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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수12 원문보기 글쓴이: 행천(杏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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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근대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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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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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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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7월, 성직자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벌인 논쟁은 루터가 교황의 눈 밖에 나는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파문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며, 에크가 주장하는 ‘로마 교회에 대한 순종(Romana obedienia)’보다 자신의 입장이 더 기독교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인 교리라고 주장했다. 에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불온한 주장을 교황에게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은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에서 앞으로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동료 모두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루터는 12월 10일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 교황으로부터 영원한 추방을 선고받았다.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파문은 루터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루터의 마음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면죄부의 오용으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루터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 의회는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제국에서 추방당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그는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로써 그는 성서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독일어 통일에까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이끄는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 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미사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 성상(聖像) 파괴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이 개혁 운동의 논리적 귀결인 것은 분명했지만,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히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1522년 ‘기사(騎士)의 난’과 농민전쟁(1524∼1525년)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부터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 연하의 전직 수녀와 결혼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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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 6월 13일 루터는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의 결혼도 종교적 신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 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년)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특히 농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혼인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강한 신념은 이런 염려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자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처음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농민전쟁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 체제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고 영주들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종말에 하느님이 오면 인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루터는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 것이 사탄에게 대적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루터의 이와 같은 생각이 개신교 성직자들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았음은 물론이다.
1530년대에 이르러 루터는 누구보다도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대중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엄청나게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몇 년 사이에 평생 쓴 편지의 3분의 1을 쓸 정도로 많은 편지를 써야 했으며, 생애 마지막 날까지 분쟁을 중재하느라 분주했다. 마침내 온 생애가 혁명 그 자체였던 사나이 마르틴 루터는 1546년 63세의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장례식에서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 필립 멜랑히톤은 찬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터는 구약시대부터 교부들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스승과 예언자 반열에 드는 위대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