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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관 속의 소녀와 피를 뽑는 철관
주조룡은 남옥당과 두 동자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바라 보며 우
문한도를 향해 말했다.
"지금 저 자는 지칠 대로 지쳤으니 공력이 약해지지 않았겠소?
이 기회에 그를 죽였어야 했을 텐데... 지금 저 놈을 놓아 주는 것
은 호랑이를 산으로 올려 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소이다."
우문한도는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이놈은 나를 메어 놓으려고 하는구나. 어디 두고 보자.'
우문한도는 주조룡에게 되물었다.
"주형은 왜 그를 쫓지 않소?"
'이놈은 과연 죄가 많고 간사한 놈이로구나.'
주조룡은 내심 이렇게 생각하면서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겨 장한이
숨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금화영기를 주워 들고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대장주께서 우리들에게 빨리 장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보낸 것
으로 보아 장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보니 어서 돌아갑시다."
네 사람은 급히 길을 재촉하여 단숨에 백화산장으로 갔다. 넓은
대청에는 여러 사람이 무슨 중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서로 귓속말
을 주고받으며 앉아 있었다.
심목풍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네 사람이 들어 오는 것을 보
자 반가이 맞으며 금화부인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부인, 그리고 우문형,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금화부인은 형식상의 인사를 보냈다.
"다행이 염려 덕분에..."
"부인께서는 교환할 물건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금화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목풍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네
사람을 둘러 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바삐 돌아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소. 여러분들은 얼
마동안 편히 쉬셔야 되겠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 부득이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셔야겠소. 여러분께서 널리 양해하여 주실 것을 바라
오."
그는 소영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는 근심스럽게 물었다.
"삼제, 왜그러나? 몸이 불편해서 그러나?"
소영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도에서 강적을 만나 한바탕 싸움을 하고 왔소이다. 큰형님의
전갈을 받고 운기를 조식할 틈도 없이 바쁘게 달려와서...."
심목풍이 눈썹을 치뜨며 다그쳐 물었다.
"어떤 상대인가?"
"가짜 소영이오."
"그럼 승부는 어떻게 되었나?"
"삼제와 그가 충돌하여 몇 수 겨루다가 수중의 장검이 둘다 부러
져서 더 이상 승부를 못 내었소이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영이에게 말했다.
"삼제, 수고했네, 어서 자리에 앉아 쉬도록 하게나."
"큰형님, 감사합니다."
심목풍은 금화부인과 우문한도에게 자리를 권하고 먼저 앉았던
수석 자리로 돌아 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 대청 안의 여러 사람들을 한번 둘러 보고는 점
잖게 입을 열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분들은 우리 백화산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들이시오. 부인과 우문형도 이제는 우리와 손을 잡았으니 두 분
도 오늘의 일을 알아야 되겠기에 급하게 부른 것이오."
금화부인은 건너편에 줄지어 앉아 있는 군호들을 힐끗 쳐다 보더
니 심목풍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어떠한 인물이오?"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리고 말소리를 조금 낮추고 건
너편 군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각자 신분을 밝혀 주시오."
그들은 모두 경장을 하고 청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 매고 있었
다. 금화부인은 하나하나 그들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그들의 얼굴
이 온통 먼지로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먼 길을 달려왔으리라는 짐
작만 갈 뿐 별다른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심목풍의 말이 떨어지자, 곧 오른쪽의 끝의 장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승의 이름은 법혜(法慧)라고 하오. 지금은 소림 나한당(羅漢
堂)에 있으며 예명은 상좌삼승(上座三僧)이외다."
"호호호... 이렇게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로 자신을 소개하니 어
찌 믿을 수 있겠소?"
심목풍은 의외의 말에 잠시 대답할 말을 찾더니 손뼉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당신들은 각자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을 꺼내어 보이
시오."
그러자 법혜라고 자칭한 흑의 장한은 힐끗 금화부인을 쳐다 보고
는 머리에 동여 매었던 청색 수건을 풀어 젖혔다. 수건이 벗겨지니
반짝반짝 빛나는 중의 머리가 드러났다.
그는 잠깐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더니 곧 다시 머리를 싸맸다. 이
어서 그 다음의 장한이 일어섰다.
"빈도는 무당 문하에 있소."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등에 꽃고 있던 장검을 재빠르게 뽑아 칼
끝을 쥐고 손잡이를 금화부인에게 내밀어 보였다. 자세히 그 칼자
루를 살펴 보니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무당지검(武堂之劍)' 즉
무당의 검이라고 정묘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세 번째의 장한이 벌떡 일어섰다.
"소승은 아미(峨媚) 문하에 있소이다. 법명은 자정(慈正)이라고
하오."
그는 품 속에서 황포 주머니를 꺼내 무엇인가를 우문한도에게 건
네 주었다. 우문한도는 그것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더니 미소를 띄
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이것은 아미파의 독문 암기요. 내가 알고 있기로는
삼능주표(三能珠標)라 알고 있소."
이어서 네 번째 장한이 일어났다.
"빈도가 거처하고 있는 곳은 청성(靑成)이고 도호는 목진(木塵)
이외다."
목진이라는 장한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수중에 들고 있는 버들
잎같은 단도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우문한도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것은 청성 문하의 유엽검이 아니오? 도형은 청성파에서 중책
을 맡고 있는 것 같은데...."
목진은 자리에 앉으며 겸손을 표했다.
다음 다섯 번째 장한이 불쑥 일어서 오른손을 휘둘러 커다란 원
을 그렸다.
"소인은 금곤오(金昆五)라고 불리오. 곤륜 문하에 있소."
금화부인이 아름다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곤륜 문하의 천정(天定)장법을 전개시키는 것으로 보아
틀림 없겠구려."
여섯 번째가 일어났다.
"이름은 흔적(痕跡)이라고 하오. 개방에 있소."
우문한도는 내심 크게 놀랐다.
"이거 실례했소이다. 귀하께서는 개방의 사대 장로 중의 한 분이
시지요?"
