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 Friday the 13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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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그 비 때문에 왠지 하루종일 재수가 없을 것 같다. 목이 없는 여자가 질척질척 피를 토하며 내 몸에 휘휘 감기는 악몽 속에서 막 깨어났을 때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잠시동안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분명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목이 없는 여자는 여전히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모기를 쫓는 사람 마냥 허공에 두 손을 휘두르며 내게 오싹함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그 손동작으로 보건대 아마도 자신의 잘려나간 목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듯, 좁은 방안 이곳저곳을 푸드득거리며(정말로 모가지 잘린 닭이 푸드득거리며 수선을 피우는 꼴 같았다)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질척질척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맨발이 자신이 흘린 피를 아무렇게나 밟으며 핏방울을 튀겼다. 금세 나의 잠옷까지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에게 고함을 지르며 따질 처지가 못되었다. 나의 혀는 풀 먹인 헝겊처럼 굳어 있었고 온 몸의 근육들은 쥐새끼처럼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그녀의 괴기한 행동들을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신기하게도 눈동자만은 감겨지지 않았다. 사실 두 눈을 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데도 말이다. 방안 곳곳을 휘젓고 다니던 그 목 없는 여인은 창문 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활짝 열린 창밖에는 거리의 풍경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워낙 후진 곳이다 보니 창밖에는 맞은편 건물의 벽만이 떡 하니 들어서서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목 없는 여인은 가만히 서서 창 밖의 그 하얀 벽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니 그녀의 목에서 뿌려지던 피는 잘려나간 목 위로 차곡차곡 고이고 있었다. 그 피가 어찌나 끈적끈적해 보이던지 마치 기름의 원액 같았다. 그것들은 잘려나간 부위에서 꾸역꾸역 치솟아 오르면서 곧바로 어느 정도 응고되어 갔다. 별안간 그녀의 허리가 뒤로 재껴지는가 싶더니 창 밖으로 목을 쭉 뻗었다. 그 반동 때문에 그녀의 목에 고여있던 끈끈한 핏물들이 열린 창을 통해 날아가 벽 위로 뿌려졌다. 하얀 벽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핏자국을 보고 있노라니 누군가 내 심장을 긁고 있는 듯한 극도의 공포가 전해졌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해서 그러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 위에 고여있는 핏물들을 계속해서 창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소름끼치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창가에 서서 목을 흔들거리며 계속해서 피를 뿌리는 그 그로테스크함이란, 맨 정신으로 볼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 때 그녀가 방안의 내 존재를 인식한 것 같았다. 어느 순간 행동을 멈추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얼굴은 없었지만 분명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확실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온 몸은 부서진 TV 화면처럼 잔잔하게 금이 가 있었고 그 사이사이마다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피묻은 두 손을 내게로 보냈다. 그리고 VTR 의 빠른 재생을 보는 것처럼 갑작스레 내게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두 눈을 감을 수만 있었더라면 아예 눈을 감고 싶었다. 분명 나는 꿈속에서 길을 헤매다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와 버린 것이리라.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해서인지 다시 피 뿌려지는 소리가 전해졌다. 질척질척질척~!