓아온 것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심정으로 그것에 기반한 당당함, 자긍심도 포함하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자기에게서 나온 당당함은 역사적으로 보면 얼마 가지 못했다. 세상 권력의 무상함을 우리는 늘 보아왔다.
성경에는 아합이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다. 느부갓네살 왕이나 다리오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둘렀지만, 마지막이 비참하였다.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려 했지만, 자신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히틀러는 세계 정복을 꿈꾸고 유대인을 학살했지만, 자신의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이것이 세상의 권력이고 세상의 당당함이다.
4] 위엄
태도나 말이 남을 꼼짝 못하게 할 만큼 기운이 있고 빈틈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자세는 반대입니다. 고개를 들거나, 어깨를 펴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무릎을 꿇었다. 스데반이 마지막 기도를 할 때도 그랬다. 하나님께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세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서는 것이 아니라 엎드린다. 성경에는 곳곳에 “엎드려 경배하고” 혹은 “엎드려 절하고”라고 했다.
직분을 받거나 안수를 받을 때에 고개를 바짝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자세를 의미한다.
* 출 15: 7 – 7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 신 9: 26 -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 대상 29: 11 -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사람들의 당당함은 자기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진정한 당당함은 나의 힘이신 하나님한테서 나온다. 우리 자신의 당당함은 얼마 가지 못하며 우리의 당당함은 쉽게 사라진다.
공회 앞에서 선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 얼마나 당당합니까. 세상의 힘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과 전도자들이 그랬다. 순교자들의 신앙이 당당했다.
우리들도 지금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있지만 굴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군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랍니다.
어머니에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