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계는 별난 동네
이 원 정
하계(下溪)는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진성이씨 집성마을이다. 퇴계선생 셋째 손자로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낸 동암(東巖) 할아버지(諱 詠道) 자손이 500년 동안 대를 이어 살고 있는데, 지금은 안동댐으로 거의 수몰이 되었지만 우리 일가가 사는 마을 중에 조선시대에는 대과급제자가 제일 많이 났던 마을이다. 수졸당(守拙堂-諱 岐)할아버지 현손 14세 세자(世字) 항열의 주손인 세진(世震)과 세사(世師-號 晩花軒) 형제, 또 세진(世震)과 삼종간인 세태(世泰-號 東屛) 등을 비롯해서 전 문중의 대과급제자 59명 중에 하계마을의 급제자가 무려 13명이나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한 마을로서는 전국에서 독립운동가가 제일 많아 정부에서 서훈된 애국지사만도 만도(晩燾-號 響山-殉節), 만규(晩煃-號 柳川-파리장서) 형제 중언(中彦-號 東隱-殉節) 등 20명이 훨씬 넘는 충렬의 마을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 마을의 빛나는 역사적 자랑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살고 있는 하계마을 동후(東厚)네 집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동후는 교리할아버지(號 柳川. 諱 晩煃)의 현손으로 그 집 주손(冑孫)이다. 교리할아버지는 양산할아버지(號 響山 諱 晩燾)의 동생으로 곽종석, 김복한, 류필영 등과 같이 유림단독립청원서(파리장서) 사건에 앞장섰던 분이다. 1970년 경 동후는 안동 어느 초등학교 선생이었고, 동후 끝에 삼촌 희구(異名-효구)도 예안초등학교 선생이었는데, 숙질간의 나이 차이는 일곱 살 정도였다. 나하고 동후하고는 내가 세살 많고, 나와 희구(앞으로는 내앞 형님이라 함)하고 나이 차이는 내가 네 살 적지만, 내앞 형님이 예안초등학교에 몇 해 근무할 무렵 아침저녁으로 만나 친하게 지냈던 탓으로 가까운 대소가 종반 같이 지냈다.
그 때 내앞 형님을 통해 들었던 이 집 숙질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동후가 안동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동후 윗대는 3형제분인데 아버지(諱 升求)와 적은 아버지(諱 忠求)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동후 혼사 문제를 일곱 살 위인 끝에 삼촌이 주관하게 되었고 초행 때도 상객으로 가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영주에 사는 봉화 금씨 댁으로 초행을 가는데, 상객이라 해도 꼭 새실랑 같이 젊어보였던 나이였다. 전통혼례를 하던 당시엔 혼인 이튿날 상객이 떠나기에 앞서 배별 상을 차려놓고 신부가 시삼촌에게 큰절로 인사드리는 예가 있었다. 금씨 문중에서는 하계 만화헌(晩花軒-諱 世師) 좋은 집으로 혼인하게 되어 경사라면서 상객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2칸 장방에 문중 점잔은 어른들이 한방 모여 있었다. 사랑 윗목에 닫혀져 있던 미닫이문이 열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부가 시삼촌에게 큰절을 올리려는 순간이다. 상객이 당황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데, 좌우에서 하는 말이
질부가 시삼촌한테 하는 절이니 앉아서 받아도 되네.
요즘 젊은이들 객지에서 직장생활 하다 보니 법도를 어떻게 알아?
이 때 상객인 내앞 형님이 엉거주춤 일어사면서 말하기를
아닙니다. 질부 절을 앉아 받는 것이 맞지만, 큰집 장질부(長姪婦)라 우리 집으로 오면 사당에 조상을 받들 질부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질부라서 절을 앉아 받기가 뭣해서 그렀습니다.
방안이 조용해졌다. 이렇게 큰 집 장질부를 대단하게 여기며 첫 인사를 받는 광경을 지켜본 금씨 문중 어른들이 자기네 딸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젊은 상객을 보고 어떻게 감동하지 않았겠는가?
모두 하는 말이
고집스럽게 무조건 예법만 이야기 하다가 이렇게 무안할 수가 있나?
맞아 도산 범절이 역시 다르네 그려하면서 수군거리더라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내앞 형님이니 그동안 부형 없는 어린 족하 동후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을까? 또 동후도 그 삼촌을 부형처럼 공경하고 따르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몇 해 후 한번은 내앞 형님이 품종이 좋은 복숭아씨 몇 개를 구해서 봉투에 넣으면서
다음 주말에 밭에 복숭아씨나 묻어볼까 하네.