흔적은 금전을 꺼내 들고 손장난을 쳤다.
다음 일곱 번째 사나이는 작달만한 키의 장한이었다. 그는 자리
에 일어났으나 사 척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소인 피진산(皮進山)이라 하오. 지금은 신풍방의 장리 형당(形
堂)이오."
그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신물을 보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았
다. 우문한도는 피진산을 웃음 띤 얼굴로 쳐다 보며 냉랭하게 말했
다.
"신풍방은 강호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 있소. 그러므로 피형께서 증명할 수 있는
신물을 보인다 하여도 우리들은 모를 것이오."
피진산이 자리에 앉자 여덟 번째의 장한이 일어나자 갑자기 심목
풍이 손을 흔들며 저지했다.
"이제 됐소이다. 앉으시오."
"부인, 이 정도면 안 되겠소?"
금화부인은 나머지 사람들을 훑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대장주의 능력과 명성을 크게 승양하는 바이오. 나머지 사람
들도 모두 이름난 문파 중의 인물들이리라 믿겠소이다."
심목풍은 자신을 칭찬함에 마음이 흡족하여 미소를 감추지 못했
다.
"그렇소. 적을 알고 자신을 평하면 백전백승의 원칙이 따르는 것
이오. 천하의 각파에는 모두 내 심복이 있소.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환하게 알 수가 있단 말이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 보고는 손뼉을 쳐서 여러 장한
들을 자신에게 주목시켰다.
"지금 무림의 사태는 매우 긴박하므로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오래
지체할 수 없소이다. 그동안도 수고하였지만 앞으로는 더욱 신중하
고 정확하게 일하여 주시오. 자! 어서들 돌아가시오."
대청 안의 군호들은 일제히 두 손을 보아 예를 올린 후 쏜살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이제 넓은 대청에는 소영의 일행 몇 사람과 심목풍만이 남았다.
심목풍은 금화부인을 넌지시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각 문파에 첩자를 두고 있다는 것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
르오. 그들은 오 년에 한 번씩만 이렇게 모이게 되어 있소. 그래서
오랜만에 그들이 모인 이 자리에 부인과 우문형을 모셔서 계획을
상의해 볼 생각이었소. 그러므로써 우리들의 우의가 더욱 굳게 뭉
치는 것이 아니겠소?"
금화부인이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받았다.
"심대장주께서 벌써 오래 전부터 강호에 군림하여 심복을 모든
문파에 잠입시킨 것에 저는 깊이 탄복하오이다. 지금 그들은 모두
중요한 자리에 있으니 심대장주께 큰 도움을 주고 있을 게요."
"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도움이 되는 것이오."
심목풍은 말을 멈추고 몇 번 기침을 하였다.
소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가벼운 기침이지만 예전에는 없었던 일인데... 몇 년 전에 무공
연마를 하다가 역효과를 보아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는데 혹시 그
것이 또...."
심목풍은 기침을 끝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는 교환할 물건을 살펴 보셨소? 그 운양자란 놈은 흉계
가 많은 놈이라 신중을 기해야 하오."
금화부인은 무엇이 우스운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모두 살펴 보았소. 아마 틀림이 없을 것 같소."
그녀는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품 속에서 꺼내며 말을 이었
다.
"이 삼기진결은 심대장주께서 거두어 들이시고 이 옥선자 그림
은......."
그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그 옥선자 그림은 이미 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부인께서 간직
하시오."
심목풍은 삼기진결을 소영에게 보이며 책을 던졌다.
소영은 그동안 운기를 조식하며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각대문파에
서 모인 심목풍의 첩자들이 자기 소개를 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 없
이 듣고 있었다.
그는 심목풍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얼떨결에 삼기
진결을 손에 받아 들었다.
소영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책을 다시 심
목풍에게 내밀어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심목풍이 먼저 입을 열었
다.
"이 삼기진결은 우리 백화산장과 부인 그리고 우문형의 공동 물
건이니 잘 간직해야 되네. 삼제는 그 책을 책임지고 간직하게나."
소영은 그의 표정이 심각하고 이미 자기에게 보관할 뜻을 굳힌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책을 품 속에 넣었다.
금화부인이 부드러운 눈으로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소제는 그토록 절세의 검기를 여태까지 써먹지 않았소? 실로 경
탄을 금치 못할 검술이오."
심목풍이 조급한 표정으로 금화부인의 이야기와는 뜻이 다른 말
을 불쑥 꺼냈다.
"부인, 나는 아직도 아까의 이야기를 자세히 모르고 있소. 그러
니 어느 분이든 나에게 그 초막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
주시겠소? 무당파에서는 운양자 외에 또 누가 나왔소?"
우문한도가 미소를 띄고 대답했다.
"종남이협과 무당의 일위 제자 한 사람이 왔었소이다."
심목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종남이협도 이 일에 참견을 하였단 말이오?"
"그렇소. 나는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무척 애썼습니다만 그들
이 굳이 교환 장소에 참석하겠다고 우겨 어쩔 수가 없었소이다."
금화부인이 말을 이어 받았다.
"그 종남이협은 상대하기 몹시 어려운 사람들이오."
다시 우문한도가 그녀의 말에 종남이협에 대해 설명했다.
"종남이협은 강호에서만 삼십여 년을 떠돌아 다니며 수많은 명성
을 떨치고 있소이다. 그중에서 갈천의가 가지고 있는 철골풍화선
(鐵骨風火禪)은 초기가 뛰어나고 변화가 만 가지나 되는 무서운 것
이라오."
그는 주위 사람을 훑어 보며 자신의 이야기에 모두가 귀를 기울
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다음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옷소매에 수화(水火) 암기를 숨기고 그 날카로운
독으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인물이오. 아직까지 무림에서 그
들을 대적할 자는 없소. 만일 그들이 전력을 다하여 무당파를 도와
준다면 우리에게 두명의 강적이 더 생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오."
