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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삿 1:1-10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삿 1:1-10 / [유다와 시므온 지파의 출전] 여호수아가 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이렇게 여쭈었다. `우리 가운데에서 어느 지파가 제일 먼저 가나안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야 할까요?' 2) 그러자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유다 지파가 올라가 싸워라. 내가 이미 그 땅을 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 주었다!' 3) 그때 유다 지파 사람들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시므온 지파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번 싸움에 우리 지파가 제일 먼저 제비에 뽑혔지만 우리 함께 올라갑시다. 다음 번 싸움에서 그대들의 지파가 제비 뽑혀 싸우러 올라갈 때는 우리도 함께 싸우러 가겠소' 그래서 시므온 지파 사람들은 유다 지파 사람들과 함께 싸우러 올라갔다. 4) 유다 지파 사람들이 싸우러 올라가자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셔서 베섹에서만 1만 명을 쳐죽였다. 5)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 연합군은 마침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 이김으로써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쳐죽였던 것이다. 6) 아도니 베섹은 그곳에서 도망을 쳤다. 그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유다와 시므온 지파 연합군은 그를 뒤쫓아가 사로잡아서는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렸다. 7) 그러자 아도니 베섹이 괴로워하면서 `내가 전에 칠십 명이나 되는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내고 내 상다리 밑에서 부스러기나 주워먹게 하였더니 이제 하나님께서 내가 한 짓을 그대로 내게 갚으시는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아도니 베섹은 예루살렘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 8)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정복하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그 성읍을 정복하고는 그곳 주민들을 칼로 쳐죽이고 성에 불을 질렀다. 9) 그런 뒤에 다시 내려가 산악지대와 남부 지역과 저지대 등 유다 온 지역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과 싸웠다. 10) 그러고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으로 쳐들어갔다. 이 헤브론을 옛날에는 기럇아르바라고 불렀다. 그곳에서는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 부족을 쳐죽였다.
뛰어난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a)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고 시작하는 사사기의 첫 문구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는 이전의 책인 여호수아 1장 1절의 문구를 생각나게 합니다. 여호수아에서도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 시작해서 모세의 후임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사명을 이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훌륭하게 분배하여 자신의 직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직면한 문제가 생겼는데, 모세의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듯이, 여호수아의 뒤를 이어서 누군가가 훌륭한 지도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 여호수아가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뚜렷한 지도자가 없는 이스라엘. 그래서 이전의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에 비해 작은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을 사사로 불렀습니다. 그렇게 사사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1b-10) 여호수아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는 없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남아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대부분을 정복하고 이방 민족을 내쫓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이방 민족이 있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구약시대 전반에는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어떤 방법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합당히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고, 이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위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올라간다’라는 것은 단순히 산을 오를 때에 쓰는 말이 아닙니다. 싸움터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은 아직까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올바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 7절에서 “여호와를 섬겼더라”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므온과 함께 올라간 유다는 예루살렘 인근 지역을 쳐서 점령하고, 산지와 남방과 평지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적용: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습니다. 믿음을 점검하고 하나님과 소통하여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성령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 마음속으로부터 늘 감사와 찬미가 흘러나오고 전도의 불길과 기도가 열심히 타오르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성령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영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만이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 설 교 >
행동하며 은혜를 구하라
이한규목사 / 사사기 1:8-13
< 유다 지파의 정복전쟁 >
살다 보면 전환기를 만난다. 전환기에는 하늘의 지혜가 필요하기에 그때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새로운 선한 싸움을 결단하라. 이스라엘이 “누가 먼저 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울까요?”라고 묻자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라고 하셨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전쟁을 통해 이미 상당한 땅을 확보했기에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처럼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때 그들은 새로운 전투를 결단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전진하지 못하는가? “이만하면 됐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전환기에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 “이제 의심하거나 주저하거나 후퇴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리라.”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선택도 잘해야 하지만 선택 후에 머뭇거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베섹을 점령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당시 예루살렘은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물론 예루살렘을 쳐서 일시적으로 점령하긴 했다(8절). 그처럼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유다 지파는 계속해서 가나안 정복전쟁을 왕성하게 추진해서 예루살렘 인근 산지와 남방의 네게브 광야와 평지에 있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다(9절). 그리고 헤브론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쳐서 거인족 아낙의 세 자손인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다(10절).
헤브론은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위치한 해발 910여 미터 정도에 있는 고도로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매장된 곳이다(창 23:19). 가나안 정복 전쟁 후에는 이스라엘의 여섯 도피성 중 하나가 세워졌다(수 20:7)). 또한 다윗의 통치 초기에는 7년 동안 유다의 수도 역할을 했다(삼하 5:5). 헤브론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파괴되고 헤브론 왕 호함도 죽임 당했는데(수 10:1-27,36,37), 그 후에 아낙 자손들이 헤브론을 재탈환했다가 유다 지파가 그들을 재정복했다(수 15:13-14).
< 행동하며 은혜를 구하라 >
유다 지파는 헤브론을 점령한 후 더 나아가서 드빌 거민들을 쳤다(11절). 드빌은 헤브론의 남서쪽 약20km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인 요충지로서 원래 이름인 기럇 세벨은 ‘책의 도시’란 뜻으로서 그곳에 큰 문서 보관 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루살렘 남서쪽 아래로 베들레헴, 헤브론, 드빌, 브엘세바가 한 축으로 이어지는 가나안 요충지들이다. 브엘세바 다음에는 네게브 광야가 펼쳐진다.
드빌을 칠 때 유다 지파의 수장인 갈렙은 드빌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자신의 딸 악사를 그의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다(12절). 고대의 포상 관습을 이용해 갈렙은 믿음 좋은 용사를 사위로 맞이하려고 한 것이다. 그때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드빌을 점령해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13절). 본문 13절만 보면 갈렙의 아우가 ‘그나스’인지 ‘옷니엘’인지 명쾌하지 않다.
갈렙의 아우가 그나스라면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가 된다. 만약 갈렙의 아우가 옷니엘이라면 친동생은 아닌 이복동생이었을 것이다. 갈렙은 여분네의 아들(민 13:6; 수 14:14)이지만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갈렙과 옷니엘이 친족이란 견해도 있다. 민수기 32장 12절을 보면 갈렙이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옷니엘이 ‘갈렙의 아우’인지 ‘갈렙의 조카’인지 ‘갈렙의 친족’인지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갈렙의 조카’란 견해가 비교적 많다.
옷니엘이 갈렙의 조카라면 옷니엘과 악사는 사촌 남매간이다. 옷니엘이 악사를 무척 사랑해서 악사와 결혼하려고 생명을 건 전투를 치렀다. 그처럼 좋은 것을 얻으려면 헌신하고 땀을 흘려야 한다. 땀을 흘리고 얻은 것은 소중하게 여겨진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고 어렵게 얻은 것은 오래 남는다.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했어도 그 약속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라.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행동이 없는 은혜는 가짜 은혜다.
약속된 복을 누리려면
삿 1~2장 / 최영기목사
제가 은퇴하기 전에 성경 전체를 설교했으면 하는 소원을 갖고 구약과 신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매번 설교에 본문을 많이 잡아야하기 때문에 신약을 상고할 때에는 매주 1장, 구약을 상고할 때에는 2-5장을 상고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서 사사기와 룻기를 상고합니다. 신약을 상고할 때에도 그렇지만 구약을 상고할 때에는 목자에서 성경 공부 시간을 꼭 가져야합니다. 돌아오는 주일에 상고할 부분을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설교 시간에는 목장 성경 공부 시간에 본문을 이리 공부한 것으로 가정하고 본문 내용은 거의 다루지를 않고 생활 적용만 다룹니다. 분량이 많은데 주어진 설교 시간에 본문 내용까지 설명하려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는 모세의 인도로 애급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넌 후부터 이스라엘이 왕국을 건설하게 되는 약 300-400년간의 시대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부족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습니다. 이러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운 사람이 사사입니다(2:16). 사사기는 영어로는 judge 즉 재판관이라고 되어있고 구교와 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에서는 판관기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백성의 구원자이면서 백성들의 시비를 가려주는 통치자라는 의미이겠습니다.
Ⅰ. 약속에 따른 조건을 만족시킨다
오늘 본문인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주민들과 전쟁을 벌여서 땅을 점령해 나가는 과정이 설명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어떤 전쟁에서는 부분적으로 승리했고 어떤 전쟁에서는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당연한 것 같은 이 결과가 사실은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출 3:17). 결과적으로는 받지 못한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는 많은 경우에 인간이 해야할 몫이 가정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에는 빈 땅이 기다리고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승리하여 정복하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와 상관없이 무조건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도 있지만 대부분의 약속은 실현이 되기 위하여서는 사람이 하여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이 해야 할 부분을 하면 약속이 실현되는 것이고 해야 할 부분을 하지 않으면 약속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믿으면 구원 얻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약속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한 복을 누리기 위하여서는 사람이 하여야할 몫을 하여야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33절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한 이러한 약속이 성취되기 위하여서는 앞부분, 즉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조건이 만족되어야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의 몫을 하여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였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 몫을 하여야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고 생각했다가 약속을 이루지 않으신 것 같으신 것처럼 느껴져서 하나님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분이 있으면 오늘 두 가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약속을 하셨는가? 하나님이 약속도 하지 않으셨는데 그런 약속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실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약속에 자신이 해야할 몫이 포함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자기 몫을 찾아서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분명히 약속하셨으면 내가 나의 몫을 할 때에 반드시 이루십니다.
Ⅱ. 하나님이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해서 승리를 하기는 했지만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주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우상 제단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2:1-2).
우리는 원주민을 철저하게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생각도 들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명령을 내리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닙니다. 평화롭게 잘 사는 거민들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기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징벌이었습니다. 유다 지파에게 체포당하여 죽음을 앞두고 한 아도니베섹의 말이 이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1:7). 이들은 성적으로 문란했고 풍년을 빌기 위하여 자신의 아기를 불에 태워 제사지내는 것을 서슴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징벌을 받아도 마땅한 민족들이지만 그래서 그들의 죄가 완전히 멸망을 받을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 400년 후에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창 15:16). 옛날이고 지금이고 극악한 죄를 지으면 사형을 시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다 사형 선고를 받을 정도로 죄를 짓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완전히 순종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어쩌면 힘이 모자라서일지도 모릅니다. 1:21에 그런 힌트가 나옵니다. 또 철제 병기가 있어서 힘이 부쳐서 못했다고도 합니다(1:1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려하였으면 철제 병거가 있더라도 그들을 못 물리쳤겠습니까? 더 큰 이유는 그들을 멸망시키기보다 종으로 삼아 부려먹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합리적인 생각 때문이었다고 아닐까 생각합니다(1:28).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완전히 차지하기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두고두고 고생을 합니다(2:3).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은 반만 순종하다가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완전히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종해야합니다. 부분적으로 순종한다든지 부분적으로 순종한다든지 하지 않고 완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순종하기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하여야합니다.
1. 성경 전체에 순종한다
자신의 의견과 맡는 것만 순종하지 말고 자신의 의견과 맡지 않는 것이라도 순종해야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몇 구절만 뽑아서 암송하며 복을 구합니다. 그래 갖고는 주시는 복을 다 누릴 수 없습니다. 말씀 전체를 읽고 묵상하여 말씀에 의하여 자신의 삶과 성격을 바꾸어 갈 때에 약속한 복을 다 누릴 수 있습니다.
2. 액면 그대로 순종한다.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에 따라 편리하게 해석해서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액면 그대로 믿어야합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면서 동성애가 죄라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논리를 펼치는 것을 보면 혀를 휘두를 정도로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 구절 저 구절 따다가 증명을 하는데 문제는 무엇인가하면 쓰신 분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죄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롬 1:24, 26-27). 이런 구절을 읽고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될 자격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일리가 있지만 “동성애가 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 뜻에 맞게 변형하여 순종할 때에 복이 내릴 수가 없습니다.
3. 단순하게 믿는다
저는 신앙 연륜이 깊어지면서 점점 신앙생활이 단순화해지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모순이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으면 그것을 밝히려고 애를 썼고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철이 나면서 깨달아지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항상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나눔터에 들어가 본 분은 아시겠지만 어떤 목장 목녀가 한인회 송년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경품권을 받으려면 후원 사업체에서 제공하는 물건을 사야합니다. 그 중에는 쌀도 있었는데 어쨌든 목녀가 150불 어치를 사서 목장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답니다. 그런데 1000여명이 모인 이 잔치 자리에 목장 식구들이 6개의 상품을 탔답니다. 그중에 목자 가정이 4개를 탔는데 다 꼭 필요했답니다. 목자가 낚시를 좋아해서 생선을 잡아다가 남을 주는 것이 취미인데 냉동고가 없어서 불편을 겪었답니다. 그런데 4개 중의 하나가 냉동고였답니다. 또 목장 식구들이 다 갖고 있는 김치 냉장고가 목자 집에만 없었는데 김치 냉장고를 탔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적습니다. 수백만 불짜리 확률이 당첨될 확률도 낮지만 그것은 자신이 복원에 당첨될 확률이 낮은 것이지 복권을 주관하는 쪽으로는 거의 100% 확률입니다. 누구인가 타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이 당첨이 4개가 되었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을 증명해 보이라면 할 말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확률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날 때에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알아채려야하지 않겠습니까?
현실이 합리적이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이 불합리하다고 대어들거나 불순종하는 예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내가 크신 분의 일을 어찌 다 알겠냐.” 하면서 모순이 있어 보이는 부분은 넘어갑니다. “크신 분이 그러라고 하니까 하면 잘 되지 않겠냐?” 하면서 상식적으로는 순종하기 어려운 일에도 순종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안 계셨다면 하나님을 이렇게 신뢰했다가 쫄딱 망해야 하는데 쫄딱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을 갖고 복 받은 가정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복을 받은 이유를 찾자면 저나 아내에게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복을 받지 못할 가능성을 많이 소지한 사람들입니다. 위태하게 느껴지는 결정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내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입니다.
Ⅲ. 후세에게 산 믿음을 심어준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려면 후손들에게 스스로 설 수 있는 신앙을 심어 주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살아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2:7). 그러나 이들이 죽고 나서는 더 악해졌습니다(2:10-12). 왜 이렇게 되었는가? 후손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심어주지 않고 전승된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모태 신앙에 대해 경계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은 형성되어있지 않고 자라면서 부모님들이 하던 것을 답습하면서 그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교회 가지 않으면 부모님에게 혼이 났기 때문에 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또 어릴 때부터 성경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성경 지식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술 담배조차도 부모님 앞에서는 혼나니까 못하지만 부모님 없는 데에서는 남과 똑같이 하고 직장 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안 믿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한 마디고 주일에 교회 간다는 것 빼고는 신앙의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 생활하면서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비도덕적인 삶을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믿음이 아닌 전승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누리는 복을 우리 후손들도 누리기를 원하면 어릴 적부터 자신의 믿음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경험을 체험하도록 하여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___
첫째로 기도 응답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여야합니다. 가능하면 자녀들과 같이 가정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하고 응답이 왔을 때에는 같이 기뻐하여야합니다. 기도 응답이 기대하지 않는 방법으로 왔을 때에는 기도 응답이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왔다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여야합니다. 주위에서 부모님의 삶에서 체험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해주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간증을 이해하건 못하건 들려 주어야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상식적인 방법보다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였을 때에 일이 잘 되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여야합니다. 제가 철이 들면서 교회를 떠난 이유 중의 하나가 성경에 보면 많은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있는데 주위에서는 기적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전설이나 신화를 모아 놓은 것이 아닌가는 생각이 들고 결국에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돌아오게 된 것도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 이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의 간증,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사도행전적인 역사를 읽으면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확신이 생겨도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부모님들이 고백하는 신앙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가 장성하면서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어릴 적에 목격한 부모님의 이중적인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삶과 가정에서의 삶 사이에 괴리를 보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는 말씀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말씀대로 살라고 강요하고 살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을 보면서 실망을 하고 신앙생활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들이 성경을 인용하여 순종을 강요하면서 어린이들은 듣고 배우기보다 보고 배웁니다. 우리들은 자녀들이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엡 6:4)”라는 부분을 무시하는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부모가 완전해 지라는 뜻을 아닙니다. 자녀들도 그러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점과 실수에 정직하고 자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앞장 서라
삿 1장 1~10절 / 류영모목사
I. 말씀을 향하여
최근 미국에서는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성큼하다 온 21세기를 새롭게 조망할 뿐만 아니라 보다 발전적으로 건설하려는 노력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인 예로 미국 NBC 방송국 앵커이자 저널 러스트인 탐 브로크 “옛트 그레이트 제너레이션” 「위대한 세대」라고 하는 책 한 권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브로크는 미국인들이 세계 속에 우뚝 서 세계에 영향력 있는 국가가 되기까지는 분명한 이유가 있더라 “현재 미국인들이 이처럼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까지는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온 조상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고 위기 때마다 뛰쳐나온 각 분야의 탁월한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요즘 세대들의 열심히 노력하지 아니하고 소원은 있으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무책임성과 이기심에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헤쳐온 영웅들 그리고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현대인들이 오늘 한국교회에 던지는 한편의 예언적인 설교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 저희 교회 라비에는 콩나무 시루를 하나 준비해 두었습니다. 콩나물 독에 물 주어 콩나물을 기르면 포동포동 살찐 콩나물이 됩니다. 그러나 콩을 밭에 심으면 비바람 맞습니다. 콩이 썩습니다. 거기에 싹이 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만을 살찌우는 성도 콩나물 같은 성도 가지고는 21세기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없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이제는 자기를 희생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도, 때로는 비바람을 맞을 때에 아프지만 야성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 역사를 이끌어 간다고 하는 선언이지요.
