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잘 알고 지내는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B였다.
"지금 탄천을 혼자 걷고 있어요. 그런데 무척 보고 싶기도 하고, 생각이 나서 뜬금없이 전화를 하게 되었네요. 일요일 밤인데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괜찮습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두 남자는 간만에 20분 넘게 수다를 떨었다.
B의 큰 딸이 12월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축하할 일이었다.
나도 B의 두 딸을 잘 알고 있었다.
7월 중순에 이미 상견례까지 마쳤다고 했다.
'야탑역' 부근에 작은 신혼집을 얻었고, 두 청춘들은 양가의 허락 하에 동거를 시작했단다.
"오래 연애를 하기도 했고 지금까지 예쁘게 사랑을 꽃피워 왔으니 굳이 12월까지 따로 살 필요가 있겠냐면서 둘이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겠다"고 하더란다.
양가 부모들도 모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었다고 했다.
나도 잘했다면서 B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대화 말미에 B가 자신의 상견례 때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정말로 심쿵한 얘기였다.
아직도 내 가슴이 알싸하게 일렁거리는 걸 보니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느꼈던 감동이 크고 깊었던 모양이었다.
예비 사위는 젠틀하고 품격있는 청년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돈댁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고 했다.
상견례 때 예비 사위의 부친이 그러더란다.
"신혼집을 구하는데 자신이 조금도 일조하지 못해 너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고 하면서 송구스럽다는 얘기를 먼저 꺼내시더란다.
(삼억이 조금 넘는 돈을 B가 전액 부담했다고 함)
그래서 B가 두 분의 사돈 내외에게 그랬단다.
"고등학교 때 국어책에 나왔던 '김소운 님(1907-1981)'의 수필이 있었어요.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고요.
저와 비슷한 연배시니까 사돈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행복이 꼭 재물과 일치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 부부는 두 청년들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성실을 믿습니다. 그 점 때문에 두 청년들이 더욱 자랑스럽고 예뻤지요.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나는 B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 상견례 장소의 분위기가 내 뇌리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사업을 하다 보면 부침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지요. 사람만 확실하고 좋으면 됐지 조건이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B가 화답했다.
"맞아요. 그렇지요? 그렇게 얘기하실 줄 알았어요. 하하하"
나도 진심이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B도 진심으로 한 얘기라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상견례에서 처음 본 사돈 앞에서 '김소운 님'의 수필을 얘기하며 너무 마음쓰지 말라고 했다는 대목에서, 나는 B를 이백 프로 이상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B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다.
나와 B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만났다.
옛날에 어느 회사로 강의를 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알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수록 조금씩 조금씩 친해졌다.
업무적으로 교집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영혼의 DNA가 비슷해서 잘 통했다.
그는 겸손했고 가정적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기반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통화 말미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의 그 작품, '가난한 날의 행복'을 서로가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멘트나 구술이 원작과 100%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폰을 통해서, 작품 중에 등장하는 가난한 세 부부의 스토리텔링과 생에 대한 진정성이 자연스럽게 녹아 흘렀다.
나도, B도 한 때는 문학소년이었던 까닭에 고딩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 작품의 얼개와 감동이 서로의 혈류를 타고 선명하게 재귀하기 시작했다.
B 덕분에 '김소운 님'의 작품을, 정말로 오랜만에 다시 한번 정독해 보았고 내 마음 속 심연에 고이 간직할 수 있었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원문을 소개해 본다.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할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다 주는 실화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다음은 어느 시인 내외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역시 가난한 부부였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세수를 하고 들어와 아침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시인의 아내가 쟁반에다 삶은 고구마 몇 개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있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기에 우리도 좀 사 왔어요. 맛이나 보셔요."
남편은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식전에 그런 것을 먹는 게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아내를 대접하는 뜻에서 그 중 제일 작은 놈을 하나 골라 먹었다.
그리고 쟁반 위에 함께 놓인 홍차를 들었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드셔요."
아내는 웃으면서 또 이렇게 권했다.
남편은 마지못해 또 한 개를 집었다.
어느 새 밖에 나갈 시간이 가까와졌다.
남편은 "인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하고 재촉했다.
"지금 잡숫고 있잖아요. 이 고구마가 오늘 우리 아침밥이어요."
"뭐요?"
남편은 비로소 집에 쌀이 떨어진 줄을 알고, 무안하고 미안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했다.
"쌀이 없으면 없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 하는 거요? 사내 봉변을 시켜도 유분수지."
뿌루퉁해서 한 마디 쏘아붙이자, 아내가 대답했다.
"저의 작은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아내 앞에, 남편은 묵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는 형언 못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 왔다.
다음은 어느 중로(中老)의 여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여인이 젊었을 때였다.
남편이 거듭 사업에 실패하자, 이들 내외는 갑자기 가난 속에 빠지고 말았다.
남편은 다시 일어나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사과를 싣고 춘천에 갔다 넘기면 다소의 이윤이 생겼다.
그런데 한 번은, 춘천으로 떠난 남편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제 날로 돌아오기는 어렵지만, 이틀째에는 틀림없이 돌아오는 남편이었다.
아내는 기다리다 못해 닷새째 되는 날 남편을 찾아 춘천으로 떠났다.
"춘천에만 닿으면 만나려니 했지요.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았나 봐요. 정말 막막하 더군요. 하는 수 없이 여관을 뒤졌지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다 뒤졌지만 그이는 없었어요. 하룻밤을 여관에서 뜬눈으로 새웠지요. 이튿날 아침, 문득 그이의 친한 친구 한 분이 도청에 계시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분을 찾아 나섰지요.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정거장에 들러 봤더니……."
매표구 앞에 늘어선 줄 속에 남편이 서 있었다.
아내는 너무 반갑고 원망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트럭에다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남편은 가는 길에 사람을 몇 태웠다고 했다.
그들이 사과 가마니를 깔고 앉는 바람에 사과가 상해서 제 값을 받을 수 없었다.
남편은 도저히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될 처지였기에 친구의 집에 기숙을 하면서 시장 옆에 자리를 구해 사과 소매를 시작했다.
그래서 어젯밤 늦게서야 겨우 다 팔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보도 옳게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8.15 직후였으니…….
함께 춘천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그때만 해도 세 시간 남아 걸리던 경춘선, 남편은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아내는 한 손을 맡긴 채 너무도 행복해서 그저 황홀에 잠길 뿐이었다.
그 남편은 그러나 6.25 때 죽었다고 한다.
여인은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모진 세파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엘 다니고 있으니, 그이에게 조금은 면목이 선 것 도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춘천서 서울까지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의 손길,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지난날의 가난은 잊지 않는 게 좋겠다.
더구나 그 속에 빛나던 사랑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행복은 반드시 부와 일치하진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진부한 일 편의 경구만은 아니다.
- 김 소 운 -
두 청춘 남녀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밤이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