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준의「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리뷰

단언컨대 결말은 없습니다/임재정                        -김희준의「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리뷰     인간은 살아 있는 매순간들을 이어 저마다 하나의 독립적 서사가 된다더군요. 창가에서 하루 종일 바라본 바깥처럼 변화무쌍하고, 가깝지만 너무 멀어서 유리창 너머의 ‘저쪽’에서 일종의 차원이 되기도 한다죠. 여기서 바라보는 ‘저쪽’은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며 소나기가 지납니다. 그런 까닭일 거에요. 완결된 서사는 길이를 따지지 않고, 넓이에 구애받지 않으며, 마침내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서사는 탄생하죠. 이것을 신생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한 인간이 소멸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누군가가 기억하는 동안만큼 새로운 생을 다시 사니까요. 오늘 나는 오래 망설이던 끝에 김희준이라는 완결된 서사 앞에 마주 앉습니다. 시를 통해 그가 맞고 보낸 현실 일체를 끄덕이고 받아들여 내면화할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이제 나는 그가 새롭게 펼쳐놓은 신생의 공간 어디쯤에서 며칠을 보내야 합니다. 불안은 내게서 설렘으로 바뀌고 그가 꾸던 몇 가지의 꿈과, 부르던 이름들과, 사랑하던 것들을 꿈꾸고 맞이하고 보내며 그를 앓게 될 겁니다. 결코 그가 될 수 없기에 나 중의 가장 무거운 나인 채로 말입니다.   김희준은 시인이었고, 숱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쫓으며 살았습니다. 태생적으로 시인은 끝없이 질문하는 자가 되죠. 질문은 시인의 자질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해서 좋은 시인은 집요하게 질문하고 그 이후의 과정을 천착하죠. 자기만의 울타리가 있지만 타넘기 일쑤고요. 과학보다 복잡하고 철학보다 과감합니다. 내·외가 없고 자·타의 경계도 사라집니다. 이제 그가 생전에 펼쳐낸 시를 열고 들어갑니다.  서사, 혹은 김희준의 신생을 품은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의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그의 질문이 시작되는 지점은 자신의 바깥, 즉 외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외부란 게 대부분 그렇습니다. 내부인 상대를 배려하지 않으려 하죠. 끊임없이 파도로 밀려와 시인의 기슭에서 부대낍니다. 부서지면서 부숴버리기도 합니다. 그토록 단단하고 커다란 바위는 마침내 모래가 됩니다. 그의 기슭에서 모래 한 줌을 손에 담아 들여다봅니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배경으로 펼쳐내는「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이나 목재인형 피노키오의 제작자를 끌어들인「제페토의 숲」등은 그의 기슭에서 읽는 모래들의 구체적 내용이 됩니다.  그의 시선은 동화로 향해 있습니다. 동화의 세계는 늘 일렁이는 물속의 일그러진 현실 세계를 담아내죠. 동화가 알레고리를 담보로 인간의 삶을 반추하는 것이라면, 그의 시들은 동화를 알레고리로 자신을 비춰보려는 물속이 됩니다. 거기서 일렁이는 것들을 만나 함께 흔들리죠. 