기업들도 소비기업은 망합니다. 자산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소비목회 가지고는 21세기에 적절한 교회를 건설해 갈 수 없습니다. 자산목회만이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비스킷이나 칩스를 먹고 살아가는 갈매기는 포동포동 살찐 것처럼 보입니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가 고기를 잡는 갈매기는 고생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떠나고 난 다음에 비스킷, 칩스가 사라지고 나면 그것 먹고 자랐던 살찐 갈매기들은 굶어 죽기 십상이지요. 그러나 거친 파도를 헤쳐 고기를 잡는 갈매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건강한 갈매기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오지에 가면 거위과에 속하는 다마구찌라고 하는 훈련된 고기잡이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한 마리 새면 두 세 가족이 먹고 살고도 남을 수 있는 많은 고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한 마리 새의 값이 황소 한 마리보다도 비싸다고 합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야생 다마구찌는 거위 값도 받지 못합니다.
이 땅에도 쓸모 있는 성도들 그리고 쓸모 없는 성도들에 값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것이죠. 세상에서도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의 값은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한 가지 비젼이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행복한 교회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비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쓸모 있는 성도를 만들어 내자고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 사사기 앞 권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1장 1절에 보면 출애굽의 영웅 모세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지휘권을 물려받은 여호수아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격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마쳐지고 나면 오늘 본문 사사기가 펼쳐집니다. 1장 1절에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가 죽음으로 펼쳐지는 사사시대를 오늘 본문은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웅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가 아니면 역사가 영웅을 창조하는가 사가들의 오랜 세월의 질문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 영웅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는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이제 너는 망했다가 아니고 여호수아가 죽은 자리에서 네가 여호수아가 되려무나. 네가 이제부터는 주인공이다. 주인공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연구가들은 사사시대를 왕이 없던 시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무정부시대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 시대야말로 새로운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사고, 새로운 생각, 새로운 결단,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전환기 시대였습니다.
농업사회 속에서는 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삼천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공업사회 속에서는 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삼백년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정보시대는 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삼십년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디지털 시대는 한 패러다임을 가지고는 삼년을 버틸 수가 없는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구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바꾸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체계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패러다임만이 21세기를 이끌어 갈 수가 있습니다.
전환기 때는 자칫 사람들이 방황할 수 있습니다. 나라도 역사도 방향감을 잃어버리고 방황합니다. 기업인들도 종교인들도 어지럼증에 시달립니다. 백성들은 꿈을 잃고 절망합니다. 자포자기하고 있습니다. 바라 볼 초점이 없습니다. 뚜렷한 영웅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지도자를 찾기 어려운 시대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산업사회 공업사회 속에서 한국교회를 이끌어온 사람들은 대형교회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산업발전과 더불어서 교회를 개척했고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되어 왔습니다. 놀라운 공헌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근간 김일성 권력을 세습하듯이 기업가들이 부를 세습하듯이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목회력을 세습하는 일들이 있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신학도들이 바라봐야 할 푯대를 잃어버렸습니다. 무서운 절망감을 이 땅에 심어 놓고 있습니다. 무서운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기업은 날로 늘어 왔습니다. 문어발 식으로 기업들이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존경받는 기업가들이 없습니다. 부러움을 사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우리 주변에 존경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러움을 사는 정치가들은 많아 졌습니다. 그러나 존경받는 지도력을 갖는 정치가들이 우리 눈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지도자가 되려무나!”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을 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쓰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치하 민족사에 암울했던 시대에 도산 안창호는 지도자가 없는가 지도자를 찾지 말아라. 네가 지도자가 되어라 말씀했습니다. 빌 벡힘 목사님은 평신도들이 교회 사역에 중심에 서는 평신도 혁명의 시대가 우리 가운데 찾아오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란 책을 통하여 마틴 루터, 존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보다 더 처절한 종교개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야 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직자들의 손 안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 준 종교개혁이었다고 하면 두 번째 종교개혁은 성직자들의 손 안에만 머물러 있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빼앗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역의 혁명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은 설교를 듣고 포동포동 살쪄 가기만 하면 되는 성도들이 아닙니다. 말씀을 실천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만인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목사만 성직자가 아닙니다.
아파트 한 주민으로 살아가면 그게 바로 내 성역의 일터입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리가 바로 여러분들의 성직을 감당하는 일터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밥 먹고 살라고 여러분에게 사업을 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수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안락을 위해서 출세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희 교회가 돕는 중국의 4백여명 신학생 가운데 한 분이 제게 보내준 간증입니다. 교회가 없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느 큰 마을에 한 사람이 어디 가서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인지를 전하기 시작했고 자기 안방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삽시간에 10명이 20명이 되고 20명이 30명 40명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공산당이 이 사실을 알고 지도자를 잡아 가뒀습니다. 그러자 젊은이 30여명이 모여서 지도자가 석방되도록 기도하다가 이제 지도자가 석방되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도자가 되자. 한 사람 두 사람 이 마을 저 마을로 흩어져서 그 도시 전체 수많은 예배당을 세워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12명이 우리 교회가 지원하는 장학금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물었더니 우리가 공산당에게 배운게 있습니다. 전군의 간부화 그러니 우리는 전성도의 지도자화를 지금 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교회 부흥 축제, 전도폭발의 새로운 시작, 예닮동산이 펼쳐지고 제자훈련이 시작되는 큰 물결이 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적인 파도를 탈 줄 알아야 합니다. 사사시대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한소망교회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앞장서라. 네가 지도자가 되거라.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열두 지파가 자기 분깃을 기업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얼마든지 현상유지하며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 여호수아가 그들의 곁을 떠나갑니다. 움츠러 들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험한 산지가 있음을 알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새로운 전투를 처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습니다.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 누가 선봉에 설까요. 누가 앞장 설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유다 지파가 앞장서라. 유다 지파가 선봉에 서라.
광야행군들을 살펴보면 유다 지파는 언제는 앞장서서 걸어왔던 지파였습니다. 험한 강을 건너갈 때도 태양이 작렬하는 모래 들판을 건너갈 때도 추운 밤에도 더운 낮에도 유다 지파는 언제나 앞장섰던 지파였습니다. 긍정적인 지파였고 능동적인 지파였고 적극적인 지파였습니다. 바로 이런 지파를 향하여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유다 지파가 앞장서라. 뒷걸음질치는 성도를 하나님이 쓰지 않습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 능동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 적극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앞장 세워 하나님이 사용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 유대 지파의 족장이 갈렙이었고 그 지파에서 다윗 왕이 나왔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왔습니다. 갈렙이 험한 산지 헤브론을 정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이 험한 산지를 네게 주소서” 여호수아에게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갈렙과 유다 지파가 올라가 그 땅을 정복하지요. 이 헤브론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수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험한 산지가 있습니까? 정복하지 못한 믿음의 땅이 있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사역의 일터가 여러분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물러서지 마십시오. 도전하십시오. 달려가십시오. 주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면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듯이 여러분의 땅이 될 것입니다.
제가 다른 교회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집회 차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이 교회가 되는 교회인지 안되는 교회인지 첫 번째 시간에 알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몰려와서 뒷자리부터 앉는 교인들이 있어요. 그런 교회는 언제나 부정적인 공기가 온 예배당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열심이 없습니다. 부흥사의 목만 아픕니다. 그러나 앞장 서 앉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앞자리부터 채워 앉기 시작합니다. 이런 교회는 틀림없이 부흥되는 교회요 열심 있는 교회요 제대로 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습관적으로 뒤에 앉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런 분이 계시면 한 자리만 앞으로 나아가 앉아 보십시오. 그것 하나 만으로 여러분들의 믿음의 분량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열심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 앞장서라는 말씀은 영광의 자리, 유익을 얻는 자리에 앞장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앞장서야 할 자리는 면류관 쓰는 자리가 아니고 십자가 지는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리를 탐하고 박수 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사역에 일터, 영적인 전쟁터에 앞장서려무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이 졸업한 시골 거창 고등학교 직업을 선택하는 10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해라.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을 가거라. 앞다퉈 모이는 곳은 피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거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거라. 그 길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니라. 그 길은 주기철 목사님이 걸어가신 길이니라. 그 길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걸어가신 길이니라. 그 길은 본 훼퍼가 걸어간 길이니라. 앞으로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기울어진 타이타닉처럼 영영 기울어 가고 말 것인가.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있는가 아니면 한국의 기업이 한국의 정치사가 두 동강이 나고 기울어져가고 몰락하는 타이타닉처럼 영원히 몰락해 갈 것인가.
몇 %의 사람들이 지도력을 가지고 지도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몇 %의 성도들이 사역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을 선교현장으로 사역터로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대체 몇 %나 되느냐 여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존 코트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기업혁신의 8가지 함정과 8가지 성공법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변화의 리드」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난 세기에 성공적으로 커왔던 기업들이지만 여전히 다음 세대에도 대기업으로 남아있으란 법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성공이 아버지의 성공이 자녀의 성공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 어제 실패했다고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실패하란 법은 없는 것입니다. 변화에 리더쉽을 가진 사람 25%를 확보할 수 있으면 창조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 믿음을 가진 사람들, 긍정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 리더쉽을 가진 사람들 25%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기업은 어제 성공을 이어갈 수 있고 어제 패배를 극복해 성공한 기업으로 이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소망교회 가운데 적어도 일천명 정도는 주님의 제자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영향력 있는 교회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는 영적인 양식을 먹고 포동포동 살찌는 성도들도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25%의 성도들은 리더쉽을 가지고 지도자 의식을 가지고 제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만이 우리교회를 다음세대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축복해 주신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주님께 위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시간과 물질과 은사가 오직 주님을 증거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사는 사람 이천명이 있어야 만이 이 교회가 이 역사를 뒤집어 가는 여전히 쓰임받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한국에 그리스도인들이 25% 정도 된다고 합니다. 네명 정도 가운데 한명 정도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존 코트의 설명에 의하면 이 땅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25%의 성도들이 바른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면 썩어빠진 세상의 속물정신을 벗어 버리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면 역사를 뒤집을 수 있다. 이 민족이 새롭게 살아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 앞장서기로 결단한 유다는 함께 앞장 서 달려갈 동력자를 구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올라가자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성령님은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 역사합니다. 기도도 모여서 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전도도 힘을 합쳐 모일 때에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온 백성들이 남녀노소 불문곡절하고 힘을 모아 돌 때에 무너졌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졌습니다.
저는 낯선 도시에 가서 식사시간을 맞이할 때가 참 자주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까? 식당을 찾는 분명한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래서 차가 많이 서 있는 식당, 발 디딜 틈이 없이 모여있는 식당에 찾아가면 실패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모이는 곳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일 수 없는 공동체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훈련의 사역이든 사역의 자리든 함께 모일 수만 있으면 그 자리는 큰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도들이 모일 때에 하늘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앞장서는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반드시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도전했던 아도닉 베섹 왕은 시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이방 임금 70명을 물리치고 70개 부족국가를 다 정복했던 힘있는 국가였습니다. 이런 아도닉 베섹을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올라가 박살을 내고 돌아온 것입니다. 앞장서는 사람을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십니다. 앞장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앞장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맡겨 주십니다. 새 역사의 주인공은 나다. 이 교회의 주인공은 나다. 주인공 의식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그만큼 믿고 그만큼 복을 받았고 그만큼 성장했으면 이제 징징거리지 말고 이웃을 섬기십시오. 어린아이 정신, 어린아이 태도를 버리십시오. 때로 권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돌봄 타령이나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쓸 수가 없습니다.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라고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앞장서 가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무거운 직분을 준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걸핏하면 이 집회, 저 집회, 여기 가서 안수 기도받고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며 산기도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치고 신통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내가 눈 생기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 신통한 성경공부 없을까. 우리 목사님 설교 테잎 말고 들을만한 화끈한 설교 테잎 없을까? 기웃거리는 성도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넝마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런 성도들 치고 제대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본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한 구절 말씀이라도 부둥켜 안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몸부림하고 그 말씀을 내 삶의 현장 속에 실천하지 못하여 그 말씀을 움켜쥐고 안타까워 할 줄 아는 사람들, 그 말씀에 능력을 이루기 위하여 실천해 보려고 몸부림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구경꾼 신앙가지고 새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훈련의 현장으로 달려가십시오. 잃어버린 사명은 없습니까? 꼬깃꼬깃 접어 두었던 사명은 없습니까? 새롭게 펼쳐 보십시오.
요나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교사로 가는 사명을 벗어 던지고 구경꾼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물고기 뱃속에 빠졌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빠졌으면 어디로 들어갔을까? 허파에 들어갔을까요. 간에 들어갔을까요. 틀림없이 위나 장에 들어가서 몸부림을 했을 겝니다. 위나 장에는 똥이 들었어요. 선지자가 똥통에 빠진 겁니다.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뒷걸음질이나 하고, 앞장서 달려갈 사람들이 뒤쳐져 불평이나 하고 있다가 똥통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여러 사람 본적이 있습니다.
