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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마당에서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내가 있다.
큰 키에 눈빛이 영롱한 양반집 대감이시다. 그 눈빛 한번이면 사나운 진돗개도 깨갱 꼬리를 내릴 판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체통지키지 못하시고 안채에서 끄응 앓는 소리가 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좌불안석.
"여보게,할멈! 벌써 해가 지고 있잖은가. 아직 기미는 보이지 않는가?"
엄한 할매만 붙잡고 방금 전에 했던 말 또 하신다.
뜨거운 세숫물에 무명천을 넣어 안채로 향하던 할매가 에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벌컥 안채의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늙으신 어머님이시다.
"이 무슨 망신살이야! 자고로 집안의 가장이 위신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삼대가 고생을 한다 하였다!"
"어머님!"
목소리만큼이나 날카로우신 얼굴로 자신의 꾸짖으신다.
마지못해 예에.하고 대청에 앉는데 순간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아기님 나오셨습니다!!!"
한양 땅에서 애 받기로 제일 간다는 산파의 목소리다!
너도나도 할거 없이 안채로 뛰어들어갔다. 그래 고추냐? 고추인게야?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갓난쟁이를 보신다.
산파가 히죽 웃으며 아기를 감싼 보자기를 풀었다.
"고추라뇨. 고운 아씨입니다요."
.
.
.
"어머님. 소자 들어가겠습니다."
보름달이 뜬 밤. 별채에 계신 어머님께 문안인사 여쭈러 스물 여섯의 남택원이 문을 열었다.
이부자리에 눕지도 않으시고 벽을 보고 앉아 계신다. 심히 언짢으심이었다.
"어머님. 보십시오. 얼마나 곱습니까. 산파의 말로는 안사람도 별 탈 없이 건강하답니다.
제 손으로 받은 갓난쟁이가 수십인데 이렇게 고운 아기는 처음이랍니다.
피부가 희고 고운 것이 제 어미를 꼭 빼닮지 않았습니까."
금실 수놓인 보에 쌓여 어린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다. 행여나 때라도 탈까 아비의 손이 조심스러웠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한 가문이다. 물론 국모를 다섯이나 만들기도 하였지만
그 피를 이어갈 사내가 끊어진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말이다!
긴 말 할거 없다. 관상이 좋은 첩실을 하나 들일 것이다."
여전히 시선은 벽을 향하신 채로 단호하셨다. 남택원이 화들짝 놀라 손사레를 쳤다.
"아니될 말씀이십니다, 어머님! 저와 제 처는 아직 젊고 건강하지 않습니까. 아이는 또다시 가지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될 말이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 몹쓸 불효자식을 보았나! 그러길래 내가 무어라 했느냐!
처음부터 성에 차지 않는 가문의 여식이라 했다! 그렇게 혼사를 막았거늘, 네 고집에 못이겨 들여앉혔더니
기껏 낳은 아이가 계집이렸다! 니가 기어이 이 어미 황천길 가는 꼴을 보고 싶어 하는 소리지 않느냐?!"
버럭 역정을 내시며 남택원에게 쏘아붙였다. 한마디 거역하는 일 없이 착하게 자라준 귀한 아들이
계집하나를 잘못만나 저리 팔불출이 되었구나, 생각할 수록 기가 차고 원통하여라!
급작스런 큰 소리에 잠든 아기씨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린다. 남택원이 서둘러 오냐오냐 달래기 바쁘다.
손으로는 둥가둥가 아이 달래기 여념 없으면서도 어머님께 하는 말씀은 못지 않게 단호했다.
"확실히 말씀 드리지만, 첩실은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저 이에게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어머님.
그럼 소자 물러갑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이,이,이!! 니가 정녕 천하의 상병신이 다 되었구나!!!"
죄송스러운 마음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컷다.
열달 배아파 낳은 자식이건만 어여쁘다 아껴주지는 못할 망정,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않으시다니.