그가 던진 질문의 내용이며 과정들입니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크레파스를 사오셨다 다음날 학교에서 손등을 맞았다 도화지에 30장의 내가 크레파스를 든 채 울고 있었다 누구는 추상적으로 누구는 피상적으로 내 울음을 그렸다 오후가 사실적이었으나내가 가진 색은 섞이지 못하는 고질병을 앓았다 나비와 아버지를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다 그들은 평면적이었으므로 마당에 핀 수국이 파랗게 컸다 크레파스가 색을 담아내려다 부러졌다 아버지 손은 파랑이었다 안방에는 바닷물이 출렁였고 물의 혈관이 만져졌다 질감이 거칠다가 따뜻하다가 구도 없는 그림이 역동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의 언어를 이해한 자가 살갗을 만질 수 있다는데 뜻을 잘못 해석하여 호된 물질을 당했다 이른 아침에 떠난 파도는 중력이 없다 눈치 없는 게가 옆으로 저미는 바람을 맞다가 기울게 세상을 읽어낸다 나비가 입체적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다                                                                             「인디고 비행」 전문.   위 시는 푸른 쪽빛의 세계 ‘인디고’를 통괄하려는 여리디여린 “나비”의 무엇에도 “잘 섞이지 못하는” 불편한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동요(파란 나라, 아빠와 크레파스)를 스위치로 활용해 이미 다 자란 아이인 화자의 등에 달린 태엽을 감습니다. 두 발을 대신하는 “크레파스” 때문일까요. 화자는 “학교에서 손등을 맞”고, “아빠는” “바닷물”처럼 거칠게 출렁입니다. 가변성으로 가득한 크레파스가 꺼내놓는 세계를 기성세대인 선생님이나 아빠는 불편해합니다. “파란”색으로 가득 찬 나라는 이제 넓고 깊은 물의 세계인 “바다”로 바뀝니다. 물은 화자를 둘러싼 전체이며 추상인 동시에 피상인 곳이기도 하죠. 달아날 상대이면서 도망칠 곳이기도 합니다. “추상”과 “피상”을 날개로, 울음을 몸으로 나비가 날아오릅니다. “평면적”인 그림 대신 “입체적”인 몸이 되려면 생각 아닌 도움닫기가 필요할 겁니다. 다행히 화자에겐 기성인 것들에게 반기를 드는 결핍들을 연료로 쓸 수 있습니다.  「인디고 비행」은 쪽빛이라 부르는 색의 질감을 통해 경직된 이 세계를 흔들어보는 독특한 시선을 동반합니다. 동요에서 발원하고 날아오르며 어른들의 세계에 연착륙하죠. “비행”이란 말이 예감하듯 연약한 도전이 거칠고 험한 바다 위로 이어집니다. 아이들이 늘 달아나려는 것은 여기가 지나치게 견고하기 때문일 텐데, 그럼에도 여기를 피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기껏「에덴의 호접몽」등을 통해 나비가 되어보는 정도랄까요. 김희준이 다루고 있는 동화(동요)의 세계는 딱딱함을 통과하려는 여린 떡잎들의 상처를 어루만집니다. 그의 표현을 빌면 끌어안고 동화되는 대신 “기울게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비”를 동반하는 그의 관찰자적 시선은 대상에게 끌려간 마음으로 말미암아 견자적 시선이 됩니다. 시적 화자가 사라져도 나비는 남을 만큼 많고 강렬합니다. 한 무리의 나비는 김희준의 시집을 공중에 띄우는 힘으로 작용하죠. 시집을 가로지르며 징검돌을 놓듯, 거론하기 힘들 만큼, 여러 편의 시에 나비가 등장합니다. 제비처럼 날렵하진 않지만 끊임없이 비틀거리며 지상과 공중을 잇습니다. 화자의 심정을 대신하고 독자를 이끌죠. 둑을 가득 채운 물처럼 위태롭지만 아름답습니다. 현실에서 꿈으로 날아오르지만 꿈을 살지는 못하니까요. 그의 나비들은 그렇습니다.  시인으로부터 날아오른 나비가 내려앉는 곳은 시인과 바깥의 경계입니다. 결핍의 주체들이 우르르, 나비를 뒤따르죠.「‘습’하다」에 등장하는 “습하고 가려운 사타구니”를 가진 화자나「알비노 인간」의 “멜라닌 색소”결핍을 앓는 가족 등은 구체적으로 나비가 빨대를 꽂았던 지점들이죠. 이쪽도 저쪽도 될 수 없는 경계인들입니다. 신화 속의 장소와 인물들, 영화 속의 주인공들도 그의 결핍과 꿈에 함께합니다. 이럴 때의 꿈은 앞날의 불편에 가 닿기보다는 유년기로의 회귀하게 됩니다. 수만 갈래 찢어진 하나의 길을 따라 H로 떠날래 빌어먹을 부모를 찾아 한방 갈겨줄래 자유의 여신상에 찔려죽어도 모를 양심과 코스트참나무로 뻔뻔한 낯짝을 패줄래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줄 알았던 첫 비행에 대해 원망할래 ……(생략)…… 빵 사이에 로스앤젤레스를 넣어먹으며 나를 달랬다 어금니로 씹히는 도시와 비둘기, 금발의 아이들, 찌그러진 나라를 위장에 채웠다                                                                         「유년스케치」부분.    