제임스 그레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그림동화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새를 잡으러 숲 속에 갔습니다. 나무그늘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주워왔습니다. 그리고 양계장에 넣어서 닭들과 오리와 함께 키웠습니다. 닭 모이를 먹고 자랐던 이 독수리는 닭 정신으로 충만했습니다. 5년을 키웠더니 큰 독수리가 되었고 날개깃 하나가 3m도 더 되는 엄청난 새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기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인 청년은 이 독수리에게 독수리 정신을 가르쳐 주기로 작정했습니다. 독수리를 안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는 순간 독수리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저 해를 향하여 나는 날아갈 수 있다. 웅장한 자연을 두루 두루 보여 주었습니다. 독수리의 가슴속에는 뭔가 용솟움쳐 오르는 무서운 힘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펼쳐 주었습니다. 날개를 치고 저 벼랑을 향하여 집어 던졌습니다. 독수리는 꺄약~ 소리를 내며 날기 시작했습니다. 비상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에 그런 글을 남깁니다. “아프리카인이여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 아프리카인이여 우리도 하늘을 날 수 있다.” 식민지배에 신음하고 있는 자기 동족을 바라보며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자기 본국에 던지는 저자의 해방의 메시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썩을 세상을 보고있던 눈을 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펼쳐 줄 저 푸른 창공이 예비되어 있는 신령하고 풍성하고 값진 세계를 바라 보십시오. 여러분의 발은 이 세상만 향하여 걸어가라고 주신 발이 아닙니다. 거룩한 길, 천성 가는 길, 멋진 길이 여러분을 향하여 예비되어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닙니다. 잠시 잠깐의 고난이 있다고 거기 웅크리고 앉아있지 마십시오. 믿음의 날개를 펴십시오. 한 두번의 실패가 있다고 영원히 실패할 사람인 것처럼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앞장서십시오. 달려가십시오. 믿음의 날개를 펴고 저 푸른 창공을 향하여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멋진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십시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너는 지도자가 되어라. 앞장서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삿 1장 1~3절 / 채규현목사
저도 처음에 사사기를 읽을 때 “도대체 사사기가 뭔가? 생각했는데, 사사에 대한 기록입니다. 영어로 사사는 “Judge(재판관)” 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옛날 성경에 보면 “판관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재판관이라는 의미죠? 그런데 여기 나오는 사사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재판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위기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게끔 세우신 용사, 챔피언, 대장…, 이런 사람이 사사입니다. 그러니까 사사라는 사람이 언제나 이스라엘을 통치하지는 않았어요. 평소에는 여러 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그 재판을 해 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외부에서 압제가 있을 때 외부 세력에 대해서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장군이 되어 함께 싸우는 그 사람들이 바로 사사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사사기는 그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사사들이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사사들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앞의 부분은 가장 모범이 되는 사사가 먼저 나오고, 점점 뒤로 갈수록 하나님의 뜻에서 떠나가는 사사들이 나옵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난 이후에 이스라엘에 왕국이 세워지기 전으로, 그 때는 전체를 지도하는 리더가 없었습니다. 그저 열두지파의 연합체로 있었는데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이야기가 사사기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그 땅에서 살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이들이 살기를 여호수아 시대처럼, 제일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승리할 때처럼 계속해서 살지 못했습니다. 점점 그들의 신앙이 약해지고 자손의 신앙도 약해지면서 죄악 중에 많이 빠지는, 점점 그들의 신앙이 침체되어 가는 과정을 쓴 것이 또한 사사기입니다. 그러니까 사사들도 점점 신앙적으로 약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점점 신앙적으로 약해집니다. 이 과정을 쓴 것이에요. 이게 전체 사사기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앞부분의 사사기 1장, 특히 1절부터 26절까지 보면 가장 모범이 되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면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 하는 가장 모범적인 면이 앞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실제 가나안 땅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오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어려운 점,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나오거든요. 그것은 오늘날의 믿음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 감격도 있고 눈물도 있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자 하는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자칫 잘못하면 그 믿음 생활에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실제 삶에서 믿음의 능력은 없어지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무늬만 크리스챤인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불쌍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중국을 보면 크리스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크리스챤만 해서 1억 2천, 3천이 된다고 하니까요. 그들은 변변히 교회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중국 공안들의 정보 캐내기와 취조와 그들이 냄새 맡아서 잡으려고 하는 그 위험한 순간에도 그들은 신앙을 지키면서 오히려 점점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마음껏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가진 이 나라에서는 오히려 신앙이 점점 한풀 꺾여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지 그것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오늘 사사기의 처음에는 “가장 신앙적으로 살 때 어떻게 살게 될까?” 이것들을 봅니다.
먼저 사사기 1장 1절부터 봅니다. 제일 먼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성경은 참 이상해요. 시작할 때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출애굽기도 “요셉이 죽은 다음에…” 요셉의 죽음부터 먼저 나옵니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죽음부터 나와요. “모세가 죽은 뒤에…” 사사기에서는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로 나옵니다. 사무엘상은 엘리와 그 가족이 죽을 때 그 사건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열왕기상은 다윗의 죽음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에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마다 많은 경우에 그때까지의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도자가 죽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토록 의지했던 모세가 죽을 때 그들은 다시 암담했죠. 자기들의 리더가 없으니까요. 그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을 또 다른 리더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뚜렷한 한 사람의 리더를 세우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러한 뚜렷한 리더가 없는 생활을 사사시대 이 때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들이 가장 믿었던 사람들이 죽은 뒤에 그 다음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렇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역시 오직 우리는 하나님만을 믿어야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이 뒤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사실 그 전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지도자들도 사실은 하나님이 세워서 이끈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 인간은 그 사실을 잊고 전적으로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을 믿어도 결국은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넘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여호수아가 죽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여호수아가 죽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1장 1절부터 26절까지 보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가장 힘이 있는 두 지파의 승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21절까지 유다지파의 승리, 또 22절부터 26절까지는 요셉족속의 승리가 나옵니다. 이 두 지파의 승리를 이야기함으로써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뒤에 수많은 전쟁에서는 많이 패하고 압제를 당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 때문에 패하고 압제를 당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앞에서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심지어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자가 없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 의지하고 인도함을 받아야 할 분은 인간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면이 오늘날의 우리의 모든 삶에도 같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에서도 역시 전체 교회의 방향을 정할 때에는 교회의 성도들로 이야기하면 제가 말하는 것이 가장 영향력이 크겠죠. 그러나 제가 있어야만 중앙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각 교회의 여러 그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큰일나는 것 아닙니다. 언제나 전체 주인, 작은 모임 큰 모임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뿐만이 아닙니다. 각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철석같이 믿고 살고 아내를 믿고 살지 않습니까? 그들이 없어질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 교회도 여러분들이 남편이 먼저 하늘나라 가셨거나 또 아내가 먼저 하늘나라 가신 분들 있죠? 물론 이별의 슬픔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뒤에 남아 있는 나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남아있는 내게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직 여기 살아서 남아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뭔가 아직도 이루실 것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없을지라도 오히려 그 때부터 지금 이 세상에, 여기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사람이 한 사람 죽을 때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그때부터 시작하십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남편이나 아내나 우리 부모나 누구든지 내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할지라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없는 뒤에 새로운 인생을 남은 사람들에게 시작시켜 주시니까요. 역시 각 가정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람 때문에 매이지 마십시오. 사람 때문에 내가 믿었던 그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쓰러지지 마십시오. 결국 어떠한 사람이든지 인간은 믿을 바가 못 됩니다.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마음이 한결같다 할지라도 인간은 어차피 죽음이라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보다 더 믿지 마십시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언뜻 언뜻 특정한 사람을 의지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꼭 그러한 마음이 들 때마다 저를 넘어지게 하시더라구요. 의지하지 못하게 치우고, 넘어지고, 실망하고…, 그런 일을 몇 번 하다보니까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 믿자, 하나님만 의지하자.’ 이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점점 성장시키실 때, 여러분의 하는 일마다 가정에서든지 가정 밖이든지, 교회 안이든지 교회 밖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믿으면 안 됩니다. 오직 여러분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십시오. 하나님만 믿고 갈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중요한 사람이 없어질 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여러분이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보면, 그래도 인간을 믿어라 하는 것입니다. 좀 아이러니컬하지만 말이 달라요. 첫 번째는 사람을 믿지 말라, 두 번째는 사람을 믿어라 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중간에서 전해 줄 리더가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묻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가리이까?” 어쩌면 이것은 “누가 리더입니까?”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해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유다가 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암암리에 그 전체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가 가장 지도자적 지파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나님께서 붙였다고 하십니다. 그 뒤에서 계속해서 그런 말이 나옵니다. 4절에도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또 19절에도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이렇게 나옵니다. 사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 이 말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최고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 뭘로 축복해달라고 얘기합니까? 대개 축복이라고 하면 언제나 금전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만 생각해요. 그래서 돈벼락을 맞으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돈벼락맞고 문제 생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축복은 어떤 특정한 물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축복이 있습니다. 돈을 가지고 이 세상에 못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 가지고 못할 것이 얼마나 많냐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돈으로 안 되는 그 진정한 것, 가장 가치있는 것을 우리는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주시면서 승리케 하시는 광경들이 쭉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승리하기 전에 유다백성이 한 일을 봅시다. 3절에 보니까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유다지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 중에 가장 강력한 지파입니다. 수도 제일 많고요. 그 다음이 요셉지파, 그 중에서도 에브라임입니다. 사사기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중에 열왕기서에 보면 계속해서 유다지파와 에브라임지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두 지파가 가장 강성하고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지파였는데, 그 유다지파가 시므온지파에게 “우리 함께 힘을 합치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유다지파나 에브라임지파에 비해서 시므온 지파는 훨씬 약합니다. 민수기에서 지파에 나오는 숫자를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들 중에서 가장 약한 지파 중의 하나가 시므온 지파입니다. 그런데 가장 강한 지파인 유다지파가 가장 약한 지파 중의 하나인 시므온 지파에게 “우리 함께 힘을 합해서 공동으로 우리 땅도 차지하고 너희 땅도 차지하자.” 그런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점점 더 많이 갖게 된다는 그 축복의 상징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전쟁에서는 다 승리했지만, 땅을 나눠야 하는데 모든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했던 것은 아니에요. 어떤 지파는 차지한 땅을 받기도 하고, 어떤 지파는 아직 전혀 차지하지 못한 땅을 받았습니다. 그럼 차지하지 못한 땅은 전쟁해서 뺏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열심히,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해서 뺏어야 그 다음에 내 것이 됩니다. 그럴 지경에 있어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에 있는 모든 약속은 그저 여러분이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있는 것처럼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그 약속을 믿고 여러분이 열심히 그 약속한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할 때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그들이 이제 약속의 땅을 밟았는데 실제로 차지하지는 않았어요. 전쟁해서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지파는 자기들이 능력이 있으니까 자기들의 힘으로 자기에게 준 땅은 접수를 할 수 있겠죠. 이길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시므온 지파는 상당히 힘들 걸요. 그런데 유다지파가 시므온지파에게 먼저 제의합니다. “우리 같이 하자. 우리 땅 차지하러 전쟁하러 갈 때에도 같이 하고, 그렇게 하면 너희 땅 차지할 때도 같이 힘을 합해서 쫒아내자.” 이렇게 힘을 합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사기는 여호수아 시대에 가장 승리하고 가장 하나님 앞에 올바르던 그 시기에서부터 점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가운데 타락해서 침체되어 가는 그 아래로의 하향 곡선을 긋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과 언제나 함께 가는 것이 백성들의 하나됨 입니다. 가장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고 신앙이 좋을 때는 백성들도 하나가 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연합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사사기를 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의 갈라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북쪽에 적군이 쳐들어왔는데도 “우리는 상관없다” 고 해서 출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네 일과 내 일을 다르다.” 여기는 같이 가는데 나중에는 점점 따로 갑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흘러서 제일 마지막에는 무슨 일이 나옵니까? 베냐민과 나머지 열한지파가 서로 전쟁을 벌입니다. 그 결과 열한지파도 심각한 타격을 입고 베냐민지파가 거의 멸절될 위기에 놓입니다. 다 잃고 마지막에는 600명밖에 남지 않잖아요. 신앙이 떨어질 때에는 그 증표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갈라지고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이 점점 돈독해지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에는 믿는 백성들끼리 하나가 됩니다.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점점 신앙이 좋아지면 부부간에 더욱 하나가 됩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부부가 서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갈라진단 말이에요. 얼마만큼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어 있느냐, 교회 든지 가정이든지 구역이든지 어느 그룹이든지, 그게 사실은 우리 영적 성장의 바로메터(barometer)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비단 사사기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욱 주님의 은혜 안에서 신앙으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더 누리고 천국 속에 있는 것이 어떤 때냐면, 믿음의 백성들이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이때입니다. 성경을 하나 봅시다. 에베소서 3장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면, 우리가 홀로 있을 때 아는 사랑은 극히 낮은 수준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언제 아느냐면 서로 성도들끼리 함께 있을 때, 함께 사랑을 나눌 때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들은 강력해지고,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능력으로 천국 안에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때 믿는 백성들이 비로소 보람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느끼고 살게 될 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그냥 주일 예배만 나오고 가서 일주일 동안 나 홀로 살고, 내 가정에서만 살고, 또 일주일 만에 반갑게 교회 사람들 맞고…, 이렇게 오는 생활에서는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믿는 백성들과 함께 있고, 함께 있으면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함께 힘을 합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서로 돕고, 서로 교제하고, 이런 일들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사랑을 알아갈 뿐만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길 원하십니다. 축복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믿는 백성들을 함께 두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천국은, 진정한 사랑은, 나 혼자 있을 때 느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서로 힘을 합하면서 관계 속에서 진정한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교회는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그룹이 아닙니다. 교회가 수많은 일들을 하지만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일을 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구요. 교회는 서로 사랑하기 위한 그룹입니다. 구역도 사랑하기 위한 모임이고, 교회 전체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로 모이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사랑은 뭡니까? “우리끼리, 우리끼리”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데이트 할 때에는 아무도 모르는 데를 가는 거죠. “우리끼리” 하는 거니까요. 세상적인 면에서는 모임이 항상 자기들끼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사랑은 뭐라고 그랬어요? “모여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구역도 모여서 아직 구역에 나오지 않은 우리 구역 식구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돕고 기도하기 원하는 것,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이름을 불러가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초청하고 함께 전도하기 원하는 것, 우리 구역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구역들이 합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 구역뿐만이 아니고 여러 소그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끼리가 아닙니다. 모여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성경적 사랑이에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내 밖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적 사랑입니다. 우리 가족이 우리 가족끼리만 아니고 밖에 있는 다른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 구역도 교구도 우리 교회도 우리끼리가 아니고 모여서 힘을 합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의미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떨어지면 이 모든 그룹들이 그 사랑이 밖을 향하지 않습니다. 여기 유다지파도 유다지파 안에서 얼마든지 자기들끼리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힘을 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손을 내밀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그룹도 밖으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이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서든지, 두 사람의 관계든지 언제나 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내가 신앙적으로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생각할 때에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을 하는 것, 어떤 사역에 임하는 것이요. 그런데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교회가 일을 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거요. 관계를 위한 모임이고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성숙도는 얼마만큼 많은 일을 하느냐에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마음을 연 관계가 되느냐, 그게 신앙의 성숙도의 지표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내 마음을 열고 서로 대화할 수 있는가, 내 마음을 열고 서로의 연약함을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는가, 진정한 한 인간과 한 인간의 만남은 서로의 약점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면까지 함께 서로 아파하며 서로 위해주고 감싸주고, 그게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드러내지 않고 갑옷을 입고 일을 함으로써 내가 하나님 앞에 열심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관계는 아닌데 일을 하면서 그것으로써 하나님 앞에 전부라고 생각한다니까요. 그게 아닙니다. 일하는 것으로써 여러분 스스로 위로하지 마십시오. 과연 다른 모든 성도들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십시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정말 마음을 터놓고 나의 연약함도 보여 가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여러분에게 몇 명이나 됩니까? 저는 우리 교회에 수많은 리더들이 세워지기 원합니다. 우리 제자훈련의 목표도 그거에요. 수많은 리더를 우리 교회에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의 관계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을 잘 포용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연약함도 내가 같이 포용해 줄 수 있는 사람들, 내 연약함도 보여서 서로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리더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그저 일 잘하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면에 그 관계에서 성숙한 사람이 우리 교회에 많아질 때 어떤 모임이든지 그 사람이 끼면 은혜가 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요. 이러한 관계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고 일만 중점적으로 하다 보면, 일은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관계는 깨집니다. 일은 잘 했는데 관계는 깨져요.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저는 특히 우리 교회에서 무언가 어느 분야에서 리더를 맡고 있는 모든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러분의 모든 사역의 초점이 절대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서 얼마만큼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내가 마음을 열고 상대편도 마음을 열고 연약한 가운데 만날 수 있는가, 그게 여러분의 신앙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성패까지도 좌우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제가 있는 동안에 우리 교회에서 여러 가지를 새로 개편도 하고 바꾼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곰곰이 따져 보면 바꾼 것보다 안 바꾼 것이 훨씬 많습니다. 안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고 안 바꾼 것이 많습니다. 바꾸는 것에는 언제나 목적이 있어요. “과연 이렇게 할 때에 우리 교회에 유익할 수 있는가?” 이것을 언제나 따집니다.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사실은 안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우리 교역자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전례가 어떠냐?” 하는 것을 언제나 물어봅니다. 그것을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을 고뇌하다가 득보다 실이 많다고 하면 안 바꾸죠. 바꾸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바꿨냐면, 조직적인 면에서 각 일하는 자리마다 다 짜여 있어서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조직을 한번 바꾸면 여러 군데 빈 공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빈 공간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끔 조직을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임시방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고서는 조직을 바꾼다고 해서 교회가 전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조직 안의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그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바뀝니다. 우리 교회도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의 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일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요. 우리 모두 바뀌기를 원하죠. 그런데 바뀌기를 원하는데 언제나 내 몸 밖에서만 바뀌기를 원해요. 나를 바꾸는 것은 안 돼요.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바꾸지 않으면, 나를 내놓지 않으면,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여러 사람 앞에서 나의 부족한 점까지 내어놓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인 만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만남이 없을 때 진정한 교제도 없고 진정한 공동체도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사람의 마음이 그런 식으로 열기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되지 않아요. 가장 이상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 여기에 있습니다. 강력한 리더 하나가 죽어도 흔들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데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부족하지만 심지어는 연약하지만 그것조차 품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상대편에게 마음을 열고요. 언제나 공동체는 크던 작던 이 면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은혜로운 구역, 은혜로운 교회, 은혜로운 소그룹, 은혜로운 그 어떤 조직이라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얼마만큼 여러분의 마음의 빗장을 푸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면이 우리 모든 성도에게 있기 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에게 이러한 면이 있어서 정말 우리 성도님들이 속한 어느 곳이든지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누구나 함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도니베섹의 죽음
