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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말하노니
고후 13:1-13
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6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13 / [마지막 경고와 인사] 내가 여러분을 방문하려는 것이 이번으로 세번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이제 여러분을 방문하기에 앞서서 하는 세번째 경고입니다. 성경은 ㄱ) `어떤 악한 일이든지 두세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ㄱ. 신19:15) 2) 나는 이 경고를 지난번에 거기 갔을 때 죄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이미 말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경고합니다. 이번에 내가 가면 엄하게 벌을 내리고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정말 나를 통해서 말씀하시는가를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내가 가면 그 증거를 여러분에게 보여주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약하게 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강한 능력으로 나타나십니다. 4) 인간으로 오신 그분의 연약한 육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지금 그분은 하나님의 크나큰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분과 같이 육체적으로는 연약한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여러분을 대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그분처럼 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5) 여러분 자신을 잘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험에 합격하였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며 여러분 속에 역사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더욱더 실감하고 있습니까? 그와 반대로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된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6) 그러나 나는 이 시험에 합격하여 버림받지 않고 참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기 바랍니다. 7) 나는 여러분이 올바른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우리의 체면이나 세우려고 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는 멸시를 받더라도 여러분은 올바른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8) 우리는 언제 어떤 경우에나 올바른 일을 권장할 뿐 악을 행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9) 만일 여러분이 강해질 수만 있다면 우리가 연약해지고 멸시를 당하게 될지라도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늘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0) 나는 내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여러분을 꾸짖거나 벌을 내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내게 주신 권위를 여러분을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고 싶습니다. 11)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내가 말한 것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서로 화목하고 평화스럽게 지내십시오.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 다정하게 인사하십시오. 12) 여기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의 권위로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강한 메시지로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경고의 목적은 그들을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1-10) 바울에게는 고린도를 세 번째 방문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모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교회에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바울의 강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사용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적 권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약한 모습으로 못 박히셨으나,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나셨던 것처럼 강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이 기대한 것은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죄악과 분쟁과 다툼이 사라지고, 정결함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의 삶,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자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스스로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결단과 변화의 모습 속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5).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강하게 나타날 때, 그들은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경고하는 핵심의 내용입니다. 즉 고린도의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미리 경고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를 대면할 때, 그가 가진 사도권을 사용하여 징계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인사와 축복(11-13) 바울은 앞에서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고의 메시지와 함께 전달했습니다. 그와 함께 그들에게 바울이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지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교회가 보여야 할 영적인 모습이고 동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교회에는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은혜와 축복이 있는 교회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는 관계에 있습니다(11-12). 그리고 이 완성의 일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적용: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모습이 되는 것, 그것은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당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가 삶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물은 100도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끓지 않습니다. 증기기관차는 수증기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켜야 움직입니다. 99도, 211도에서는 절대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작 1도 차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용기는 집요함을 요구합니다. 마지막 1퍼센트의 인내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 유영만의《용기》중에서 -
< 설 교 >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고후 13장 / 최영기목사
오늘을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 등 공동체의 일원으로 삽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삶이 어떤 지가 인생의 질을 결정합니다. 공동체의 삶이 기쁘고 즐거우면 인생이 행복할 것이요 공동체의 삶이 힘들고 고되면 인생도 불행할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를 쓰는 사도 바울의 의도는 한 마디로 집약이 됩니다. 완전하게(9절) 혹은 온전하게(11절) 되라는 것입니다. 완전하게나 온전하게 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인데 완전히 수리하여 새것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estore라고 하면 의미가 잘 전달될 것입니다. 가짜 사도로 인하여 믿음의 기초가 흔들리고 불순종하는 태도가 자리 잡고 파벌이 형성된 건강하게 회복시키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러한 의도로 쓴 편지의 마지막 장을 통하여 공동체의 건강을 회복하여 온전하게 만들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하나님이 같이 하는 사람을 경외한다
회복되어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을 자신이 하나님이 불러주신 사도이라는 사실을 틈틈이 강조합니다. 이유는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그가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드리고 그렇게 할 때에 복음에 확실히 선 교회가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호소는 자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지를 마감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 노골적으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1-2절).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갈 2:20).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보였던 것은 그리스도의 온유입니다. 그러나 온유함을 약함으로 오해하고 계속하여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엄중함이 나타날 테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3-4절). 인간 바울이 아니라 자신을 사도로 불러서 사용하시는 주님을 경외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한 사람을 경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을 존중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크리스천들에게 권세 즉 나라 권위에 순종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3:1). 그러므로 나라 권세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하신다고 했습니다(롬 13:2).
우리는 여기에서 크리스천들이 나라 법을 지켜야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와 정부를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라 법을 준수해야합니다. 나라 법을 어기고 세금 포탈을 한다든가 가짜 물건을 판다든가 허위로 사회보장 제도 혜택을 받는 것은 다 하나님을 속여 먹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잠시는 유익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크리스천 가정이 되려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하여야합니다. 부모나 남편이 반드시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에게 권위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목자와 사역부장에게 순종해야합니다. 주님이 몸 된 교회에서 세운 직책이라면 그 뒤에 하나님의 권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을 때에도 부모를 저주하면 사형에 처하라는 엄한 명령을 주셨습니다(출 21:17). 현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유는 부모님이 하나님에게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에 비추어볼 때에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불순종하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을 멋지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의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이러한 사람들이 삶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없을 것입니다. 건강한 회복되는 공동체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순종할 때에 얻어집니다.
2. 불우한 사람을 경외한다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사람들은 존중해야하는데 그러한 사람들이 불우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불우한 사람들, 특히 과부와 고아와 이스라엘 백성들 틈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잘 돌보라고 하신 말씀은 제가 최근에 수차 인용했으니까 다시 인용하기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람은 낮은 곳에 임합니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배고프고 헐벗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35-36, 40). 그리고 불우한 사람을 돌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45).
미국이라는 나라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평가하지만 제가 세계를 다녀보면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렇게 잘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완전히 돌보는 것도 아니고 불우한 사람들 틈에 소외된 분들도 있지만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대단합니다. 건축을 할 때에 신체장애자를 배려하여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장치를 안 하면 건축 허가를 내어주지를 않습니다. 노인들에 대한 사회 보장 제도도 곧잘 되어있어서 어떤 노인은 미국 정부가 효자라고까지 말합니다. 자녀들이 하지 않는 것을 정부에서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지내면서 가족끼리 선물하는 것을 그만 두고 불우한 사람에게 선물을 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우한 사람을 돌보아 주님을 기쁘게 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연중행사로 그치지 아니하고 삶의 스타일도 정착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 공동체가 건강해지고 회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병약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 잘 될 것입니다. 자폐증이라든지 문제를 안고 있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를 잘 수용하는 목장이 잘 될 것입니다. 신체장애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을 주어 고용을 허락하는 회사가 잘 될 것입니다. 불우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나라가 잘 될 것입니다.
Ⅱ. 자신이 믿음 안에 있나 를 살핀다
회복되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하여서는 자신을 때때로 점검해야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계속하여서 사도 바울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이 하나님의 종인가, 과연 사도인가? 사도 바울은 온유함을 나타내어서 이들의 요구에 다 응하여 자신이 참된 사도임을 증명해 보였지만 편지를 마감하면서 최후로 도전을 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을 평가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평가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믿음 안에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13:5-6절).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우리도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를 종종 살펴야합니다. 특별히 공동체가 불만으로 차 있던지 두려움, 절망감, 염려가 지배할 때에는 구성원, 특히 영적 권위를 갖고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은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를 살펴야합니다. 믿음이란 신뢰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그러한 분위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살펴서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여가 원인이었다고 생각되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한 후에는 순종을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속해 있는 공동체의 현재 모습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생각하고 그 합당한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만을 찾아서 순종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지는 어떻게 점검합니까? 궁극적으로는 삶으로 증명이 됩니다. 어제는 휴스턴 기온이 급랭 되어서 눈이 나린 곳까지 있었습니다. 밤에 온도가 빙점 이하로 더 내려갈 테니까 조심하라는 TV 보도를 들었다고 합시다. 이 일기 예보를 진짜 믿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화초를 좋아하는 사람은 꽃을 집안에 들여다 놓을 것이고 파이프가 얼지 않도록 천으로 씌우든지 물이 밤새 흐르도록 해서 파이프가 터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런 TV 보도를 듣고서도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는 사람은 이 보도에 대해 긴가 민가 하는 사람 즉 믿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약 2:26). 행함으로 검증이 되지 않는 믿음을 가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Ⅲ. 자신보다 공동체를 우선한다
회복되어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공동체를 우선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이 믿음에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찰한 후에 “우리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것을 기대하고 또 바라고 있습니다(7-8절). 자신들이 믿음 안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 동시에 사도 바울에 관한 우리의 판단도 맞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는 불리해집니다.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서라도 사도 바울은 그들이 믿음 안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에게는 고린도 교인들이 잘 되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9절).
뻔한 얘기 같지만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공동체 일원이 자신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해야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당연한 말이지만 실천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새해가 되면서 많은 분들이 나라가 잘 살 길에 관하여 많은 의견을 진술할 것입니다. 국민과 정치인들이 자신보다 나라의 유익을 우선하면 나라가 잘 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회사 직원과 경영자가 자신보다 회사의 유익을 우선하면 회사가 잘 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이 실현성이 없는 것이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해야할 동기 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약간 양보하여 공동체가 잘되면 결국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온다면 약간의 양보는 할 수 있지만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켜야한다면 그렇게 할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를 건강하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크리스천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주님의 뜻과 영광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공동체가 가정과 교회, 둘입니다. 요즈음가정이 쉽게 깨지고 있습니다. 부부끼리도 배우자가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자기실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서슴지 않고 이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가정을 지켜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건강한 가정, 회복된 가정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첫 번 공동체이고 인간이 깨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가정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하다보니까 자신을 죽이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애쓰고 그러다보니까 부부 관계도 회복이 되고 자녀들에게는 따듯한 가정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그리하여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성도들이 교회의 유익을 자신의 유익보다 우선할 때에 건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유익보다 교회의 유익을 우선한다는 것은 두 가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역만 되면 된다!" "복음만 전해지면 된다!"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자세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난주에는 초등부가 주관해서 성탄절 축하예배를 드렸는데 어린이 프로그램을 주관했던 자매님이 나눔터에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 교회 나오기 시작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자매님인데 요지는 자신이 참된 섬김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특별 예배가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수많은 돕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돕는 사람들을 보니까 사회에서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존경받는 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돕는 역할을 맡아서 정성을 다해서 섬길 뿐만이 아니라 기쁨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참된 섬김의 모습을 보았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사역만 되면 된다. 복음만 전해지면 된다는 생각이 일반화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이 나타나는 것이 목장 사역입니다. 목자치고서 자신의 목장이 부흥하는 것을 원치 않는 목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장 식구가 적응을 힘들어하거나 새로 방문한 목장 식구가 잘 안 맞는 것 같으면 다른 목장으로 옮길 수 있도록 조처해 주는 목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용을 보일 수 있는 것은 목장을 부흥시키는 목자로써 인정받기보다 목장 식구의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보다 교회의 필요를 우선하는 것은 집사님들에게서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10월에 회계연도를 시작하기 전에 집사님들이 맡으면 좋을 사역부서 명단을 작성하여서 집사님들에게 선호하는 순서로 번호를 매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원하시는 부서에서 섬기도록 배려해드리는데 가끔 가다가는 별로 인기가 없는 부서는 원하는 분들이 하나도 없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역부서가 채워지는 이유는 원하는 부서를 적은 명단에 ‘목사님이 지정해주시는 부서’라는 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난에 체크하는 데에는 위험 부담이 따릅니다. 자신의 적성과 전연 맡지 않는 사역부에서 사역을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집사님들이 자신이 원하는 부서를 표기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난을 체크하시는 집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격이나 적성에 전연 맞지 않는 사역을 맡겨도 성실하게 사역을 해내십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하시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사역보다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역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교회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 점검하라
유재영목사 / 고후 13:1-10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후 도서판매량이 예년보다 절반으로 줄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점에 갔습니다. 무슨 책을 살까 이 책, 저 책을 들춰보다가 저와 이름만 같은 정재영 교수가 쓴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성도는 교회는 떠났지만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말합니다. 현재 이러한 가나안 성도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다만 2013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조사 결과 약 100만 명의 가나안 성도가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가나안 성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뛰쳐나오게 된 몇 가지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강요받는 신앙에 대한 부담입니다. 신앙은 개인의 믿음과 관련된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신앙에도 집단주의적인 요소가 작용하여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힘들어하다 교회를 떠난 경우입니다.
둘째는 소통 단절의 문제입니다. 신앙에 대한 생각이나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교회 공동체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는 풍토, 목회자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질문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입니다.
셋째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믿음만 강조하면서 책임 있는 행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실천 없는 신앙의 모습에 실망해서 교회를 떠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나는 술도 안 먹고 기독교적으로 산다.”고 표방은 하는데 기독교인이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난 경우도 있고, 매일 아침 QT는 열심히 하면서도 기업 운영 방식에서는 탈세나 노동자 착취를 자행하는 사장의 모습을 보고 교회를 떠난 경우입니다.
넷째는 자기 식으로 표현되는 신앙입니다. 특정인이 정보를 독점하지 않고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목회자들만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얼마든지 신학 서적을 접할 수 있고,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기성 교회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교회를 옮기거나 아니면 아예 자신들에게 맞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경우입니다.
저자는 가나안 성도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구조를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격히 구분하고 직분에 따른 위계 서열을 중시하는 현재 한국 교회의 구조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주인 의식을 갖고 참여하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구조를 추구해야 한다. 상명하복의 권위주의 방식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리더십이 발휘 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성숙한 기독교인의 관심은 마땅히 공공으로 확장되고 공동체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훈련된 기독교인이라면 교회 밖에서도 일반인들과는 다른 더 엄격한 도덕 기준에 따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책을 읽고 가나안 성도를 가장 많이 양산한 교회가 어느 교회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고린도교회였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고린도교회는 바울 파, 아볼로 파, 베드로 파, 그리스도 파로 분열된 교회였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 있을 정도로 음행을 행하는 이들도 있었고, 소송 중인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로 다툼이 있었고, 주의 만찬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며 싸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라고 선물로 주신 은사를 받은 이들이 성도들을 무시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이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골로새 교회는 질서 있게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 지고 있다는데 우리 교회는 뭐냐?’내가 이러려고 교회를 다니나 자괴감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자기 체험의 특별함을 강조하면서 지배하려고 하는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한 교회 그만 다니겠다며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시 편지를 써서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다. 그리스도의 편지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향기는 ‘음, 냄새 좋은데’정도가 아닙니다. 들끓는 쥐 때문에 골치를 썩던 독일 하벨른의 시장이 쥐를 없애주면 상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마을에서 쫓아내자 조용히 돌아와 피리를 불어 마을의 아이들을 이끌고 사라진 피리 부는 사나이가 부는 피리 소리와 같습니다. 멸망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라는 설명을 볼 때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에 이르도록 이끄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편지는 ‘Dear my friend'로 시작하는 일반적인 편지가 아니라 추천서를 말합니다. 취업을 할 때 교수님이 추천서를 써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추천서를 읽으면 그 학생의 리더십이나 대인 관계와 학교 생활의 숨결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과 그의 숨결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추천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편지는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사람의 마음에 쓴 편지여서 생명이 넘치고 다른 이들이 생명을 얻는 자리에 이르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꾼이 된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향기와 편지가 되는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다행히 고린도교회는 이 물음에 아멘으로 반응했습니다.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닫고 바울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확증해 보라는 바울의 권면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가 늘어나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에게 울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확증해 볼까요? 이를 확증하려면 바울이 자신의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 빌립보서 3장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4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와 지금은 배설물로 여기는 세상의 의 중에서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지 스스로 점검하라고 합니다.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옳은 자가 되고,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은 자가 된다고 합니다(7절).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을 믿느냐 입니다. 어린 아이의 믿음에 대하여 시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편 131편 1절에서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분에 넘치는 교만을 버리고 오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없이 구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미에서 보면 교만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생명의 주인이며, 다른 생명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허황된 영웅주의입니다. 주위에 존재하는 것들을 자기중심을 향하도록 배열하고 지배하려는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교만은 스스로 잘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빠지기 쉬운 병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이 날이 임하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 오만한 자들이 낮아지고, 오직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고 합니다(사 2:11-12절).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평온을 유지하고, 영원히 주님만을 바라보며 삽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참 중요합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체험한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실린 글을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고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서 수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나고 있는 구름과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81-82쪽)
히브리서 기자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 12:1-3)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교만과 오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고 있습니까? 살다보면 겪게 되는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흔들릴 때 주님 안에서 평온을 유지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성품을 닮기 위해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며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믿음 안에 거하고 있는지를 확증한 사람은 진리를 거스르지 않고 진리를 위해 삽니다(8절). 성경에는 진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 진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1-32). 제자들에게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에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8:17).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과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룩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 나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복 받고,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복을 받는 방편으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고,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연습을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이 실패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고 연습합니다.
우리는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꾼이 많은 시대, 여러 이유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시대, 기독교가 지탄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확증하며 분에 넘치는 교만과 오만을 버리고 영원히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았나?