여기 홀로 빈 방에서 “전기회로에” “누군가 뿌려놓은 과자 부스러기”를 따라가며 영화<헨젤과 그레텔>을 시청하는 유년의 화자가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텍스트의 바깥에 머무는 것과는 다르게 김희준은 ‘시청하는’ 행위를 넘어 “전기회로에” “누군가 뿌려놓은 과자 부스러기”를 뒤쫓듯 이야기 속으로 직접 뛰어들고 주인공들과 함께 합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겪는 갈등과 고통은 오롯이 화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함께 울고 웃고 분개하는 동일시 현상이 벌어지죠. 헨젤과 그레텔처럼 화자는 이국 태생의 한 아이가 되어 남매를 버려둔 “찌그러진 나라”인 “모국”을 성토합니다. 빵조각 삼아 물어뜯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시는 묵직한 반전을 펼쳐 보입니다. 요망한 남매, 수만 갈래로 찢어져야 할 건 내가 아니라 헨젤과 그레텔이어야 했다 콘센트를 열고 머리카락을 끼운다 내 유년이 또 다른 곳으로 입양되고 있다                                                                           「유년스케치」부분.   화자가 자신과 동일시하던 “헨젤과 그레텔”을 “요망한 남매”라 칭하며 밀어내는 부분이 그렇죠. 현실의 화자가 가진 “외로움”을 그들이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까닭일까요. 이런 ‘꾸려진 세계’를 함께 할 수 없는 상태의 감정을 시인은 “웃는 낯으로 사라지는 빌어먹을 모국”이라고 구체적으로 명명합니다. 시적 화자의 입을 빌려 “콘센트를 열고 머리카락을 끼”운 형태의 “입양”을 고백하는 부분에 이르면 시인의 놀라운 표현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유년스케치」는 시인으로부터 날아오른 나비가 찾아 헤매던 것들이 과거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새삼 일깨웁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유년은 시집 속의 시 제목만 훑어봐도 쉽게 동화와 신화, 성경 등을 통해 몸집을 키우고 지금 여기에 당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의 유년기가 그러하듯 섭취한 모든 문화의 주인공이 되어 새로이 플롯을 짓고 처지를 재구성합니다. 재구성된 플롯 속의 시인은 언제나 외롭고 불편합니다. 그것이 합당한 것임을 주장할 필요성도 생기죠. 플롯 속의 인물들은, 파스를 붙이려 엉덩이 드러낸 아버지를 철썩 때리다가「‘습’하다」부분.엄마와 나는 서로를 핥으며 멜라닌을 채웠다「알비노 인간」부분.잊어버렸니 누나야 나는 혼자에 병적인 걸                                                                           「소년기의 끝」부분. 인용에서 보듯 애초의 배경이 가진 인물인 동시에 ‘아빠, 엄마, 누나, 언니, 나’의 얼굴을 함께 쓰고 입체적인 표정을 지으며 일그러집니다. 형식적으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짓지만 가족의 카테고리 밖에 위치하죠. 나는 나인 동시에 모든 것이 됩니다. 변명일 수도 있지만 기존의 사회적 규율을 뛰쳐나가거나 달아나기 적당한 환경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비”는 이럴 때 어디선가 날아듭니다. 시인에게 위태롭지만 매력적인 날개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가냘프지만 유년의 화자에겐 아주 적당한 장치가 되죠. 이 일련의 과정들을 자기 확인을 위한 성장통으로 이해 할 수 있다면, 끈질기게 자기의 타자화를 추구하고 그 과정 속에서 그림자로 얼룩진 자신을 끔찍해하는 시적 화자와도 조우하게 될 겁니다.  