삿 1장 1~7절/ 채규현목사
사사기는 다른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이야기책과 같습니다. 역사기록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역사 이야기를 읽을 때, 여러분은 언제나 “그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이 질문을 하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제자훈련 받는 분들, 큐티(Q.T)도 계속 하는 분들, 기초양육훈련 받는 분들이 있는데, 큐티 하다 보면 어떻습니까? 큐티 책에 보면 매일 관찰 질문, 연구묵상, 느낀 점, 결단…,이런 순서로 나오는데 마지막에 항상 결단을 해야 해요. 매일 결단해야 되죠, 일주일에 한번 소그룹 모임 갈 때마다 결단해야 되죠, 주일날 설교 들으면 또 결단해야 되죠…,수없이 많은 결단들이 있으니까 ‘도대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길인가, 너무나 많은 결단 앞에서 내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들이 온전히 제대로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그 전에 반드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나 혼자 하는 결단은 지킬 수도 없거니와 그 결단이 내게 무겁게 짐으로 다가옵니다. 사실, 큐티하는 이유는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그것이 기계적으로 문제풀이가 되기 쉽습니다. 그게 아니고 우선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찾고 그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하나님 앞에 나의 심정을 내놓고, 그 하나님 앞에 나의 간구할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간구하는 것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십시오. 성경에서 모든 병에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여호와 라파”라고 합니다.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여호와 닛시”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특정한 면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언제 묵상하게 되느냐면, 바로 성경의 각 본문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환경이 나올 때 그때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구나.’ 느끼면서 묵상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도 읽을 때에 사람들의 행동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삶 속에 지금 하나님은 어떠신가, 누구이신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읽으시면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은혜로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특히 4절~ 7절까지), 드디어 유다가 올라가서 자기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입니다. 그 중에 가나안 땅 베섹에 강력한 왕 아도니베섹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아도니베섹이라는 이름은, 이름일 수도 있지만 자기의 진짜 이름이 아니고 어떤 타이틀(title)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파라오(Pharaoh)라고 하면 이집트의 왕들을 전부 파라오(바로)라고 불렀죠? 또 아브라함 시대에 가나안 시대의 족장, 또는 왕의 이름이 아비멜렉이었습니다. 그 아비멜렉은 한 사람이 아니고 아마 그 아비멜렉이라는 말 자체도 타이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여기 아도니베섹도 마찬가지에요. ‘아도니’라는 말이 ‘주(主)’라는 말이거든요. ‘베섹의 주(Lord)’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타이틀일 가능성도 많이 있습니다. 여하튼 그 아도니베섹을 만나서 싸워서 이긴 다음에 그 아도니베섹의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을 잘라 놓습니다. 그리고 치욕을 주고 아도니베섹은 결국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 아도니베섹이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7절 후반부에 보니까 “아도니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그는 결국 예루살렘에서 죽게 됩니다. 한 왕의 야망 때문에 70명의 왕이 죽었고, 그 70명의 왕과 전쟁하는 동안에는 그에게 속한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왕들이 자기 앞에 있을 때에 전부 자기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을 다 자르고, 자기 상 앞에서 음식을 주워 먹게 하는 치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이제는 내게로 돌아오는구나.”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이방인인 아도니베섹의 고백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특히 모든 악에 대해서는 행한 대로 그대로 갚는다는 면이 거듭거듭 나옵니다. 아마 아도니베섹도 70인 왕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치욕을 주면서 죽일 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올 줄은 몰랐겠죠. 그러나 그것이 그대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순간에 자기 죄도 깨닫고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을 고백하고 죽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여러분은 믿고 사십니까? 심지어는 우리 죄악조차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 죄에 대한 벌이 여러 가지 형태로 오게 되는 것을 봅니다. 첫째로는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다의 웃시야왕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전에서 제사장이 하는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우기고 분향하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문둥병에 걸립니다. 또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라는 왕은(사실 자기 아버지 여호사밧왕은 선한 왕이었는데) 자기가 왕이 되면서 모든 아우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삶 속에서 여호와의 치심을 받아서 창자가 썩어 들어가고 마침내 그 창자가 나와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 (하나님께서 각각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신 그 분깃이 있는 땅인데) 을 차지하려고 나봇을 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봇의 피가 흘려진 바로 그 곳에서 아합 네 피가 흐르리라.”고 하셨고 아합은 바로 거기서 죽습니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죄와 벌이 임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어떤 때에는 그에게 직접 가지 않고, 심지어는 그에게 직접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에게도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한 이후로 결국은 온 백성이 전쟁 속에 휘말림과 동시에 자기 아들들도 죽게 됩니다. 또 유다의 므낫세라는 왕은 유다 전체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인데 통치기간도 가장 길었습니다. 온갖 악을 행했고, 사실은 결정적으로 그 므낫세왕의 죄 때문에 남왕국 유다가 멸망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도 므낫세가 회개하거나 하나님께 겸비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네게 임하겠다고 한 모든 재앙이 네게 임하지 않고 너는 너의 침상에서 그대로 죽을 것이요 네 자녀에게 임하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기브온 사람들은 원래 이방 족속이지만 살아나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해 여호수아와 화친을 맺죠.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서 이스라엘이 정복할 때 기브온 족속은 죽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약속은 영원한 거예요. 그런데 사울왕이 기브온 사람을 죽입니다. 그 때는 몰랐어요. 그런데 다윗이 통치하던 기간에 3년 연속 기근이 드는 거예요.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3년 동안 이렇게 기근이 드는 이유는 사울이 여호와 앞의 언약을 저버리고 기브온 사람을 죽임이라.” 그래서 결국은 사울의 아들들을 잡아서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깁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그 아들들을 죽이고 난 후에 그 모든 재앙들이 멈췄습니다.
자기에게 그 벌이 임하던, 심지어는 자식에게 임하던 모든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한 벌은 반드시 임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심지어 이 세상에서 지은 죄에 대해 이 세상에서 그 죄 값을 치루지 않으면, 죽은 뒤에 반드시 죄 값을 치fms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잘못했을 때 어려움을 겪는 때에 내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게 더 나아요. 그래서 지금 환난을 당하고 천국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이 세상에서 온갖 죄악을 저질러도 아무 일이 없다면 결국은 죽어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게 더 문제죠.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벌은, 죄악을 행해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둔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81편 11절, 12절 말씀을 보십시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강퍅한 마음대로 그냥 버려두게 되면 죄악을 날마다 더 쌓게 되죠. 이게 더 큰 벌인 줄을 아시겠습니까? 로마서 1장 28절도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믿지 않은 상태는 반드시 죄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크고 작은 죄를 짓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회개치 않겠죠? 결국 죽은 뒤에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뒤에 심판이 있느니라” 그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을 잊을 때 간혹 가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실족합니다. 우리에게 환난이 임할 때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 세상의 온갖 죄악을 다 짓고 사는데 하나도 문제없이 일도 잘 되고, 그 집 가게도 잘 되고, 직장에서 승진도 잘 되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은 죽을 때라도 좀 고통스럽게 죽어야 되는데 죽을 때도 자기 침상에서 편안하게 죽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항의하는 내용이 바로 시편 73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73편 중간에 보면 “내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일의 전말을 깨달았도다” 죽은 뒤에 알았다는 말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보니까 그들은 심판대 위에 서 있더라는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모든 죄악을 쌓고 죽은 뒤에 모든 보응을 받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사람들의 선과 특히 악에 대해서 반드시 그것을 보응하실 줄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아는 백성들도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삽니다. 분명히 보응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죄를 짓게 될까요? 죄를 짓는 이유는 제일 먼저, 내 머릿속에 내가 죄를 짓는 순간에 하나님은 안 보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에 죄를 짓습니다. 1990년에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 때 독일에서 그 공산권 치하에서 자유운동을 했던 베라 볼렌버그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독일은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하게 정보사찰을 받았던 나라입니다. 그때의 정보기관이 스타지(Stasi ; Staatssicherheit)라는 기관이었는데, 독일이 통일된 다음에, 1992년 1월에 그 스타지가 사람들을 사찰한 엄청난 양의 정보 내용이 공개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때 자유운동을 하면서 온갖 어려움과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자기 파일에 관해서는 열람을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파일을 볼 때 바로 자기가 그렇게 믿었던 친구들, 이웃들, 가족 중에도 자기를 사찰했던 정보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베라 볼렌버그라는 여자도, 사실 자기 아버지도 이 비밀경찰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제일 먼저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하는 성격 때문에 곧 공산당에서 쫓겨났고 나중에 자유운동, 민권운동, 소련의 핵 때문에 비핵화 운동들을 하면서 끊임없이 사찰을 받고 고통을 받다가, 이제 동독이 해방이 되고 드디어 자기 파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파일을 보고 나서 그녀가 하는 말이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내가 가장 미워하는 그 사람들조차도 제발 자기들의 파일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하고 이야기했어요. 왜냐하면, 자기 파일을 보니까 한 60명의 정보원들이 자기의 지근거리에서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중에 암호명 “도날드”라고 하는 사람의 파일을 보니까 가장 샅샅이 자세하게 적혀져 있었어요. 심지어는 자기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까지도 거기 다 적혀있는 거예요. 나중에 판명난 것으로는 그가 자기 남편이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자기를 사찰한 독일 비밀경찰의 정보원이었어요. 결국 이 부부는 별거했고 이혼했습니다. 그 남편은 그 후 작은 도시로 이사 가서 전화도 없는 골방에서 쓸쓸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남편이 자기 부인에 대해서 그렇게 정보를 줄 때 무슨 생각으로 했겠습니까? 그 당시 동독이 강성할 때에는 그 스타지라는 정보기관에 붙어사는 것이 보다 좀 더 편하게 사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팔아서까지도 자기는 편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절대로 그 스타지 파일이 열리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안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했겠죠? 그런데 가장 은밀했던 그것조차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미련한 인간들은 수없이 많은 죄를 짓는 순간에 ‘절대로 모르리라’ 그 생각이 반드시 그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밝히 드러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쁜 방향으로 담대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면 저는 우리 믿는 백성들이 한번쯤은 죄를 짓고 걸려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얼마만큼 하나님이 깊이 보고 계시는 것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어느 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스타들입니다. TV 스타들이요. TV 스타들은 어떻습니까? 언제나 카메라가 따라 다니잖아요? 하늘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인공들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의 장편소설처럼 찍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심지어는 여러분의 가장 은밀한 생활까지도, 여러분의 화장실까지도 그 카메라가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도. 그 카메라가 어디 있을까요? 여러분이 골방에서 은밀하게 죄를 짓는다고 해 봅시다. 그 은밀한 곳에 누가 있습니까? 나는 있잖아요, 나. 그 하나님의 모든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바로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따라다닙니다. 저는 바로 그런 면을 한번 느끼고 나서 얼마나 섬칫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카메라가 있다니까요. 죽음에 직면했던 사람들 중에서 그 때 그 죽음 앞에 섰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는데, 죽음을 앞둔 순간에 어려서부터 자기가 이제까지 살던 모든 생활이 순식간에 필름처럼 지나가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필름이 어디 있었겠어요? 하늘에서 공수되어 왔을까요? 내 마음에 있다니까요. 그것을 우리가 부를 때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적 용어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양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양심이 있는데 그 양심은 마치 피부와 똑같은 거예요. 자, 뜨거운 주전자를 피부에 대면 피부가 아프죠? 아픈 게 피부에 남지 않습니까? 양심이 그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양심이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의 그 양심은 더 이상 선악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판단할 때마다 죄악적인 것, 이기적인 것만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럼, 세상에도 착한 일 많이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그 착한 일도 마음의 동기는 언제나 이기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는 일이 어차피 자기중심에서부터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건 죄라고 합니다. 양심은 나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게 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그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에게나 공통적으로 하는 기능은 바로 우리 모든 삶의 기록소, 저장소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에 내 인생 동안의 모든 것, 심지어는 내가 은밀한 곳에서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행한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대부분 죄악 중에 있을 때에는 그것을 잊으려고 합니다.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한번 죄를 지으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 다음에 또 그 죄를 짓게 됩니다. 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나중에는 죄에 대해서 무뎌집니다. 그 때는 이미 하나님이 환난과 아픔으로 다시 그를 잡기 전에는 그냥 죄악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나 말씀드리는 것이 믿는 사람들은 하여튼 잘못할 때마다 걸려야 돼요. 작은 잘못부터 걸려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게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알지 못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내 속에 저장소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내 마음 속의 양심이라는 저장소 속에 나의 모든 일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드러나서 거기에 관한 응벌을 받는 그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백성에게 있는 축복은 좀 다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절하게 어려움과 환난을 주십니다. 특히 우리가 잘못할 때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삶을 보시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그대로 응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내놓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 혹시 제가 모르고 있는 죄가 있습니까?” 알고 있는 죄는 바로 내놓고, 모르고 있는 죄가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사람이 점점 죄에 어두워지고 교만에 어두워지면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환난 중에 있으면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있으면 안 보이던 죄가 어느덧 보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내 자신이 낮아지니까요. 물높이가 낮아져야 물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듯이 내 속에 있는 교만함이 없어져야 내 속에 있는 진정한 내 자신의 잘못과 죄악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과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 중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환난이 임했다고 해서 전부 내가 잘못해서 환난이 임한 것은 아니에요. 내가 잘못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더욱 강건하게, 더욱 폭넓고, 더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인격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환난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내가 어려움을 당해봄으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게 하기 위해서 환난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많은 경우에는 내가 잘못해서 오는 환난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먼저 봐야 합니다. 먼저 보고 즉각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내놓고 구체적으로 회개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할 때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다시 주님의 피로 씻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한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하고 더 주의 은혜와 주의 축복을 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하는 일을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면이 느껴지는 순간, 믿는 백성들에게는 두려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축복의 하나님,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내게 악을 행해도 내가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응하십니다. 우리는 그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에 나오죠?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선으로 대해주면 그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여러분, 복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또 하나는 바로 그 보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행위들,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나도 잊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죠. 그러니까 반드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도 안 믿는 사람, 죄악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반드시 보응하시는 하나님 앞에 섰더라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의 핍박 중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그 백성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위로의 말입니다. 잠언 11장 31절에 보니까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악인과 죄인도 반드시 보응을 받고 의인도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디모데전서 4장 8절에도 보면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한 삶,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반드시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41편 1절을 봅시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기서 권고한다는 말은 뭡니까? 생각해주고 돌보아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빈약한 자를 돌봐주는 자는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반드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욱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이웃들, 우리와 함께한 빈약한 백성들, 빈약한 교회들,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는 선교지들,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으로 함께 나눌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을 다시 만날 때 더욱 그 면이 내게 힘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더욱 힘을 내서 주의 일을 하고, 헌신하고, 함께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의 시대를 사는 영적원리
삿01장 1~7절 / 김형준목사
한국의 현실을 풍자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천재 6명을 한국 땅에 한꺼번에 보냈습니다. 이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최근에 점검해 보았을 때 이들의 현재 삶이 이러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강남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학원 강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종래의 과학이론을 뒤집어엎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이론을 발표했지만 이를 시기한 학계와 선배 학자들로부터 건방지며 선배를 무시한다는 소리를 듣고 왕따를 당해서 굉장히 고심하다가 결국 머리가 좋은 이 사람은 어려운 길보다는 편한 길, 돈 버는 길을 선택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강남에 학원 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을 찾았더니 중국 음식점에서 자장면 배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그는 수학과 물리학 밖에 모르기 때문에 내신성적에 걸려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먹고 살아야겠기에 그가 택한 직업이 철가방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불쌍하게도 남한이 아니라 북한에서 태어났습니다. 북한에서 머리 좋은 사람이 하는 일은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일인데, 갈릴레오가 아무리 깊게 연구해 봐도 주체사상은 허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당국이 자아비판의 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자아비판의 자리에 서서 자기 마음과는 다른 주체사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고 내려오면서‘그래도 주체사상은 허구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들켜서 아오지 탄광에 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디슨은 예상대로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까다로운 각종 규제와 급행료 등에 걸려서 빛도 보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은 사업에 부도가 나서 지금 어디 사는지 하나님도 그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퀴리부인은 라듐을 발견해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좋지만 얼굴이 받쳐주지 못해서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특유의 근면성을 살려서 지금 재봉사로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호킹박사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절망 속에 빠져 살다가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는 서울시내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위 이야기에서 우리나라는 아무리 세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천재가 있다할지라도 그 천재를 쓰지 못하는 국가, 그리고 어떤 원칙이나 방향 없이 자기이익과 자기생각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한 글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TV가 미쳤다.’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얼마 전 KBS 공영방송국에서 가족들이 보는 시청시간대에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라는 드라마에서 맞벌이 아들 내외가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데, 그 손자를 어머니가 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이 아이가 국을 쏟아서 약간의 화상을 입어 응급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온 며느리가 응급실 앞에서 어머니의 뺨을 때립니다. 아이를 어떻게 봤냐고 합니다. 자기 아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맞을 짓을 했다고 하며 외면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방송에 나왔다는 것뿐이지 사실상 우리 현실 속에서 이것이 드라마의 소재로 될 만큼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국대 모 교수는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며 내전이었는데 미국이 개입해서 이 땅이 통일 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인명살상도 없고 전쟁도 1달 내에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01년 8.15행사 때 북한 김일성 생가만경대를 방문해서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계승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적화통일이 안된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는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분단이후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일입니다. 학자로서의 기본적인 객관성을 갖지 못한 일들이 대학에서도 일어납니다.