고후 13장 1~10절 / 박조준목사
어느덧 이 해도 다 저물어 오늘 이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언젠들 세월이 빠른 것을 느끼지 아니하겠습니까마는 이렇게 연말을 당하고 보면 새삼스럽게 광음이 통과한 것 처럼 절감하게 됩니다. 더구나 뒤를 돌이켜 볼 때 무엇 좀 해 놓은 것이 있을 때는 그래도 살아 온 보람을 갖게 되지만 별로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울 때 그 마음의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 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해를 보내면서 지난 1년 동안에 우리가 살아온 생의 자취를 한 번 되새겨 보 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제일 먼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믿음으로 하여 왔는가? 생각해 봅니다.이 말씀을 들을 때 얼른 생각하면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아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의례 믿음에서 하는 것이지 믿음 없이 하는 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반문하실 분도 계실 줄 믿습니다. 물론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이 할 수가 있습니 다.이렇게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린다고 하면서도 믿음은 별로 없이 할 수가 있습니다. 무슨 교회의 기관이나 단체에서 봉사를 한다고 하면서도 믿음 없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일이면 좋아서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손도 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 회를 봉사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해야겠는데 내게 유익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하고 내게 좀 손해가 날 일이면 아예 모른척 해 버립니다. 이거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는 생활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야고보 장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참 믿음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런 죽을 믿음 가지고, 참 믿음이 아닌 것 가지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고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그 다가오는 징벌을 피하라 고 일러 주었느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리고 너희 스스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 라고 말할 생각도 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도 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다 찍혀 불에 던질 것이다. 나무 잎은 무성한데, 얼른 보기엔 좋은 나무 같아 보이는데 문제는 좋은 열매를 맺었느냐 하 는 것입니다. 여기 세례 요한의 말에 나쁜 열매를 맺은 나무는 찍어 버린다고 하지 아니하였습 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이 나쁜 열매 즉 적극적인 죄는 별로 범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좋 은 열매 맺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한 것이 죄입니다. 믿음으 로 행하지 않은 것은 다 죄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금년 일년 동안에 하나 님이 원하시는 좋은 열매를 얼마나 맺었습니까? 좋은 열매 맺지 못한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질 까 두렵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런 말을 누구더러 했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했어 요? 아닙니다.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스스로 거룩하다고 다른 사람을 천시하던 바리새인, 국민의 지도자로 자처하던 서기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자인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말로 바꿔 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너희들 아, 너희 목사들, 장로들, 권사, 집사, 교회의 지도자들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 들아 믿음의 열매를 맺었느냐?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만 생각하고 합당한 열매 맺지 못하면 아 무 의미가 없다. 믿음으로 살면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 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열매가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생활이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얼마나 스스로 속이는 생활을 하 였습니까? 오늘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들으십시다. 내가 믿음에 있는가 너 자신을 시험하라 내가 과연 믿음에 있습니까?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했습니까? 그러면,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을 가리켜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까? 어떤 이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오해하여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같이 해주시는데 믿고 구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도 간절히 구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했는데 하면서 일은 내 마음대로, 아니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꾸며놓고 축복 해 달라고 구한다면 그것이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떠난 것, 하나님의 경륜과 일치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허락하신 것 외의 것을 되리라고 믿고 구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 고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을 일방적으로 잘못 믿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비록 밤 낮 쉬지 않고 구한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그러므로 하 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은 언제나 내 생각이나 내 뜻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허락을 절대로 믿어서 그대로 살아갑니다. 로마서 12장의 말씀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서 힘씁니다. 사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 다. 그리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버리 운 자니라. 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귀합니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능력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 말씀한 것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님의 영이 함께 할 때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함께 하 는 사람은 언제나 승리하고 형통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주의 영이 떠나면 이는 아무 것도 아닙 니다. 아마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에 나오는 삼손일 것입니다. 삼손은 본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나실인으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 씀 안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특별한 힘을 주어서 인류 역사 이래 아직도 삼손 만큼 힘이 센 사람이 없었습니다. 힘으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썩은 당나귀뼈 하나로 블레셋 군인 천여명을 쳐 물리쳤고, 사자를 움켜 잡고 참새 다리 찢듯이 각을 뗘 버리고 마는 장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수의 나라 블레셋의 여인 간첩 드릴라에게 빠져서 하나님의 사람 으로 합당하게 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 그의 힘은 다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블레셋 군에게 잡히게 되었고 그의 종말은 문자 그대로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삼 손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머리칼을 밀어 하나님의 영이 떠났으나 그는 알지 못하였고 여전한 줄 생각하고 힘을 쓰려 하였으나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것처럼 비극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 사무엘상을 읽어보면 실로에 제사장 엘리가 있었는데 그의 두 아들이 역시 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대로 제사장의 일을 보기는 하지마는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삼상 2:12) 하였습 니다. 그래서 아들은 하나님 앞에 백성들이 제사 드리려고 예물을 가져오면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미리 가로채 먹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사 람이 엘리에게 와서 분명히 선언하였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많은 사람 가운데서 너를 택하여 나 의 제사장으로 삼았는데 이렇게 나를 경멸하니,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 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분명히 말하는데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겠다. 나를 존중히 여 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겠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게 되어 이 스라엘은 에벤에셀 곁에 진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싸움에 이스라 엘이 크게 패하여 4,000명이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언약제를 실로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우리가 이기겠지 하는 기대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군에서는 더 용기 를 내어 싸워 이스라엘은 대파하고 전사자가 3만이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영이 떠난 다음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으나 크게 지고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세상 사람보다 더 초라합니다.백합화가 귀합니다. 그 향 기가 그윽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백합화가 썩어지면 꽃 중에 제일 더러운 냄새를 피웁니다. 그리스도인이 귀합니다. 이 세상에 향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떠나면 더러운 냄새를 피웁니다.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같이 귀합니다. 썩은 것을 막게 하고 모든 음식물의 맛을 냅니 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떠나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길가에 내버려 짓밟힘 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성령이 떠난 것을 모르니 이것 얼마나 비참합니까? 요한계시록에 나오 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가난하면서도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거나, 눈이 멀어 보지 못하면서도 다 본다 고 하면 이거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한 분이 하루는 친구네 집에 일을 보러 갔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앞을 보는 사람인데 오랜만에 서로 만나 하루를 잘 지내고 저녁까지 잘 대접해서 저녁 늦게 소경 친구는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루를 재미있게 지낸 것을 고 맙게 생각하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안고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친구를 돌려보낸 이 사람은 집에 들어와 정돈을 하려다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캄캄한 밤에 앞 못 보는 친구가 집으 로 돌아가는데 그 친구는 상관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하고 부딪치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호롱불을 켜들고 저 멀리까지 간 친구를 뒤쫓아 따라갔습니 다. 여보게 김군! 잠깐만, 자네 집에 가면서 이걸 들고 가게 하면서 호롱불을 주었습니다. 이 친 구는 섭섭해 하는 낯 빛으로 여보게 자네는 내가 앞 못 보는 것을 잘 알지 않나? 나한테 이 호 롱불이 무슨 소용있나? 김군, 그게 아니네, 자네는 상관없지만 이렇게 캄캄한 밤에 다른 사람이 혹시 부딪칠 것 같아서 주는 것이야. 이 등불을 들고 가면 다른 사람이 보고 비켜갈 것 아닌가 이때 이 친구는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준 등불을 들고 한참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딱 부딪쳤습니다. 이 사람은 화를 냈습니다. 여보시오. 눈도 없소? 그렇지 않아도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 등불을 들고 가는데 사람을 업신여기고 이런 시비요? 그때 부딪친 손님 이 등불이 어디 있소? 하고 되물었습니다. 등은 있는데 불은 이미 꺼져 있었습니다. 한참 걸어 오는 동안에 바람에 불이 꺼진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령의 눈이 어두우면, 내 마음속에 성령이 떠난 것도 은혜의 불길이 꺼진 것도 모르고 지나 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줄 착각하고, 성령이 떠났어도 함께 하시는 줄로만 알고 있으면 비극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어떤 환자는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가 진단을 받고 병을 발견했는데 이미 때는 늦어 시간만 기다리 고 있는 경우를 봅니다. 육신도 중요하지만 우리 심령의 상태를 바로 시험해 보는 것은 무엇보 다도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했으면, 성령이 함께 계신 것 같지 않으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 개하여 처음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촛대를 우 리에게서 아예 옮기고 말겠다 고 경고하십니다. 우리가 금년 일 년을 믿음으로 살았습니까? 내 마음속에 주님의 영이 계시는 것을 아십니까?
나 자신을 아십시다
고후 13장 1~13절 / 박조준목사
여러분께서 기도하여 주셔서 그 동안의 전도여행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합 니다. 지난 3주 동안 미국 뉴저지, 뉴욕, 필라델피아,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하와이 집회를 인도 했습니다. 제가 5년만에 처음으로 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모였고 은혜도 많 이 받았습니다. 특별히 감사했던 것은 어디 가나 우리 갈보리 교회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로 30 가정을 넘게 만나 뵌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한국에 계신 여러분 에게 안부를 전하였고 갈보리 교회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헬라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고 했는데 너무 평범한 말이면서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주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유명한 것 같습니다.사람이 무엇 입니까? 사람은 이 땅에 그저 우연히 생겼다 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단세포 동물 에서 시작하여 수천 수만년이 지나는 동안에 사람이란 존재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 므로 인간의 존재는 우연한 것이며 결코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또 어떤 이는 사 람이란 기계와 같아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고 생각합니다. 숙명론자들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팔자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 는 사람이란 땅 위에 모든 동물에 비해서 가장 지능이 높은 동물에 불과하다 고 합니다. 유물론 자의 생각입니다.그런데 성경은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 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고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우리에 대하여 어떤 뜻을 지니고 계셨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우 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교제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은 네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 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제자 들에게 물어 보신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사람 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고,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짐승은 아무리 지능이 높고 재간이 많다고 하더라도 자기 반성이란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 했습 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때 지금의 우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으며 또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우리 자신을 확증하는 것이 필 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 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꿈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성시에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 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했습니다. (시 8:4-5)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를 바라고 있 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실제 자기 자신보다 높여 불려지는 것을 속으로 좋아한다고 합니다. 열살 난 어린아이에게 얘는 한 열다섯 살은 되어 보이는데 하면 그 아이는 결코 이 말을 자기에 대한 모욕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녀가 같이 옷가게에 들어갔을 때 옷을 파는 사람이 딸에게 언니하고 옷 살 때는 이렇게 같이 다니세요? 하고 물으면 이 말을 듣고 있던 중년부인 어머니는 속으로 대단히 흡족해 할 것입니다. 육십 세가 훨씬 넘으신 분에게 겨우 오십이 되었 을까 말까 할 정도로 보입니다 하면 뻔한 거짓말인줄을 알면서도 속으로 기분 좋아하는 것이 인 간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심리를 이용해서 영업소에서는 모르는 손님에게 대개는 사장님! 하 는 것으로 통합니다. 사장이 아니더라도 사장님이란 말을 들어서 기분 나쁠 것은 없기 때문입니 다. 이 말들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자기가 아닌 자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 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될 수 있는 그리고 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금의 자신이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자세로 지금의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될 수 있는 미래 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이 지구 위에는 50억 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 중에 한 명이고,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더 좋아지든지 더 나빠지든지 간에 변화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 을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변화도 거듭되고 있습니다. 날마다 강해지는 사 람이 있는가 하면 날마다 약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의 폭을 넓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욱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명을 향한 변화도 있고 죽음을 향한 변화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우리는 변해 가고 있습 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오직 한길만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삶이란 물결은 오직 한쪽으로만 흐릅니다. 삶은 결코 뒷걸음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그 선택의 지점 이 바로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님이 그 뜻을 우리에게 두시고 그 마음의 경륜을 따라서 우리를 만드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우주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 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하나도 의미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 하 나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큰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오래 전에 하나님께 서는 우리를 생각하셨습니다. 어떤 경우 우리 자신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 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기대를 미처 알지 못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하 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쓰일 곳이 어딘지 아시고 계십니다.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 가는 것은 바로 이것을 찾아서 우리 자신을 바쳐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어떤 물체도 각기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뭇잎, 꽃잎이 그렇게 많지마는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이 이 땅 위에 그렇게 많지만 서로가 다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요 조화입니다. 우리 손의 지문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지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 세 상에 50억이 넘는 사람 중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의 존 재 가치를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 각 사람이 나는 나다 라는 진리의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 삶에 대한 자세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 마음 속에 시기심이 사라질 것입 니다. 우리가 왜 남을 시기합니까? 남이 나보다 더 중요하게 대접을 받으며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이 할 일이 있고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미움, 편견 그리고 탐욕 같이 우리를 비참하게 파괴시키는 부정적인 감정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 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눈이 귀나 코나 입이 하는 일을 할 수가 있 습니까? 우리 각 사람에게는 그에게만 맡겨진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남에 대한 시기심을 없애고 나면 자신의 일에 더욱 열중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전적 으로 책임져야 할 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능력의 한계 안에 있는 모든 환경과 삶은 더 욱 향상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과거의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참 모습을 찾을 때 우리는 어제의 불행스런 기분을 말끔히 떨쳐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문호 세익스피어가 그의 저서 햄릿 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 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의 나, 게으른 나, 무관심한 나, 상처받은 나, 화가 난 나, 정욕 의 나 같은 수없이 많은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그러진 나의 모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하여 나대로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지아치노 롯시니라는 이태리 작곡가는 수년 동안 여름만 되면 작은 농촌 마을로 갔습니다. 그는 어느 여 름날 그 작은 동리 사람들의 음악적 재능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중 한 여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는데 이 여인은 중간음 B플랫에서는 꼭 틀렸습니다. 그러나 롯시니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 여인이 틀리는 음을 빼고 노래할 수 있는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음 B플랫은 주 위의 다른 사람들이 감싸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목 소리 같이 아름답게 들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통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 다. 우리는 만능은 아닙니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자신 있는 계명으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 러면 우리의 삶 전체는 그 노래에 화음을 맞추어서 노래하는 우리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아니하 고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어떤 이가 하나님은 일단 말씀을 시작하시 면 그 문장을 끝맺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에 수천 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하 나님은 반드시 시작한 말씀에 마침표를 찍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책은 끝 났으나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는 말을 종종 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깨달아야 할 진리가 아직 많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창조는 단 한 번에 끝나지 않았 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직도 완성된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참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는 두 인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점잖은 사람에게 저속한 면이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에게 거짓된 면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미움이 곁들여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이 나의 참 모습인가를 결 정지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바울처럼 죄악된 자신을 십 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이유를 바로 보고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의 외모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외관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외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활 태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우리 나름대로의 생활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도덕의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다 불량 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 셨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지만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 습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으로 남을 헐뜯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할 수도 있습니다. 헐뜯는 일을 일삼으면 그 인격은 비뚤어지고 맙니다. 사람은 본성이 타락해서 다른 사람을 칭찬하기보다는 흉보는 데 흥미를 느끼고, 격려하기보다는 헐뜯고 맥빠지게 하기가 쉽습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귀와 사람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나귀는 생각 없이 발질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험담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눈에 보 이는 것 모두가 나빠 보입니다.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무엇을 보나 적극적 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헤치는 말이 아니라 모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저주 가 아니라 축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고 외면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습 니다.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대 접받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공부한 프린스턴에 들러 한국인 교수로 유일한 분인 이상현 박사님을 만나 뵙고, 그밖에 몇 분 교수님들과 점심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박사님은 한국인으로서는 세상말로 성공하신 분 중에 한 분이십니다. 수많은 미국인 교수와 의 경쟁에서 채택되신 유능한 조직 신학 교수로 그만큼 대우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분 말씀이 교수회의를 할 때까지는 일대 일로 하지만 회의가 끝나고 나면 자기는 외톨이가 되는데 그 순간 에는 아예 다 집어치고 한국에 나오고 싶은 생각이 막 일어난다고 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때처럼 어려운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남이 나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가치 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목표를 정하고 따라야 할 큰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바쳐야 할 봉사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 를 인정할 때 생의 최고의 행운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사람들이 나를 따돌릴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 우리 편 이 되어 주실 분이 계십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가 분명히 알고 믿는 원리를 분명히 체득한 사람 그리고 그 진리를 목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것 을 믿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생의 뒷문으로 도망쳐 버리는 사람들은 대개가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종종 나의 참된 가치가 어디 있나? 하는 질문을 해 보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을 바로 잡고 선한 삶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중합니까?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는 각각 다르지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이 세상에는 나 는 외롭고 버림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 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 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를 정말 의미 있고 중 요하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중요 한 의미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빌립보 2장 13절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 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향하신 소원과 기대가 계십니다. 이 쓸모 없 는 나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데는 큰 뜻이 있습니다. 나만이 해야 할 사명이 있습 니다. 이 사명을 깨닫고 내 평생 슬프거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 여 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도 가치가 있습니다.