금화부인이 냉랭한 미소를 흘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렇게 그들의 무공이 뛰어나다면 그들과 겨루어 봐야지."
그녀는 눈길을 돌려 우문한도를 뚫어지게 쳐다 보며 부드럽게 말
을 이었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저의 능력이 닿는 한 전력을 다하여 돕겠소이다."
"수고스럽겠지만 다시 그 초막에 들러 주시오. 종남이협이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 주시오. 내일
아침에 백화산장 앞에서 자웅을 겨루자고 말이오."
우문한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부인은 왜 그들과 겨루려는 거요?"
"그 갈천의의 풍화선을 구경하고 싶소이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심목풍이 끼어들었다.
"부인, 우리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내가 초청한 사람도 아
직 오지 않았으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이틀만 참으시오."
금화부인은 약간 언성을 높여 대꾸하였다.
"내 소견은 심대장주와 다르오이다. 무위도장의 몸이 아직 완전
히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무당파에는 영도자가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내일 아침에 종남이협을 누른 다음, 그
기세를 이용하여 무위도장을 사로잡아 무당파를 우리 백화산장의
수중에 넣자는 것이오. 그래도 내 일을 막으시려오?"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부인, 내가 알고 있기로는 무위도장과 운양자는 몹시
교활한 인물들이라 설사 옥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명성을 더럽힐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금화부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보기싫게
일그러졌다.
"그럼 이 기회에 무당파의 영도자를 제거해 버립시다. 새는 날개
가 없으면 절대 날지 못하는 법이오. 그러니 우선 무위도장과 운양
자를 죽여 손쉽게 무당파를 굴복시키기로 합시다."
소영은 그녀의 제의를 듣고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저 여인은 정말 독과 약을 곁들인 인물들이로구나.'
심목풍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
을 열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좋소이다. 부인께서 그 계획에 절대 자신이 있고 또 종남이협을
누를 수 있다면 나도 부인의 계획대로 따르겠소이다."
"그러나 소식을 전하러 우문형에서 가실 필요는 없소."
그는 우문한도를 쳐다 보며 금화부인의 부탁을 일소해 버렸다.
금화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무당파 사람들은 우문선생과 무슨 큰 원한이라도 있는 것 같았
소이다. 우문선생이 제의를 한다면 무위도장이나 운양자도 절대로
거절은 하지 않았을 것이오."
심목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말이 맞소. 종남이협들도 수십 년간 강호에서 지낸 인물
들이므로 부인의 제의에 무슨 이유를 붙여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
오."
심목풍은 그제서야 확정된 결정을 얻었는지 돌연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곧 청의의 아름다운 소녀가 다가 왔다.
"대장주님, 무슨 분부가 있사옵니까?"
"민첩한 무사를 몇 명 뽑아 내 명기를 갖고 흩어져 있는 첩자들
을 만나 보게 하도록 하여라. 그들에게 무위도장의 행적을 탐지하
라고 이르기만 하면 된다."
시녀는 아름다운 음성으로 대답을 하고 급히 대청 밖으로 나갔
다. 그리고 잠시 후 심목풍에게 돌아와서 결과를 알렸다.
"대장주님의 말씀대로 열여덟 명의 날쌘 장한과 말을 내어 각처
로 보냈사옵니다.
심목풍은 흐뭇한 미소를 띄며 다시 시녀에게 일렀다.
"너는 어서 당치(堂値)부자에게 종남이협에게 도전장을 한 장 써
보내라 하라"
시녀의 동작은 매우 민첩했다.
잠시 후 시녀가 갖고 들어 온 도전장을 훑어 본 심목풍은 그것을
금화부인에게 넘겼다.
"부인, 한 번 읽어 보시오. 읽어 보시고 고칠 곳이 없다면 그 곳
에 장소와 시간을 쓰시고 부인의 서명을 하시오."
금화 부인은 그 도전장을 대략 읽어 보고는 즉시 붓을 들어 몇
자 써 넣었다. 심목풍은 도전장을 시녀에게 건네 주었다.
"이것을 당치의 책임자에게 전해라. 만일 오늘 자시 안으로 종남
이협에게 전하지 못할 시는 그의 목을 대신 바치라고 하여라."
심목풍은 시녀가 대청을 나서자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아! 피곤하군, 부인과 우문형도 피로할 테니 어서 숙소로 돌아
가 편히 쉬시오."
세 사람은 내일의 큰일을 위하여 그대로 헤어졌다.
소영은 난화정사로 돌아와 그대로 침상에 몸을 눕혔다. 남옥당과
몇 수 겨룬 까닭에 진기는 물론 정신까지도 혼미한 상태였다.
그는 누운 채로 품속에서 삼기진결을 꺼내 머리맡에 올려 놓고
금화부인이 보낸 도전장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금화부인의 표정을 보니 종남이협을 누를 자신이 있나 본데...
무위도장은 나를 살펴 주고 보호해 준 일이 있으며, 운양자도 역시
내 생명의 은인인데.... 내 그들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면
바로 이 기회가 좋겠군. 무위도장에게 빨리 이 소식을 알려 사전에
준비를 하게.....'
이런 걱정을 하며 몸을 뒤척이고 있는데 살며시 문이 열리고 금
란이 조그마한 쟁반에 오지그릇을 들고 들어 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백합탕이 담겨 있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소영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던 참이라 백합탕으로라도 잠
시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 주저없이 받았다.
금란은 귀엽게 웃으며 다가섰다.
"셋째 나리께서 마다 않으시니 소녀의 마음은 기쁘옵니다."
소영은 갑자기 악소채가 등을 두드리며 머리를 쓸어주던 옛날 일
이 새삼 그리워 그대로 눈을 감고 옥란이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
다.
금란은 옥수저로 백합탕을 조금씩 떠서 소영에게 먹였으며, 옥란
은 그의 머리를 매끈하게 빗겨 주었다.
소영은 얼마 동안 악소채를 생각하던 중 문득 당삼고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낭자는 그동안 나를 찾지 않았느냐?"