대통령은 연정을 주장해서 지금 문제의 초점이 어디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내용이 밝혀지면 우리나라 전체가 뒤집어질만한 도청테이프로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예전에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던 관행들이 이제는 전부 뒤집어 지고 있습니다. 자기기준을 절대시하고 싸우려고 들고 타협과 이해가 사라져가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갑니다. 시대가 미쳤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마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혼돈과 소용돌이 속에서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시대의 피해자이면서 시대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시대의 제물로 자기 시대를 끝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희생제물처럼 끌려가고 따라가는 종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진정한 가치를 찾아 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죄와 혼란이 가득한 이 땅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과 이 시대를 극복할 지혜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개인의 삶이나 가정 그리고 미래를 이 시대의 흐름대로가 아니라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시대로 만들었던 신앙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를 분별하며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돌려놓았던 그들의 삶의 모습은 오늘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없는 환경의 흐름 앞에서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잃고 방황해 본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대로 가면 내 인생은 그대로 끝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아니 지금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 시대를 극복할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끼신다면, 여러분의 삶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며 고통스러워하신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십시다. 나를 향해 우리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이 시대의 어두움을 헤쳐 나갈 지혜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가나안정복을 위해 앞장서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이후에 사랑과 지지를 받고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능력을 갖춘 지도자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혼란가운데 빠졌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목표가 사라지고, 나를 지탱하고 이끌어주었던 것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위기를 극복할 지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1절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의 지도자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그가 명하는 것을 행하며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엔 여호수아를 따라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가나안 거민들과 싸우며 지금까지 많은 영토를 얻고 정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이 있었고 가나안땅의 중심지에는 강력한 원주민이 여전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을 주도하고 앞장섰던 여호수아가 죽은 것입니다. 지도자를 잃어버린 이스라엘백성은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를 넘어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묻자와’ 라는 단어로 번역된 ‘샤알’은 단순히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강청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살길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라는 강한 의미입니다. 전환기의 혼란한 시기에 저들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요한 분깃점에 있을 때 자신들의 경험이나 판단과 주관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사울과 다윗 이 두 사람을 보면 허물과 실수가 많고 실패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버림받았고 다윗이 끝까지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끝까지 붙드시고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에게서 중요한 특징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삼상 23:2)입니다. 다윗은 반드시 그가 어려움과 곤고함이 있을 때, 그가 또 승리와 위대함이 있을 때, 그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실수와 범죄도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불행과 실패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의 불행과 실패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던 이유는 실패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절망과 낙심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역대하 16장에는 유대의 아사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신앙개혁을 통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 나갈 때 그의 길은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갔지만 그의 노년에 마지막으로 북쪽 이스라엘이 유다를 치러 올라왔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아람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청하여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역대하 16:7-10 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나니를 유다왕 아사에게 보내어서 사람을 의지하는 아사왕의 앞에는 전쟁이 있으리라고 예언 합니다.
사람은 승리와 성공에 도취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만을 의지합니다. 돈과 사람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세상을 의지할 때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아 보이지만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는 실패한 것 같지만 그것이 결국은 승리의 길이 된다는 것을 봅니다.
잠언3:5-6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땅에 이르는 동안 너무나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의식주에 대한 훈련이 있었습니다. 전쟁도 있었습니다. 징계와 심판 등 너무나 많은 훈련이 있었지만 그 모든 훈련이 목적하는 것을 한가지로 요약하라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미래를 열어주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전환점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의지하고 나를 지탱해주던 것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무엇부터 하십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십시오. 지금까지 신앙생활에 있어서 수많은 성경공부와 설교, 그리고 영적전쟁과 다양한 경험들의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복된 길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도, 아말렉 앞에서도,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요단강 앞에서도, 여리고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요청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힘들고 무엇을 하여야 알지 못할 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갑시다.
둘째, 그들은 영적인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간청하는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습니다. 2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 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3절에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거의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며 전쟁에 나아갑니다. 안주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순종하며 따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유다지파에게 가라고 했을까요?
야곱의 아들들 중에 장자의 상징인 사람이 세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루우벤은 육적 장자이지만 그는 장자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육적으로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장자의 축복은 유다가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명하신 이유는 이 전쟁은 육적인 땅을 넓히는 싸움이 아니라 바로 영적싸움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일이며 가나안인을 심판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영적교훈을 전달하기위한 목적입니다.
창세기 49장 8-12절까지 보면 유다지파의 탁월함과 광야의 전쟁을 치루면서 가장 앞장서서 승리를 주도했던 지파이며 영적인 지경을 넓혀 가는데 가장 탁월한 지파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승리하더라도 단순히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증거하고 나타낼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영적인 일과 중요한 일을 맡깁니다. 일을 해 나갈 때 자기이익과 관계를 중요시하고, 또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자기자랑과 그것으로 인한 육적인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사역의 의미를 희석하며 오히려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쓰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일을 행하고도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고 여전히 영적인 교훈과 유산을 남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사람을 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한 백성이 누렸던 축복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생각이란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에게 왜 허락하셨는지를 하나님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들을,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영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는데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일을 좋아하며 잘 따라하지만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자기의 이익이 무엇인지 찾는 사람입니다. 돈, 명예, 이권을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는 참 많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를 통해서 자신이 얻을 이익만을 생각하다 결국 은 삼십냥에 그는 망하지 않았습니까? 그 재물이 불탈 때 함께 불타는 겁니다.
둘째로 나타나는 유형은 심리적인 지지, 만족감, 내가 일을 했다는 성취감 등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고, 주도권을 잡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겸손함이 없으니 교회 분란과 어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머지 한 유형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헌신을 통해 주님의 이름과 영광돌리기를 기뻐합니다. 영적인 사역에 유익이 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가나안 정복의 의미는 하나님 중심의 삶에 있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신 이유와 주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인 일을 하고 나서 육적인 것 즉 이 땅에 썩어질 것을 거두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보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왜 유다지파가 시므온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까? 영적전쟁은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유익해야 합니다. 서로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시므온지파인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같은 어머니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지파 중 가장 큰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전쟁을 충분히 수행 할 수 있는 지파입니다. 그러나 시므온지파는 가장 약한 지파이며 하나님께서 흩으셨던 지파였습니다. 유다지파는 시므온지파의 도움도 필요했지만 가장 약한 지파가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하여서 자기 땅의 분깃을 차지하지 못할 위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다지파는 시므온지파를 지명해서 함께 연합함으로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만 시므온지파를 배려하는 공동체성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의미를 생각하고 살피게 될 때에 영적인 연합과 공동체성에 대한 의식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자신들의 힘으로는 신앙생활과 믿음을 지킬 수없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아보는 영적 감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전쟁은 혼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철저히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연약한 지파를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목표와 목적을 나눌 수 있는 지파와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요즘 신앙생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적이 다르면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목적이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 보다는 자기유익과 이익, 인간관계를 더 철저히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오히려 가리게 됩니다. 우리가 왜 같은 비전과 사명을 나눕니까? 같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하신 일들을 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영적인 교훈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떠나 혼자서는 이 영적싸움에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셋째, 말씀을 배운 대로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4절에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모세나 여호수아가 함께 나갔을 때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에 승리를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여호수아 없이 어떻게 전쟁을 치를 것인지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말씀을 따라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적용하며 나아갔을 때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도니 베섹을 체포합니다. 초창기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의 명단에 들지 않고 숨어있었던 사람입니다. 요즘 같으면 빈 라덴 같은 사람입니다. 드러난 세력과 조직 그 배후에 숨어서 정체를 감추고 이스라엘백성들을 괴롭히고, 가나안 정복을 철저히 방해한 중심 세력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수하의 왕들의 엄지손가락 발가락을 잘라서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고 개처럼 자기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게 했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악독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이 바로 이 사람의 엄지발가락과 손가락을 자릅니다. 그 이유는 다시 공격의지를 상실시키는 것과 이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이 없으면 가나안땅의 우상숭배에 나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적용하면서 나가면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의 근본적인 숨겨진 문제들이 드러나게 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파악하게 되면서 결국은 승리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씀 따라 나갈 때 우리 삶에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로막았던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승리를 경험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적용하며 살아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들을 극복하며 승리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헤브론을 점령하고 아낙의 세 아들을 죽입니다. 이전에 모세와 여호수아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경험과 의지를 가지고 온전히 순종하여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베풀어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이들을 물리치며 가장 핵심이 되는 풍성한 땅을 누리게 됩니다. 두려움의 대상을 정복하고 승리의 땅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놀랍게 그들로 하여금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영적인 풍성함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을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 이면에 숨겨진 풍성함과 기쁨의 감격을 선물로 주십니다
마가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을 제자들에게 경험하게 하시고 이들을 건너편 벳세다로 향하게 합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를 타고 갔지만 거센 풍랑으로 파선되는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배위에 오르시자 풍랑은 잠잠해 집니다. 마가는 이 장면을 보며‘떡 떼시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마음이 둔하여 졌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풍랑가운데로 몰아 넣으셨을까요? 자신들이 경험하고 체험한 믿음을 다음 사건에 적용하여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떡 떼던 일을 통해서 능히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믿고 저들이 담대하기를 원하셨지만 여전히 눈앞의 일 때문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듣고 나면 그것을 가지고 그대로 한 번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겠다고 하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배운 말씀을 물질로 온전히 적용 해보는 것입니다. 그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내가 주일성수를 온전히 해보겠다고 결심할 때 부어지는 영적인 회복과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 우리를 지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드림으로 건강한 물질관을 갖게 하며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듣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나아가보십시오. 물론 전쟁이 있지만 승리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정한 맛은 바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에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길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끄는 삶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 합니까? 우리에게 철저하게 숨겨진 더 악한 것을 발견하여 결박하게 만듭니다. 두려워 떨던 아낙자손을 처형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예루살렘을 회복하게 됩니다
여러분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두려워서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일들을 극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내 삶에 회복해야할 영적인 예루살렘을 다시 찾기를 원한다면 바로 말씀을 따라 사는 적용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에 한 사람이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어떤 전기학자는 아브라함 링컨을 지칭할 때 성경과 기도로 시작한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링컨은 아홉 살 때 자기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물려준 성경을 가보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는“이 성경은 12만평의 땅을 물려주는 것 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너는 성경을 읽고 성경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다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라고 유언했습니다. 이후로 링컨은 성경 속에 있는 보화를 캐기 위해 말씀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9살에 어머니 낸시를 잃습니다. 17살 때 누나 세라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첫사랑에 실패했습니다. 23세에는 주 의회 선거에 나갔지만 낙선했습니다. 29세에 의원지명권을 상실했습니다. 41세에 링컨의 둘째 아들 에드워드가 사망했습니다. 42세에 아버지 토머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45세 상원의원 낙선, 47세 부통령지명권 상실, 49세 상원의원 재낙선, 51세 대통령에 취임, 52세 셋째아들 윌리엄 사망, 55세 대통령재선, 56세 1865년 4월 암살 등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그의 생애에 있었지만 그가 포기하지 않고 위대한 영적유산을 발견하고 노예를 해방시키며 미국을 새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지금도 링컨박물관에 가보면 그가 어려울 때 가장 사랑했던 성경구절이 펼쳐 있습니다.