고후13장 1~13절 / 박조준목사
헬라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고 한 말은 너무 평범한 말이면서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주 요긴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그렇게 유명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사람이란 이 땅에 그저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조그만 단세포 동물에서 시작하여 수천, 수만 년 지나는 동안에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우연한 것이며 결코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이란 기계와 같아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이 그 대로 되어지게 되어 있다 고 생각합니다. 숙명론자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피조물 이라고 합니다 오늘 읽은 성시 에도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으신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 을 지으실 때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교제할 수 있기를 원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 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적 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 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발전이 있고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짐승에겐 자기 반성이란 없습니 다. 그러므로 짐승은 본능대로 살면 그만이지 무슨 발전이나 성장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은 지금 우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에 어 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 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꿈을 함 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보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 분 실제 자기 자신보다 높이 불러지는 것을 속으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열살 난 아이에게 얘는 한 열 다섯 살은 되어 보이는데 하면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절대로 자 기를 모욕한 말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녀가 같이 옷가게에 들어갔을 때에 옷가게에 서 일하는 사람이 그 딸에게 언니하고 옷 살 때 이렇게 같이 다니세요? 라고 물으면 옆에서 듣 고 있던 중년 부인인 어머니는 속으로 대단히 흡족해 한다고 합니다. 60이 훨씬 넘은 분에게 겨 우 50이 되었을까 말까 해 보입니다 고 말하면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업집에 가면 이 심리를 이용해서 오는 손님에게는 누구에게나 사장님, 회장님 으로 통칭합니다. 부장이 사장이란 말 들어서 기분 나쁜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자기가 아닌 자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놀 라운 사실은 우리가 될 수 있는 그리고 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금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자세로 지금의 자신의 모습과 자기가 될 수 있는 미래의 자신의 모 습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 생겨납니다. 이 지구상에는 지금 5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는 그 중에 한 명 이고 그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같이 더 좋아지던지 더 나 빠지던지 변화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강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마다 약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 의 폭을 넓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욱 자지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자리 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변해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직 한 길만을 택할 수가 있습니다. 삶이란 오직 한쪽으로만 흐릅니다. 삶은 결코 뒷걸음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그 선택의 지점이 바로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삶을 성공으로 혹은 실패로 이르게 하는 갈림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간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 님이 그 뜻을 우리에게 두시고 그 마음의 경륜을 따라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우주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을 발 견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 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셨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도대체 나는 어디에 소용이 있는 존재인가 고 방황하기도 합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우리가 바 로 쓰일 곳이 어딘지 이미 아시고 계십니다.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은 바로 이것을 찾아내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승리적으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왜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부었습니다. 그의 말 중에 감동적 인 대목들이 나옵니다. 사도 행전 20장 22절 이하에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 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향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일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편지 디 모데후서 4장에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그의 사명을 위해서는 한 방 울의 기름도 남김 없이 다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적인 삶의 비결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어떤 물체도 각기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뭇잎 꽃잎 하 나도 꼭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이 이 땅에 그렇게 많지만 서로가 다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요 조화입니다. 이 말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분이 쓴 글의 제목 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민들레도 봄에 핍니다. 세상에는 많은 꽃이 있습니다. 화려하고 아름 다운 꽃, 향기 좋은 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꽃이 있습니다. 그러나 민들레꽃 은 누가 눈여겨보는 꽃은 아닙니다. 이 꽃을 꺾어다가 방안에 꽂아 놓는 꽃도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보거나 말거나 귀여워하거나 말거나 봄이 되면 으레 핍니다.이것이 민들레가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나와 같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는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을 확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나다 라는 진리를 깨달을 때 내 삶에 대한 자세에 큰 변화는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 마음속에 시기심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것은 남이 나보다 더 중요하게 대접을 받으며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인 가 나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비참하게 파괴시 키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미꽃이 아름답지만 민들레꽃이 될 수 없습 니다. 그러므로 민들레꽃은 장미꽃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심이 없어지면 자기 자신의 일에 더욱 열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능력의 한계 안에 있는 모든 환경과 삶은 더욱 향상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 신의 참 모습을 찾을 때 어제의 불행스런 기분을 말끔히 떨쳐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가 어느 식당에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갔더니 그를 아는 손님 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했습니다. 밖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청소부가 이 광경을 보고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을 세익스피어가 보았습니다. 점심을 끝 내고 나오면서 청소부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식당에 들어가서 우연히 밖을 보니 당신이 땅이 꺼 질 듯이 한숨 쉬는 것을 보았는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이 때 청소부 대답이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아니요, 그게 아니라 선생님 같은 분은 식 당에 들어가시기만 해도 모든 손님들이 일어나 존경의 표시로 인사를 하는데 나는 이렇게 하루 종일 뜰을 청소하고 있어도 누구 하나 수고한다는 말 한 마디가 없어요. 내 이생이 하도 한심스 러워서 그랬어요. 이 말을 들은 세익스피어가 친구여, 당신은 지금 이 세계의 한 모퉁이를 깨끗 이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저서 햄릿 에서 그대의 참된 모습 을 보여 주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어그러진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여 나대로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로시니라는 이태리 작곡가는 수년 동안 여름만 되면 어느 작은 마을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의 음악적인 재능을 시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좋은데 중간음 B 프랫에 가서는 꼭 틀리군 했습니다. 그러나 로시니는 낙심하지 아니 하고 그 여인이 잘 틀리는 그 음을 빼고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간음 B 프랫 이 있는 데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화음으로 감싸 놓았기 때문에 그녀가 그 한 음을 빼놓고 노 래를 할 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목소리처럼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자신 있는 계명으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전체는 그 노래의 화음에 맞추어서 노래하 는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게 도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어떤 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일단 글쓰기 를 시작하시면 그 문장을 끝맺습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에 수천 년이 걸리는 일이 있지만 하나 님은 반드시 시작한 글에는 마침표를 찍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책은 끝났으나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는 말을 종종 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아직 깨달아야 할 많은 진리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 일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습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참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맨처럼 두 인격이 자리하고 잇습니다. 점잖은 사람에게 저속 한 면이 같이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에게 거짓된 면이 함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미 움이 곁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이 나의 참 모습인가를 결정 지어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죄악 된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 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가령, 하나님은 우리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지만 매우 위험한 것 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입으로 나오는 말이지마는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헐뜯고 비난할 수도 있고 반면에 격려와 칭찬을 할 수가 있습니다.
헐뜯고 비난하는 일을 일삼게 되면 그 사람 의 인격은 비뚤어지고 맙니다. 우리 사람의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은 말하기보다는 흉볼 때 흥미가 있고, 격려하기보다는 헐뜯고 비난하는 것이 쉽습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귀와 사람의 차이는 다른 게 아니고 나귀는 생각 없이 발길질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험담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는 데 그렇게 되면 보는 것마다 좇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무엇을 보나 적극 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허는 말이 아니라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 다. 헤치는 말이 아니라 모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더구나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을 저주한다 해도 그 사람이 욕설이나 저주를 받지 아니하면 결국 그 욕설이나 저주가 빙빙 돌다가 내게로 돌아오고 맙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외면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아니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는 기회가 주 어지지 않아서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불평과 불만으로 가들 차 있 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남이 나를 무시할 수 있습 니다. 그래도 나는 자신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자신의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 삶의 목표를 정하고 따라야 할 큰 뜻이 여기 에 있습니다. 나에게 목표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바쳐야 할 봉사가 있습 니다.나 자신이 가장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신할 때 생의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며 의지할 수 있는 분, 우리 편이 되어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심 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가 분명히 알고 믿는 원리를 분명히 체득한 사람 그리 고 그 진리를 목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생의 뒷문으로 도망쳐 버리는 사 람은 대개가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목적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종종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아니합니다. 가치 있는 삶이란 세상 사람의 눈에 띄게 사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큰 사업을 해 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만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예술가로 인류에게 큰 기쁨을 주어야만 가치 있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탁월한 경영 능력을 가지고 어떤 기관을 운영 해 나가는 사람만이 가치 있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유능한 지도력을 가지고 국민을 지도하는 사람만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내가 받은 달란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면 가치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마 성경을 내놓고 이 땅에서 출판된 책 가운데 요한 번연의 천로역정 을 능가하는 책은 없 을 것입니다. 거기 보면 순례자가 능욕의 계곡 을 지날 때입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앞에 가로 막아 선 무시무시한 괴물을 만났습니다. 그 괴물은 순례자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너는 이 능욕 의 계곡에서 죽을 각오를 해라. 내가 네 영혼을 없애 버리겠다. 이처럼 무서운 말은 없습니다. 사람이 왜 중합니까?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에게는 제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각 사람이 지니고 있는 그 의미와 가치 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 나는 외롭고 버림받은 존재며, 아무 가치 없는 인생이 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 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의미 있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람들이요 가치 있는 사람 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향하신 소원과 기대가 계십니다. 이 아무것 도 아닌 나, 약점과 허물투성이인 나를 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데는 크신 뜻이 계십니 다. 나만이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성실하게 살아갈 때 크게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갈터이니
고후13장 1~2절 / 지용수목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지구촌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에, 존귀하신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지금 말씀을 제가 전하고 있지만 주의 성령께서 저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며 여러분을 아름답게 가꾸시고 치료하실 줄로 믿습니다.
신비로운 일은, 공기의 온도는 똑같은데 공기가 움직이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바람 한 점 없어 아주 갑갑하고 답답한 여름날에 종이부채로라도 부채질을 하면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키거나 자연 바람이 불어오면 “야! 시원하다.”라고 하게 됩니다.
사람도 움직일 때 움직이는 이도, 보는 이도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학생이 공부하지 않으면 답답하게 보입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할 때 자신의 마음도 시원하고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도 시원합니다. 남편이 직장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 자신도 답답하고 그 모습을 보는 아내도 답답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일이 있어 열심히 일하면 자신도 시원하고 가족도 시원합니다. 움직일 때 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움직일 때 시원하고 열매가 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신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죽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신은 본래 없습니다.
따라 합시다.
“다른 신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 사단, 귀신으로 된 무리는 있어도, 악한 영은 있어도 다른 신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착각 때문입니다. 솔거가 그린 황룡사 벽의 소나무가 진짜같이 보이니 많은 새들이 그 소나무에 쉬려고 날아갔다가 벽에 부딪쳐 죽었듯이, 모든 종교에 나름대로 선함과 착함이 있으니 거기에도 구원이 있을 줄로 착각하고 갔다가 거기에서 영원히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존 칼빈이 말했습니다.
“다른 종교의 선한 행동은 화려한 죄악이다.”
다른 종교들이 선을 많이 행하면 사람들이 ‘아, 저기에도 구원이 있구나.’하고 그곳으로 갔다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이 차라리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아서 예수님께 나아와 구원 받기가 쉬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10장 10절에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5장 22절에도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다른 이가 없느니라.”
거짓말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신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사람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일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가셨을 때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면서도 도와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수님,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때에야 비로소 치료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병이 있는데 여러분이 약사나 의사의 도움만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나갑니다. 주님께 아뢸 때 주님께서 손 얹어 치료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그 순간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어떤 병은 시간이 걸려야 낫지만, 어떤 병은 순간에 회복됩니다.
지난번 서울의 한 교회에서 집회로 섬길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에 척추병으로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못하는 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무척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런데 첫날밤 치료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에 그분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뛰어도 괜찮고 하루 종일 청소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한순간에 치료해 주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약함을 만지셔서 강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병을 치료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계시는 것을 어느 새 알아 챈 많은 사람들이 각색 병든 자, 귀신 들린 자를 데리고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다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밤이 되자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피곤한 주님과 제자들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른 새벽, 주님께서는 벌써 한적한 곳에 가셔서 새벽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생활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시편 46편 5절에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새벽에 홍해를 갈라 주셨고, 새벽에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시기 위해 새벽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동이 트자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말씀도 받고 치료도 받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가는데, 어디에 계시는지 헤매지 않고 바로 갑니다. 예수님께서 늘 기도하시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어서 가세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다른 마을들로 가자. 내가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말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필요에 따라 길을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길을 가십니다.
휫필드라는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이크 없이도 삼만 명에게 설교했던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신비로운 은사를 받은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설교의 요청이 쇄도했고 그는 그것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피곤에 지쳐 있으면서도 요청하는 교회마다 다 가서 복음을 전하다 결국 젊은 나이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에도 목사님들이 교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병원 심방도 가고 장례식에도 가고, 그러다 병들고 쓰러져 은퇴하기도 전에 목회를 그만두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저도 만일 오라는 곳마다 다 간다면 제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것입니다. 또 우리 교회를 섬기는 23년 동안 제가 여러 교회로부터 청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릎을 꿇으면 그 교회들의 청빙이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저의 사명은 양곡교회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오라 한다고 가고, 교회가 오라 한다고 가고, 그러면 안 됩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 마을 저 마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절에서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못을 방문합니다. 거기에는 행각 다섯이 있고, 의사가 포기한 불치병자들이 누워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가끔 그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삼십 팔 년 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서 사는 불쌍한 환자도 있었습니다. 몸이 조금 약해도 일어서고 앉을 수 있고, 걸어다닐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감사해야 하지만, 입원하지 않고 사는 것에 정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십 팔 년 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답답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삼십 팔 년 간 일이 잘 안 되어도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제 일이 잘 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부부가 삼십 팔 년 간 겨우 살아 왔어도 ‘하나님, 우리 부부가 잘 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며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삼십 팔 년 간 남편을 전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도 ‘주여, 제 남편이 예수 믿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삼십 팔 년 간 가난에 찌들려 살아 왔어도 ‘하나님, 제가 이런 형편으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하고 부르짖어 기도하여 야베스처럼 응답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가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물이 동할 때에 저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제가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순간 삼십 팔 년 동안 누워 있던 자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예수여, 당신이 누구이기에 안식일에 일을 하는가?”
삼십 팔 년 간 병석에 있던 사람이 일어났으면 그 사람에게는 축하해 주고 예수님께는 고맙다며 경배해야 하는데, “왜 안식일에 일을 했느냐?” 하며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감히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따지고 항변했습니다. 복이 없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도 따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목사님께 따지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복이 없는 교인은 “목사님,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따집니다. 그러나 복이 있는 사람은 주님께나 목회자 앞에 엎드려 은혜 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집주인이 자기 집의 물건을 마음대로 할 수 있듯이 안식일에도 마음대로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구약 시대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삼일 째 되는 날 부활하셨는데 그 날이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을 성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해만 바라보듯이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예수님께서도 일하시고 성령님께서도 계속 일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할렐루야!
우리가 기도를 제대로 못하여 넘어지고 자빠져도 이렇게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령님께 큰 박수를 올려 드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바울 안에 계시니 바울은 나이가 들어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라고 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 안에 있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도 계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내가 가리니.”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예수님 말씀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 13절 말씀대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제 ‘나’라는 말에 자기 이름을 넣어 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도 일한다.”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를 든든히 세우러 갑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교회를 세우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허는 일을 하는데, 교회를 허는 일은 마귀가 합니다. 마귀는 교회를 근심시키고 교회에 걱정 끼치는 일을 합니다. 박태선,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의 교인들은 다 교회를 헙니다. 이단은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것 같지만, 교회를 헙니다.
성령의 사람인 우리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내가 가서 교회를 세우리라.”
교회에서 가만히 있는 사람은 답답한 교인입니다.
찬양대원으로든, 교사로든, 구역장으로든 일해야 됩니다. 또 청소도 하고, 안내도 하고, 부엌에서 설거지도 해야 합니다. 지금 서울 시장님이 교회에서 차량 안내를 하듯이, 우리도 어떤 자리에 있든 변함없이 겸손하게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해서 교회를 크게 세우고 기관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한국 사람만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인이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한국 사람만 받을 성령이 아닙니다. 전 세계 만민이 성령을 받고 구원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복음은 세계적이다. 성령님은 세계적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우리는 가야 됩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됩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우리 모두가 땅 끝까지 가야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선교사가 되어 땅 끝까지 가면 우리나라에는 교인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내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내 아버지가 나의 땅 끝입니다. 내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내 남편이 나의 땅 끝입니다. 내 직장의 동료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동료가 나의 땅 끝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내가 빛을 발해 그 동료를 구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식당 주인이면 식당에 오는 사람 중에 믿지 않는 손님이 나의 땅 끝입니다.
언젠가 우리 장로님들을 모시고 추어탕 집에 갔다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계산대에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말로 전도하지 않아도 계산을 하다 보면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라는 글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제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먹은 추어탕이 갑절로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병원 의사라면 내 병원이 땅 끝입니다. 병원 벽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이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을 걸어 놓으면 말로 전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직접 아프리카까지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업을 잘 하던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사업을 그만 두고 아프리카에 가야 됩니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가서 어떻게 선교하겠습니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받을수록 사업을 더 잘하여 선교 헌금을 많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선교 헌금 500만 원이면 선교사 두 분을 파송할 수 있습니다. 천만 원이면 선교사 네 분을 파송할 수 있습니다. 일억 원이면 사십 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일본 동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일본에 목회자가 없어 쉬는 교회가 있으니 선교사 한 사람만 파송해 주세요.”
선교비 이백 오십만 원이 있으면 준비된 훌륭한 선교사 한 분을 파송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몇 천 명의 준비된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을 잘 하여 준비된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도울 때 효과 있는 선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선교할 때도 효과 있는 전략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할 때도 내 감정을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의 뜻을 따라 겸손히 가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따라 가면 후회하게 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한 교수가 캐나다의 지체 부자유자 여섯 명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 사표를 내고 일생 그 여섯 명을 돌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삶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대한 그릇이 여섯 명만을 섬기다 세상을 떠났으니 효과적인 전략이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우리 모두 지혜롭게 충성하여 열매를 많이 맺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전도나 교회 일만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군대는 하나님의 군대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군인들의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열심히 공부하고 총리와 도지사들이 되어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왕비가 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부모님을 섬기고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잘 기르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우리 말 번역이 원 뜻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 말씀의 원 뜻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입니다.
‘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everything, for this please the Load.’ 우리가 부모를 섬기면 그것이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기르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회사 일을 잘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의 ‘이르러(가서)’라는 말은 공격적으로 전도하라는 뜻입니다. 공격적으로 전도하고, 공격적으로 충성하고, 공격적으로 남편에게 잘 하고, 공격적으로 직장 일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사 출근 시간이 8시이면 7시에 출근해서 일할 준비를 하고, 학교 등교 시간이 8시이면 7시쯤 학교에 가서 공부할 준비를 할 때 모든 일이 더 잘 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양곡교회 목사이지만 우리 교회만 보지 않고 세계를 보며 공격적으로 말씀을 준비해서 전하니 말씀이 세계로 나가는 줄로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공격적으로 한다고 다 성공하고 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꼭 크게 되고 부자가 되어야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집 한 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집 한 채 없었습니다. 저금통장이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몇 백억을 가지셨다면 부끄러운 주님이 되셨을 것입니다. 온 우주를 다 가지신 주님께서 다니면서 돈을 챙기신다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사도 바울이 돈이 많은 통장을 가지고 있었다면 부끄러운 목회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자랑이 되겠습니까? 유산을 많이 받았든지 부인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한다면 돈을 많이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순수하게 목회하는 목회자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 자랑은 아닌 것입니다. 또 공무원은 정직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소중한 일이지 부자가 된다고 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을 가지고 나가야 하지만, 현실에 만족해야 됩니다. 1등을 목표로 공부했지만 5등도 할 수 있고 20등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대로 감사하고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신앙생활입니다.