소영의 갑작스런 물음에 두 시녀는 크게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멍하니 바라 보기만 하였다.
소영은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다.
'저들은 나를 무척 두려워하는군. 내가 너무 심하게 대하였나?
이제부터는 신경을 써서 부드럽게 대해 주어야겠다.'
"나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앞으로는 절대 화를 내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지내라."
옥란이 앞으로 나섰다.
"소녀들은 셋째 나리를 모시면서 전보다 많이 편해졌사옵니다.
소녀들은 평생 종으로 살아야 될 몸입니다. 그러므로 셋째 나리께
서 저희들을 때리시면 맞고, 또 꾸중하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셋째
나리께서는 소녀들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시와 소녀들을 거절하
지 마시옵소서. 그것으로써 저희들은 더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좋다. 내가 이 백화산장에 있는 한 너희들을 내 곁에서 절대 떠
나게 하지 않겠다."
옥란은 어린애처럼 기쁜 마음을 감출 길 없어 손뼉을 치며 좋아
했다.
"셋째 나리, 감사하옵니다. 만약 나리께서 이곳을 나가실 때에도
소녀들을 데리고 가신다면 더욱...."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러자 소영은 더
욱 마음이 흐뭇해졌다.
"내가 강호에 유협하며 두 처녀를 데리고 다닌다면 뭇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저희들을 남장시켜서 서동(書童)으로 보이게 하면 되지 않사와
요?"
소영은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기로 하지."
그러자 옥란과 금란은 소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이들에게 별로 잘 대해 주지 않았고, 지금까지 별로 관심
을 두지 않았는데 이토록 나를 지극해 생각해 주니 더 바랄 것이
없구나.'
소영은 갑자기 망화루에서 한쪽 팔을 잘린 하화라는 시녀가 머리
에 떠올라 두 시녀를 일어서게 했다.
"너희들은 안심하여라. 난 한 번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
도 지키는 사람이다."
옥란은 언제 눈물을 흘렸는지 얼룩진 얼굴로 금란의 손목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저희 두 소녀는 정성을 다하여 셋째 나리를 모시겠음을 맹세하
옵니다."
"그런 이야기는 구태여 할 필요가 없고, 당낭자의 소식이나 알려
주려므나."
옥란은 머뭇거리며 무어라고 대답을 못하고 금란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소영은 직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그쳐 물었다.
"당낭자가 어떻게 되었느냐?"
그러자 마지못하여 금란이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옥란 동생은 너무나 나쁜 소식이라 감히 대답을 못해 드리는 것
입니다, 당낭자는 대장주의 명령으로 옥에 갇혔사옵니다."
소영은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뭐라고? 무엇때문에 그랬느냐? 그녀는 손님인데..."
금란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세째 나리, 조용히 말씀하십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옥란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언니가 말씀 드리세요. 소녀는 밖에 나가서 동정을 살피겠사옵
니다."
소영이 손을 흔들어 만류하려 하였으나 벌써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으므로 금란에게 시선을 던지며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금란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연방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자세한 것은 소녀도 모르오나, 아마 셋째 나리와 관계되는 일
인 것 같사옵니다."
소영은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해져 다그쳐 물었다.
"나와 관련이 있다면 좀더 자세하게 알아야 되겠다."
금란은 황급히 앞으로 다가서며 두려운 빛으로 물었다.
"셋째 나리, 누구에게 알아보시려 합니까?"
"이장주에게 묻겠다."
"물어 보셔야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장주께서도 당낭자
를 풀어 줄 수 없을 것이와요."
소영은 그녀의 이야기에 의아심이 생겨 캐묻고 싶었지만 우선 눈
앞에 닥친 일이나 해결하고 싶었다.
"그럼 대 장주를 찾아가지."
금란은 고개를 흔들면서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주께서 당낭자를 옥에 가두셨으니 웬만해서는 그녀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옵니다. 셋째 나리께서 대장주께 물어 보셔야 별 소
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 난 그 일에 참견을 못한단 말이냐?"
"참견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사옵니다."
소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게 소리쳤다.
"안 돼! 이 일은 반드시 개입해야 되겠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
찌하여 초청한 손님을 옥에 가두느냐 말이다."
금란은 바싹 소영에게 다가서며 안타깝게 만류했다.
"셋째 나리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저희 산장에서는 어
느 누구라도 감히 대장주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옵니다. 나리께서는
비록 대장주의 신임을 받고 계시지만 대장주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알겠다. 네 말을 참고로 삼겠다. 그러나 필시 무슨 커다란 내막
이 숨어 있는 것 같으니 절대 모른 체 할 수가 없다."
금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영을 빤히 쳐다 보며 물었다.
"나리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소영의 눈살이 크게 찌푸러졌다.
"무엇이 두렵겠느냐? 나는 대장주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한다
고는 생각치 않아."
"소녀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살아 그동안 귀로 듣고 눈으로 보
아온 것이 많사옵니다. 그러나 나리께서 굳이 대장주께 물어 보신
다면 더 이상 말리지 않겠사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라겠습니
다."
"그래.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너희들은 염려말고 있어라."
그러자 금란은 탐스런 양 볼에 눈물을 흘렸다.
"번쩍이는 창 칼은 손쉽게 피할 수 있으나 급습해 오는 화살은
방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금란이 무릎을 꿇자 소영은 재빠르게 그녀를 일으켰다.
"왜 자꾸만 그러느냐? 나도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면 진흙
속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옥란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 왔다.
"금화부인이 오십니다."
소영은 급히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놓았던 삼기진결을 집어
들어 품 속에 넣었다. 소영이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금화부인이
벌써 문앞에 다가 왔다.
"소제 안에 있소?"
그녀는 금란과 옥란에게 미소를 띄며 천천히 들어섰다.
"이 두 낭자도 괜찮지? 소제는 항상 복이 많은가 봐."
"부인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어찌 소녀들을 그토록 치켜 세
우십니까?"