뭘 하던 밭인데?
밭이 한 떼기 생겼다고 내가 자랑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에 동후가 연전에 저가 월급타서 저축한 돈으로 사뒀던 밭을 날 가지라고 주었다네.
족하인 동후가 사 뒀던 밭을 어떻게 삼촌을 주었을까?이야기는 이러하다. 동후가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여가로 벌도 치고 집안의 농감도 하면서 알뜰히 돈을 모아 논도 사고 밭도 샀다. 동네 사람들은
동후가 일정하고 알뜰해서 저렇게 논도 사고 밭도 사고했다네.
젊어서 남편 잃고 어린 아들 동후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고생한 보람이 있겠어!하며 마을에서 동후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한번은 숙모 삼촌 온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느닷없이 동후가
적은 어머니요! 아무데 제가 사놓은 논을 적은 어머니께 드릴 테니 여가로 가꾸시면 내년부터는 계량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밭은 아제 드리겠습니다.숙모와 삼촌은 펄쩍 뛰면서
네가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네가 열심히 벌어서 산 논밭을 왜 나누어 주겠다는 거냐?
그런 말 하지마라. 너는 큰집 주손인데 큰집은 제사도 많고, 손님도 많아 형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도 네가 장성해서 알뜰히 사는 것만 봐도 우리는 든든하고 고맙기가 말 할 수 없다.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마라옆에서 지켜보던 동후 어머니는 말없이 대견한 아들을 바라보다가 거든다.
동후 생각이 그렇다니 자네도 아주버님도 그렇게 하세요.
동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 논하고 밭은 제가 벌어서 산 것이 아닙니다. 조상님 덕으로 샀던 것이지요.
그게 뭔 말이고? 그 논밭 산지 몇 해나 됐다고 조상 덕으로 샀다고 하느냐?
아제요! 아제나 저나 같은 선생하면서 아제는 왜 땅 한마지기 못 사고 저는 땅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집은 옛날부터 크게 여유가 없어 아제는 기차라고 조상 분재를 하나도 못 받아서 월급 가지고 살아가기도 빠듯해 형편이 늘 그렇지요. 그러나 저는 그래도 조상 덕에 집도 있고 엇가리 밭도 좀 있어서 제 봉급을 조금씩 모울 수가 있었기 때문에 밭도 사고 논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상 덕이라면 조상 덕이지요. 그러니 저한테는 고마워 할 것도 미안해 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내앞 형님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의 전부다. 가끔 친구들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이집 숙질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내앞 형님도 십여년 전에 객지 문경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받았던 감동을 많은 분에게 전하고 싶어서 40년 전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내앞 형님(희구))과 풍산 형님(진구)은 동갑이고 촌수는 4종간이니 열촌이다. 풍산 형님은 부포 우리 바로 옆집 마골어른(號 笑溪公 諱 琴性洙) 생질이다. 풍산 형님 역시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동생 두원이는 지방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풍산 형님(애국지사 丕鎬의 자) 계실 때는 3․1절이나 광복절 때 기념식 행사장에서 원촌 동만이 하고 셋이서 자주 어울렸는데, 지금은 두 분 다 멀리 가버리고 말았다.
한 20년 전 풍산 형님 딸이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는데,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왔다. 신랑도 서울대 같은 과를 졸업하였다 하고 주례는 신랑 신부의 스승이라 했다. 청량리 대왕코너 결혼식장으로 갔더니 양쪽 혼주, 주례, 신랑이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한참 후 식이 시작된다는 사회자의 안내 방송을 듣고 식장으로 들어가니 사회를 보는 젊은이 역시 두루마기를 갖춘 한복을 입고 사회를 보고 있었다. 고향하고 관계돼서 모두 한복을 입지는 않았을 테고 국문학을 전공한 스승과 제자들이 상의해서 결정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색다른 장면이었다. 신랑 입장에 이어 신부가 입장하는데, 신부 역시 고운 치마저고리를 입고 입장하는 것이 아닌가? 또 의아한 것은 신부가 입장할 때 혼주인 풍산 형님이 손잡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삼촌인 두원이가 신부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옆 좌석의 알만한 하객에게 물어봤다.
신부는 왜 혼주인 풍산 형님이 안 데리고 들어오고 삼촌인 두원이가 데리고 들어오지?