배가 불러오는 동안에는 온갖 좋은 음식, 좋은 옷, 다 해주시더니 여자아이라고 저리 역정을 다 내신다.
남택원이 발걸음을 돌려 안채로 향했다.
"서방님..."
창백한 얼굴로 부인 손명옥이 일어나 앉는다.
"그대로 누워계시오! 아직 몸도 성치 않을진데..어서 누우시오."
"아닙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희미하게 웃어보이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요 철없는 핏덩이는 금방 또 잠이들어 새근새근 숨소리만 내고 있다.
"어머님께서...싫어하시지요."
아이를 바라보는 어린 마님의 눈가가 촉촉하다.
"그런 말씀 마시구려. 겉으로는 저러셔도 속으로는 부인과 아이가 모두 건강하니 안심하고 계실 것이오.."
"일부러 그리 말씀해주실 필요 없으십니다..기대가 크셨으니..마땅히 실망도 크시겠지요. 모두 부족한 제 탓입니다..."
한방울 눈물이 아이의 이마에 톡 떨어졌다. 남택원이 발끈하여 서둘러 부정했다.
"부인의 탓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이게 다 하늘의 뜻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소? 이 아이는 귀하게 자랄 것이외다.
내 이름도 지어주었소! 빛날 정(炡)에 어여쁠 연(娟)이오. 모든 사람들에게 어여쁨 받아 빛이 날 아이가 될 것이오!
자, 정연아...너도 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보시오! 정연이도 마음에 들었는지 힐끔 웃지 않았소?"
애써 부인을 위로하시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모진 시집살이 끝에 겨우 어리고 여리신 마님, 떡하니 아드님 낳아 이쁨 받으며 사시나 했더니
이젠 시집살이에 이어 아들 못낳은 죄인 취급을 받게 생겼으니 어찌 안쓰럽지 아니한가?
속 깊고 정 많은 그 집 일꾼들, 다들 제 일처럼 발만 동동 굴렀다.
정연이 뱃속에 있을때 그토록 자상하게 대해주시던 어머님, 한 순간에 싸늘하게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그래도 제 아들 놈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인데 어찌 남처럼 대할까.
체면이 있으시고, 고집이 고래심줄이라 아무도 몰래 아이가 대청에서 잠들어있으면 힐끔 보시고는
고 녀석 참, 여러 사내 울릴 홍안이로다. 얄쌍한 눈은 며느리 고 것 닮은 듯 하고, 코는 잘생긴 아들을 닮은 듯 하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양반의 품위를 지키려는지 잘 칭얼대지고 않고 밤 새 잘만 자고, 젖도 잘 물고, 히죽히죽 잘 웃는다.
슬그머니 안아올려 이쁜내강아지 하셨다가 빗자루질 하는 하인이라도 들어오면 서둘러 내려놓고는 큼큼 헛기침하시고
언제 그랬냐는듯 휑하니 치맛자락 날리시며 별채로 돌아가셨다.
하지면 며느리 손명옥에게는 여전히 겨울 시린 바람이다. 괜히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에이쯧쯧
혀를 차고 뒤돌아가버리고, 자꾸만 아랫것들을 시켜 애 잘 낳게 생긴 처녀 좀 찾아보라는 둥
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명령하셨다.
손명옥은 무서운 시어머니 앞에서 차마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며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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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정연아. 갑돌이라고, 할멈의 아들이란다. 오늘부터 우리집 식구가 되었으니 잘 대해주거라."
"..갓똘? 하멈 아들?"
겨우 입을 떼며 꽤죄죄한 몰골로 마당에 서 있는 남자아이를 가리킨다. 이제 겨우 세살된 정연아씨였다.
갑돌이라 불리우는 소년은 그래봤자 네살안팎. 남루한 차림새로 할멈 옆에서서 정연을 똑바로 쳐다본다.
어리지만 그 눈빛이 살아있다. 정연이 무서워서 제 어미 뒤로 숨는다.