"누가 너희들과 농담을 한다 하였느냐? 나는 진심으로 너희들을
칭찬했을 뿐인데."
두 시녀는 금화부인의 위치를 생각해서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소영은 그들의 심각한 분위기를 직감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웬일이오? 이곳은 침실이니 부인께서 들어 오실 곳이 못
되오. 밖으로 나갑시다."
금화부인은 무엇이 우스운지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호호호... 남녀가 유별이라면 저 두 계집은 어찌 이곳에 들어
와 있소? 그들은 여자가 아니란 말이오? 난 이곳이 좋으니 여기에
서 이야기합시다."
소영은 그녀의 완강한 고집에 작은 의자를 내밀어 앉기를 권했
다. 금화부인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부인께서 이곳을 찾은 용건이 무엇이오?"
"소제는 이 누나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
소?"
소영은 너무나 의외의 물음에 무어라 대답을 못하고 잠시 머뭇거
렸다.
"소제는 이 누나가 내일 아침 종남이협과 대결을 한다는 것을 알
고 있소?"
"부인에게 들었지 않았소?"
금화부인은 얼굴을 붉히며 소영을 뚫어지게 쳐다 보며 말했다.
"부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부르는 말이오."
"그럼 어떻게 칭하란 말이오?"
"나는 소제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나를 무어라고 불러야 되
겠소?"
소영은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나 짐짓 화제를 돌렸다.
"그럼 내일 아침 싸움에서 부인을 도와달라는 말이오?"
금화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필요 없소. 나는 혼자서라도 종남이협을 물리칠 자신이 있소.
그러나 어떤 실수로 상처를 당할는지는 모르오. 소제의 큰형과 우
문선생에게서 종남이협은 높은 절기를 지녔다고 들었소. 특히 그
첫째 갈천의가 지니고 있는 풍화선은 무척 독한 암기를 지니고 있
으며 무수히 많은 변화를 발한다고 하더군... 그러니 누나도 할 수
없이 그에 맞설 준비를 해야 되겠소."
소영은 자신이 생각하였던 것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꺼내자 호기
심이 일었다.
"제가 부인에게 무엇을 도와드려야 되겠소?"
"뭐 별다른 것이 아니오. 내 대신 한 가지 물건을 보관하고 계시
오."
"무엇인데요? 귀중한 것이오?"
금화부인은 품 속에서 옥선자 그림을 꺼내며 말했다.
"옥선자 그림이오."
소영은 의외의 일에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뭐 그렇게 당황할 것은 없소. 이 옥선자 그림은 큰형이 직접 누
나의 소유라고 말한 것이오. 그래서 내일의 싸움에서 만약 누나에
게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소제가 가지시오."
소영은 의아심을 감출 길이 없어 받지도 않고 생각했다.
'부인은 왜 이것을 심목풍에게 주지 않고 나에게 맡기는 것일까?'
금화부인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오. 누나가 심대장주나 우문선생에게 이
그림을 맡기지 않는 것은 그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오. 누나는 아
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소제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소."
"그건 터무니 없는 오해요."
금화부인은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띠었다.
"소제가 설령 누나에게 이것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
나는 후회하지 않겠소."
그녀는 말을 끝내며 옥선자 그림을 소영에게 불쑥 내밀었다.
"소제, 어서 받으시오. 그리고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살펴
보시오."
"살펴 볼 필요도 없소. 가짜는 아닐 테니....."
소영은 착잡한 심정으로 옥선자 그림을 받았다. 그동안 서로 친
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을 믿고 중요한 물건을 맡기
는 그녀가 어쩐지 외로와 보였다.
'내일 아침 결투에서 만약 그녀가 다친다면... 될 수 있으면 싸
움을 말리고 싶은데.'
소영은 이런 생각으로 금화부인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녀도
눈동자를 고정시켜 소영을 의미 깊은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잠시 후 금화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잘 간직하시오. 내일 누나가 죽지 않는다면 찾아가겠소."
"그렇다면 할 수 없이 부인의 명령에 따라야 되겠군요. 하하..."
금화부인은 소영의 농담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 보았다.
얼마 전까지 뒤에 서 있던 두 시녀는 어느 새 밖으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소영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조금전의 두 시녀는 심목풍이 소제에게 준 계집이오?"
"아니오. 그녀들은 항시 이 백화산장에 있으며 난화정사를 맡을
것이오."
금화부인은 더욱 나직히 말했다.
"소제는 이곳에 가맹한 지 얼마나 되었소?"
그러자 소영은 깜짝 놀라 잠시 대답을 못하였다.
'이 부인은 정말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로구나. 내가 백화산장에
가맹한 일은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그것을 알았소?"
금화부인은 소영을 흘겨 보았다.
"누나는 두가지 일로써 짐작을 하였소."
"어떤 일이오?"
"첫째는 소제의 무공을 보고 알았소. 소제는 그들과는 전연 다른
초식을 쓰고 있소."
"또 다른 하나는?"
"동물은 같은 종족이 모여 살아 가고 있소. 심대장주나 주조룡이
가지고 있는 교활한 성격과 흉계가 바로 대답이오. 소제에게는 조
금도 그런 것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선을 따르고 있는 것이 그들
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오. 만약 소제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
는다면 틀림없이 심대장주는 손을 써서 소제를 죽이든가 자기 앞에
굴복시킬 것이오."
소영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듯 크게 두근거렸다.
"소제, 안심하시오. 지금은 그들도 소제를 이용할 때이며, 소제
도 그들을 긴요하게 이용할 수도 있소."
그녀는 주위를 다시 살피고는 소영의 귀 가까이에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소제는 그 두 시녀들을 조심하여야 되오."
소영은 의아심이 일어 다그쳐 물었다.
"그것은 왜 또 그렇소?"
"오늘 초막에서 소제는 겉으로는 백화산장을 위했고 안으로는 운
양자를 도와 무위도장의 생명을 구하였소. 그 일은 나도 눈치를 채
었으니 어찌 교활하기 그지없는 주조룡과 우문선생이 그것을 몰랐
겠소? 그때 나는 소제의 본 뜻을 알아차리고 더 속이지 않고 진짜
해약을 가르쳐 준 것이었소."