이 사람! 그 집이 하계 어떤 집인가?
하계는 본래 혼주가 안 데리고 들어오고 삼촌이 데리고 들어오는 법인가?
전통 혼례를 할 때 신부가 원삼(圓衫)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툇마루에 나서면 오빠나 삼촌이 안아서 예석에 세우는 법이거든…… 그래서 그럴 꺼야!듣고 보니 그럴 상 싶게 들렸다. 혼주가 내 딸 데려가라고 예석에 데리고 나오는 것 보다가는 삼촌이나 오빠가 손잡고 들어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풍산 형님보고
예식장에서 하는 혼례인데, 신부에게 드레스를 입히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이사람 저사람 입던 드레스 돈 주고 빌려 입히는 것 보다가는 제 옷 입히는 것이 낳지 않겠느냐?고 했다. 요즘 젊은이들 들으면 지금 어떤 세상인지도 모르는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다음 이야기를 한 가지 더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풍산 형님 4종제 되는 원주(源周)가 몹쓸 병이 들어 서울 모 대학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있었던 일이 있었다. 원주는 한문학을 많이 공부한 탓으로 대구 모 대학의 교수로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장기간 입원하게 되니 가족만이 밤낮 구료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렇다고 돈이나 주고 생면부지의 남에게 환자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때 풍산형님이 서울에 와서 직장 다니는 하계동네 청년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원주 병이 위중하니 앞으로 얼마나 입원해 있어야 될지 걱정이다. 종수씨 혼자 매일 병원에서 간병하다가는 환자보다 먼저 쓰러지실 것 같다. 그러니 너희들이 하루씩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해 간병을 해야겠다.그 말을 듣고 있던 좌중의 청년들은
그렇게 해야지요. 저희들끼리 각자 회사 사정을 고려해서 순번을 짜겠습니다.하고는 월차휴가를 내서 돌아가면서 간병을 했다고 들었다. 하계 파조 동암 할아버지 자손끼리라 하면 먼 촌수는 근 30촌이 되었을 테고, 만화헌(晩花軒)할아버지 자손끼리라 해도 근 20촌이 될 터인데, 풍산형님 말 한마디에 청년들의 마음이 그렇게 모아지다니? 이런저런 회사의 사정을 핑계하여 빠지려고 하지 않고……
마을은 고사하고 우리 대소가에서는 풍산 형님같이 나서서 그런 발설할 사람도 없지만, 비록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군소리 없이 따를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청년들은 돌아가면서 오늘 저녁부터 내일 저녁까지 24시간 간병을 맡아 정성껏 구료하고 다음 당번이 오면 24시간 동안 일지형식으로 작성된 하루 동안의 경과, 예를 들면 소변은 몇 시에 봤고 잠은 몇 시에 들었다가 몇 시에 깨었고 변의 빛깔은 어떠했고 이런 것을 기록해서 교대하는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고 한다. 말하자면 간병일지라고 하면 되겠다. 가끔 회진하는 의사선생이 이 일지를 달라고 해서 펼쳐보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머리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 아닌가?
오늘 이미 돌아가신 내앞 형님, 풍산 형님 원주 동후 생각이 나서 옛날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았다. 본 것도 있고 들은 것도 있지만, 모두 있었던 일일 것이다. 하계 마을 한 동네의 이야긴데, 이야기에 나오는 분들이 하나같이 교직에 몸담아 있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첫댓글 집안 내력을 이래서 보는갑다요. 혼사에 집안 들먹이는 분들 많든데....어떤 분들은 재력이 내력이라 하드만.^^* 잘 지내지? 진작 인사를 해야 하는데 사정이 좀 있어서, 부산 친구들 한테 얘기 좀 해주면 안될까? 많이 고맙고 미안해 하드라고.....
대단하구만. 그런 집안내력은 어떻게 마을사, 안동의 역사 같은데 기록으로 남기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무실 류씨들도 집안 내력 기록한것 보면 대한 할건데 동네 역사부터 회장은 거기에 포함이 안되나 같은 소속이니까
한참 오래전 옛날 이야기 듣는것 같았네, 우리 어릴때는 이런일 있었는데,.... 친구들 모두 잘 있제? 계희는 며느리 인사도 받고 좋아 죽겠제?ㅎㅎㅎㅎㅎㅎㅎㅎ 웃음소리 부산까지 들린데이.. 살살 웃어라,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