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나는 고막이 아예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누군가가 기다란 쇠꼬챙이를 나의 귓속에 집어넣어 다른 쪽 귀로 관통시켜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온통 식은땀 범벅이었고 이불과 요도 나의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방안에는 나 외에 그 누구도 없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때까지 그놈의 질척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도 여전히 내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문득 창 밖을 바라보니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소리는 비오는 소리였다. 나는 비오는 날을 싫어한다. 특히 눈을 뜨자마자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더욱 더 싫어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날이 밝았음에도 세상이 어둡다. 바로 그것이 싫은 것이다. 적어도 낮이라면 좀더 밝고 화창해야 할 터인데. 비는 그 모든 것을 비정상적으로 몰고 가 버린다. 아무리 정오라 해도 늦은 저녁의 어스름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것은 마치 이 세계가 엉망으로 뒤틀려버린 듯한 우울함이다. 게다가 비는 묘한 비린내까지 동반한다. 잠옷을 적셨던 땀이 마르자 한기가 밀려온다. 문득 방안에서 썩은 냄새가 느껴진다. 한쪽 구석에는 어젯밤 마셨던 소주병이 네 개씩이나 뒹굴고 있고 그 옆에는 지저분하게 먹다 만 참치캔이 엎어져 있다. 참치 캔에서 썩은 고기 냄새가 흘러나온다. 역겨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열린 욕실 문틈으로 붉은 타일들이 내 눈을 자극한다. 묘한 공포감에 소름이 돋는다. 무릎 관절염을 앓는 노인네 마냥 힘겹게 일어서니 머리가 딱 기분 나쁠 만큼 지끈거린다. 창문을 열기는 싫지만 그래도 방안의 공기가 너무 탁한지라 창문을 열 수밖에 없다. 비릿한 비 냄새가 코끝을 스민다. 덤으로 지독한 악취까지 풍긴다. 방금 전까지 내 목을 조여왔던 꿈 생각을 했다. 목 없는 그녀는 바로 이곳에 서서 창 밖으로 피를 뿌리고 있었다. 그녀의 피가 뿌려졌던 맞은편 벽을 바라본다. 정말로 붉은 뭔가가 보이는 것도 같다.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붉고 거대한 왕거미다. 붉은 왕거미는 벽에 몸을 밀착시킨 채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정말로 주먹만한 크기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을 닫는다. 창을 통해 금방이라도 거미가 들어올 것만 같기에. 그도 그럴 것이 창가 근처엔 유난히 거미가 많다. 창과 벽 사이엔 채 50센티미터도 떨어져있지 않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손길이 아예 닿지 않는 틈이다. 그러니 그 틈새로 거미줄들이 촘촘히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창문을 자주 열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언젠가 창을 열고 아래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 틈새 아래는 한마디로 거미들의 천국이자 내게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온갖 지저분하고 더러운 쓰레기들로 바닥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그 위로 시커멓고 굵직굵직한 거미줄들이 빽빽했다. 역겨운 냄새가 물씬 올라와 코끝을 자극했고 나는 그만 그 자리서 구토를 해버렸다. 나의 구토물이 거미줄 위에 덕지덕지 늘어붙자 놀란 거미들의 행동이 바빠졌다. 그들은 천재지변으로 부서져나간 자신들의 집을 열심히 복구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벽을 타고 꾸역꾸역 올라와서는 아파트를 대량신축이라도 하듯 새로운 거미줄을 뽑아내었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속이 매스꺼워왔다. 그 이후로 다시는 창문을 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꼭 그 사건 때문만은 아니고 원래부터 나는 이 세상 어떤 생물체보다도 거미를 혐오했다. 아니, 이 세상 어떤 생물체들도 다 사랑할 순 있겠으나 거미만은 아무리 심한 고문을 받는다해도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미에 대한 혐오는 어릴 적 끔찍했던 체험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거대한 왕거미 때문에 심한 경기라도 일으켰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걸음마도 하기 전부터 거미를 싫어하게 되었고 걸음마를 할 때쯤엔 거미줄에도 질색을 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거미와 아침 비로 시작한 하루였으니, 그 하루가 순탄하게 풀릴 리 만무하리라.