‘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시편 34:4,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혼란한 시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에 내 삶의 운명 앞에 다시 한 번 도전하여 이 시대의 흐름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묻자와 가로되, 하나님께 물어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적인 의미를 되새겨 보십시다. 더 나가서 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삶, 적용하면서 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발견하며 그 삶을 살아가는 용기 있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삿01장 1~7절 / 조상호목사
1981년도의 코카콜라의 자산은 4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6년 만에 코카콜라의 자산이 무려 3500% 성장을 하여 150억 달러 정도로, 코카콜라의 주식 소유자들은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 수없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코카콜라 사는 GE(General Electric)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탁월한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코카콜라 사를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코카콜라의 폭발적인 성장 배경에는 로베르토 고이쥬에타(Roberto Goizueta)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1년에 코카콜라 사의 회장에 취임한 후, 암에 걸려 사망한 1997년 까지 16년 동안 코카콜라 사를 경영하였는데, 그에 대해서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그 사람만큼 아메리카 드림의 본 보기가 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그 자신이 믿었을 뿐 아니라, 그의 탁월한 리더쉽으로 인해 수천 명의 다른 이들이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는 자꾸 현실에 안주하려는 회사의 중역들에게 엄청난 목표 제시를 함으로써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코카콜라의 이미지 구축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는 항상 이렇게 외쳤습니다. “코카콜라의 경쟁상대는 다른 청량음료들이 아니라, 물이다. 물과 경쟁했을 때, 우리의 시장 점유율은 40%가 아니라 3%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우린 한참 멀었다.” 그렇게 최고 경영자가 말하니 회사 중역들은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전 세계에 퍼져있던 코카콜라는 더욱 공격적인 경영으로 ‘지구촌 시대 판매 전략’에 돌입했습니다. 그는 그의 경영 방침에 다음과 같은 모토를 내걸었습니다. “미국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코카콜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그 결과, 회사 전체 수입의 65%에 불과하던 해외 시장 수입이 1997년도에는 80%로 올라섰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새롭게 도전하는 것을 꺼립니다. 이미 익숙해진 것을 잘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또 다시 새롭게 도전하려면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지는 데까지 힘들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주부를 대상으로 한 TV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회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한 주부들에게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남편과 살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주부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현재의 남편과 절대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사회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이나 관람객 모두에게 “이 자리에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현재의 남편과 다시 살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 한 분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할머니를 보면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사회자는 진실한 사랑을 하며 사는 부부를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마이크를 대고 “할머니, 정말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남편과 살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럼 물론이지요. 우리 남편을 지금까지 길들이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지금의 남편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더욱 싫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변화되길 싫어합니다. 현재의 모습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겪어야 할 일이 너무 힘들고 귀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도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언제나 전진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코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옆으로 나왔습니까? 아니면 뒤로 쑥 들어갔습니까? 앞으로 튀어나왔습니다. 귀도 앞의 소리를 듣도록 앞을 향하여 열려져 있습니다. 말은 언제나 앞을 보고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눈은 머리 뒤통수에 달리지 아니하고 앞에 달려서 앞이나 위를 바라보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 자리에 머뭇거리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전진하지 못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사람이 없습니까? 혹시 우리 교회가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하며 이 자리에 멈췄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없습니까?
지난 10년 동안 우리 교회는 힘차게 달려왔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에벤에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도우셨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은 후퇴입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흘러갑니다. 나이는 들어갑니다. 머리는 하얀색으로 변하고, 주름은 하나둘 늘어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 자리에 서있는 것은 정체가 아니라, 후퇴임에 분명합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달려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에게 “새롭게 다시 시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홈컴밍데이를 주님의 은혜 가운데 마친 우리 교회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절 상반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여호수아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2~300만이나 되는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너고, 금성철벽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공략하여 꿈에 그리던 가나안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가나안 정복의 영웅입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죽은 것입니다. 믿었던 지도자가 사라진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많은데,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 지도자가 죽은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나안에 남아있는 잔존세력으로부터 반격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살다보면 이와 유사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개인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 민족이 어디로 가야 할 지, 나아가야 할 방향 감각을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하나님의 뜻을 물으라
먼저 기도로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새벽기도회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한국에서 평신도로서 롯데그룹 중앙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저는 아픔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그 아픔은 신입사원으로서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직장 상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저의 아픔은 다름 아닌 제가 개발한 것들이 제품화되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어 가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퇴근도 하지 않고 연구소에서 밤새도록 연구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었는데, 번번이 상사로부터 결재를 받지 못하여 심혈을 기울인 것이 수포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제가 만든 것을 제품으로 허락받기 위해 결재 받으러 직장상사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껌 연구실에 있는 박 모라는 입사 동료는 달랐습니다. 그 친구는 항상 결재판을 들고 콧노래 부르며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우수연구원상을, 그 친구는 종종 받곤 하였습니다. 비록 예수 믿는 저였지만, 그 친구를 보면서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느 날 입사동기인 그에게 좌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저의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 친구가 저의 고민을 듣더니 자기가 결재를 잘 받는 비결을 알려주었습니다. 자기는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의 상사에게 항상, 그리고 충분히 먼저 물어 본다는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롯데껌이 자기 같은 평연구원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의 상관과 충분히 토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제품은 대부분 결재를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스터 조,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모르는군.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직장 상사에게 항상 물어보라고. 상사가 원하는 방향을 정확히 모르면 아예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아. 먼저 물어보고 일을 시작하라고...” 저는 17~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의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그 때 그 친구의 말이 저의 인생에 있어서, 아니 저의 신앙생활과 사역에 있어서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민족의 지도자인 여호수아 장군이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들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남아있는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까? 말씀 해주십시오.”라고 그들은 기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매사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다시 묻자온대, 다윗이 가로되”(삼상 23장)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먼저 묻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방향을 지시하시면 그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때때로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를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의 장벽이 여러분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믿었던 사람이 여러분들로부터 등을 돌렸습니까?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생각처럼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까? 생각지 않게 물질의 문제가 생겼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기도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때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기도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나아가라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로 하여금 ‘앞장서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그 때 유다 지파는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하필이면 우리 지파입니까? 싫어요, 못해요”라고 하며 머뭇거렸습니까? 아닙니다. 4절 상반절을 보면 “유다가 올라가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올라갔다고 합니까? 유다 지파가 올라갔습니다.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음으로 전진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부터 3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인생,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곳 뉴질랜드나 호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럭비입니다. 저는 이 럭비 경기가 매우 성경적인 경기라고 생각합니다. 럭비에는 후퇴가 없습니다. 축구에는 작전상 후퇴가 있습니다. 볼을 가진 선수가 볼을 뒤로 돌리며 드리블 할 수 있지만, 럭비 경기에서는 볼을 가진 선수는 대부분 뒤로 가지 않습니다. 1미터라도 전진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합니다. 상대편에서 태클을 걸어도 죽자 살자 앞으로 전진 합니다. 여러 명이 에워싸고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럭비 경기에 임하는 자세와 히브리서 10장의 정신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도전정신이 없습니다. 항상 입만 열면 “할 수 없어요, 못해요, 안돼요, 무서워요, 어려워요, 살 떨려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해요”라고 말하는데, 이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믿음이 연약한 것처럼 “좋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새벽기도회에서 오세아니아 총회장이시자 시드니순복음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정바울목사님의 사모님이신 홍금란 전도사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 목사님(정목사님)은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한번 믿음으로 결정하면 우직하리만큼 끝까지 나아갑니다.” 저는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우리 정목사님을 크게 쓰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지파를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4절부터 6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유다 지파가 올라가매 누가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였다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적들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셨습니다. 유다 지파가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맛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계산기 잘 두드리는 사람보다, 믿음으로 전진하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직하지만 멈추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경주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시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다른 사람과 동역하라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세 번째 비결은 다른 사람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는 자기의 믿음만을 앞세우며 자충우돌 하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를 구했습니다. 시므온 지파에게 ‘나와 함께 올라가자. 우리와 함께 올라가서 그들과 싸우자’라고 하며 동역자 되기를 간청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홀로’를 부르짖으며 솔로로 뛰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더불어 일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과 25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마지막 때에는 사단이 자꾸 모이지 못하게 하는데, 믿는 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모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여서 더불어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에 승리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운동선수 중에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은 마이클 조던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프로 농구 선수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농구 황제’라고 부릅니다. 미국의 프로 농구계에 뛰어난 선수들이 많습니다만, 마이클 조던처럼 ‘황제’라고 불리는 선수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가 황제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기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농구 황제라고 부르는 그 이유는 훌륭한 리더쉽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 미 프로 농구에 입문했을 때, 혼자서 평균 3~40점, 많을 때는 5~60점을 종종 올리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자기가 높은 점수를 올리는 날, 자기 팀이 경기에 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점수를 20점대로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패스하는 것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경기에 이기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친구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많은 선수들이 그와 함께 농구 경기를 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경기를 하면 자신의 플레이가 훨씬 더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멋진 패스를 많이 합니다. 그는 동료들의 기량을 돋보이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농구 황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약점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모르고 스스로 유능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장점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약점에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론과 동역할 수 있었고 여호수아와 훌과 같이 훌륭한 일꾼들과 동역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2~300만이나 되는 수많은 백성들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에도 모세와 같이, 유다 지파와 같이 동역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더불어 섬겨주는, 가슴이 넓은 사람을 오늘날에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4) 남겨놓은 일을 하라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네 번째 비결은 남겨 놓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말은 과거를 묻어버리고 완전히 과거와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정리하지 않고 결코 새로운 것을 도전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도자인 여호수아 장군의 지휘아래 대부분의 가나안 땅을 정복했지만, 유대 땅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하나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요새 이름은 ‘베섹’입니다. 베섹의 무사들은 매우 용맹스럽고 매우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7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여기 ‘아도니’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도니 베섹’이란 ‘베섹의 왕’을 뜻합니다. 베섹의 왕은 70여명의 왕의 엄지 발가락을 찍어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밥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주워 먹도록 하는 등, 매우 잔인한 무사였고 대단한 용기와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지역들은 점령하면서도 이 베섹은 정복하지 않고 남겨 둔 것입니다. 베섹은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숙제였습니다. 남겨놓은, 아니 꼭 해야 할 과제요 넘어야 할 산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섹을 점령하지 않고 놓아두고서는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남겨두었던 그 숙제를 해결하기로 결심을 하고, 그곳을 공격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베섹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남겨 놓은 베섹이 무엇입니까?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먼저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남겨 놓은 일들을 하십시오. 그 일이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물질의 채무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잘라버려야 할 악한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잊어버려야 할 가슴 아픈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늦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남겨 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면 그것을 푸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숙제부터 하라. 숙제를 끝내고 놀아라!” 부모님들이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숙제를 끝내지 않고 놀 때에는 마음이 불편하지만, 숙제를 끝내고 나면 마음 편하게 놀 수 있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듣기를 싫어해도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꼭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다면 그것을 하시기 바랍니다. 남겨놓은 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유머 한 가지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노새 한 마리가 두개의 큰 건초 더미 사이에서 굶어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왜 노새가 양쪽에 먹을 수 있는 건초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굶어 죽었을까요? 그 노새는 고민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쪽 건초를 먹을까? 아니면 저쪽 풀을 먹을까? 고민하며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굶어죽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쯤 서 계십니까? 머뭇거리며 주저앉아 고민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앉아서 넋두리만 늘어놓으며 원망과 불평만 일삼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롭게 다시 시작을 하라!”,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영향력을 주도하는 신앙
삿 1장 1~7절 / 박정식목사
예수께서 떠나시고 난 다음에 그의 사도들과 교회가 그의 비젼을 가슴에 담고 그의 모든 영향력을 이 땅에서 회복해 나간다. 동일한 맥락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더 이상 모세의 시대가 아닙니다. 더 이상 여호수아의 시대도 아닙니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만의 시대도 아닙니다. 이제는 그 모든 시대가 우리에게 계승됐습니다. 이제는 나의 시대입니다. 내가 모든 하나님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과 제가 하나님 역사의 주역으로 뛰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비전이예요. 그것이 하나님 공동체의 거룩한 열정이 되어야만 합니다.
지난봄에 제자훈련 컨벤션이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거기 우리 동역자들하고 함께 참여를 했습니다. 전국에서 제자훈련 잘하는 교회들이 모여서 비젼을 나누고 앞으로 20세기는 어떻게 열어 갈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그런 여러 가지 웍샵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에 같이 모여서 서로 기도하고 서로 받은바된 은혜를 나누다가 문득 한분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는 될 수 없겠죠. 제가 그럼요 할려다가 잠깐 생각을 했습니다. 함부로 말하다간 또. 조금 생각해보고 그렇겠네요. 세계에서 제일 사이즈가 큰 어떤 건물을 갖지 못하겠지요. 또 생각하다가 그렇겠지요. 한가지는 가능할 것 같네요. 그래서 제가 뭐냐 그랬더니 평신도들이 동역자가 되어서 정말 하나님의 비전을 이 땅에 펼쳐가는 유일무일한 교회 그거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게 제 가슴에 굉장히 도전이 되었어요. 아니 목사가 가질 비젼을 저 양반이 대신 가졌어요. 하긴 제 가슴에 붙은 비전을 그분이 지금 자기 가슴에 이식시키고 그것을 고백하는 거겠지요. 그 때 함께 기도했어요. 은혜의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는 될 수도 없지만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큰 어떤 건물 자랑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하고 싶다. 그건 뭐냐하면 유일무일한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그들이 모든 사람을 서로 섬기고 그들을 도와서 함께 동역하는 그런 공동체만은 가능하지 않겠느냐. 이미 한국교회에서는 초유의 교회거든요. 조금만 더 넓히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멋진 비전을 함께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거기에 있어요. 모세 시대 지나갔고, 여호수아의 시대 지나갔고 이제는 하나님이 유대 지파와 이스라엘 모든 족속들에게 이젠 너희가 그 비전을 가슴에 담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현장을 우리 앞에 펼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절과 이절 다시 한번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누가 먼저 올라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나안 정복이 완성되지는 않았어요. 이 과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강한 적들과 전투와 전투를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모세나 여호수아가 진격하면 그들은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는 누가 올라갈것인가.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먼저 올라갈 것인가. 서로간에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펴보기 어려웠던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일절 말씀에 담겨 있는데 한번 자세히 읽어 보실래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다시 한번.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바로 이 단어입니다. 지금까지는 모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 보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만 경험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단어입니다. 우리가 모세의 스토리를 보면은 그가 항상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하시고 이런 패턴이 계속되지요.
여호수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대답하시고 백성들은 거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전혀 새로운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을 쳐야하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그런 민족으로 좀 탈바꿈한 것입니다. 물론 끝까지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지금 현시점에서는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 그 위기를 그들이 선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현실에서 하나님께 무릎꿇고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가오리이까.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지파가 먼저 가라?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는 거예요. 누가 최선봉에 설 것인가, 누가 위기 앞에 직면할 것인가, 누가 이 모든 난간을 무릎 쓰고 도전할 것인가. 그렇게 하나님께 물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지파가 갈지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다 지파가 여호수아의 모든 지도력을 계승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서서 이제는 그 지파가 위기와 문제를 향해서 도전해 나가고 있는 현장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향력이 증폭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을 계승하고 있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한 족속에게로, 그 족속에게서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전이되어가는 그 현장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현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비전을 품고 아무리 많은 믿음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현장이 없어져 버리면 그 신앙은 사실 대수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현장이 있습니다.
이미 민수기 14장에 보게되면 예전부터 이들은 이런 비전이 가슴속에 있었어요. 그들의 족장이었던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하잖아요. 여호수아와 더불어 함께 보고를 하는데 모든 사람은 열명의 보고를 받아 들여서 우리는 못 들어간다. 그 땅은 너무나 우리를 삼키는 땅이 돼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 대적들을 이길 수 없다. 자포자기에 빠집니다. 그러나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 앞에 강권하지요. 그들의 신은 그들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거역하지말라. 그럴때 어쩌면 유대 지파는 처음에는 반기를 들었지만 갈렙의 음성을 듣고 그의 거룩한 영향력에 의해서 가슴에 뭔가 비전을 담았을지도 몰라요. 탁월한 지파입니다. 유다지파입니다. 그런데 이 영향력이 어디까지 계승됩니까? 한 사람의 영향력이 지파 전체에 미치지만 나중에 보면 그 영향력이 결국 유다지파 전체 속에서 드러나는 현장을 보게됩니다.
여호수아 14장입니다. 12절 말씀에 이제 가나안 정복을 실시하는 상황에서 모든 지파가 서로 눈치만봐요. 누가 기득권을 챙길 것인가. 누가 더 좋은 땅, 노른자위를 차지할 것인가. 서로간에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그때 유다 지파의 족장이었던 갈렙이 앞으로 나서서 지금 내 나이가 팔십오센데 이제나 저제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게 산지를 주십시오. 하고 가장 강대한 적군들이 살고 있는 유대 산지를 요구하잖아요. 이게 리더 혼자 되는 이야기입니까? 안되지요. 결국 그 리더십이 발휘되려면 따르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어야되요. 좋은 리더는 반드시 좋은 팔로우들이 있어야되요. 바꿔 말하면 좋은 어떤 지도자는 반드시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는 조력자들이 있어야되요. 그렇지않으면 그 리더십은 의미가 없는거예요. 결국 갈렙이 그렇게 파격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유대족속이 그의 뒷받침을 했기 때문입니다. 산지를 향해서 진군할 수 있는 그런 열망과 비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예요. 지금도 유대지파가 적진을 향해서 제일 먼저 앞서가는 현장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지파는 나중에 메시아가 오시는 지파입니다. 다윗의 지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도해 나가고 세상을 선도해 나가는 그런 지파입니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그들의 가슴속에 그런 비젼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당신의 가슴에 있는 믿음의 현장을 보이십시오. 당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현장을 보이십시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을 느끼고 있다면 그 현장이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어야되요.