한 아버지가 한 번도 100점을 받아 오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한 과목만이라도 100점을 받아 오면 상금으로 50만 원을 줄 테니 열심히 공부해서 100점 좀 받아 와 봐라.”
아이에게는 50만 원이 거금입니다. 아이가 너무 기뻐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드디어 시험을 치르고 그 며칠 후 아이가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아빠, 기쁜 소식이 있어.”
“너 100점 맞았구나.”
“내가 100점 맞으면 아빠가 50만 원 준댔지?”
“그럼, 주고말고.”
“그 돈 아빠가 써.”
아이가 100점을 받지 못해 50만 원을 받을 수 없지만, 그 돈을 아빠가 쓰니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딸을 주셔도 ‘아, 내게 딸이 필요해서 딸을 주셨구나.’라고 믿어야 합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중학생 딸을 둔 우리 집사님 한 분이 아기를 안고 제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어찌 이리 터울이 많이 져요?”
“목사님, 첫 아이를 낳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어린이 주일에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는데 그때 잉태해서 낳은 아이입니다.”
기도해서 아기를 낳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아기가 잉태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이를 입양하시기 바랍니다. 사정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남편이 차장이든 과장이든 대리든 그대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공격적인 꿈을 꾸며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공격적인 꿈을 갖고 나아가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축원합니다.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시원합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간다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쓰는 바울의 얼굴이 굳어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기쁘지 않고 평화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서릿발이 선 상태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인데,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내가 지금은 너희를 떠나 있지만 내가 너희와 대면하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라고 합니다.
편지의 마무리는 평화롭게 끝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바울은 편지 마지막 부분에도 계속해서 아주 심각하게 책망하는 말을 씁니다.
왜입니까?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죄는 무슨 죄입니까?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 성적인 죄를 계속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로 책망하고 두 번째 방문으로 대면하여 책망해도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그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또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사람은 죄를 지으면 회개합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딸)아,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구원할 때, 내가 너에게 세례를 줄 때, 네가 세례 받고 집사가 된 후에도 때로는 넘어질 것을 내가 알았다.’하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할 때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부끄러워 ‘아이고!’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때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가 네 약함을 안다.’라고 하시며 다시 씻어주시고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성화시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망하는 자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 죄를 짓습니다.
요한일서 3장 6절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은 작은 죄도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키듯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은(No one who lives in him keeps on sinning.)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런 악인들 몇 사람이 있어서 교회를 어지럽히니 바울이 ‘내가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가면 치리하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주님을 아프게 하고 목회자를 근심시키는 교인이 없기를 바랍니다.
죄는 우리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한 사람이 실수해서 감옥에 갔는데 그곳에 자기 사돈도 들어왔습니다.
“아니, 사돈이 여기에 웬 일입니까?”
“아이고, 내가 사돈을 뵈러 여기에 왔나 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글쎄, 사돈이 아시다시피 내가 나쁜 일을 할 사람입니까? 하루는 길을 가다 보니 쓸 만한 새끼줄이 있기에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글쎄 거기에 소가 매어 있었나 봅니다. 저를 소도둑으로 몰아서 제가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도 사돈이 아시다시피 남에게 해를 끼칠 사람입니까? 한 부잣집의 경비 시스템이 얼마나 잘 되어 있나 시험해 보려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가 도둑으로 오해 받아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사돈끼리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죄는 부끄럽게 하고 결국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북극의 한 도전적인 검은 곰이 남극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남극에 사는 흰 곰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식사가 끝난 다음에 검은 곰이 흰 곰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남극은 이 지구촌에서 가장 추운 곳인데 털이 그렇게 희어서 어떻게 사시오? 나처럼 털이 검어야 태양열을 많이 흡수해서 따뜻하게 살 수 있을 텐데.”
그 말에 기가 죽은 흰 곰이 말했습니다.
“희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합니까?”
“변화를 주어야지요. 요즘에는 변화해야 살아 남아요.”
“도대체 어떻게 변화를 주란 말이오?”
“검은 물감으로 염색을 하시오.”
흰 곰은 검은 곰의 말대로 그 아름다운 흰 털을 검은 물감으로 염색했습니다. 그랬더니 햇살이 정말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아! 따뜻해서 좋구나. 정말 변화가 필요하구나.’
이튿날 사냥꾼이 습격해 왔습니다. 검은 곰이 된 흰 곰은 잽싸게 도망을 가서 평소에 하던 대로 흰 눈과 흰 얼음 사이에 숨었습니다. 흰 털이라면 사냥꾼의 눈에 띄지 않았을 텐데, 검은 털이니 얼마나 잘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답니다.
흰 세마포를 입고 사는 우리에게 마귀는 ‘검은 것을 해 봐라. 재미있다. 아주 좋아. 해 봐라.’라고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결국 죽게 됩니다. 죄를 멀리 하고, 죄를 지었으면 빨리 회개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탄식하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계속 죄를 지으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치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남은 모든 사람은 거짓 교사들과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당하여 바울에게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은 설교가 시원치 않고 외모도 볼품이 없고 병도 많은 사람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또 예루살렘 교회에 보낸다고 하면서 헌금을 자기가 챙긴 나쁜 사람이다.’라고 하며 바울을 헐었습니다. 잘 생기고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당하여 바울을 대적한 것입니다. 악한 일꾼도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쓰고 나타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제외하면 가장 위대한 목회자인데 그런 위대한 목회자 바울을 비난한다면 이 세상의 목사님들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고린도에 보내셔서 1년 반 동안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게 하셨는데, 바울이 흔들리면 고린도 교회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니 바울이 ‘내가 가면 그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몸에 종기가 나면 며칠이든 몇 달이든 치료하면서 낫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썩어 들어가면 그 부분을 잘라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한 안수 집사님의 부친이 당뇨 합병증으로 다리가 썩어 들어가 발목을 잘랐습니다. 발목을 자르지 않으면 온 몸이 썩어 들어가서 죽으니 두 발목을 다 자른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의 집이고 사랑의 집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어지럽히는, 당을 짓는 무리는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잘못과 실수는, 몸에 난 종기가 낫기를 치료하며 기다리듯이, 기다리며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당을 짓는 무리는 나쁜 누룩처럼 퍼지니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을 짓는 무리는 대개 그럴 듯한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도 잘 하고 새벽기도도 잘 하고 남 보기에도 신앙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형이고 인물이 좋았습니다. 모세는 말을 더듬었는데, 그는 말도 잘 했습니다. 그러니 영향력이 커서 250명의 족장들이 고라에게 붙었습니다. 고라와 그 250명이 모세의 리더십을 흔들었습니다.
“네가 왜 왕노릇을 하느냐? 네가 지나치다.”
그 일로 고라와 그 가족과 그에 속한 모든 사람이 다 죽었지만 교회에도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모세라면 고라가 당을 짓기 전에 사촌형이라도 그를 잘라냈을 것입니다.
오늘까지 우리 교회를 섬기면서 한 번도 치리한 적이 없음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은 치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교육을 받고 와서 ‘오늘날의 교회에는 문제가 많다.’라고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요즘에는 목회에 실패한 사람들이 어떤 기관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면서 교회를 은근히 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양떼는 그것을 모르고 거기에 빠져 ‘교회가 선교하지 않고 잠자고 있구나.’하는 등 교회에 대해 비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끼리 당을 지어 교회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해외 선교도 해야 되지만 국내 전도도 하고 부모도 공경하고 이웃도 도와야 합니다. 고기 한 근 사먹지 못하는 이웃집에 고기 한 근을 사주는 것도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먹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한 부분에만 집중하면 이단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에서 복음이 나가고 교회에서 성령의 생수가 흐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모두 교회 중심으로 믿음 생활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기쁨이 되고 여러분은 저의 기쁨과 자랑이 되어 행복하게 전진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근심하며 ‘내가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는 편지를 쓰는 일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쓴 것은 ‘내가 이제 가서 칼을 갈아 너희를 치겠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0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떠나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이 편지를 받고 죄 짓는 자와 당 짓는 자가 회개해서 내가 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 내가 가서 엄하게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게 해 달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화목하고,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하고, 질서 있게 전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약하심으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이성희목사 / 욥기 23:15-17, 고린도후서 13:3-4
서론
삼손은 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가장 힘센 사람입니다. 힘센 삼손은 구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삼손은 홀로 모든 원수를 갚고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강한 자가 가지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약점으로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리고, 자기가 죽음으로 블레셋을 이겼습니다. 그는 다곤 신전의 두 기둥 사이에 팔을 뻗고 신전을 무너뜨려 원수들을 괴멸시켰습니다. 두 팔을 뻗는 삼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형으로 그의 최후를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죽음으로 장식한 것입니다. 그는 강하지만 약한 자였습니다. 강하지만 약하므로 죽은 최강자 삼손입니다.
여러분, 에스겔 골짜기의 뼈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골짜기에 흩어진 뼈와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연결된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생기가 들어가서 비로소 살아 있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뼈가 사람이 될 때에 가장 연한 것은 겉에 있었고, 가장 강한 것은 속에 있었습니다. 처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은 가장 강한 것은 속에 있고, 약한 것은 밖에 있습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외유내강’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습입니다.
옛날 랍비들은 육체를 설명하면서 뼈 주위에 살이 있는 것은 소중한 뼈를 지키기 위해서이며 해파리처럼 살만 있어도 안 되고 또 돌처럼 뼈만 있어도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랍비 얀켈은 “언제나 갈대처럼 휘어져라. 삼목처럼 높이 솟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태풍에 느티나무 가지는 꺾여도 버드나무 가지는 꺾이지 않습니다. 약해보이지만 강한 것이 마침내 이깁니다. 겉으로는 엄청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무한히 강한 자가 승리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닮아야 승리자가 됩니다.
일본 소설가 엔도 슈샤꾸의 ‘나를 사랑하는 법’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이 들면서 나는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방법이란 바로 남들 앞에서 강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약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솔직함일 수 있고, 겸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신 것을 보세요. “약해지라”, “져라”, “손해 보라”는 것입니다. “가난해져라”, “화평케 하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때려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온통 약해지라는 것입니다.
왜 약해져야 합니까? 약해져야 강한 것이니까 약해져야 합니다. 산상보훈이란 결국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시고 가르치신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강하지 않으시면 십자가에는 절대 못 박히시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인류보다 더 강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에 의해 사형을 당하신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약하신 분이셨습니다.
첫째,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3:4 상반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으로서 세상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모든 것 위에 강한 힘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약함을 나타내셨습니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왜 가장 강한 하나님이 약한 사람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약한 사람이 되시고 사람 가운데서도 연약한 사람이 되셔서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에 오실 바에야 ‘강한 권력자’, ‘걸출한 율법학자’, ‘예루살렘의 귀족’, ‘잘생긴 카리스마’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강한 모습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하필 약한 자가 되셨습니까? 예수님은 약한 자에게 힘이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작은이의 벗이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한 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인 구원자의 뜻이 자신에게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약함을 선택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하심은 자신을 낮추어 분노하지 않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여 자신을 포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53:2에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은 여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사야 53:7에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모습은 한 결 같이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어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눈에 약해 보이는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세상은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다락방강화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미워하고 박해하지만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현대의 참 양심이라고 일컫는 바우어하우스 박사는 안티 기독교 정신이 유럽을 휩쓸고 있다고 하면서 “약한 형태의 기독교는 박해 받는 존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정신은 사울이 예수님을 박해할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실 사람들에게 강한 것을 약하게 바꾸십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할 때 천사는 야곱의 허벅지를 잡고 둔부의 힘줄을 쳤습니다. 야곱의 가장 강한 곳을 친 것입니다. 허벅지 근육은 사람의 가장 강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장 강한 부분을 치셔서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다리를 절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안에서 강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크레이그 크로퍼드는 “약점이 없는 것은 신과 죽은 자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30에서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합니다. 약함이 자랑거리인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이며, 확신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만든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는 악명이 높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수용자의 99%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약한 사람이나 어린이나 노인 등 노동에 쓸모없는 사람은 가스실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줌의 재로 변하게 나오게 되는 ‘지구의 지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가 다 죽었을까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오히려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학자 빅터 프랭클은 참 약한 학자였습니다.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여인들이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약하여 고통을 당하지만 반면에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은 약한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모든 하나님의 거인들은 약한 사람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약한 것이 거인의 조건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약하시기로 결정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도 약하므로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라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13:4 하반절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약해서 죽습니까? 약해서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약해서 삽니다.
바울은 강함을 ‘살아남’이라고 해석합니다. 살아 있는 자가 가장 강합니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죽으면 더 이상 강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자보다 더 강한 자는 없습니다. 시체를 보고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놀라지만 시체는 무섭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무서운 법입니다.
“살아 있네”라는 말이 요즘 유행합니다. 이 말은 희망이 있고, 강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은 것 보다 더 강합니다. 왜 약하지만 살아납니까? 왜 약한 자가 강합니까? 우리가 약함을 통해 가장 강한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 강한 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2:10에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이란 역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실입니다. 이 역설은 신앙의 세계나 자연의 세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약한 것이 살아남고 강한 것은 점점 사라집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강함은 우리의 부활과 강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언제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라는 놀라운 비밀 가운데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아말렉 군사가 오합지졸인 이스라엘군사에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싸우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장군 거인 골리앗이 소년 다윗에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는 약한 자이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미디안과 아말렉의 군사들이 사사기 7장에는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와 같다고 하였지만 기드온의 300용사에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메뚜기가 사람을 못 이긴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장군 시스라가 900대의 철 병거로 이스라엘을 침범하였지만 여 사사 드보라에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약한 자가 세상을 의지하는 강한 자를 이긴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예는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운행하시는 힘이며 사람을 지으신 분입니다.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힘이십니다. 하나님은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생명의 힘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모습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예수님은 사셨고, 우리에게 살게 하십니다.
순교란 복음을 위하여 이교도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행위를 말합니다. 기독교와 같은 일신교에서 순교가 주로 일어납니다. 순직과 순교는 다릅니다. 순교자들은 한 결 같이 강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약하여 세상의 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강하지 않으면 그 죽음은 절대로 당하지 못합니다. 순교자들은 죽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심이라”는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순교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는 세상의 힘에서 볼 때는 약하기 그지없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가장 강하고 멋진 순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수도사들에게는 ‘순종’이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들은 청빈, 순결과 함께 순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서약하고 수도사가 됩니다. 수도사들이 말하는 순종이란 그 대상이 두 분입니다. 하나님과 수도원장입니다. 하나님과 수도원장에게 그들은 절대로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작은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반드시 원장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도 어떤 작은 물건까지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의미로 그렇게 합니다. 순종하는 자는 약한 자가 아니라 진정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데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약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약한 나로 하여금 강하게 하십니다. 약하기에 강하게 하십니다. 쓰러졌기에 일으키십니다. 가난하기에 부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영원히 달려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숨을 거두신 잠시 후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속에 계시지 않으시기에 자신의 무덤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잠시 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멀리 하시고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잠시입니다. 죽음은 고작 사흘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처럼 우리의 마지막 죽음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죽음은 잠시이지만 부활은 영원합니다.
결론
십자가가 국기에 그려진 나라가 여럿입니다. 그 중에 덴마크는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 십자가 국기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1219년 덴마크의 발데마르(Valdemar)왕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스파냐의 군사력에 비해 덴마크는 열세였고 고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왕은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이 전쟁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오니 승리하게 하소서.” 그 때 갑자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났습니다. 왕은 십자가를 보는 순간 용기를 얻어 승리를 확신하고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그 후 왕은 전쟁을 할 때마다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를 그린 기를 앞세우고 나가 싸웠고 승리하였습니다. 왕이 전쟁에 가지고 가서 승리하게 하였던 그 기를 후에 덴마크의 국기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가 승리입니다. 죽음에서 승리입니다. 멸망에서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약한 자로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약하셔서 세상의 힘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리 찢기고 저리 맞는 약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힘 있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고후 13:3~5 / 김광일목사
김형국 목사의 ‘만남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부제는 ‘예수를 만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이에게’입니다. 저자는 예수를 만났음에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와의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만남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길에 그냥 두면 죽을 것만 같은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데 식구들은 ‘왜 길에 있는 고양이를 데리고 왔느냐’며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식구들이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일을 서술하며 저자는 말합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집에 들어와도 삶이 이렇게 변합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를 마음에 받아들였는데도 삶은 그대로라고 합니다. 새끼 고양이도 아니고,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수많은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는 예수께서 내 마음속에 들어왔는데도 왜 아무런 변화가 없을까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변하지 않는 자신과 가족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예수가 내 인생에 들어오셨는데 삶이 변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저자는 교회 안에 세 부류의 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교회만 다니는 사람입니다.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지만 이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배가 재미없고 잠만 찾아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수를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신앙고백도 합니다. 성경 지식도 있는데 인격이나 삶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모습에 별 차이가 없어 ‘나는 왜 늘 똑같지?’라는 질문을 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예수를 믿어서 변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구원의 감격을 잊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변화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지루하고 졸립던 예배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예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삶이 달라집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김형국 목사는 그 이유를 자기 성찰의 차이, 즉 자신을 바르게 거울에 비춰보느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면 죄와 부족함이 드러날 텐데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보니 ‘이 정도면 괜찮지’하는 마음에 변화될 생각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게 하는 예수가 필요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는 영적 질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교인들끼리 파당을 짓고 미워하고 시기하였습니다. 부도덕한 일이 발생하였고 영적 교만에 빠졌습니다. 교리를 흔드는 이단 사상이 침투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무시하고 부정하며 사도직마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직에 대해 시험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보라고 충고합니다. 여기의 ‘시험하고’의 원어 ‘페이라제테’는 지속적인 동작을 명령하는 형태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어떠한 삶의 변화를 경험했는지,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계속 시험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어떻게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 기준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 능력을 믿는가
아시시의 프란시스 (Francis of Assisi)가 말을 타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싶어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위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나의 뜻을 알게 된다면 지금 네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쓴 것이 될 것이며, 혐오하던 모든 것은 더없는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그 순간 말이 움직이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나병 환자가 앞에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말에서 내려 다가가 문드러진 손에 돈을 쥐어 쥐고 악취가 나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프란시스는 말을 타고 오면서 감정에 북받쳐 울었습니다. 자신이 변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했던 것을 경멸하고 멸시했던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프란시스는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승리 곧 자신에 대한 승리를 얻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여기의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원어로 ‘에크 뒤나메오스 데우’인데 ‘그리스도께서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약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일으키사 강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에 입각하여 주와 함께 살리라는 의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약하다고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렀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함에서 강함으로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약하게 보이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가 돌아보기 바랍니다.