<2>
증명이라도 하듯, 불운은 하루종일 따라다녔다. 원서를 보냈던 어느 중소기업의 입사면접에서 나는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작고 허름한 기업 같아 보여 다소 안심하고 원서를 넣어 보았는데, 어떻게 알고는 나의 전과사실을 들먹였다. "출소 한지 이제 겨우 세 달밖에 되지 않는군요? 아직 사회적응을 좀 더 하심이 좋을 듯 싶군요. 십오 년을 들어가 계셨으니 적응기도 남들보다 더 길게 잡으셔야 할겁니다. 선생께서 십오 년 동안 안주하고 계실 때 세상은 로켓보다도 빨리 돌아갔으니까요." 면접관은 내게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로켓보다 빨리 세상이 돌아갔다는 비유는 왠지 초등학생들이나 쓸 비유 같았다. 어쨌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인지라 큰 낙심은 없었다.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면 될 일이니. 아예 이력서가 필요 없는 단순 노무직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괜히 15년 전의 나를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울 명문대 경영학과를 우수한 실력으로 졸업했던 그 때의 나를. 그런데 불행은 계속되었다. 입사에서 떨어진 나는 곧바로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의 기사식당을 찾았다. 저렴한 가격에 많은 양을 먹을 수 있기에 기사식당을 찾았던 것인데 싼 게 비지떡이라고 저렴한 만큼 그곳은 불친절했고 지저분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마침 일꾼들 점심시간 때라 식당 안은 엄청 붐볐다. 나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국밥을 시켰고, 뜨거운 국물 가득한 국밥이 내 앞에 대령했을 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숙여 바라본 탁자 밑에는 큼직한 거미가 두 마리씩이나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 거미가 조롱이라도 하듯 나의 무릎위로 툭, 떨어졌을 때 나는 기겁을 하며 자리를 박차야만 했다. 그 바람에 탁자는 요란스레 엎어졌고 국밥의 뜨거운 국물들은 같이 식사를 하던 일꾼들의 온 몸을 뒤덮어버렸다. 난동이 벌어지고 나는 모든 것을 돈으로 변상해 주어야만 했다. 아침부터 불길하게 내 시야에 들어왔던 거미가 결국 그런 식으로 나에게 응징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액땜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엄청난 불행 후 곧바로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이중, 삼중으로 중첩된 불행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급하게 뛰어야 했고,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빗 길에 미끄러지면서 근처의 과일가게 가판대를 엎질러버렸다. 각양각색의 과일들이 대로변으로 굴러다녔고 넘어진 내 얼굴위론 뭔가가 툭 떨어졌다. 눈앞에 붉은 사과 한 개가 보였다. 나는 붉은 사과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 원인도 결국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말이다. 아주 어렸을 때에 동네형으로부터 들은 괴담이 아직까지 나의 의식을 비뚤어지게 지배하고 있었으니 그 괴담이란, 붉은 사과는 사람의 피로 만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나는 붉은 사과에 심각한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붉은 사과를 만진 날에는 반드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곤 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마자 반사적으로 그 붉은 사과를 멀리 차버렸고 그것은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 길을 건너고 있던 아이의 머리에 부딪혔다. 아이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으며 하필이면 머리가 바닥과 충돌했다. 그렇게 넘어진 아이가 피를 흘리며 일어나려 할 때, 아이위로 미처 브레이크를 잡지 못한 오토바이 한대가 지나가 버렸고 아이의 두 다리는 가볍게 부서져야만 했다. 물론 오토바이도 중심을 잃고 공중으로 퉁겨 올라서 마주 오던 택시의 앞쪽범퍼에 처박혀야만 했다. 정말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난 그저 사과 한 개를 발로 찼을 뿐인데. 정신을 가다듬고 사태를 살펴보았다. 두 다리가 두부처럼 허물어진 아이는 의식을 잃은 채 도로위로 피와 부서진 근육조직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오토바이 운전사는 헬멧이 깨어진 채로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범퍼가 부서진 택시 운전사는 유리조각에 오른쪽 눈이 찔린 상태였다. 교통은 심각한 체증을 빚고 있었으며 검은 하늘은 여전히 비릿한 빗물들을 질척질척 뿌리고 있었다. 그날 나는 열아홉 시간 동안 경찰서에서 보내야 했다. 그후 나의 보호감찰원이 와서야 나는 경찰서 쇠창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