우리 한국 축구의 현장을 내일 모레 보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거스 히딩크 감독을 영입해 왔을 때 사람들이 굉장히 좀 들떠 있었잖아요. 기대했습니다. 저렇게 유명한 명장을 영입했으니까 하루 아침에 뭐가 될거다. 그런데 참 과정은 참혹했지않습니까? 작년까지만해도 별볼일 없었어요. 그 경기에서 5대 0 아닙니까. 프랑스에서 그래서 우리 한국팀 별명이 5대 빵. 프랑스에서도 오대 빵인데 거기서도 5대 0으로 졌어요. 그런데 점점더 히딩크의 인기가 올라가는 이유가 뭐예요? 아 잘한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 예전과는 다른 플레이를 보고 아주 굉장히 도전적이고 뭔가 진취적이지 않습니까. 끝까지 끝장을 보는. 그래서 얼마전에 보니까 프랑스전 보면서도 우리가 막 열광하고 졌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봤고. 앞으로봐도 싸울때 좀 그런 가능성을 봤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아무리 잘하면 뭐합니까 내일 모레 깨지면. 내일 모레가 중요한거예요. 내일 모레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히딩크의 운명이 달려있고 우리 국가 대표의 운명이 달려 있어요. 물론 한번 지는 것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때 검증이 될 것입니다. 그때 이기면 우리는 열광할 것입니다. 야, 정말 잘했구나. 그런데 그때 지면 지금까지의 모든 연습 게임이 다 수포입니다. 프랑스와 싸우고 난 다음에 그 프랑스의 그 감독이 기분 나쁜 소리를 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한국팀이 잘 싸웠다. 그러나 한국팀은 최선을 다한 것 같다. 여운을 남겼어요. 자기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진거예요. 항상 운동 선수에게 따라 다니는 중요한 구호가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인데 연습을 연습처럼 했으니까 실전도 망치는 거지요. 현장이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현장들.
여러분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일생동안 경험해 오셨습니까. 그 현장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그 현장이 어디입니까. 유다지파처럼 선봉에 서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처럼 위기를 자신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처럼 문제를, 더 어려운 것들을 자신이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탁월한 리더십입니다. 교회의 정말 위대한 동역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까지 모든 열정과 헌신에 대해서 뭔가 기득권을 갖고 대접받고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더 낮은데로 내려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섬겨서 어떻게 이 영향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폭시킬 것인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도와서 그들을 나와 동일한 믿음의 동역자로 세워갈 때 거기에 위대한 리더십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교회도 보면 그런 동역자들이 참 많아요. 어떤 분들 보면은 베델성서대학 같은 것 할 때 애 업고 여기서 왔다갔다해요. 여러분 남의 애 보기 얼마나 힘든줄 아십니까. 그게 무슨 벼슬입니까. 순장인지 된장인지. 그런데 순원들에게 뭔가 말씀 배우게 해 주고 싶어서 그 애 업고 말이지요. 아니 그분이 말씀 배우면 내 배가 부릅니까. 그분이 달라지면 내 인생이 뭔가 달라집니까. 그 시간에 책이나 보시고 그 시간에 쉴수도 있잖아요. 애 업고 두시간 세시간 그렇게 고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한 영혼에 대한 열망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이 날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 누군가가 날 위해서 복음을 증거해 주고 나 위해서 누군가 섬겨줬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믿음이 섰다. 이제는 내가 그 일을 감당해야된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전 세계에 확장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을수록, 하나님을 가슴에 품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할수록 섬기는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그건 말로만이 아닙니다. 더 힘든 일을 자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시간 내내 삑삑해서 저 위에 계신 분들이 얼굴도 제대로 못드는 것 같은데 저분들이 무슨 죄인입니까, 월급 받습니까. 어제 밤 늦게 와서 이것저것 다 점검하고 기계가 문제가 있는걸 어떡하겠어요. 그러나 좀 있다 보긴 합시다. 저분들 다 헌신자들이예요. 다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지금 편안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땀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공동체의 가치예요. 누군가가 아이들을 섬기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항상 일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많이 도출이되요. 이런 문제 저런 문제. 물론 그것도 우리가 좀더 창의적으로 접근하고 좀더 좋게 만들어가야되겠지만 내가 직접 뛰는게 중요합니다. 당신 눈에 그 일이 거슬린다면 당신이 그 일을 행하십시오. 아마 당신은 그런 은사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서로 상호사역하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 믿음의 현장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이것저것 다 못하신다면 주차라도 좀 잘해 주십시오. 제가 2부 예배때 그런 부탁을 드렸습니다. 은혜의 동역자들은 교회 반경 100m 사이에 차를 주차시키지 말자. 주차장은 초신자들이나 아니면 정말 급해서 오신 분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서 비워두자. 아직도 우리 동네에는요 그래도 그런 공간이 좀 있는 편이예요. 오분만 걸어가면 저 문학산, 연경산 약수터 앞에 널따란 주차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놓으셨어요. 백대는 충분할겁니다. 2분만 걸어가시면 저 동진 아파트 옆에 공영 주차장이 또 하나 있습니다. 수십대가 설 수 있는 곳입니다. 아니 조금만 더 걸어가시면 큰 간석도로 주변에 주일날은 그렇게 차가 붐비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차를 파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교회 옆에는 주차하지 마십시오. 교회 진입로, 이 도로는 우리만 쓰는게 아니지요. 아파트 주민들이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주일마다 아마 짜증 많이 낼거예요. 이놈의 교회 때문에. 다 우리가 욕먹는 것 아니겠어요. 또 아이들이 다니다가 차가 있으면 위험합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잖아요. 우리가 조금만 양보하고 조금만 배려하면 우리 모두가 함께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어떤 일이 더 위대하냐, 어떤게 더 초라하냐 그런게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공동체와 하나님의 비전을 더 이루기 위해서 현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을 찾아가실 때 영유아부에서 말한마디 잘해주십시오. 너무 고마워요. 애가요 너무 좋아졌어요. 여기 쥐어 뜯기고 왔어도 참 좋아졌어요. 그렇게할 때 그분들이 살맛나지 않습니까. 어떤분은 이렇게 뜯겨가지고 애가 좀 상처가 났는데 서로 다른 반응을 보여요. 어떤 분들은 이것땜에 그냥 막 교회까지도 안다닐까보다 싶은 마음을 갖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선생님들이 미안하잖아요. 아니 애들이 이것 뜯는 것 이거는 번개같아요. 기는 애들도 뜯을거는 번개같이 뜯어요. 언제보면 물고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애본 공은 없는거예요. 약 사다가 발라주고 막 근심하는데 거기다대고 괜찮아요 한마디 하면 될 것 가지고 어떡해, 어떡해 해버리면 얼마나 엉어리가 지겠습니까.
우린 함께 동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장이 있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 위해 죽으셨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여러분 개개인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목사 위해서는 백배를 죽어 주시고 여러분 위해서는 한배를 죽어 주신게 아니라 우리 개개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풍성한 것입니다. 그 믿음을 우리가 소유했습니다.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위한 현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장을 서는 현장, 먼저 희생하는 현장, 인내와 섬김의 현장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3절 말씀 읽겠습니다.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본문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세 번 나오지요. 그것은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동역자 신앙입니다. 유다 지파가 올라가는데 자기들은 약해요. 너무나 버거운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거부하거나 그것 때문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지파를 거룩한 열정으로 변화시키고 그들을 거룩한 열정으로 도전하게해서 함께 올라갑니다. 위대한 것은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유다가 선봉에 서고 자기들만이 그 가나안 정복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선봉에 섰지만 다른 지파들,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서 함께 그 일을 하도록 앞장세운 것입니다.
여러분, 시므온 지파가 본문에 나오지요.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시므온 지파가 있는가 싶을 만큼 사실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지파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보면 유다지파가 가나안 땅을 더 정복할 때 그들이 동역자로 섭니다. 시므온 지파입니다. 무명의 지파지만 유다지파와 동일하게 어깨를 나란히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일구는 현장에 그들이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전쟁의 현장에, 헌신의 현장에 우리는 함께 가야만 합니다. 함께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더 은혜를 증폭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폭시키고 격려와 위로를 통해서 위대한 비전을 일구기 위해서 끊임없는 도전과 끊임없는 동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교회 동역자들이 무슨 일을 할때는요 저도 일은 안해요. 그런데 옆에라도 있어주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니까. 어젯밤에 저분들이 왜 이렇게 음향에 문제가 생겼느냐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러분 화요일날 축구시합 보여드릴라고 저 무대 맨 뒤에 있던 스크린을 앞으로 달았어요. 여러분의 눈에는 안보여요. 화요일날 내려오시면 스크린이 내려올겁니다. 어디서 이게 나타났나 싶겠지만 저 뒤에서 붙어 있어서 쓸모가 없었어요. 2년동안 쓸모없이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이제 앞으로 끄집어 내리는데 무게가 엄청난 무게입니다. 그걸 구슬땀을 흘려 가면서 어제 다시 밧줄로 끌어 올려서 고정시켜서 앞쪽에다가 옮겨 달았어요. 그런데 그거 하는데 저도 옆에 있어야되요. 통닭 사주지도 않지만 있어야되요. 왜냐하면 그래야 그분들이 물론 저 없어도 잘 할걸 알지만 그래야만 뭔가 교감이 있잖아요. 괜히와서 제가 한마디하면 괜히 잔소리로 들릴수도 있지만 그래야만 서로간에 오가는 교감이 있잖아요. 이렇게 힘들게 한다는걸 저도 느껴야만 가치가 있잖아요. 어떨때는 돈주고 시키는게 편할 때도 있어요. 그럼 저는 거들떠도 안봐도되요.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거든요. 함께 뛰는 곳이예요. 내가 못하더라도 입으로라도. 못하더라도 마음으로라도 함께 뛰는 곳입니다. 그럴때 함께 승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절부터 보겠습니다. 읽습니다.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
유다와 시므온이 아도니 베섹을 칩니다. 아도니 베섹은 베섹의 주인 그런 뜻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지역의 정복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전 지역을 통일했던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한때는 칠십명의 임금들을 잡아서 그들의 수족을 끊고 자기 상 앞에서 주워 먹도록 만들었던 그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 강대한 사람을 무너뜨리고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한 것입니다.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함께 했기 때문에 그 승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함께 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 넘치는 현장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도적인 영향력을 통해서 누리는 승리의 현장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22절 말씀 볼까요. 읽습니다.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여러분 요셉 족속도 이제는 올라갑니다. 뭐가 뛰니까 뭐도 뛴다고. 유다지파와 시므온이 올라가서 아도니 베섹을 치고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니까 요셉 지파도 이제는 올라갑니다.
요셉 지파가 어떤 문제였습니까. 여호수아 18장에 보게되면은 그들에게 제일 좋은 땅을 뽑아서 나눠줌에도 불구하고 너무 좁다, 정복하지도 않으면서 좁다고 그래요. 그랬더니 여호수아가 너희는 인구도 많다, 힘도 있으니까 너희가 더 많이 차지하라. 가서 정복하라. 여전히 불평만 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동역하고 그런 비전을 이루었을 때 이제 뒤따라 올라갑니다.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모든 동역자들이 함께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서 매진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또 한사람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성장시키고 그들을 동역자로 세워가는 현장입니다.
폴 스티븐스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는데 이분은 평신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쓴 책 가운데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좀 제목이 이상하지요. 평신도가 사라졌다. 교회안에 평신도가 없으면 도대체 목사만 있으라는거냐. 그런데 그분의 말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동역자라는 개념보다는 난 평신도야하는 것, 그 잘못된 이름 밑에 자기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는 월급 드리는 목사가 하는 것이고 교역자가 하는 것이지 나는 안하는거야. 자기들은 손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의 지론이 뭐냐하면 목회자나 평신도나 할것없이 주님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 이상 평신도가 아니라 동역자가 존재하는 교회예요.
교회는 사역자들이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영향력은 점점 증폭되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한사람 불러다 쓰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닙니다. 지금도 광고 때리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수 있어요.
예전에도 여전도사님 좀 구할라고 광고 냈더니 면접 보는데만 며칠 걸렸어요. 좀 있으면 전화와서 만나야되고. 한 사람을 세워서 그들과 더불어 동역하는 것은 결코 쉬운게 아니예요. 몇 년 걸리는 일이예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십시오.
결론을 맺습니다. 21세기는 어쩌면 위기의 시대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위기가 우리에게는 위대한 가능성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의 패러다임이 잘못 형성되면 그 위기 앞에 무너질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때에 우리를 구원 하시고 이때에 은혜의 교회에 소속하게 하시고 이때에 하나님이 나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나를 구원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이 시대에 존재한다는 이유가 어디에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그냥 부름받은 특권에만 젖어있고 구원 받은 것에만 만족하고 포기하고 나의 삶을 유린당하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십자가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감격하고 비록 적지만 나도 누군가를 섬겨서 그들을 동역자로 세워야 되겠다. 그것이 비단 순장되고 어떤 스텝 리더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방 내에서도 약한 지체를 도와주고 그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격려해서 신앙의 어떤 정상에 서게하는 그런 거룩한 마인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교회 전체는 얼마나 멋진 교회가 되겠습니까. 제가 다 여러분 뒷바라지 해 드릴수 없습니다. 이번 주간에 장례식 좀 했다고 제 목이 쉬어버렸잖아요. 저는 제 약한걸 압니다. 저 못지않게 탁월한 동역자들이 은혜의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함께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동역자들. 우리가 그렇게 살아 갈 때 우리의 다음 세대는 설 것입니다. 그 영향력이 전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야만 우리의 미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만큼 중요합니까. 결론은 주역이 바뀌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예수 그리스도, 사도들. 아닙니다. 이제는 내가 제외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제외되면 나의 다음대도 없습니다. 저는 항상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서 제가 제외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건 제 바램입니다. 제가 제외되지 않을 때 그 영향력이 내 다음대에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안에 그런 비전들이 날마다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셨음을 찬송합니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 없고 그다지 부요한 환경도 아니며 세상에서 그렇게 위대하고 유명한 사람은 못될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얼만큼 중요한 존재인가를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삶의 정체성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부름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의 동역자들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섬기고 나를 위해 복음을 증거함으로 내가 여기에 존재합니다. 이제는 내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응답하게 하셔서 나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향력과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동역해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성장시켜 갈 뿐 아니라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 다음대 또 다음대까지 완성해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 믿음의 현장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현장들이 지금 삶의 현장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이까
삿 1장 1~7절 / 김성광목사
A. 먼저 올라감에 대하여
1. 먼저 올라감, 앞장 섬
2. 본문 배경 설명(삿 1:1~7)
B.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이까(먼저 올라가는 자의 축복)
1. 지도자가 되는 축복 - 지도자, 성공(창 49:8~10)
2. 자손 번창의 축복 - 자손이 가장 많음, 자손 번창(민 1:26~27)
3. 가장 넓은 땅을 얻는 축복 - 사업번창, 물질 축복(수 15:1~12)
4. 신앙의 축복 - 예수 그리스도가 나심(마 1:1~16)
C. 유다 지파처럼 항상 먼저 충성하고, 먼저 앞장서는
신앙을 가져서,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A. 먼저 올라감에 대하여
1. 먼저 올라감, 앞장 섬
오늘 설교의 주제는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중국에는 손문(孫文 ; 1866~1925)이 지은 ‘삼민주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인생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선지선각자’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생각하고, 먼저 알고, 먼저 깨달아서, 먼저 행동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역사를 이끌어 나갑니다.