"산 속에 버려진 아이라고? 기가 다 차는구나! 감히 예가 어느 가문이라고 거지새끼를 키워!!!
당장 내다 버리래두!!!"
예상대로 문제는 이 집의 안주인이시다. 게다가 못마땅해 죽겠는 며느리가 허락했다고 한다.
제 까짓게 무어라고 감히 허락을 한다는 말이냐 자식까지 낳았겠다 이제 아주 이 집의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려고 들다니!
손명옥은 심성이 곱고 여자다우며 순하디 순한 여자였다. 양반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넉넉치 못한 형편으로
어렵게 살았는데 그런 와중에 남택원과 인연이 닿아 시집을 오게 된 것이었다.
집안의 반대는 혹독할 정도였다. 허나 남택원은 하나밖에 없는 장손이었고 손명옥이 아니면 죽어도 혼인은 안할거라
몇번 자리까지 드러누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들인 며느리인 것이다.
본성은 고우나 마음이 심약하고 내성적이라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이었다.
바느질감을 나갔던 할멈이 돌아오는 길에 산 속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사내아이를 발견하고 동정하는 마음에
집으로 데려온 것인데, 자식하나 없이 남편을 여의고 몇십년을 과부로 혼자 살아온 할멈에게 큰 위로가 될 듯 싶었다.
또 사내아이를 못 낳은 저에게 왠지 하늘이 주신 선물로도 느껴졌다.
왠지 모를 인연을 느낀 탓이기도 했다.
그래서 데리고 살자한 것인데 어머님께서 또다시 역정을 내신다. 다시 한번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셈이었다.
"어머님, 제가 바른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이 집 자식으로 키우자는 것도 아니고, 할멈의 아들로 키우겠다는 겁니다.
아직 어려서 잘 가르치면 후에 우리 가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입니다! 부덕한 이 몸이 이리 부탁드립니다.
어머님! 그만 노여움을 푸시어요...."
별채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눈물로 호소했다. 어린 정연아씨는 그저 어머니,어머니 하며 옆에서 따라 울고,
할멈은 어린 갑돌을 껴안고 괜찮다, 걱정할 것 없다, 인제 너는 내 아들이다..읊조린다.
한참을 빌고 빌어 저녁때가 다 되서야 별채의 문이 끼익 열렸다.
사람은 안보이고 가느다란 목소리만 흘렀다.
"작은 사고 하나라도 쳤다가는 너까지 쫒겨날 줄 알아라. 못난 것...쯧쯧."
"어머님..!!!"
이렇게 갑돌까지 남택원의 집에 머물게 되었구나, 아이를 씻기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히니
그야말로 장성하면 장군감이로다. 힐끔 갑돌을 쳐다보던 안주인마님의 표정이 씁슬하다.
그 날 밤, 손명옥은 고뿔에 걸려 자리에 누웠다.
제법 독한 고뿔인지 이틀을 열에 시달려서 의원을 들였는데, 맥을 짚던 의원이 순간 움찔 놀란다.
"무슨 변고라고 생긴 것이오?"
남택원이 걱정스런 얼굴로 의원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내 저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영감. 부인께서는 회임을 하셨습니다."
그 밤이 어땠는지는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 기억할 정도로 한바탕 난리통이었으니,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제 우리 어린 마님 드디어 사람 대접 받고 살겠구나, 하늘이 도왔구나, 버선 발로 마당에서 춤을 추던 그런 시절이었다.
짧았던 행복이 겨우 열 달만에 커다란 시련으로 변하여 다가 오고 있는 줄도 까마득히 모르는 채.
첫댓글 나빠요 ㅠㅠ ㅠ ㅠ 착한 보리 엄마(?)를.... , 무튼 다음편도 기대할테니, 건필하세요^^
아~커다린 시련 선머슴같은 둘째딸 남보리탄생이군요.
둘째가 보리가 태어났으니.. 에구.. ... 담편 기대하고 있을께요.. 이렇게 일찍 오시다니.. 넘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