나의 보호감찰원은 황병도라는 이름의 40대 중반의 대머리였다. 아직 완전히 머리가 벗겨진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그렇게 될 듯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공짜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내가 감사의 뜻으로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를 몰고 달팽이 요리 전문점으로 나를 데려왔다. 그는 근래 들어서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다며 그래서 다른 기름진 음식은 먹지 못한다며 내 등을 떠밀었다. 쌍꺼풀 없는 그의 눈이 새우같이 웃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얼굴은 상당히 번들거렸다. 정말로 고마웠던 처음의 진실된 마음은 이미 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나로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대뜸 점심을 사겠다고 말해버린 내 혀를 뽑아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달팽이 구이가 접시 가득 날라지자 황병도의 입가엔 탐욕스런 미소가 흘러 나왔다. 그는 냉장고에서 막 나온 맥주 한 병을 경쾌하게 땄다. 그리곤 우선 자기 잔부터 가득히 채운 후 나의 잔도 채워주었다. 맥주를 따르면서도 그는 연신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 경찰서 서장이 내 처제의 남편하고 둘도 없는 친구사이거든. 그래서 나하고도 안면이 많았지. 몇 번인가 같이 어울려서 가족단위로 야유회도 갔었고. 나보다 나이도 두 살 어리고 말야. 그래서 그 친구 내 부탁이라면 끔뻑 죽지! 헐헐헐." 황병도는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가래 섞인 웃음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보살펴 주셔서." 나는 그와 맥주잔을 부딪히면서 별로 속에 없는 말을 했다. "아냐 아냐,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서로 사정 봐줘 가면서 돕고 살아야 할게 아닌가. 혹시 다음에라도 어려운 일 생기거든 서슴거리지 말고 내게 연락을 주게. 내 힘닿는데 까진 자넬 도와줄 테니까. 헐헐헐." 맥주잔을 깨끗이 비운 황병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팽이 구이를 넙죽 집어먹었다. 그의 입술사이로 달팽이 꼬리들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입맛이 싹 가셨다. 그의 입술사이로 빠져 나온 달팽이들을 보며 나는 뭔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치 거미를 볼 때의 그 느낌처럼. 하지만 달팽이가 어째서 내게 거미와 같은 불길함을 던져주고 있는 건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것도 역시, 언젠가 내 기억 속에 좋지 못한 경험을 새겨놓았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뿐이다. 누구라도 사물에 대한 오래된 경험들까지도 모두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기억하고 있는 것들보다 미처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훨씬 많은 법이다. "참, 자네 그 소문 들었나?" 황병도는 어느새 달팽이 한 접시를 다 비우고 있었다. 굶주린 돼지처럼 말을 하면서도 열심히 음식물들을 입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두툼한 입술이 역겨울 정도로 기름져 보였다. "그 왜- 고속버스터미널 가는 길목에 버려진 건물 몇 채 있잖아. 거기 어딘가에 귀신같은 녀석이 살고 있다던데. 혹시 아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도통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짐작도 하지 못할 말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선 그 속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황병도가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망각수'에 관한 이야기다. 망각수란 기억을 잊게 해 주는 신비한 물이다. 이미 이 거리에선 괴담처럼 은밀히 떠도는 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헛소문만은 아닌 것이 실제로 망각수에 의해서 자신의 과거 범행사실들을 깨끗이 잊고 사는 출옥수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 죄수는 출옥 후 곧바로 망각수를 마시고 과거 자신의 범죄사실들을 백짓장처럼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도 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자신이 감옥에서 보낸 시간들까지 깨끗하게 지워버렸다고 한다. 나와 함께 출옥한 최학석이라는 녀석도 얼마 전 내게 전화를 해서는 그 망각수를 마시러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나로선 그러한 소문들에 신빙성을 갖지 않았기에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도 하다. 그러한 망각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스운 게 아니다. 자신의 과거 범죄사실을 저 혼자 잊는다고 해서 전과사실이 없어져 버리는 것도 아닌데, 무엇 하러 그 물을 마신단 말인가. 남들의 눈에 여전히 자신은 전과자이며 범죄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그 물을 찾는 것은 오로지 자기 위안 때문인가. 게다가 나로선 살인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고 하더라도, 감옥에서 보낸 15년의 세월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15년도 깨끗이 지워버린다? 그것은 이제껏 살아온 내 인생의 반 정도를 잘라내 버린다는 꼴인데, 과연 그런 정도로 기억에 구멍이 난 상태로 인간이 정상적인 삶을 살수 있을까? 무리다! 삐삣삐삣~! 갑작스레 휴대폰이 울렸다. 황병도는 취기 오른 얼굴로 수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지껄이더니 이내 일어섰다. "씨발~! 