둘째는 ‘후지후각자’로 다른 사람이 깨닫고 행동할 때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항상 한 단계 행동이 느립니다. 셋째는 ‘부지부각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앞서 있는지 뒤쳐져있는지 모르고 그냥 인생을 헛되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또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먼저 보고, 먼저 깨닫고, 먼저 손을 써서 앞서 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시작하고 앞서야지 뒤따라가겠다고 하면 기회가 오더라도 모두 놓쳐 버리고 한 평생을 뒤쳐지게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 1842~1910)는 “모든 일에 망설이는 것보다 불안전하다 할지라도 먼저 시작하는 것이 한 걸음 앞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 1889~1975)는 “당신이 첫 단계를 시작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를 이루어주신다.”라고 말했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 가락을 끊으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삿 1:1~7)
오늘 본문말씀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각각 분배하고 그 분배된 땅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할 때에 열두 지파 중에 누가 먼저 싸울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택하신 모세도, 여호수아도 죽은 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만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나아와 하나님께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이까’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유다는 반드시 싸움에서 승리하여 다른 모든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열 두 지파 중에 왜 유다지파가 먼저였을까요? 원래 유다지파는 그의 조상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네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장자가 첫 번째였는데 왜 열 두 아들 중에서 네 번째 아들이 장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먼저 행동하고, 먼저 축복을 받고, 먼저 승리하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까?
성경말씀을 보면 유다지파가 축복을 받은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행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앞장 서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유다지파는 용기가 있었고, 모험을 좋아했기에 항상 무엇을 할 때마다 앞장서서 행동에 옮겼습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빈 우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할 때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창 7:26~27)’라고 동생을 구출하는 데 선한 말을 먼저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민수기 10장 말씀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 광야를 진행할 때에도 열 두 지파 가운데 제일 먼저 앞장서서 출발한 지파가 바로 유다지파였습니다. ‘유다지파가 수두로 유다 자손 진 기에 속한 자들이 그 군대대로 진행하였으니(민 10:14)’
착한 말도 먼저하고, 행동도 먼저 한 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습니다. 전쟁도 먼저 했습니다. 점령도 먼저 했습니다. 먼저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고 모험도 해야 합니다. 만약 전쟁을 먼저 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 먼저 앞서 나가다가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지파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먼저 순종하고 행동하는 용기와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먼저 행동하는 믿음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유다지파는 먼저 앞장서 올라가서 먼저 싸워서 땅을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지파는 다른 지파보다 네 가지 축복을 먼저 받았습니다. 그 네 가지 축복 중 첫 번째는 유다지파 중에서 민족의 지도자, 왕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손들의 수가 많이 번창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것이고, 네 번째는 영적인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유다지파의 후손을 통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하느냐, 나중에 하느냐 하는 것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먼저 하는 것은 그만큼 먼저 특권을 누리고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B.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이까(먼저 올라가는 자의 축복)
1. 지도자가 되는 축복 - 지도자, 성공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8~10)
본문말씀에 하나님께서 유다지파에게 치리자의 지팡이가 항상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치리자의 지팡이’란 왕권을 말하는 것으로 유다지파에서 대를 이어 왕권을 계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윗도 유다지파요, 솔로몬 왕도 유다지파요, 남 유다는 계속해서 유다지파가 왕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이웃나라도 정복했습니다.
먼저 충성하고 먼저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먼저 나아가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3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재주가 많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열심을 내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먼저 일어난 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새벽에 먼저 일어난 새들이 벌레를 많이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성공도 먼저 합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 1732~1799)에게 한 신문기자가 “당신의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도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주가 더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굳이 다른 것이 있다면 매일 네 시에 일어난다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 일어납니다. 성도 여러분, 네 시에 일어나서 모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의사는 오늘날 현대병, 성인병의 75%는 게을러서 생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운동을 하지 않아서 생긴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이 병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내리는 벌이 바로 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게으르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템플대학의 러셀 콘웰(Russell Herman Conwell ; 1843~1925) 박사가 4000명의 백만장자를 조사하여 그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분석했는데, 첫째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만사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게으른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미국의 웬디스 햄버거는 아주 맛이 있어서 저도 미국에 가면 꼭 그 곳에 가서 햄버거를 먹을 정도입니다. 이 웬디스 햄버거의 창업자 데이브 토마스(Dave Thomas ; 1932~2002)는 ‘나는 10억 배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간증하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는 사생아 출신으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적도 없이 자랐습니다. 고등학교도 중퇴하였고,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60세가 될 때까지 간이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했습니다.
그의 할머니는 그에게 항상 “얘야, 무엇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고 더 헌신하거라.” 하고 늘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도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고 비록 금액은 많지 않지만 십일조도 먼저 드리고 신앙생활도 항상 먼저 했습니다.
그는 60세가 되어 햄버거 가게를 하나 차렸고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재료를 쓰고, 더 좋은 가격으로 더 맛있는 햄버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60세가 되어서부터 돈을 벌기 시작하여 6조원 규모의 대 기업가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나는 10억 배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60세에 시작하고 나서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더 정직하게 일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여러분도 모두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2. 자손 번창의 축복 - 자손이 가장 많음, 자손 번창
“유다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유다 지파의 계수함을 입은자가 칠만 사천육백 명이었더라”(민 1:26~27)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행군할 때에 인구의 수를 조사했는데, 본문말씀을 보니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장정들을 소유했었습니다. 열 두 지파들 중에서 유다지파가 가장 많은 청년군대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도 ‘먼저’의 축복입니다.
유다자손은 번창했습니다. 자손이 많으면 그 만큼 노동력도 많게 되고, 전쟁이나, 목축이나, 농사를 하는 데도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먼저 충성하는 믿음이 자손들까지 번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손이 번창하는 축복, 가문이 형통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똑같은 집안의 형제들이라도 그 집안에서 가장 자손이 잘 되느냐 하는 것도 먼저 열심을 내는 형제가 자손이 번창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 말씀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고 부지런하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먼저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제일 나중에 생각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생각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첫째로 생각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첫째로 생각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조지아주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스탠리(Thomas J. Stanley) 박사가 20년간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연구하였는데, 미국 부자들의 80%가 부모의 재산을 전혀 받지 않은 중산층이나 빈곤층의 가정에서 부자가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질적인 유산을 받는 것보다 정직, 근면, 신앙심과 같은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자녀가 장래가 훨씬 성공했다는 통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잣집 자녀들보다 중산층이나 또는 가난한 층, 정신적으로 무장한, 정신적으로 부지런한, 그런 가정의 자녀들이 더 크게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신문기사에서 방직공장 여직원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김미애 씨인데, 그는 경북 포항시 구룡포의 작은 어촌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12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배를 사서 사업을 하다 그만 부도가 나서 빚만 잔뜩 지고 가출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해녀 생활을 하며 추운 겨울에도 바다 속에 들어가 해삼, 전복, 조개들을 따다 다섯 남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뜻밖에도 자궁암 말기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석 달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교회를 다니자고 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앉혀놓고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먼저 와서 앞자리에 앉고,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부흥회 등 언제나 먼저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덕분인지 석 달이 아니라 사년을 더 사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는 친구를 따라 부산의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방직공장에서 공원 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은 비록 공장에서 일하지만 나에게도 학교를 다닐 기회를 주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 새벽마다 가서 기도하고 회사도 먼저 출근하고 또 예배도 먼저 가서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야간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 하나님께 기도드려 대학교에도 들어갔습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공부한 결과, 동아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장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졸업 후 사법시험을 치렀는데 당당히 합격을 했습니다.
고시에 합격을 하고 고향을 가니 고향에서는 잔치를 벌여주고, 교회에서도 목사님과 성도들이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머니가 항상 말씀해주신 대로 무엇이든지 먼저 하고, 기도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 1769~1821)은 “자식들의 운명은 그 어머니가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자녀들에게 “누구보다 먼저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해라” 하고 먼저 하는 것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3. 가장 넓은 땅을 얻는 축복 - 사업번창, 물질 축복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남단은 에돔 지경에 이르고 또 남으로 신 광야까지라 그 남편 경계는 염해의 극단 곧 남향한 해만에서부터 아그랍빔 비탈 남편으로 지나 신에 이르고 가데스 바네아 남편으로 올라가서 헤스론을 지나며 아달로 올라가서 돌이켜 갈가에 이르고 거기서 아스몬에 이르고 애굽 시내에 미치며 바다에 이르러 경계의 끝이 되나니 이것이 너희 남편 경계가 되리라 그 동편 경계는 염해니 요단 끝까지요 그 북편 경계는 요단 끝에 당한 해만에서부터 벧호글라로 올라가서 벧 아라바 북편을 지나 르우벤 자손 보한의 돌에 이르고 또 아골 골짜기에서부터 드빌을 지나 북으로 올라가서 강 남편에 있는 아둠밈 비탈 맞은편 길갈을 향하고 나아가 엔 세메스 물을 지나 엔로겔에 이르며 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올라가서 여부스 곧 예루살렘 남편 어깨에 이르며 또 힌놈의 골짜기 앞 서편에 있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나니 이곳은 르바임 골짜기 북편 끝이며 또 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넵도아 샘물까지 이르러 에브론 산 성읍들에 미치고 또 바알라 곧 기럇 여아림에 미치며 또 바알라에서부터 서편으로 돌이켜 세일 산에 이르러 여아림 산 곧 그살론 곁 북편에 이르고 또 벧 세메스로 내려가서 딤나로 지나고 또 에그론 북편으로 나아가 식그론에 이르러 바알 라산에 미치고 얍느엘에 이르나니 그 끝은 바다며 서편 경계는 대해와 그 해변이니 유다 자손이 그 가족대로 얻은 사면 경계가 이러하니라”(수 15:1~12)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각 지파별로 분배할 땅을 제비를 뽑았는데, 유다지파가 제일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지파는 블레셋 땅, 요단강 서편 가나안 지역의 절반이나 되는 큰 땅을 차지했습니다.
넓은 땅을 차지했다는 것은 재물의 축복을 말합니다. 유다지파는 가장 넓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먼저 충성하는 사람, 먼저 믿음을 갖는 사람, 먼저 행동에 옮기는 사람에게 반드시 성공과, 축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이 바쁘고, 사업이 바쁘다고 하여, 수요예배를 결석하고, 금요예배를 결석하는 사람, 이렇게 내 할 일을 다 한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주중에 예배를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먼저 생각해서 몸과 마음과 물질을 먼저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도 먼저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 1902~ )은 “하나님에 관한 일을 당신의 인생보다 더 귀중히 생각하면 성경에 약속된 모든 축복이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먼저 생각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도 나를 먼저 생각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이 세워진지 이제 수백 년 밖에 안되었지만 모든 분야에서 미국이 세계 강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과학적으로 모든 분야가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이 그렇게 강력한 국가가 되었습니까? 땅이 넓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남미도 크고, 캐나다도 크고, 중국도 크고, 시베리아도 크고, 아프리카도 큽니다. 그러나 미국이 강한 민족이 된 것은 그 조상 청교도들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민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미국에 제일 먼저 세운 것이 신학교였습니다. 주의 종을 양육하고, 성경교사, 하나님의 종들, 목사를 양육하기 위해 집안에서도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신학교에 보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의사, 변호사, 교수 등을 하고 남은 사람들을 신학교에 보내는데, 미국은 집안에서 가장 똑똑한 자녀를 신학교에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로 세웠던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가 세계에서 정상을 달리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면 교회도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좋은 자리는 주유소와 백화점만 들어서 있습니다. 좋은 자리에 교회를 세우는 민족이 가장 형통하고 축복받은 민족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God bless America!’ 하고 외칩니다. 대통령부터 초등학생들까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해서 어려운 위기를 잘 극복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이제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가장 좋은 자리에 짓고, 가장 똑똑한 사람이 주의 종이 되고, 하나님 앞에 먼저 예배를 드릴 때 기독교 국가가 되어 하나님 중심으로 뭉치고 단결하는 축복받는 선진국가가 될 것을 믿습니다.
김효숙 집사님은 23세에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착하기는 한데 경제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늘 고생하고 어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기도꾼이 되었습니다.
부부는 감자탕 집을 운영하면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감자탕 집을 하나 차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감자탕 집을 운영하고 셋방을 살며 조금씩 돈을 모아 400만원 정도의 돈이 모아졌을 때, 교회에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하나님, 저희도 성전 건축에 참여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린 뒤 그 돈을 성전건축헌금으로 모두 드렸습니다. “비록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보탬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며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네가 나의 집을 지으려 하는데 내가 내 자녀인 너에게 집을 주지 않겠느냐.”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시동생이 찾아오더니 “형수님,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하면서 왜 여태 집 한 채도 없습니까? 집 달라고 기도하세요.”라고 하며 아파트 분양 계약서를 한 장 내밀었습니다.
그는 그 계약서를 보며 아찔했습니다. 앞으로 내야 할 돈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집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분양계약서를 놓고 기도하는 순간부터 식당에 손님들이 밀려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장사가 잘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화장실도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습니다. 그래서 4개월 마다 4000만원의 중도금과 잔금을 지불해서 35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았습니다.
그는 “제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작은 예물을 드렸더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좋은 집을 주셨습니다.” 하고 간증했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를 손해 보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축복과 사랑과 은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축복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재물의 축복을 주십니다. 부자가 되게 만들어 주시고, 성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4. 신앙의 축복 - 예수 그리스도가 나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16)
유다족속은 영적인 축복, 신앙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유다족속의 혈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습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를 낳았고, 유다자손에서 다윗이 나왔고, 다윗의 자손에서 요셉이 나왔고, 요셉의 아내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열 두 지파 중에서도 유다 지파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영적인 축복이 나타납니다.
신앙의 축복, 영적인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축복을 받으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축복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말씀을 보면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눅 19:4)’ 예수님께서는 그런 삭개오를 보시고 부르셔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9절 말씀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열심히 해야 축복도, 영광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나에게 축복이 오겠지, 기적이 오겠지, 성공이 오겠지’ 하고 생각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일어나서 앞서 달려가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먼저 생각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 앞에 먼저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는 아마 당대에 가장 큰 재물의 축복을 받고 성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항상 40분 일찍 교회에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맨 앞줄에 앉아 예배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만나러 교회로 찾아온 사람들은 그의 뒤통수만 보다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기자가 그에게 “왜 당신은 항상 일찍 교회에 가십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앞자리를 놓칠까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평생 동안 그 앞자리를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종종 예배가 시작했는데도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성도님들이 계신데 이제 이 이야기를 듣고 달라질 것을 믿습니다. 대개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지각을 많이 하고, 성적이 안 좋은 사람들이 뒷자리에 앉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제 신앙생활, 교회생활만큼은 일찍 나와서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과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떤 물리학자들이 ‘영적인 파워’에 대해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는 것을 조사했는데, 설교할 때에 설교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파장이 울려 퍼지는 데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소나기처럼 쏟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뒷자리에는 이슬비처럼 보슬보슬 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앞자리에 앉은 것과 뒷자리에 앉은 것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 할지라도 결과가 다릅니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십일조도 많이 내고 축복을 받습니다. 앞으로는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모두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을 내고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유다지파처럼 항상 먼저 충성하고, 먼저 앞장서는 신앙을 가져서,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유다지파는 먼저 충성하고 먼저 봉사하고 먼저 앞장서서 네 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네 가지 축복을 받기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앞장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앞장서서 행동하는 사람은 첫 번째로 지도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왕들이 많이 나옵니다. 두 번째는 자손들이 번창하고 잘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넓은 땅을 차지해서 재물의 축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영적인 축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유다지파의 좋은 점, 특징을 잘 새기심으로 여러분의 가정생활, 직장생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 여러분의 앞날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축복받고 인정받고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