소영은 한층 더 놀랬지만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자
신의 약점을 메우러 애썼다.
"무림에서는 신의가 앞서는 것이오. 부인이 진짜 해약을 주었으
므로 그쪽에서도 진짜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준 것이 아니겠
소? 그러니 심형께서 그것을 알고 계신다 하여도 나를 탓하지는 않
을 거요. 그러나 나에게 두 시녀를 조심하라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
금화부인은 입가에 쓴 미소를 띄며 소영을 잠시 쳐다 보더니 천
천히 말을 이었다.
"소제는 너무나 순진하여 사람을 대할 때 별다른 경계심이 없어
서 탈이오. 앞으로 강호에 떠돌아 다니려면 이런 일을 허다하게 많
이 부딪치게 될 것이오. 두 시녀는 소제를 감히 해하지 못할 거요.
그렇다고 대장주도 소제를 해치지 못할 것 같소?"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날려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아무 기척도 없자 그녀는 천천히 걸어 들어
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누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소제의 시중을 드는 두 시
녀가 정도 이상으로 소제에게 친절을 베풀 것이오. 그렇게 해서 소
제의 신임을 얻어 놓은 뒤...."
소영은 가슴 한구석이 섬뜩하였다.
'이 말은 정말 맞구나.'
금화부인 계속 말했다.
"심대장주가 소제의 신임을 얻은 두 시녀를 이용하여 함정을 만
든다면 틀림없이 빠질 것이오. 누나는 백 가지 독을 치료할 수 있
으면 또한 독을 쓰는데도 자신이 있소"
"대장주가 소제를 길들이지 못하겠다든지 혹은 소제의 명성이 높
아져서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는 언제든지
두 시녀에게 명령하여 소제의 음식에 독을 넣고 그 해약을 미끼로
소제를 자기 마음대로 흔들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소."
소영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내심 느끼는 바가 있었다.
'심목풍은 하화라는 시녀의 팔을 자르게 한 적도 있었으니 나에
게도 그렇게 안하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하지. 부인의 이야기가 어쩌
면 맞을지도 모른다. 심목풍은 잔악하고 무슨 일을 하든 수단 방법
을 가리지 않으니 만약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형제 결의
도 무시하고 손을 쓸지도 모르는 일이다.'
금화부인은 다시 입을 열어 그의 생각을 전가시켰다.
"그때 가서 소제가 후회를 해야 이미 엎지러진 물이오. 이 누나
는 오직 소제를 위하여 미리 알려주는 것이니 될 수 있는 한, 두
시녀를 멀리하시오."
그녀는 머리에 꽂혀 있는 옥비녀를 뽑아 소영에게 내밀며 말했
다.
"소제, 이 옥비녀는 천하에도 둘도 없는 것이오. 이것을 몸에 지
니고 있으면 갖은 재난도 물리칠 수 있으며 백독을 알아 낼 수가
있는 것이오. 앞으로 차를 들때 우선 이 옥비녀로 시험해 보시오.
만약에 차에 독이 들어 있다면 비녀는 즉시 흑색으로 변하게 될 것
이오."
"이런 진귀한 물건을 어찌..."
"아니오. 이것은 소제의 생명에 관계되는 일이니 어서 사양말고
받으시오."
소영은 할 수 없이 옥비녀를 받아 쥐고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그럼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인의 성의를 받겠소. 그러나 자꾸만
짐이 무거워지는 것 같소이다."
"소제는 다만 누나가 아껴주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되오."
"누나는 더 이상 소제를 귀찮게 하지 않고 이만 물러가겠으니 편
히 쉬시오."
그녀는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난화정사에서 사라졌다. 소영은 묘
한 기분에 싸여 그녀를 쫓아가 몇 마디 물어 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그냥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 보았다.
백화산장에서 생기고 있는 흉계와 음모를 소영으로서는 어쩔 도
리가 없었다. 더욱이 강호의 경험이 워낙 부족하여 이런 난관을 쉽
게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소영이 그녀가 주고 간 옥비녀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문 밖에
서 낮은 기침 소리가 났다. 그는 재빨리 옥비녀를 품 속에 넣고 문
을 열었다.
그곳에는 심목풍이 점잖게 두 손을 등 뒤에다 지고 몸을 벽에 기
대고 서 있었다.
"큰형님께서 오신 것을 미처 몰라 뵈어 마중을 나가지 못하였습
니다."
심목풍은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서더니 조금 전에 금화부인이
앉았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방안을 두루 살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제, 여기에 금화부인이 왔었나?"
"네, 왔었습니다. 큰 형님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만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럴 필요는 없네."
심목풍은 손을 저으며 점차 표정을 심각하게 바꾸었다.
소영은 이러한 것으로 보아 큰일이 생겼음을 짐작하였다.
이때, 심목풍의 긴 한숨소리가 들렸다.
"삼제, 그대는 묘강에서 독충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
나?"
"몇 번 들었습니다."
소영은 삼성곡에 있을 때 장산패에게서 강호 각지의 자세한 내력
과 묘강이 독충을 기른다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은 적이 있었다.
심목풍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럼 삼제는 금화부인이 바로 그 독충을 기르는 사람이라는 것
을 알고 있나?"
소영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그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 독충을 사용할 때 대부분이 식사와 차에다 넣
네. 그러나 금화부인은 사람의 살갗과 닿는 순간 독충을 옮겨 상대
를 상하게 할 수가 있네. 그동안 내가 너무 바빠 그것을 알려 주지
못했네."
소영은 자신의 앞가슴을 남에게 얻어 맞는 것처럼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멍청히 심목풍을 쳐다 보기만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
이 한데 엉켜 도저히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가 없었다.