둘째로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복음 전도자 무디 (D. L. Moody)의 집에 청년이 방문했습니다. 평소에 무디를 존경하던 청년은 무디의 성경은 어떻게 생겼을까 호기심이 생겨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평생 성경 말씀대로 살아오셨던 당신의 성경은 특별할 것 같습니다. 그 성경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무디는 기꺼이 성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에는 구구절절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묵상했던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던 청년은 ‘T, P'라는 글자가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실험해보았더니 입증되었다 (Test and Proof)라는 뜻이에요.” 무디는 성경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삶에서 입증되고 확인된 구절마다 ‘T.P’ 즉 ‘입증되었다’라는 말을 적었습니다. 무디의 설교가 능력이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삶으로 확인된 것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읽어야 합니다. 무디처럼 확실한 증거가 있는 믿음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여기의 ‘확증하라’는 원어로 ‘도키마제테’인데 ‘정밀하게 조사하고 살펴보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까다롭게 심사하여 믿음의 사람인지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보석 세공사가 순금을 정제할 때 불순물을 검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핍박 앞에 섰을 때 그 믿음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유혹과 시련 앞에서 드러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확증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의심하는 믿음으로는 환난을 이길 수 없으며 핍박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확증된 믿음만이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떠한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 사건 속에 필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라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이러한 확증된 믿음 안에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의 임재를 아는가
‘로렌스 형제’로 불리는 니콜라스 에르망(Nicolas Herman)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수도원의 주방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신앙적으로 성숙하는 가장 쉬운 길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을 나의 생각과 모든 느낌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 자체를 묵상함으로 항상 그 분 안에 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에 몰두하여 주방에 자신을 가두었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일하기 전과 일한 후에 가졌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최선의 일을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고, 일하는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계속 말을 하였고 일을 도와주심에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났을 때 잘한 일이 발견되면 감사하고 잘못이 발견되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매일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연습을 하고 잘못하면 즉시 용서를 구하였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반복적인 임재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내 안에 계신다는 임재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여기의 ‘너희 안에 계신 줄을’은 원어로 ‘호티 이에수 크리스토스 엔 휘민’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문문을 사용하며 강조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 안에 예수로 채워야 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버리운 자라고 바울은 선언하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어야 그리스도인은 능력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환난을 이깁니다. 마귀를 이깁니다. 질병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거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Soren Kierkegaard)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강가에 갔습니다. 강에 들어가 두 팔을 내저으며 “저를 보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수영하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발을 바닥에 딛고 헤엄치는 것처럼 흉내낸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수를 믿는다고, 믿음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한 발로 땅을 딛고 물에 떠있는 척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묻습니다. 수영할 줄 모르면서 헤엄치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듯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상 믿음이 없이 사는 모습은 아닙니까? 그는 이러한 믿음을 ‘시험되지 않은 믿음’(untested faith)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유혹이 닥쳐왔을 때, 어려움 당할 때, 시험이 다가올 때, 고난이 올 때,이 여러가지 시험을 거친 학증된 믿음입니까?
조선 후기 학자 위백규(魏伯珪)가 열 살 때 지은 좌우명(座右銘)에 나오는 글입니다. “여기시인녕자시 여기청인녕자청(與其視人寧自視, 與其聽人寧自聽) -남을 보느니 차라리 나 자신을 보고, 남에게 듣느니 오히려 나 자신에게 들으리라.” 나를 정확히 보는 눈만 있다면 나 자신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고, 마음의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용기만 있다면 나보다 내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남의 말에 솔깃하기보다 자신의 귀를 열어 스스로에게서 듣고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에 대한 관심만으로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에 대한 관심을 넘어 자신을 성찰할 때 비로소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을 원하십니다.
이 시간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약함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믿음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가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는 믿음 안에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송기성목사 / 고후13:5-7
C.S.루이스(Clive Staples Lewis) 는 “천국과 세상,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천국을 선택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는다. 그러나 세상을 선택하면 천국도 세상도 다 놓쳐 버린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을 선택한 사람은 천국을 얻을 뿐만 아니라 세상도 덤으로 얻게 됩니다. 그런데 천국을 선택한 사람은 천국을 선택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6:33)
사도 바울은 천국을 선택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Put yourselves to the test and judge yourselves.) 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낙제생이 되지 말고 합격자가 될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험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는 것 역시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험 자체가 매우 부담스럽고 그 결과에 대해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천국을 선택한 사람은 부득불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낙제생이 되지 말고 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고린도후서13:5-7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합격해야 할 두 가지 시험을 치르고자 합니다.
1.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사도 바울은 그 평생에 시험을 많이 당하곤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시험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두 가지 점에서 그들의 잘못을 시정하도록 권면했습니다. 하나는 시험의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시험의 대상은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의 내용은 무엇보다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시험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시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야 합니다.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믿음 안에 있는가’ 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라고 반문하면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 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험의 불합격자 곧 낙제생이라는 것입니다 (Unless you have completely failed.)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염려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선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믿음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시험의 낙제생이 되어 버림받은 신앙의 실격자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천국을 선택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세상을 선택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 결과 그런 사람들은 천국도 세상도 다 놓쳐 버리게 됩니다.
김형국 목사님은 「만남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한때 선교 단체에서 그와 함께했던 여학생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한 대안학교의 교장이 되었다는 그 동료를 아주 오랜만에 만나 매우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 솔직히 마흔 살에 예수님을 만났어요.” “아니, 예전에 우리가 같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찬양곡도 만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야?”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교회 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게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때 제 모습은 마치 오물을 실크 스카프에 둘둘 말아서 가지고 다니는 형국이었을 거예요. 남들은 그게 고급스러운 스카프인 줄 알았겠지만 사실 그 안에는 배설물밖에 없었어요. 나이 마흔에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지금껏 저 자신을 속이고 꾸며 온 죄를 깨달았죠. 그제야 제가 주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주님께 제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게 됐어요.” 아멘!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5:10에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하였습니다. 히브리서11:6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시험입니다.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심으로 세상을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요일5:4).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지 않는 교회 생활을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실크 스카프에 배설물을 둘둘 말아서 가지고 다니지 않고 주님께 자기 인생을 온전히 의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함으로써 신앙 시험의 실격자가 되지 말고 합격자가 되어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을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너희는 선을 행하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사도 바울은 그 평생에 배척을 많이 당하곤 했습니다. 사실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을 어리석은 자로 여겼습니다 (고후12:11).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고린도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서신을 쓴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에 굳게 서서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버림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믿음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는 것이며, 믿음 안에 있는 사람답게 선을 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 고 한 것은 그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도 잘못을 범할 수 있고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버림받은 자 같이 볼지라도 바울은 그들이 선을 행하게 하고자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을 행하는지 자신을 시험하며 확증하는 사람은 때로 자기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할지라도 개선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자’ (고후12:11)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천국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 결과 그는 세상도 덤으로 얻게 됩니다.
국내 최초로 호스피스를 도입한 김수지 전 이화여대 간호대학장의 이야기입니다. 김 박사님은 1948년 여순사건 때 총살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남성을 돌봐줬던 간호사 아주머니에게 감동을 받아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화여대 간호학과에 들어갔고 1978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보스턴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왜 간호사가 되셨어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에 김 박사님의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간호사로 부르셨다. 간호사는 돌보는 사람이다. 주님은 나를 돌보셨다. 그 주님의 돌보심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돌보아야 할 이유다. 크리스천이란 누군가? 크리스천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심으로써 생각과 삶이 변하고 끝내는 주위까지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주로 고백할 때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만난 하나님, 그 분은 돌보시는 분이시다. 나를 돌보셨고,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시기를 소망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게 성공은 예수님처럼 돌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멘!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2:10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안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로마서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으심을 받은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선한 일에 대한 시험입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고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는 사람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도리어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줄 믿습니다.(롬12:21)
너희는 선을 행하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선을 행하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사람은 결코 악을 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만난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아 주심 같이 자기도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섬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돌보는 삶을 사는 것을 성공으로 여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하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변화를 이루고 주위까지 변화시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마5:16)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중국의 증자는 ‘일일삼성’ (一日三省),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을 성찰했다고 합니다.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 대장도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을 반성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사람은 결코 구태의연하지 않고 자기 갱신과 성숙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시험하고 판단하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시험하고 판단할 것은 믿음과 선행입니다. 세상을 선택하지 않고 천국을 선택한 사람은 마땅히 그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열심히 신앙생활,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도 믿음과 선행에 불합격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고급스러운 실크 스카프에 배설물을 싸 가지고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처럼 보배롭고 가치 있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믿음과 선행을 시험하고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을 선택한 사람으로서 시험의 불합격자가 되지 말고 합격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천국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 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까지 더하여 덤으로 주시는 세상의 복도 받으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고후 13:5 / 이삼규목사
세상을 살다보면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판단)과 행동이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참과 거짓이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고, 동일한 들판과 공장에서 일하고, 한 교회에 출석하고, 같은 비행기를 타기도 하고, 똑 같은 가게에서 물건을 사기도 합니다. 거짓은 참을 모방하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자꾸 혼동하게 됩니다. 오늘날 누가 가인이고 누가 아벨인지 구별하려면 매우 날카로운 매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예민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이삭은 야곱의 팔을 만졌지만 그것을 에서의 팔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들 중에서 배신자가 나올 것이라고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유일하게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가룟 유다 자신이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면 아주 편하고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말도 부드럽게 하기 때문에 호감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때로는 사탄의 사자(使者)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거칠고 직언(直言)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피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우리에게 영적 위험성과 영원한 멸망에 대해 경고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는 우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확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 안에 있습니까?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를 미몽(迷夢)에서 구하기 위해 마련해주신 모든 수단들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영적 미몽(迷夢)에서 벗어나는 길
1)기도(祈禱)
물론 기도가 우리를 오류에 빠지지 않게 무조건 다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대상이 중요하고 어떤 기도들은 유익은 없고 오히려 해롭기 때문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광란적으로 기도하면서 심지어 제단 위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자신을 칼로 자해하면서 피를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전혀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절에서 108배를 하면서 열심히 기도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그들에게 어떤 응답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드렸던 하나님은 존재하셨지만,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만하고 자기의(自己義)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데 많은 어려움들과 문제점들이 따를 수 있지만 그래도 기도는 오류를 피하고 올바른 곳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다른 조건들이 똑같다면,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눅 18:1)합니다.
2)신앙(信仰)
사도 바울은 믿음(신앙)이 ‘방패’라고 말합니다.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신앙의 사람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평안한 가운데 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드릴 때 기뻐하시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보화를 신앙의 사람들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의미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신앙의 사람이 낙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신앙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의 사람이 밝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이 ‘쾌활함’은 아닙니다.또한 신앙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거나 사람들 사이의 교제를 즐기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것입니다.
3)성경 묵상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 10:17). 성경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강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공급해줍니다. 그래서 복된 사람은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4)순종(順從)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렇습니다. 사울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왕위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가 안전히 운행을 하려면 항상 길가에 세워진 도로표지판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운전자가 도로 표지판을 잘 읽었다고 할지라도 그 도로 표지판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로 표지판이 지시하는 데로 순종할 때 안전운행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네비에서 알려주는 아가씨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려면 우리는 성경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5)겸손(謙遜)
시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성경은 절대 교만한 자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잠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오직 유순한 양만이 목자의 인도를 받을 수 있으며, 오직 겸손한 자녀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의 손길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 25: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교만한 자들은 진리에서 떠납니다. 교회를 괴롭혀 온 모든 이단들 뒤에는 자신을 믿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역사의 증언입니다.
우리 주님도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6)진지한 사색(思索)
우리는 사색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사유(思惟)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색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진리가 저장될 수 없습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특별히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진지한 사색이 우리를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7)성령의 조명(照明)
성령님의 내적 조명(照明)이 없는 사색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스럽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배는 항해 지도의 도움이 없이는 대양(大洋)을 항해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내적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인간의 지성은 진리, 절반의 진리, 완전한 오류가 뒤섞여 있는 대양을 가로질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눈이 되시고, 이해력이 되십니다. 우리는 결코 그분 없이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가 진단법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 즉 ‘자아 인식’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면을 벗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고 과감히 실행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도덕적 및 영적 상태를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마7:1-5 참조). 심지어 자기 자신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4:3절 참조). 궁극적 판단은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완전히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고전 11: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자기 발견이 불완전하고 우리의 자기 판단이 대부분 편견에 빠진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적 위치를 찾아주려고 애쓰시는 성령님과 협력하여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가 상황의 필요에 따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비록 이 질문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밝혀주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1)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틀에 박힌 진부한 답이 아닌 정말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물질입니까? 명예입니까? 권세입니까?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2)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강요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말고,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 마음의 은밀한 보물’ 주위에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생각들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보물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3)나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우리는 의무적으로 돈을 지출해야 하는 것들을 빼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세금을 내거나 가족과 자신을 위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지출하는 돈은 여기에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거의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겼을 때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냅니다.
4)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우리 시간의 많은 부분이 문명화된 삶을 영위하고 지속하는데 소요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집니다. 바로 이 자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냅니다. 여유가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아니면 운동을 하거나 오락을 즐깁니다. 여러분은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5)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이끌리기 마련입니다.
행 4: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우리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찾아가는 곳이 곧 우리가 어떤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6)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우리가 겉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속으로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 주변의 이방나라들을 동경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영광, 하나님과의 언약, 율법, 복에 대한 약속, 믿음의 조상들을 모두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스라엘을 비판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그들과 똑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7)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마땅히 존중해야 할 하나님의 지혜를 존중하는 사람은 ‘웃는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머는 우리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중요한 속성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유머 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그만큼 건강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머 감각과 ‘경솔한 웃음’은 다릅니다. 경솔하게 웃음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죽음, 출생 그리고 사랑 같은 것들을 경솔한 웃음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기도, 성경, 의(義), 인간들의 큰 슬픔과 고통 및 그리스도께서 피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사신 교회를 가지고 농담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된 이야기를 가지고 농담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진정 여러분 안에 왕으로 계십니까?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저는 진짜를 구별하는 일곱가지 질문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질문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고후13장 05절 / 정필도목사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이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믿어지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우리가 천국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은 기적이고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평생 교회에 다녀도 믿어지지 않으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기적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믿어지십니까? 믿어지는 여러분은 모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구원받아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모시고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평생 마귀의 종노릇만 하다가 지옥 불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을 생각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생 교회에 나오고, 집사도 되고, 전도사도 되고, 목사도 되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자신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지를 몰라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는 스스로 테스트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가정교사를 많이 했었습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이 배운 것을 정말 아는지 확인하려면 시험을 쳐봅니다. 안다고는 했지만, 막상 시험을 치면 몰라서 틀리는 것이 나옵니다. 시험을 쳐보면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확증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믿음이 있는지 테스트해보고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신비한 세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항상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식적으로 알 뿐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을 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마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불어도 안전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체험적인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아버지, 이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이 문제를 축복해주세요.”라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도하다 보면 은혜 받고, 응답받고 체험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어서 더욱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의뢰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변 사람을 의지하고, 자기 주먹을 의지합니다.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송도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몇 배로 보복하려고 하고,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분쟁에 휘말려서 서로 고소하고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려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기도로 해결하지 않고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문제가 생기면 직분과 상관없이 혈기를 내고 싸우려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입을 꼭 다물고 기도만 하니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예레미야 17장 5~8절에는 「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삽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전쟁과 풍랑과 기근이 있으니 항상 불안하고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고 광야만 바라봤습니다. 광야만 보면 물도, 풀도 없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안하고, 화가 나고,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 불평을 하고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이와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신문, 뉴스만 열심히 보고 성경은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걱정이 많고 불안합니까.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삽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을 가진 하나님, 신실하고 완전하신 하나님, 변함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마음이 늘 담대하고 평안합니다.
무디 목사님이 대 부흥사로 활동할 때, 영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배를 타고 오다가 큰 풍랑을 만났는데, 모두 겁을 먹고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무디 목사님은 코를 골고 잠만 자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런 죽음의 경각에 어떻게 잠이 오냐며 목사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난 또 뭐 큰일이나 났다고요. 뭐가 걱정입니까? 죽으면 천국 가고, 살면 미국 가면 되지 걱정할 것 없어요.” 그러고는 다시 잠을 자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일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삽니다.
셋째,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항상 먹고사는 것을 가장 많이 걱정합니다. 사업이 잘되지 않으면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그리고 건강과 세상 일에 대한 걱정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염려가 많아지면, 그것은 믿음이 작아진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어떤 걱정거리를 가져오셨습니까. 그 염려는 믿음이 작아진 연고입니다. 마태복음 6장 30~32절을 보면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지 못할까 봐 염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까 봐 염려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염려입니까.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혜와 큰 믿음과 큰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두 가지 근심이 있는데, 세상 근심은 근심에 사로잡혀 건강도 해치고, 육신도 병들고, 마음도 병들어 결국 믿음도 약해져서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해서 염려하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만 가져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도 유익이 되고, 모든 면에서 유익이 됩니다.