우연한 만남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세계를 직조하고 무늬의 편성권을 가진 창조자, 구체적으로는 시인이니까, 적재적소에 누군가를 호명할 수 있습니다. 시의 목록들만 얼핏 훑어도 김희준이 인식하는 세계는 편광기를 지나온 빛처럼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지도로 표기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세계죠. 심지어 무감한 평면의 벽돌들을 끌어당겨 3차원의 세계로 환원하는 놀라운 마술도 보여줍니다. 편광기를 지나 흩어진 것들이 한 곳으로 쏟아집니다. 당신은 투렛투렛 웃습니다 고딕을 닮은 구름이 정결합니다 단조로운 비가 내립니다 몇 해 전 잃어버린 큐브 조각이 섞여 있습니다 큐브가 깨지면 말을 반복하는 누나, 문장이 분절되는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다각다각 빗방울이 단단해집니다 구름에 담긴 우울을 폭우의 뼈라 이해하기로 합니다 골목에는 검은 뼈를 드러낸 우산이 발에 채입니다 블록이 쌓입니다 밑바닥에 잠긴 누나가 젠가에 갇힌 하루를 보냅니다 막대기가 된다면 벌칙의 이름은 누나입니다 제 몸을 조립하는 누나에게 밀도 높은 저녁이 쏟아집니다 분리불안을 앓는 레고가 다리에 붙습니다 의족은 땅을 딛는 방법이 서툽니다 누나의 틈을 엿봅니다 퍼즐로 만들어진 병실과 링거는 아래에서 위로 굳어갑니다 여름은 때때로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먹구름이 고딕양식으로 완성될 때 퍼즐 조각을 숨겨두어야 합니다 쏟아지는 곳마다 누나의 흉부가 패입니다 벌어진 몸을 초소형의 큐브조각이 채웁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밤이 지날 때 달은 허물어지고 당신은 투렛투렛 우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테트리스 적응기」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더하기(테트리스)와 빼기(젠가 게임) 사이에 머뭅니다. 현실의 다른 표현이 이럴까요. “당신”과 숨은 ‘나’와 “누나”가 있고, 게임은 큐브로 된 세계라서 수시로 조합을 달리하며 장소를 바꾸죠. 구름을 품은 큐브가 비로 쏟아집니다. 골목과 젖은 우산도 보이는 군요. 게임의 규율은 여전히 실존을 묻는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그 공간을 살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겠죠. 역할극처럼 등장인물들은 여러 번 배역이 바뀝니다. “당신”은 가장 힘이 세고 울타리를 이루는 자 입니다. “누나”는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는 동시에, 떨어지는 큐브조각들로 가득찬 체제의 바닥이자 병실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벌칙의 이름이기도, 큐브 조각에 흉부가 “패”이기도, 패인 흉부를 채우기도 하는 “입체적인” 동시에 모두의 상처로 남죠. 이 이상한 “플라스틱으로 된 밤”의 질서를 화자인 ‘나’는 숨어서 훔쳐볼 뿐이고요.  구조화한 게임의 세계에서 개인은 체제의 쓸모에 복무해야 하며 체제에 의해 차용됩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 이상한 세계는 기시감을 넘어 현실을 견디는 우리에게 고딕의 큐브가 되어 짓쳐듭니다. 다시 짚어 보죠. 달아날 수 없는 자의 표상으로 모두의 아픈 “누나”가 있군요. 떨어지는 큐브에 깔려 바닥이 되거나 병증과 치병, 환후를 감당합니다. 누나에겐 ‘나’를 둘러싼 “당신”이란 세계, 혹은 체제의 입장도 얹혀 함께 합니다. 시의 도입부와 말미를 움켜쥐고 “투렛투렛 웃”는 폭력으로, 날씨나 공기처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에워싸인 채 말이죠. 아련하지만 시인의 고백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제목이 그걸 넌지시 일러줍니다. “테트리스 적응기”라고 말이죠.  “적응기”라는 표현이 물고 있는 세계는 무섭고 섬뜩하며 아름답습니다. 김희준의 시세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명도 없이 무감한 듯 시인은 조근조근 폭력적인 세계를 밀어갑니다. 등장인물들은 폭력의 주체이면서 피해자가 됩니다. 숨어있는 화자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적응기”이므로 게임이라 부르며, 빤할 게 틀림없을 결말을 견뎌야만 하죠. 나비를 불러 비틀거리며 달아나도 그만일 텐데, 애석하게도 큐브로 된 비가 쏟아지는 날씨로군요. 시 내용에 의하면, 플라스틱으로 만든 밤이 지날 때 달은 허물어지고 당신은 투렛투렛 우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테트리스 적응기」 부분. 끝내 “투렛투렛 우는 방법을 터득”하고 “적응기”를 마쳐야 합니다.   시인은 늘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죠. 꿈은 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쉬 모서리가 허물어지고, 날려 보낸 나비는 되돌아들기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내 자리 한 칸 없다는 사실이 나를 밤으로 내”모는 「평행세계」의 일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이상하게도 김희준의 시들이 부르는 낯선 이름들은 대체로 유년의 추체험들로부터 비롯됩니다. 보고 듣고 읽은 것들이 쌓인 커다란 창고처럼 방이 있고, 유년기의 아이가 성년이 된 시인을 찾아오거나 시인이 아이를 찾아 떠나곤 하죠. 이때의 교통수단을 나비라 부르기로 할까요.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이 보입니다. 덜컥, 나는 그가 됩니다. 성년의 시인과 유년의 아이는 어디선가 ‘샴’처럼 하나의 몸으로 겹쳐질 텐데요. 김희준의 서사는 이 부분을 설원의 백지로 남겨 놓았습니다. 누군가는 이 백지에 문을 그려 넣기도 하겠죠. 문 열어 또 다른 세계의 나를 만나기도 할까요?  때마침 초인종이 울리는 군요. 이제부터 우리, 이 이야기의 문을 함께 열어보기로 하죠. 단언컨대 결말은 없습니다. 시는 과정이 전체인 장르니까요. 아뇨, 설원 끝으로 가요켄과 메리 나무 앞에 세워주세요 초인종이 울린다 투명하고 세속적인 밤이 타닥인다 서력기원부터 쌓인 첫눈이 유리에 가득하다 닿는 건 가져가렴, 나는 가만히 젖는다 말린 종이처럼 눅눅해진 나무의 체질처럼 첫눈이 되고 싶어 깍지를 낀다 신기루도감에는 잠들지 않은 순록이 세기를 기다린다 몸을 포개볼까 고매한 책갈피가 될까 서기를 기록할까 세상 끝으로 가면 녹슨 율령을 새긴 내가 물기 없이 말라가겠다 춥진 않니? 초인종이 울린다 망설이다가 어항에 눕는다 물비린내가 난다 어항은 물고기를 믿지 않는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물이 오래 고인다면 젤리가 될지 모르지 말캉한 몸을 가진 켄과 메리는 하나의 길을 찾았을까 통조림으로 저녁을 때우고 그 안에서 잠을 잔다 빈 캔을 뒤집으니 젤리 속에 갇힌 내가 떨어진다 첫눈이 따뜻하면 좋겠어 그리하여 어항이 따뜻하면 좋겠어 금붕어가 따뜻하면 좋겠어 초인종이 울린다 투명하고 세속적인 밤이 시작될 때 나는 나를 찾고 나를 맞이한다 안녕, 위태로운 피부가 깨진다 밤이 말라간다 극지의 오로라가 몸을 펼친다 근사한 지느러미가 결정체로 남는다면 나는 설원의 행성이 되어야겠다 불온한 내가 나를 기다리는 곳에서, 빙하의 결말이 첫눈이라는 말, 순록은 결빙된 입김에서 달리고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자 내가 서있다 우리의 탯줄과 켄과 메리 나무 아래 두고 온 이름을 생각한다 내 뒷모습은 어땠었나 고갈되지 않은 두 개의 낙원이 팽창한다 낮과 밤이 일시에 요약된다 초인종이 울린다                                        「기형적으로 순환하는 너와 나의 설원, 그리고 파라다이스 혹은 샴쌍둥이」전문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