심목풍은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방면에 있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네. 다행히 수일 안
으로 의술에 능통한 친구가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그분에게 물어
보면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네. 바로 그 독충을 없애고 또
해독하는 약을 만들기 위하여 일부러 묘강에서 십 년 간 생활한 사
람이니 그분에게 자네를 보이면 자네가 금화부인의 독충에 물렸는
지 여부를 대번 알 수 있네."
그는 금화부인과 똑같은 행동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밖으
로 나가려 하였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삼제는 조심해야 하네."
소영은 그를 급히 불렀다.
"큰형님, 잠깐만...."
"삼제, 무슨 일인가?"
"금화부인이 소제에게 옥선자 그림을 맡겼습니다."
심목풍은 차가운 미소를 떠오르더니 곧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꾸
었다.
"그녀는 그대에게 보관만 시킨 것인가?"
"금화부인은 내일 아침에 종남이협과 싸움을 하기 때문에 소제에
게 맡긴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내일 싸움에 이긴다면 다시 이것
을 찾고 패하면 소제더러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나? 그럼 잘 보관하고 있게나. 그녀가 내일 싸움에서 어떻
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심목풍은 옥선자 그림을 손아귀에 넣고 싶었지만 짐짓 태연한 척
하며 소영의 눈치를 살폈다.
강호의 견식이 부족하고 거짓을 모르는 소영은 엉큼한 꾀에 속아
한 발 한 발 깊은 함정에 빠져 들어가 그의 계책에 걸려 들고 말았
다.
"그 그림을 지금 소제가 갖고 있으니 큰 형님께서 구경을 해 보
시겠습니까?"
심목풍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마지못하는 척 입을 열었다.
"옥선자 그림은 소문만 들었지 아직 보지는 못했네. 어디 보여
주겠나?"
소영은 서슴지 않고 품 속에서 그림을 꺼내 심목풍에게 건네주었
다.
"나는 원래 자네에게 명하여 금화부인이 가지고 있는 이 그림을
속임수를 써서라도 뺏으려고 했네. 그러나 그녀의 독충이 무서워
이제까지 말을 못한 것이네. 금화부인이 이미 이곳에 찾아와서 이
것을 맡겼다니 이제는 할 수 없이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겠네. 그러
니 내가 이것을 잠시 가지고 가 자세히 감정을 한 다음 내일 아침
에 틀림없이 보내 줄 테니 나에게 빌려 줄 수 없겠나?"
소영은 의외의 말에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큰형님께서는 이것을 망화루로 가지고 가겠다는 말씀입니까?"
"풍문에 듣기로는 이 그림이 매우 정묘하다고 했네. 내가 이곳에
서 감상을 하다가 금화부인이라도 들어 오면 곤란하지 않겠나?"
소영은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큰형님께서 그 그림을 갖고 가신 후에 금화부인이 돌아와 다시
그 그림을 내 놓으라고 하면 소제의 입장이 난처하게 됩니다. 그러
니 소제가 산장을 나가 그녀를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심목풍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네가 산장 밖으로 피해 나간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네. 그러나
어디 먼 곳으로 가지 말고 속히 돌아오게나."
소영은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소영은 비록 강호의 견식이
없어서 상대에게 속았지만 지혜는 있었다. 무의식중에 심목풍에게
옥선자 그림을 넘겨 준 후 곧 그의 간계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소영은 이미 그림을 수중에 들고 있는 심목풍에게 무어라 말을
하여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음을 느끼고 묘한 꾀를 짜냈다.
'이왕 속은 것이니 사후 대책이나 세워야겠다. 어서 이곳을 나가
중주이고를 만나 물어 봐야 되겠다.'
소영은 심목풍의 대답이 떨어지자 재빠르게 산장을 빠져 나가 곧
장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는 큰 길을 피해 들과 산으로 경공술을 전개시켜 질풍처럼 길
을 재촉했다. 전날 상팔과 결투약속을 할때 그가 가리켰던 조그만
절이 생각났다.
'그곳으로 가면 중추이고를 만날 수 있겠다.'
그곳을 방향을 잡고 얼마쯤 내달리니 과연 한 채의 초라한 절이
눈에 들어 왔다.
절은 아주 황폐하고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되서 주위에는 잡초
가 무성하고,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는 미행하는 사람이 있나를 살폈다. 별다른 이상이 없자 진기
를 모아 팔보간섬(八步懇蟾)의 신법을 전개시켜 연속 몇 번을 치솟
으니 절의 담을 뛰어 넘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절의 문은 썩어 있었으며 그 주위는 온통 먼지가 덮여 있어 삭막
한 기분을 자아 냈다. 더군다나 양편에 큼직한 관이 놓여 있어 더
욱 기분이 나빴다.
소영은 상팔이 만약에 강호에 사변이 일어나 그에게 연락할 수
없을 때에는 사방 안으로 들어 와 남쪽에 있는 관을 열고 그 속에
있는 자기의 글을 읽으라는 말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이 기회에 그의 시신을 꺼내어 보리라 생각하였다.
천천히 남실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남쪽에 놓여 있는 관
을 한참 동안 눈여겨 보고는 내력으로써 가볍게 관뚜껑을 밀어 보
았다.
관뚜껑은 쉽사리 열렸다. 소영은 그 관속을 들여다 보았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관 속에 사람이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닌
가. 전신이 온통 흰 천으로 덮여 있어 몸차림이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신체가 작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여인이 아니면 조그만
동자라 짐작되었다.
내심 무서운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송장이 썩은 냄새는 나지 않
았다.
'만약 이것이 여인의 시체라면 나는 너무나 당돌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중주이고의 서신을 찾으려고 온 것인
데 엉뚱하게 남의 시체를 건드릴 수야 없지.'
소영이 관뚜껑을 닫으려는데 언뜻 종이 쪽지가 흰 천 사이로 보
였다.
'아, 저것이로구나.'
그는 놀라움과 기쁨에 넘쳐 손을 뻗쳐 그 종이 쪽지를 집으려 하
였다.