넷째, 무엇을 더 사랑하고 좋아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해서 자기를 위해서는 하나님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붙잡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버립니다. 또 쾌락을 더 사랑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하게 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쾌락을 누린다고 해도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돈이 많고 부인이 많아도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너무 괴로워서 자기가 사는 것조차 괴롭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 보다, 돈보다, 쾌락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세상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다섯째, 회개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회개합니다. 작은 죄라도 철저히 회개하기 때문에 그만큼 거룩하게 삽니다. 그리고 겸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으니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다섯 가지에 자신을 비춰보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않은 신앙은 헛수고이고,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가짜입니다. 그 사람은 시민권을 가졌지만, 가짜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은 평생 신앙생활을 해서 천국에 갈 것 같았지만, 천국 문 앞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에 진실이 빠지면 가짜이고, 헛수고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가치관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참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려고 합니다. 잘 안 되어도 그를 위해서 사랑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성 어거스틴은 “사랑이 있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요, 사랑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성질을 부리고 본색이 드러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노력만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얼굴만 봐도 압니다. 얼굴만 봐도 기쁘고 행복이 있습니다.
허벌튼 벤슨이라는 의사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믿음은 의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믿음은 창조력을 증진시키고, 두통을 없게 하고, 불면증을 사라지게 한다고 합니다. 또 중풍을 예방하고, 혈압을 감소시켜 고혈압치료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암을 치료하는 데에 많은 유익을 주고, 공포로 인한 충격을 예방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춥니다. 근심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설사, 구토, 변비, 울화병도 고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영과 육이 모두 건강해지도록 역사 하십니다. 믿음은 약할 때에 강하게 되는 비결을 체득하게 해주고,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게 해줍니다. 믿음은 인생의 힘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면 구원을 받는 것뿐 아니라 육신의 복도 많이 받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합시다
고린도후서 13:5 / 황의봉목사
어떤 철새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늘을 날다가 내려다보니 아래에 많은 먹이가 널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철새는 배고픔을 못 이겨 그 먹이가 있는 장소로 내려가 실컷 주워 먹었습니다. 먹이에 정신이 팔려 결국 그 새는 그곳에 눌러 앉고 말았습니다. 다시 1년이 지나자 동료 철새들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철새는 자기도 이제는 합세해 보려고 했으나 너무 살이 쪄서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철새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다시 주저앉아 먹이를 주워 먹으며 지냈습니다. 또 다시 1년이 지나 동료 철새들이 고향으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전번의 반도 못 오르고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겨울이 지나게 되었을 때 철새는 몸이 너무 비대해져서 고향으로 날아갈 꿈을 영원히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어 혼자 외로이 살다가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2022년도 앞으로 20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금년을 다 보내기 전에 자신을 점검할 적절한 시기인줄 압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하루의 매상고를 계산하여 얼마나 이익을 남겼나 계산하고 공부하는 학생은 수능시험을 보기 전에 모의고사를 통하여 무슨 과목이 부족한가 항상 평가해야 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오늘은 우리교회 예산 결산 위원회가 모여 한해를 결산하고 새해 예산을 수립하는 날입니다. 오늘 아침 이 말씀을 통해 먼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1. 우리의 신앙 점검이 필요한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첫째, 예방이 치료보다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 옛말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는 성인 남녀에게 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 코로나뿐 아니라 겨울이 되면 독감 예방주사를 맞도록 계속 권장하고 있습니다. 병에 걸려 치료하는 비용 보다는 미리 예방하는 것이 쉽고 비용도 절감되기 때문입니다. 건강도 그렇고 사업도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생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크게 병들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깊은 관심이 없으면 지나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바쁘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분주하게 살다 보면 참으로 관심 가져야 할 문제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바쁘다보면 건강관리 소홀히 하기 쉽고 바쁘다보면 내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잊기 쉽습니다. 의사들은 1년에 한 번씩은 건강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냥 ‘건강하겠지…’ 하고 있다가 큰 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사업에 대한 평가 없이 그냥 ‘잘되겠지’ 하다가 정말 진단해 보면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름도 없이 등만 가지고 있다가 “보라 신랑이로다”하는 소리가 들릴 때 바짝 마른 심지에 불을 붙이니 꺼질 수밖에 없고 그제야 누구에게 기름을 빌리려니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건 우리 이야기입니다. 주일날 교회 잘 다니고 있으니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마음 푹 놓고 살다가 주님 오시는 날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 기회가 지나가면 대처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천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 3:1)라고 하였습니다. 학생이 자기의 실력을 평가해보지 않고 잘 되겠지 하다가 대입 수능시험을 맞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서운 암도 조기에 발견하면 거의 완치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질병도 기회가 지나가면 불치의 병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내 믿음이 이만하면 되겠지 하다가 주님 앞에 갔을 때 모른다고 하시면 이것은 정말 큰일인 것입니다. 다시 어찌해볼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7장22절과 23절에서 이 사실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 그렇다면 우리가 점검하고 확증해야 할 사항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가를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에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는가?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성령이 내안에 계신가? 지금이라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두 종류의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엠마오로 가면 두 제자들(눅 24:13-35)은 예수님께서 동행중에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낙심 중에 슬픈 빛을 띠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그 사실을 모르면 승리의 생활, 기쁨의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사탄의 유혹과 환경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엄청난 착각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는데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있다가 부랴부랴 찾아 헤맸습니다. 사흘만에야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았으니 그동안 얼마나 가슴을 졸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주님이 함께 동행하고 계신데도 알지 못하고 실망 중에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안 계신데도 계신 줄 착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말로 마음속에 주님이 계시며 그 사실을 깨닫고 항상 기쁨 중에 승리의 생활을 하십니까?
둘째, 신앙생활의 기본에 충실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가 두 아들을 훈련시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기본에 충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손웅정씨는 축구를 좋아했지만 기본기가 없었고 그래도 성적은 내야 했기에 죽기 살기로 뛰다 보니 몸은 금방 망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들에게만큼은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기본기다지기’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아들들에게 7년간은 슛팅을 전혀 못하게 하고, 기본기만 죽어라 연습을 시켰습니다. 양발을 사용하게 하기 위해 양발 연습을 시키고, 모든 생활습관도 왼손을 먼저 사용하게 했습니다.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본기와 인성이기에 꾸준하고 끈질긴 노력, 감사와 존중의 마음, 겸손하고 성실한 태도를 강조하며, 두 아들의 축구를 직접 지도했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에서 읽은 글입니다.
신앙생활도 기본기가 잘 갖추어진 사람은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기본기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힘들어집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주일성수, 기도생활, 말씀생활, 봉사생활, 그리고 전도생활입니다.
그 중에 주일성수는 신자의 첫째가는 표시이며 신앙의 척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째 쉬시며 이날을 안식일로 정하셨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날을 성일로 정하고 거룩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날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에 나와 주의 말씀을 듣고 찬송하며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날입니다. 이날을 등한히 하는 성도의 영혼과 생활은 반드시 부패하고 맙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8:13-14)고 하셨습니다.
이날 성도는 세상일이나 오락을 금하고 경건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이나 생명에 관한 것까지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고 하셨습니다. 주일성수 뿐만 아니라, 기도생활, 말씀생활, 봉사생활, 전도생활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생활표준으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계명 앞에서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부족을 알고 자성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하였습니다. 십계명은 결코 성도들을 억압하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파멸의 낭떠러지 옆에 있는 보호의 난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잘 잡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내 신앙은 지금어디에 와있습니까? 그냥 막연하게 잘 하고 있겠지 하고 방심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을 점검하고 확증하여 주 앞에 서는 평안 가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고후13장 5~10절 / 지용수목사
스스로를 탁월한 인재요 수재라고 생각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아주 특별한 인물로 알았는데 대학 졸업 후 입사 시험에 거듭 실패를 했습니다.
‘나 같은 인재를 몰라보는 이 어리석은 세상에서 살아 무엇 하나?’
그는 죽기로 결단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한 노인이 그것을 보고 뛰어들어 그 청년을 구했습니다. 청년의 사연을 들은 노인이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를 주워서 청년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 손에 있는 그 모래를 이 모래사장에 떨어뜨리게나.”
청년이 모래알을 떨어뜨리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방금 떨어뜨린 그 모래알을 주워서 나에게 주게나.”
“할아버지, 이 모래사장에서 그 모래를 어떻게 찾아요?”
그러자 노인은 자기 호주머니에서 진주 하나를 꺼내어 청년에게 주며 다시 말했습니다.
“자, 이번에는 그 진주를 모래사장에 떨어뜨리게나. 그리고 다시 그 진주를 주워서 내게 주게나.”
청년이 진주를 떨어뜨린 다음 금방 다시 주워서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이 사람아, 모래사장에 있는 모래는 다 똑같아 표가 나지 않지만 진주는 금방 알아 볼 수 있네. 이처럼 자네가 진짜 수재이고 인재이면 사람들이 왜 자네를 몰라보겠는가? 착각하지 말고 자네를 진주처럼 값지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가꾸어 나가게.”
노인의 말에 크게 깨달은 청년은 ‘그래, 내가 착각을 했구나. 나는 그저 모래알같은 흔한 사람이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구나.’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회사에서 나를 몰라주네, 여기서는 나를 몰라주네.’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만한 실력자가 아니거나 헌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잘 살피는 지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야곱의 아들 유다가 결혼을 해서 엘, 오난, 셀라,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엘이 장성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악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일찍 데려 가셔서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습니다. 유대 관습은 죽은 형에게 자식이 없으면 동생이 형수를 통해 아들을 낳아서 형의 대를 잇게 합니다. 그러니 유대 청년들은 형수가 너무 못생겼으면 ‘주여! 형님이 장수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만일 형수가 아리땁고 귀하면 ‘오! 하나님, 형님이 죽어도 괜찮겠습니다.’라고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죽은 엘의 대를 잇기 위해 오난이 형수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생명의 씨앗을 형수 몸에 뿌리면 그 자식이 내 이름이 아니라 형님 이름을 갖게 되니 그런 짓은 하지 않아야겠다.’
오난은 형의 대를 이어주기가 싫어서 생명의 씨앗을 형수의 몸에 뿌리지 않고 밖에 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악한 마음을 보시고 그도 데려 가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큰아들과 둘째아들이 죽은 것이 며느리 다말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셋째아들 셀라도 며느리와 잠자리를 같이 하면 죽을까 봐 며느리 방에 들이지 않고 오히려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냈습니다.
세월이 지나 유다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얼마 후, 유다는 친구 히라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에 갔습니다. 양털 깎는 날은 축제의 날이라 모두 기뻐하며 즐기고 마십니다. 그리고 시가지를 돕니다. 그 정보를 안 다말이 과부 옷 대신 창녀 옷을 입고 변장하여 유다를 유인했습니다. 아내가 없어서 외롭던 유다는 얼큰한 기분에, 유혹에 빠져 여인과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주기로 약속하고 그 증표로 그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여인에게 맡겼습니다. 다음 날, 유다는 그의 친구를 통해 염소 새끼를 여인에게 보내고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여인을 만나지 못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 마을에는 창녀가 없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그냥 돌아와서 유다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자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만 두게. 하나님을 섬기는 내가 창녀를 찾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나? 세상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는가? 창피를 당하기 전에 그만 두세.”
그런데 몇 달 후 유다는 친정에 가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잉태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뭐?”
유다가 사람들에게 며느리 다말을 끌어내어 불에 태워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말을 끌어내어 불에 태워 죽일 준비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남편 없이 아기를 가지면 돌로 때려 죽이든지 불로 태워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끌려 나가면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여주며 그 물건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고 했습니다.
“유다 어른, 자부께서 이 도장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고 하더이다.”
유다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가 나보다 옳구나. 내가 내 아들 셀라를 그에게 주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구나.”
여러분, 유다가 자신을 살피지 않았을 때에는 남편 없이 잉태한 며느리를 죽일 여자로 보았지만, 자신을 살피니 자신이 더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구누구를 비난하지만 자신을 살피면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시니 돌 던질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는 변명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격이 없는 사도다. 복이 없어서 몸에 병이 가득하고, 예루살렘에 보낼 헌금을 슬쩍 챙긴 나쁜 사람이다.’라는 거짓말로 악담을 하는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에게 “아니다. 나는 참 사도다. 지극히 큰 사람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은사도 많이 받았고 방언도 많이 하고 능력도 많이 행했고, 14년 전에 삼천층까지 갔다 온 사람이다. 나는 참 사도다.”하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공격을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무슨 말입니까?
“내가 비록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고 성령님께서 나를 잡아 쓰시는데, 너희가 한 성령을 받았다면 어떻게 나를 비난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받은 영이 악령이 아닌가 한 번 테스트해 보아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요, 성령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입니다. 성령을 받은 가슴은 하나입니다. 할렐루야!
교회가 하나로 나아가는 것은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장로님들과 여러분은 마음이 다 다르고 생각이 다 다르지만 성령은 한 성령이기에 하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른 말을 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하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비밀을 공개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스스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왔고,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여러분, 세상 종교의 창시자들은 다 땅에서 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천국의 비밀을 나눌 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자칭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말씀을 잘 받는다는 바리새인들은 “네가 사람인 주제에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사람인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하면서 예수님께 도전하고 대항하고 변론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왜 내 말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지 아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함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함이다.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그렇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리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설교 시간에 딴전부리는 사람치고 잘 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설교 시간에 졸고, 설교 시간에 딴 짓을 하면 축복은 떠나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는 복 있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너희를 지도하는 나를 왜 비난하겠느냐? 너희가 정말 성령의 사람인지 너희를 스스로 시험해 보아라. 한 번 테스트해 보아라. 너희 자신을 확증해 보아라.” 라고 한 것입니다.
점을 치는 점쟁이는 두 종류입니다. 가짜 점쟁이는 배워서 하지만 진짜 점쟁이는 배우지 않고 귀신을 받아서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배워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을 받음으로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결혼한 신혼부부가 아이를 가져서 한 달 반이 되었다면 본인들만 압니다. 이웃 사람들은 모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남들은 몰라도 우리 자신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내게 계시네」
우리에게 성령이 계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 받은 것을 어떻게 압니까? 토레이 박사님이 말하기를, 성령 받은 사람의 입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어떤 말씀이든, 어떤 기적이든 하나님께서 하시면 다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경의 기적이 다 믿어지시는 분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은 복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천국 시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십자가를 아무리 보아도 더하기 부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내 죄를 대신 지신 십자가’로 믿어집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성령의 사람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즐거울 때 함께 즐겁고 교회가 어려울 때 함께 아프면 성령의 사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지도를 잘 따라가야 교회가 화목하고 하나가 되는데, 바울을 비난하니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바울이 “너희가 성령의 사람인가, 마귀에게 쓰이는 사람인가 확인해 보라.” 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가 쓰는 일꾼에는 세 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늘 쓰임을 받는 귀신들이 있고,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한테 왔다가 마귀에게 갔다가 하면서 쓰임 받는 사람이 있고, 베드로처럼 잠깐 쓰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루도, 잠시도 마귀에게 쓰임을 받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인데 예수님의 길을 막았습니다. 십자가를 못 지시게 막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수제자에게 사탄이라 부르신 것은, 순간적이지만 베드로가 마귀에게 쓰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제가 어떤 사람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면 여러분은 “목사님, 그 사람은 충성하는 사람입니다”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도 순간적으로 마귀에게 쓰일 수 있습니다. 영안이 밝고 영분별의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교회를 헐고 근심을 시키고 걱정을 끼칩니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를 세워주십니다. 우리 모두 말 한 마디를 해도 교회를 세우는 말, 긍정적인 말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입을 마귀가 쓰는 입으로 허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를 읽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주 놀라서 움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후서를 보낸 다음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편안하게 목회하며 로마서를 쓰고 로마 선교 여행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만 비난하지 말고 너 자신을 한 번 확증해 보아라.”
이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언제나 자신을 살피면서 귀한 성도의 길을 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이는 “기억해라.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우리가 성령을 받아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기억해라. 버림 받지 않음을 기억해라.” 라는 것입니다.
주의 종 바울은 비록 병들고 왜소하고 가난하고 볼품이 없고 오히려 거짓 교사들이 잘 생기고 건강하고 얼굴에 기름이 흐르고 보기에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잡아 쓰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3절 이하에 보면, 주의 날에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신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교회가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되지만 신비의 경험이 없으면 약해집니다. 여러분도 때때로 신비의 경험을 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나팔소리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일곱 금촛대가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 금촛대 사이로, 인자 같은 이 즉 예수님께서 다니시는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금띠를 띠셨습니다. 발은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머리와 털의 희기는 눈 같고 양털 같으며 눈은 불꽃 같고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물소리 같으며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았습니다.
그 굉장한 광경 앞에 떨면서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사도 요한이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른손을 대시면서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산 자라. 나는 한 번 죽었지만 영원히 산 자요, 음부와 사망의 권세와 열쇠를 가졌노라. 너의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앞으로 될 일을 기록하라. 너의 본 비밀은 일곱 촛대와 일곱 별인데 일곱 금촛대는 교회요, 손에 있는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들이라.” 할렐루야!
일곱은 완전수를 뜻하니 일곱 촛대는 모든 교회를 말합니다. 이 세계의 큰 교회, 작은 교회, 도시 교회, 시골 교회가 다 귀한 것은 주님께서 다니시는 금촛대이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다 찌그러져가는 교회도 청와대보다 귀하고 백악관보다 귀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계시니 우리보다 귀한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엊그제 지면을 통해 세계에서 제일 큰 다아아몬드를 보았습니다. 도쿄에서 아리따운 모델 아가씨가 그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목걸이를 걸고 나와 처음으로 선을 보였습니다. 그린 칼라에 그 무게가 40.7캐럿이나 되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대단한 다이아몬드로 그 가격이 이천억 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은 극히 값진 진주라고 마태복음 13장 45절에서 46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따라 합시다.
“예수님과 천국은 극히 값진 진주다.”
예수님 진주와 세계에서 가장 큰 진주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일본의 그 다이아몬드 천억 개를 모아도 예수님 진주보다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셨으면 우리는 재벌인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재벌이다. 이래 뵈도 재벌이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가졌고 예수님을 가졌으니 다 가진 것입니다. 회사 사장이라도 예수님이 없으면 불쌍한 나그네에 불과하고, 말단 사원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참 성공자이고 재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교회도, 성도도 얼마나 귀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일곱 별을 일곱 교회에 파송한 천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양곡교회에도 파송된 천사가 지키고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샤워를 할 때도 천사가 옆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아 예쁘게 샤워합니다. 아무렇게나 하지 않습니다. 코를 풀 때도 조심스럽게 풉니다.
또 일곱 별을 교회의 사자(使者)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천사는 하나님께 능력을 받아 능력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두어도 무엇이든 잘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저나 많은 목회자들은 약해서 홀로 두면 목회를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붙잡아 주셔야 됩니다. 그러니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로 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오늘까지 양곡교회를 섬긴 것은 제 능력이나 제 실력이 절대로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를 잡아 주시고 예수님께서 저의 오른손을 잡아 주셔서입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른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도 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의 종들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붙잡으셔서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할 때 자신을 알고 목회자를 알아야 됩니다. 목회자가 부족해도 주님께서는 목회자를 주님의 손에 붙잡으셔서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음은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종은 옳다고 생각해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종은 무엇입니까? 복종은 내 뜻과 다를 때도 따르는 것입니다. 성도가 목회자에게 복종해야 교회가 하나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 이번에는 다 동쪽으로 전진합니다. 동쪽으로 전진!”이라고 할 때 모두가 하나 되어 동쪽으로 전진할 때 강력한 우리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쪽으로 갈 때입니다.”라는 사람이 나오면 교회가 약해집니다. 여러분은 순종도 잘 하시고 복종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교회가 강한 십자가 군대로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모든 것을 지불할 마음으로 경성하니 교인들은 목회자가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까지 우리 교회가 이만큼 된 것은 제가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협력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잘 협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가 즐거움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즐겁게 목회할 때 교회에 행복이 넘치고 축복이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근심 때문에 설교 준비를 잘 못하고, 좋은 비전을 갖지 못하면 교회가 얼마나 손해를 많이 보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가 버린 자 되지 않은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비록 부족해도 우리 주님께서 붙잡고 쓰시는 종임을 알아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7절에서『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라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곁에 계신데도 막 사는 것은 시어머니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미국에 사는 우리 교민이 한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인 안주인이 샤워 후 나신인 채로 다녔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안주인의 생각을 모르긴 하지만 그가 가정부를 의식하지 않으니 그랬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옷을 벗을 때 강아지가 보고 있다고 “부끄러워라.”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옆에 계시고 내 안에 계시는데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에서 8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여러분, 죄를 계속적으로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며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면 악한 일을 조금만 해도 마음이 아프고, 양심에 가책이 됩니다. 만일 그래도 악한 일을 계속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신앙의 연조가 깊고 봉사도 많이 하여 장로님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담배를 끊지 못해 목사님 몰래, 아내 몰래, 아이들 몰래 꼭 화장실에 가서 빠꼼빠꼼 도둑 담배를 피웠습니다.
저는 담배를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이 없지만, 저희 고향 마을의 한 형이 빠꼼빠꼼 담배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담배는 몸에 좋지 않잖아요.”라고 했더니, “이건 내 과자야 내 과자.”하며 계속 피웠습니다. 얼굴이 타들어가더니 나중에는 폐가 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놈의 담배 때문에, 이놈의 담배 때문에…….” 하면서 담배를 계속 피웠습니다.
한 아저씨는 담배를 끊고자 했으니 못 끊는 자신이 너무 답답해 가족 앞에서 이렇게 공표를 했답니다.
“앞으로 내가 다시 담배를 피우면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며칠 후 또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것을 보고 부인이 말했습니다.
“꼴 좋네요. 당신 정말 사람 맞아요? 다시 담배를 피우면 인간이 아니라면서요?”
“내가 앞으로 담배를 안 피운다고 했지, 언제 옆으로 안 피운다고 했나?”
담배를 끊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봅니다. 장로님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그 맛에 빠져 재래식 화장실에서 계속 도둑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 화장실에 벌레가 많으니 장로님 부인이 때때로 약을 부어 벌레를 죽였는데, 하루는 약이 다 떨어져 휘발유를 부었습니다. 담배를 피우러 화장실에 들어간 장로님은 냄새가 조금 이상했지만, 평소에 사용하던 약이겠거니 하고 담배를 다 피운 후 평소대로 꽁초를 밑으로 던졌습니다. 그 순간 화장실이 폭발하여 장로님의 엉덩이가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장로님을 찾아갔더니 눕지도 못하고 해괴한 모습으로 “아이고, 하나님. 확 끊을 겁니다. 아이고, 아파라! 확 끊을 겁니다. 한 번만 용소해 주이소. 한 번만 용서해 주이소.”라는 말만 계속하고 있더랍니다.
장로님이 되어서도 담배를 못 끊으니 하나님께서 엉덩이를 태워서라도 끊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끊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맞고 나서 끊으면 아픕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나도 좀 미안한 일이 있는데…….’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지금 그것을 끊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채찍을 맞은 후에 끊으면 아픔이 큽니다.
그리고 바울은 8절에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따라 합시다.
“주님이 진리이고, 말씀이 진리이다. 진리가 곧 길이다.”
기차가 레일로만 가듯이 예수님을 믿으면 진리로만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좌로 우로 치우치면 안 되고 진리만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다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귀하게 보인다면 제가 귀한 것이 아니고, 제가 따라가는 진리가 귀해서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복을 받았다면 제가 복을 타고 난 것이 아니고 제가 따라가는 진리가 복이기 때문에 제가 복 속에 사는 것입니다. 제가 행복해 보인다면 제게 특별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진리 때문에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능력이 넘쳐 보인다면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능력이기 때문에 능력이 흐르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담대하게 보인다면 제가 의로워서 담대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의롭기 때문에 제가 사자처럼 담대한 것입니다. 인생은 간단합니다. 물론 직장 생활, 사업, 부부 생활, 자녀 교육 등, 인생 살이는 쉽지 않지만 진리를 따라가면 간단합니다.
캘리포니아의 한 남자가 바닷가를 거닐다 “하나님, 제 소원 한 가지를 좀 들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했더니, 구름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의 변함 없는 믿음을 예쁘게 보아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으니 말해 보아라.”
“하나님, 여기서 하와이까지 다리를 놓아 주세요. 그래서 자동차로 왔다 갔다 하게 해주세요.”
“아들아.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리 교각을 태평양 밑바닥까지 박으려면 철근이 얼마나 많이 들고 콘크리트가 얼마나 많이 들겠느냐? 내가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지 판단이 잘 안 선다. 그것 말고 내 영광을 나타낼 다른 소원을 말해 보아라.”
그가 한참 있다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소원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제 아내를 잘 알 수 있게 해주세요. 왜 그렇게 잘 토라지는지, 또 울 때에는 무슨 생각으로 우는지, 그리고 나보고 때때로 ‘신경 꺼! 신경 쓰지 마!’라고 하는데 그 때는 어떤 심정인지 알려 주세요. 어떻게 하면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좀 알려 주세요.”
“알았다 알았어. 아예 하와이까지 다리를 놓아 줄게. 4차선으로 해줄까? 8차선으로 해줄까?”
하나님께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여자의 마음을 맞추는 것보다 태평양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는 것이 더 쉬웠나 봅니다.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도 ‘여자는 참 묘하다.’라고 생각되시는가 봅니다.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공부보다 더 어렵고 사업보다 더 어렵고 목회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쉽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떠나 내 아이디어로 하니 어렵지, 성경대로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며 귀히 여기고 아끼면 감동을 주는 남편이 됩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간증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하게도 저의 가정이 늘 천국 같다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그저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고 말씀을 따라 나가니 부족하지만 그래도 아들 노릇을 하고, 남편 노릇을 하고, 아빠 노릇을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제도 제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잠깐 들렀습니다. 점심을 먹으며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결혼할 때 상대가 그 당시 얼마나 아름답고 예쁘고 매력적이냐 그것도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고 늙어도 계속 아름다울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소.”
그러니 아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가 물어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물론 옛날에도 당신이 예뻤지만 나이가 든 지금 더 아름다우니 팔십이 되면 당신은 더 아름다울 거요”
그러자 아내가 “무엇이 먹고 싶어서 그래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린이 회장을 했습니다. 그때 학교에서 학예회가 있었는데 예쁜 여학생 한 명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반했는데 나중에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그 때도 예뻤지만 지금도 예쁘고 팔십이 넘어도 예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입을 쓰시면 아내에게 상처 줄 말을 하지 않고, 남편에게 상처 줄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귀한 말을 하게 됩니다.
한 집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TV를 보고 있고 어머니와 딸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쨍그랑’하고 그릇이 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조용합니다. 궁금해진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부엌에 가 봐라. 누가 그릇을 깼는지 가 봐라.”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안 가 봐도 알아요.”
“어떻게 알아?”
“엄마가 깼어요.”
“네가 어떻게 알아?”
“조용하잖아요.”
만일 딸이 그릇을 깼다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바가지로 쏟아졌을 것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운전을 조금만 잘못하면 옆에서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하면 조용합니다.
가정 생활도, 공부도, 회사 일도,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성경은 모든 것의 해답입니다. 이 진리대로 살아가면 귀한 사람, 귀한 남편, 귀한 아내, 귀한 부모, 귀한 회사원, 귀한 사업가, 귀한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맥아더 동상을 없애자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먼저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기도하고 인천 상륙작전을 해서 우리가 현재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공산 치하에서, 김정일 밑에서, ‘김일성 아바이, 아바이’ 하면서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굶주리며 살 것입니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없애겠다고 말하니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라가 망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맥아더만 보지 말고 자신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알면 그런 말은 못합니다. 개인이, 가정이, 교회가, 나라가 사는 길도 진리, 성경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천 억 원짜리 진주나 귀한 보석을 천억 개 준다고 해도 못 바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 것을 감사하고, 이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진리를 모르는 우리 겨레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온 겨레가 진리를 따라 복되게 사는 우리나라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축원
고후13장 8~14절 / 피종진목사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수 있고, 말한 대로 이루어지게 되고, 사모하는 대로 받게 되고, 구한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나면서부터 기쁨도 있지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슬픔도 있고, 또 성공도 있지만 실패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서로 축복하기를 좋아하고, 또 축복 받기를 간절히 소망하면 하나님께서 불행이 행복으로 바꾸어지게 하시고, 죽음이 생명으로, 저주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해 복의 세계로 이끌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주의 백성들을 간절히 축복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귀한 은혜가 임하기를 진심으로 축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위로를 받을지어다.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11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위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툼과 분쟁 속에 있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참된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위로’란 히브리어 원어에 보면 ‘위안을 받는다, 마음의 유쾌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불쾌감도 가질 수 있고, 유쾌한 마음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 심리를 유쾌한 마음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 ‘보혜사’라고 하는 뜻이 바로 ‘위로’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위로를 베풀어주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위로의 영이 함께 동행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큰 위로가 있기를 소망하면서 위로를 받으라고 축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4에 보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환난이 있을 때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도 위로하실 수 있고, 또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하시는 것은 바로 환난을 극복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풍파와 한파가 몰아닥칠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는 없지만 방파제가 파도를 막아주고, 또 뜨거운 햇빛이 강하게 쪼여주면 그것을 다 이길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당하는 어떤 고통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이사야 49:13에도 보면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해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아야 될 때 사람을 생각하거나, 또 어떤 환경 여건 조건에서 그 어떤 위로를 찾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려고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아니하고 그 고난만큼 위로해주시고, 슬픔만큼 이길 수 있는 위로를 주시며, 역경 환난만큼 이길 수 있는 안전을 주시고, 어두움의 권세만큼 광명의 빛으로 그 어두움을 물리쳐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6:13에 보면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보좌’를 의미하기도 하고,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며, ‘신앙의 모든 근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 밖에서, 신앙 밖에서 어떤 인간의 방법으로 무슨 재미있는 게임을 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거나, 또 어떤 스포츠를 통해서 위로를 받아 보려고 하거나, 또 어떤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위로를 받아보려고 하거나, 관광을 하면서 위로를 받아보려고 하지만 이러한 것에 위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슬픔과 고통, 괴로움, 절망과 좌절감에서 어떤 위로가 필요하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여러분을 위로해주실 수 있습니다.
둘째, 평안할지어다.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11절) ‘평안하십니까?’ 이렇게 우리 한국의 인사는 묻는 인사가 많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인사는 ‘평안하세요’ 이렇게 축복해주는 인사가 더 좋습니다. 주의 백성들의 입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축복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다른 사람이 축복할 때도 감사히 생각하고, 또 축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축복권을 부여해주실 줄 믿습니다.