그의 손이 거의 흰 천에 닿으려는 순간 호통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건드리지 말아라."
그 호통은 크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 차가운 감이 깃들어
있어 소영의 가슴을 섬칫하게 했다. 상대는 언제 나타났는지 대문
앞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전신에 검은 도포를 걸치고 얼굴은 여위어 마치 귀신같은
형상이었다.
소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상대의 기습에
대비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 관 속의 시체와 당신은 어떤 사이요?"
흑의 대한은 대뜸 한 발을 내딛으며 냉랭한 눈빛으로 소영을 쏘
아 보았다.
"당신은 참견할 것이 못 돼."
'죽은 사람에게 물어 볼 수는 없으니 다시 물어 보아야겠군.'
소영은 이런 생각으로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었다.
"귀하의 존성 대명은 어떻게 되옵니까?"
흑의대한은 소영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관이 있는 곳으로 다가
와서는 힘 안 들이고 한 손으로 그 관뚜껑을 닫아버렸다.
"귀하께서 만약에 한 발만 더 앞으로 나선다면 소인은 부득이 손
을 쓰겠소이다. 무례 한 놈이라고 원망하지 마시오"
그러자 흑의 대한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소영의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허허허... 당신은 아깝게도 나를 굴복시킬 기회를 잃어버렸소."
"우리는 아직 한 초도 겨루지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기회를 잃
어버렸다 하오."
흑의 대한은 옆의 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이 관 옆에서 떠나지만 않았다면 나는 당신에게 공
격을 하지 못했을 것이오."
소영은 그제서야 상대가 관뚜정을 닫을 때 무의식중에 자기가 뒤
로 두 발이나 물러섰음을 느꼈다. 흑의 대한은 두 눈에 살기를 띠
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손을 쓰겠소? 아니면 내가 대신 손을 쓸까?"
소영은 얼른 그의 말뜻을 알아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어떻게 손을 쓰란 말이오?"
"당신이 손을 쓰시겠다면 내가 독이 묻어 있는 칼을 주지. 그 칼
에 묻은 독은 피를 보면 사정없이 핏속으로 파고 든다네. 당신이
몸의 아무 곳이나 조금 베면 당신은 편안하게 죽을 수 있으며 시체
는 언제까지 썩지 않지."
소영은 불같은 분노를 억제하고 짐짓 웃음을 보였다.
"그럼 당신에게 손을 쓰라고 하면?"
"그 때는 당신에게 고통이 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을 생포하여
날마다 조금씩 살을 베어 내어 칠 일 후에야 죽게끔 만들겠다. 그
렇게 칠 일 동안 고통을 받는 것보다...."
소영은 흑의 대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내뱉았다.
"나는 스스로 손을 쓰기도 싫고 또 당신이 손을 쓰는 것도 싫소.
두 가지 모두 싫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흑의 대한은 의외로 기쁜 표정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지! 서로 좋은 방법이 있고 말고, 당신은 보기와 같이
참으로 영리하군."
"무슨 방법이오."
"당신은 틀림엄이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데 내공이
깊을 사람일수록 그 효과도 크지."
소영은 더욱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크게 외쳤다.
"당신은 나를 놀리는 것이오? 무슨 엉터리 수작을 꾸미려는 것이
오?"
흑의대한은 엷은 미소를 흘렀다.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지 마시오. 당신은 필시 내 딸을 살릴 수
있으리라 믿소."
흑의대한의 말은 갑자기 공손해졌다.
"만약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내 힘이 닿는 한 도와 줄 수 있
소. 말해 보시오. 내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오?"
흑의 대한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애는 바로 이 관 속에서 들어 있는 것은 내 딸이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소?"
흑의 대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관에 눈길을 박았다.
"내 딸의 병세가 요 며칠 사이에 더욱 심해져서 이제는 죽은 사
람과 마찬가지요. 나는 그 애의 혈도를 몇 곳 점하여 최후의 원기
를 흩어지지 않게 해 놓았소."
"그럼 당신의 의술은 보통이 아니겠구려?"
"그렇소. 노부의 자랑같지만 의술에 있어 나를 따를 인물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소영은 유심히 상대를 살펴 보았다. 그의 얼굴 근육은 굳어져 버
린 듯 두 눈동자만 움직이고, 또한 입이 움직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보아도 살아 있는 사람같지가 않았다.
'이런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이 의술에 뛰어나다니... 정말로
사람의 생김새를 보아 모든 것을 판단할 수가 없구나.'
소영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흑의 대한이 말을 이었다.
"나는 본래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러 왔었소. 그런데 갑자기 딸이
발작을 하여 부득이 황폐한 절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었소."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것은 염려없소. 다만 당신은 내 딸을 도와 주겠다고 약속만
하면 되오."
"좋소. 승낙하겠소."
흑의 대한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품 속에 손을 집어 넣어 잠시
뒤적거리더니 한 개의 자그마한 옥잔과 가느다란 철관(鐵管)을 꺼
냈다.
소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흑의대한은 철관을 소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의 피를 조금 내어 보시오. 당신의 혈액을 봐야겠소."
"피를 내란 말이오?"
"내 피로써 당신의 딸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피를 드리
겠소."
소영은 그가 내민 철관을 받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독이 묻어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서슴없이 왼쪽 팔맥의 동맥을 짚어 그 철관을 찔러 넣었다.
흑의 대한은 재빠르게 옥잔을 대었다. 그러자 흑의 대한은 손을
흔들며 소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됐소! 그만하시오."
그는 소영의 물음에는 대꾸도 없이 옥잔의 피를 한참 동안 들여
다 본 다음 혀를 내밀어 피를 핥아 보더니 크게 외치는 것이었다.
"좋은 피야! 과연 좋은 피야!"
소영은 가슴이 싸늘해져서 흑의 대한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 보
았다.
'사람 몸의 피는 모두 같거늘... 설마 내 피가 다른 사람과 틀리
지는 않겠지.'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
분명 다르지..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하고 갑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줄겁게 탐독 하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