시편 29:11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기 원합니다. 또 원하는 복의 형태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달성되었다고 해서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많다고, 건강하다고, 잘 생겼다고, 지위와 명예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한 평안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셋방살이 하면서도 찬송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도 밤낮 싸우고 고민하고 자기 생애를 저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살든지 그곳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이 있어야 됩니다. 주께서 주시는 평안의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평안을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사야 57:21에 보면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평안도 없어질 뿐 아니라 평안이 오지도 않습니다.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고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움이 있는 곳에는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주께로부터 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지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5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노력하거나 자기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0:6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킴으로 천대까지 베푸시는 축복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험난한 광야 길을 걸어가는데 왜 시내산에서 돌비 십계명을 주어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어떻게 보면 이것이 굴레 같지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면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 말세에는 물붓듯이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그 은혜는 바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은혜입니다. 성령의 은사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은사가 충만하면 하나님이 범사도 잘되게 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절)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로마서 5:5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씀했고, 로마서 5:8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악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또 유다서 1:21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섯째,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을지어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절) 여기에서 ‘교통’이란 ‘아주 밀접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성령님과 밀접한 교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성령님과 밀접한 교제 속에 성령님의 뜻을 순종하고, 성령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에스겔 36:26에 보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씀했고, 에스겔 36:27에 보면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로를 받을지어다, 평안할지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지어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을지어다’라고 고리도 교인들에게 축원한 사도 바울의 축원이 여러분의 생활속에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 하나님
고후 13장 13절 / 조용기목사
오늘은 "은혜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옛 헬라 사람들은 값없이, 대가 없이, 공짜로 주시는 것을 은혜로 주신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 우리 하나님에 관한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란 헬라어의 '카리스’라는 말인데 아주 보기에 아름다울 때 헬라 사람들은 카리스 라고 말합니다. 황혼에 저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들고 새들이 날라 가고 평화롭고 고요할 때 이를 보고 카리스, '야~ 은혜롭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또한 노래를 잘 부를 때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그 노래를 듣고 난 다음에 마음에 아주 기쁘고 평화스러우면 '카리스' '아~ 은혜롭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해서 사회적으로 칭찬 받을 만한 덕성스러운 행동을 했을 때 '야- 은혜로운 행동을 했다.' 은혜란 말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예술품이나 경치를 보았을 때 '아~ 카리스,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을 때 또한 덕성스럽고 훌륭한 행위를 볼 때도 카리스,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여러분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일 뿐 아니라 그 은혜가 우리의 생애 속에 큰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변화를 갖다 주는 것입니다. 보기에도 아름답고 듣기에도 좋고 함께 살기에 덕성스러운 훌륭한 인격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은혜의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와 만물을 하나님 아버지가 지으셔서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양을 만드셔서 우리에게 돈 받고 태양의 빛을 비취게 합니까? 공짜로 햇빛을 비취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기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돈 받고 숨 쉬라고 합니까? 공짜로 숨 쉬게 하는 것입니다. 물을 주님께서 만들어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었는데 사람들이 오염되게 했지 하나님 오염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도 공짜로 주셨습니다. 오곡백과 다 주님이 공짜로 만들어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선물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선물을 주는 분은 은혜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거저주신 것이지 대가를 받고 우리 생명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자라서 세상에 태어날 때 공짜로 태어났지 우리가 돈 주고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7장 24절로 25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 생명이 있고 숨 쉬고 사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폐병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숨 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은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폐가 많이 상하니까 숨을 잘 쉴 수가 없어요. 드러누워 있으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벽에 기대서 억지로 숨을 쉬는데 조금이라도 잠이 들고 억지로 숨을 못 쉬게 되면 기겁을 하고 놀랍니다. 숨이 탁 턱에 닿아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숨을 시원하게 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은혜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이 배가고파 보면 밥이 얼마나 복스러운 것을 알게 되고 목이 말라보면 물이 얼마나 귀중하고 은혜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숨을 못 쉬게 되니까 한 모금 숨을 편안하게 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혜인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의 숨 쉬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우리가 숨도 쉬고 먹고 일어나고 마시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깨기도 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구주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를 짓고 그 죄를 상속으로 받은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속에 죄의 부패가 들어 있어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의 부패를 떠날 수가 없어요. 속에 숨겨서 있는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를 심은 것은 죄의 부패로써 우리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죄의 부패를 없앨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밖에 안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몸 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성을 도말하시고 우리에게 거듭나게 해서 새로운 심령을 심어준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여러분 언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몸 찢고 피 흘려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성경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셔서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을 받아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영생의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감격하지요. 그리고 난 다음에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그 자리에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성령이 보혜사로써 우리를 돕게 해주신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 곁에는 돕는 자 보혜사가 항상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성령은 바람같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돕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보혜사로써 돕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알면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고 도움을 간구하면 성령께서 언제나 오른손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같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받습니까? 가정교사가 우리와 같이 있는데도 인정을 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교사가 있는 것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해야지요. 우리는 매일매일 성령님이여 나를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말씀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도움을 청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하지 않는데 주지 않습니다. 찾지 않는데 찾게 하지 않습니다. 문을 두드리지 않는데 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했었으며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대가를 주고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나면은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는데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적인 체험으로 말하면 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성령은 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를 자상스럽게 돌보며 오래참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행인과 나그네 같이 살다가 죽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깨달아야 될 가장 중대한 것은 인간의 지상 삶은 잠시 잠깐이요, 지상 삶 이후에가 영원한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여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저 세상에 있는 것을 우리가 증명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망과 음부를 멸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생의 조상이 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 사도들을 순교 당하게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난 다음에 죽음을 불사하고 까지 라도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을 후세에 보여 주어서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한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우리가 안 믿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한 그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하나 없이 잡혀서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증거만 안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눈으로 보고 그 말씀을 듣고 손으로 만져보고 함께 식사를 나눈 우리들이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12명의 제자가 모두다 순교를 당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보게 될 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확실한 사건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예수를 저버리면 천국에 가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눈물과 고통과 탄식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 그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말씀하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계신 천국에 여러분과 저를 데리고 가서 함께 있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예수 믿으면 걱정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아무리 고통과 괴로움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 땅의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은 언제고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입니다. 그 고생과 수고의 날이 지나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영원한 평안과 기쁨의 처소인 천국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그것을 대가를 받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선물로 주시고 그 아들을 선물로 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처럼 천국도 선물로 주셨으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 요구되는 것입니다. 믿음만 가지면 주의 선물을 받아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 감동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기에 주님이 몸을 찢고 피를 흘렸었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을 일일이 따라 다니면서 책잡아 심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죄를 대신 청산하고 여러분을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요, 영원한 은혜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신 것이니 여러분 얼마나 큰 은혜인 것입니까? 돈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의복을 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기술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명을 선물로 준 것입니다. 살을 찢어서 먹여 주시고 피를 흘려서 마시어 주신 것입니다. 받아먹으라. 이는 내가 너를 위하여 찢는 살이라고 말씀하시고 받아 마셔라. 이는 내가 너를 위해서 흘리는 죄사함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이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용서와 의와 평강을 선물로 얻었으며 마귀와 세상을 이기고 거룩함과 성령 충만을 선물로 얻었으며 주님 채찍 맞은 공로로 말미암아 치료와 건강을 선물로 얻었으며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저주 받으므로 아브라함의 복을 은사로 받았으며 주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영생천국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한데로 이를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이렇게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을 꿈꾸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고 나가면 이 은혜가 여러분 속에 활성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은혜속에 살며 은혜의 성령님께 늘 의지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혜사로 내어주신 성령님은 자신을 어머니로 내주신 예수님과 같은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얼마나 오랜 인내를 가지고서 똥, 오줌 받아내시고 돌보아 주시고 길러 주시듯이 성령께서 얼마나 오랜 인내력을 가지고 우리의 잘못을 찾아 참으시고 다시 깨우치시고 회개시켜 주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해주시고 도와주시는 역사를 성령이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고아원에 있는 우리처럼 만들지 아니하고 부모가 있는 어린 아이처럼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2천년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현실적인 하나님이요, 꿈속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시시각각으로 깨닫게 해주시고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기억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강단에 서면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할 때 제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기억이 나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강단에 설 때 하고 강단에서 내려갈 때하고 그렇게 틀린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는 내가 말할 수 없는 말도 깨닫게 해주시고 잊어버린 것을 기억나게 해주시고 하늘나라가 살아서 역사하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마음속에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연구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이는 것처럼 계시를 통해서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께 의지하면 성령이 진리를 계시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알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알게 되면 은혜가 충만하고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과 은혜
둘째로, 여러분 율법과 은혜를 우리가 분명히 분별해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것인데 10계명 및 613개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며 심판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거울 보십시오. 거울이 여러분 화장해 줍니까? 거울을 여러분 들여다보면 머리가 헝크러진 것을 보여 주시고 눈썹이 잘 그려지지 않거나 립스틱이 밖으로 묻은 것이나 얼굴 화장 잘못한 것이나 이런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울아 머리를 바르게 잘 빗게 해줘. 거울아 얼굴 치장 고쳐줘. 립스틱을 바르게 발라줘." 아무래도 거울은 그런 것을 못합니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줄 따름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참 모습을 보여줄 따름이지 우리를 씻어주거나 구원해주는 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부터 죄 중에 태어나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기 때문에 율법의 거울 앞에 서면 나타나는 것이 죄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뭇잎사귀 보다 더 썩어지고 패리한 우리들인 것입니다. 걸레보다 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부 죄인으로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 도망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죄인이 벌거벗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수가 없지 않습니까? 율법 앞에서는 설수 없으므로 다 도망을 치고 숨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써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시내 산 앞에서면 그곳은 하나님의 뇌성벽력과 벼락만 치는 것이지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 하에서 여러분 구원받을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과 교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백일천하에 드러내고 얼마나 오만하고 교만한 것을 율법은 우리를 밝히 비춰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7절로 9절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이 없을 때는 자기가 깨끗한 줄 압니다. 거울이 없을 때는 자기 얼굴에 숯구멍이 묻어도 숯구멍 묻은 줄 모르고 당당히 갑니다. 그러나 거울이 있으니까 숯구멍이 묻고 더러운 것을 알므로 부끄러워서 밖에 못나가는 것처럼 율법이 없을 때는 자기가 죄인이 아닌 줄 알고 당당하게 나갔다가 율법이 들어오고 보니 모든 것이 죄라. 천지에 죄가 꽉 들어차 있으니 그 형태로써는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어 도망을 치고 땅굴을 파고 숨으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교만은 율법이 오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입니까? 나의 힘으로 능으로 율법을 처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속에 드러난 죄를 청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용서를 받아야 되겠는데 누가 용서를 해줍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려서 내 죄를 청산해 주셨으므로 예수님의 은혜로써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적은 빚을 지면 여러분이 갚을 수 있지만 여러분이 한 사람이 빚을 10억 이상 100억의 빚을 지면 못 갚아요. 10억의 빚을 어떻게 갚습니까? 더구나 100억의 빚을 어떻게 갚습니까? 천억, 1조원이 되는 빚을 어떻게 갚습니까? 우리가 짊어진 죄는 여러분 돈으로 환산하면 100억이나 1조원 같은 빚과 같은 것입니다. 평생을 벌어도 못 갚아요. 못 갚으면 그 대신 벌을 받아야죠. 그 벌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빚을 청산해 준 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빚이 없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죄 없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서 이 땅에 33년 동안 사시고 십자가에 올라서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을 다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시고 내가 다 갚았다고 외치시고 우리가 주님께 나오기만 하면은 그 보혈로써 죄를 씻어 주시고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통해서 서같이 멀리 옮기시고 영원히 등 뒤로 던지시고 죄가 눈에 다시 보이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공짜로 용서와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죄악을 대신 갚으시고 용서와 회개와 구원을 주시니 이것이 바로 은혜의 구원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로 9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제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가 덮어썼으니까 보혈이 말합니다. "내가 갚았다. 하나님 내가 다 갚았어요. 이 피를 보십시오. 내가 다 갚았으니 이 사람에게 심판을 내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여러분과 나의 우산이 되어서 우리를 막아 주시기 때문에 하늘이 내려오는 진노가 예수님의 보혈의 우산에 부딪치면 다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하는 사람은 값없이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서 주는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은혜뿐 아니라 갈보리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변화를 주는 것입니다. 새사람, 거듭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를 믿으면 이전 사람 아담이 사람은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죄가 물러가고 용서와 의로운 사람이 되고 세속이 물러가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질병이 물러가고 치료받은 사람이 되고 저주가 물러가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멸망이 물러가고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새사람이 된다는 놀라운 은총을 우리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신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 여성이 시골에서 오줌, 똥을 들고 밭에 가서 오줌 뿌리고 온갖 고생과 괴로움을 다 하다가 부잣집 아들하고 결혼을 해서 시집을 오게 되면은 신분이 달라집니다. 이제 오줌, 똥을 머리에 걸머지고 밭에 가서 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고통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부잣집 며느리가 되어서 이제는 온 영화를 누리고 살 수 있는 신분상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신분상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아들 나라에 살고 있지 마귀의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했었으나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모시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나라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통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아들을 통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아들을 통해서 병나은 사람이 되었고 아들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고 아들을 통해서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기 신분이 어떠한 사람인 줄을 알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살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까? "당신이 누구요?" "나는 누구인지 모릅니다." 너무나 비참하잖아요. "당신이 누구요?" "나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 신분을 확인하고 사십시오. 옛사람이 아닙니다.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혈로 값 주고 사서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된 사람인 것입니다. 자유를 얻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승리를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야 내 신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시키는데로 끌려가는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의 사람인줄 알면 "마귀야 물러가라!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이긴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병에서 고침 받았다. 예수로 말미암아 축복받은 사람이 되었으니 저주야 물러가라!" 신분을 알면 신분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알아야 이것을 그대로 믿고 꿈꾸고 입술로 주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그 신분 속에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써 신분이 달라진 것 아닙니다. 믿음으로 신분이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신분이 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옛사람으로 생각하고 옛사람으로 꿈꾸고 옛사람으로 믿고 옛사람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옛날 사람은 지나가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복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늘나라 시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은혜를 받으면
셋째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은혜를 우리가 마음속에 받으면 어떠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은혜는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공짜로 받을 뿐 아니라 보기에도 아름답고 듣기에도 좋고 같이 살기에도 덕성스러운 큰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오면은 가장 먼저 오는 것이 마음에 평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지 않습니까? 풍랑이 대작하여 돛이 부러지고 닻이 부러지고 그들은 물에 흠뻑 젖고 물이 배를 침몰 시키려고 하는 그 위험에 처했을 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일으키니 예수님이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매 즉시로 잠잠해지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인생풍파에 우리가 시달려서 죽을 지경일 때가 많습니다. 고난의 풍파, 가정의 풍파, 생활의 풍파, 인생고 바람에 시달려서 고통당할 때 예수님을 깨워 일으켜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오면 마음속에 평화가 즉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평화는 사람의 힘과 능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평화로써 놀라운 기적적인 평안으로 마음을 잡아 주는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가 잠잠하고 고요해지는 것처럼 마음이 잠잠하고 고요해 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절에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때마다 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야 가정도 평안하고 사업도 평안하고 생활도 평안한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가 결코 우리에게 행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여러분 행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으로써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면 은혜가 와서 평안으로 채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통해서 평안을 주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가 오면 마음에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 있다 사라지지만 예수 믿고 들어오는 기쁨은 끝없이 마음속에 솟아나는 기쁨인 것입니다. 주의 기쁨이 마음속에 넘쳐나면 그리스도의 사랑도 넘쳐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심 걱정이 물러가고 기쁨이 마음에 넘쳐오면 얼마나 행복하고 좋습니까? 주의 사랑 비췰 때에 기쁨 오잖아요. 1절만 불러 볼까요?
주의 사랑 비췰 때에 기쁨 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기도하게 하시며 희미한 것 물리쳐 주의 사랑 비췰 때에 기쁨 오네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명랑하게 비췰 때에 찬송 하네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화평함과 기쁨주네 그 큰 사랑
마음에 주님의 은혜가 오면은 기쁨과 사랑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늘 마음에 찡그리고 있고, 늘 미움이 있고 원한이 있으면 은혜를 못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런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35장 10절에 "야훼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은혜가 오면은 슬픔과 괴로움이 사라지고 영영한 희락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은혜가 와야 마음에 만족과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행복이 은혜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지 세상 것으로 오는 행복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5절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하나님이 오셔야 돈도 만족하고 가정도 만족하고 지위와 명예와 권세도 만족하지 하나님 없는 만족은 있는 것 같으나 없고 거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꾸 돈돈 하는데 돈은 많을수록 타락하고 만족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지위도 여러분 하나님이 없는 지위는 마음에 평화를 빼앗아 가고 탐욕으로 꽉 채워 놓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와야 참으로 모든 것이 돈도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영화도 만족하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를 얻는 지식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돈이든 다른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도 은혜 없으면 배설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어야 효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가 언제나 구하고 찾으면 우리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와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도 내가 뜨겁게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30절로 31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은혜를 받으면 이런 사랑이 넘쳐나지만 은혜를 받기 전에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요, 이웃에게 잘해주는 것이 사랑인데 은혜가 와야 이웃에게 악을 안행하고 이웃을 잘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힘쓰는 이러한 일들은 은혜가 와야 우리의 생활 속에 이루어지는 체험인 것입니다. 은혜가 와야 감사와 찬송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감사하고 찬양을 해도 마음이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은혜가 오면은 마음이 부드러워져요. 생각도 부드러워지고 마음도 부드러워지고 은혜가 오면 손도 보들보들 해지고 발도 보들보들 해지고 몸도 보들보들 해져요. 은혜를 받으면 부드러워져요. 저는 언제나 은혜가 왔는지 안 왔는지 보면 은혜가 오면 마음이 부들부들 해져서 남의 말도 고깝게 들리지 않고 남의 말도 사랑스럽게 들리고 귀하게 보여지고 은혜가 오면 내 목이 부들부들 해져서 목이 마음대로 움직여지고 손가락이 부들부들 손을 만지면 손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어요. 은혜가 오면 얼굴을 만져보면 얼굴이 굉장히 부드럽고 좋아요. 모든 것이 부드러워 진다구요. 영도 부드러워지고 마음도 부드러워지고 몸도 부드러워지고 생활도 부드러워지고 그 부드러움 가운데 감사와 찬송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로 17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은혜가 와야 찬송하고 노래 부르고 감사하고 예수 이름으로 모든 것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 은혜가 없는데 마음이 굳어지고 딱딱해지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없지요. 저는 늘 내 마음속에 기억나는 것은 제가 평신도 때 부산 공설운동장에 미국에서 나온 유명한 부흥사가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밤에 도둑놈들이 와서 천막을 찢어가요. 그런데 나는 그때 평신도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밤 철야를 하면서 그 천막을 지켰습니다. 그때가 늦가을이라 얼마나 춥던지 그때는 담요도 없어서 가마니를 몸에 이렇게 둘러치고서 엎드려 있는데 밤에 철야하는 사람이 한 2,30명 신세가 고약한 사람들만 모여서 철야를 해요. 그런데 아주 무식한 노동자 한 사람이 간증을 나와서 간증을 하는데 나는 그때 그 간증을 듣고 너무나 실망하고 저런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 사람 보면 누가 예수를 믿겠냐고 생각한 것은 왜냐하면 "보이소. 내 말 들어 보이소. 내가 고마 부엌에 와서 은혜를 안 받았는교! 은혜를 받으니까 손이 보들보들 합니데이. 내 손 좀 보이소. 손이 보들보들 하고 얼굴도 보들보들하고 온몸이 다 보들보들 한겨." 여러분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렇게 부들부들해요. 그러면 내가 속으로 그때는 '저런 무식한 놈이 어디 있느냐. 은혜를 받으면 마음에 기쁨이 오고 평안이 온다고 하면 몰라도 무슨 손이 부들부들하고 얼굴이 부들부들 하고 발이 부들부들하고 저렇게 무식한 소리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런 사람보고 예수를 믿겠느냐.' 그렇게 제가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보면은 그 사람이 진짜로 솔직한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인 것을 안 것은 제가 은혜를 받고 보니까 손이 보들보들하고 얼굴이 보들보들 하고 몸도 보들보들하고 마음도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워진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야 부딪쳐도 부들부들 하기 때문에 싸움을 안 해요. 뼈다귀가 있어서 부딪히면 딱딱 소리가 나고 괴로우니까 조금만 부딪쳐도 고함을 치고 싸움을 하지만 은혜가 있으면 부들부들해서 부딪쳐도 부들부들하고 욕을 얻어먹어도 부들부들 하고 불의를 당해도 부들부들 하고 부드러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은혜 없이 우리가 일어나지 않지 않습니까?
<결론>
습관적이고 율법적이고, 의식적인 신앙은 딱딱하고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없습니다. 은혜 속에 살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하고 말씀 읽고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성령 충만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늘 구하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출발하기 전에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 은혜를 주셔서 은혜 가운데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행복과 기쁨과 찬양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시옵소서.' 또 낮에도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도 부르짖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도 은혜를 달라고 부르짖고 남편 만나기 전에 은혜를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래야 안 싸우지요. 아내를 만날 때도 '은혜를 주시옵소서.' 부모를 만날 때 자식을 만날 때도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웃을 만날 때도 은혜를 주시옵소서. 은혜는 우리에게 호흡과 같고 마시는 물과 같은 것입니다. 항상 호흡을 해야 살고 물을 마셔야 사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은 은혜를 마시고 먹고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 가운데 살아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올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구해야 얻지 구하지 아니하면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도 구해야 얻고, 예수님께 구해야 얻고, 성령께 은혜를 달라고 구해야 얻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기도할 때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공짜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값으로 주는 것이 아니므로 믿음으로 구하면 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공로를 세워야 받는 것이면 공로 없으면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돈을 내야 주는 것이면 돈을 안내고는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받는 것 같으면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못 받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선물인 것입니다. 공짜로 준 것입니다. 잘났던, 못났던, 무식하던, 유식하던, 미인이든, 못난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믿기만 하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해서 은혜를 받아 은혜 속에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일매일 은혜 속에 살면 여러분도 행복하고 이웃 사람도 행복하고 하나님도 행복하고 여러분 인생살이가 기쁘고 즐거움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