이 미친 자식, 오늘 죽을 줄 알아! 자네, 도봉석이 알지? 그 자식 그거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고 쳤다는 구만. 미친놈~! 소주병으로 사람을 두 명이나 찔렀다는군. 그런 자식은 평생 쉬어터진 콩밥으로 위장이나 채우다가 뒈질 녀석이야! 미친 자식." 거나하게 취해 있어서인지 비틀거리며 연신 미친 자식을 연발해대는 황병도야 말로 내 눈엔 진짜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튼 황병도는 잘 구워진 달팽이 요리 두 접시와 맥주 서너 병으로 비싼 점심을 때운 후 그렇게 장황하게 소리를 지르며 사라졌다. 황병도가 막 빠져나간 식당 출입문의 흔들거림이 천천히 내 망막에 포착되었다. 별안간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섬뜩한 영상이 하나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식당을 나서던 황병도의 잔상이 아직 내 머리 속에 남은 채 그것은 기괴한 영상으로 변형되었다. 영상의 완성본은 얼굴이 유난히도 길쭉한 남자였다. 온 몸에 기분 나쁜 소름이 먼저 돋았다. 그 남자는 내 이웃에 사는 정신나간 기형아였다. 얼굴이 다른 사람의 두 배정도로 긴 그는 의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자폐아였고 좀 안 좋게 말하자면 바보였다. 언젠가 내 옷에 상당량의 침을 묻히기도 한 장본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자식이 무지하게 싫다. 거미만큼이나, 달팽이만큼이나, 붉은 사과만큼이나. 언제부터 그 자식이 싫었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다. 썩은 동태 눈깔 같은 퀭한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웃음을 흘리는 그 모습자체가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가끔씩 창 밖으로 그 길쭉한 얼굴이 허락도 없이 내 방을 훔쳐보기 때문일까. 그 모습은 정말로 어느 유령보다 섬뜩하다. 나의 창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말했다시피 그 거미줄투성이의 비좁은 틈으로 기어 들어와야 할 것이다. 나로선 그것이 섬뜩한 의문이다. 그 자식은 무슨 연유로 막혀있는 비좁은 틈을 악착스럽게 기어와서는 내 방을 훔쳐보려 하는가.
<4>
쨍그랑~! 유리 깨어지는 소리가 내 고막을 두드린다. 그 재수 없는 녀석을 생각해서인가.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유리컵이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컵 속에 있던 물은 고스란히 내 바지를 흠뻑 적신다. 허둥대며 일어서는 내 발바닥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유리조각 하나. 피가 흘러나와 바닥의 물에 해초처럼 섞여든다. "조심하셔야죠.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 13일의 금요일인데." 언제 다가왔는지 식당 여주인이 내 곁에 와 있다. 그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양말을 손수 벗기더니 마른 수건으로 상처부위를 감싼다. "피가 많이 나오는데요. 이렇게 꼭 누르세요. 가서 빨간 약이라도 가지고 올 테니까요." 그녀는 의사 같은 어투로 내게 명령하고는 서둘러 주방 쪽으로 간다. 되돌아온 그녀의 손엔 붕대와 구급약품들이 쥐어져 있다. "상처가 덧나지나 않아야 할텐데..." 상당히 호의적인 그녀를 유심히 관찰해 본다. 나이는 대략 나랑 비슷한 30대 후반정도. 그리고 혼자 사는 여자처럼 보인다. 일찍이 남편을 잃었던가, 아니면 이혼을 했던가. 그 나이치고는 꽤 호리호리한 몸매에 피부도 곱다. 근사한 외모다. 하긴 출옥 후 내 눈에 비친 그 어떤 여자가 예쁘지 않았으랴. 15년만에 구경하는 여자들이었기에 내게 조금이라도 친절을 보이는 여성들이라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이 동요되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아무튼 처음 온 남자손님에게 이토록 호의적인 걸로 봐선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13일의 금요일이에요. 재수 없는 날이니, 항상 조심하세요." 그녀는 13일의 금요일임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두 번다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13일의 금요일이 그토록 이나 내게 두려운 날이었던가. 언제부터? "장사도 되게 안되네~! 오늘은 일찍 문이나 닫을까보다~!" 그녀의 푸념 섞인 한숨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바람에 나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손만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그녀의 윤기 있는 목덜미와 종아리가 보였다. 나의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빨라졌다. 온 몸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이성을 잃은 사람 마냥 그녀의 입술을 훔치기에 바빴고 그녀는 그것을 허락했다. 우리는 곧바로 장소를 옮겼다. 나의 집으로. 집에 도착했을 땐 벌써 저녁이었다. 책상위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다섯 시 십 삼분이었다. 전자시계 액정화면이 5:13을 가리키고 있는 그 광경에 또 다시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13 이라는 숫자 때문이었다. 지레 겁을 먹은 것일까! 그녀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차분히 앉아서 생각을 해 본다. 어째서 내가 13일의 금요일에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만 하나? 그러나 아무리 기억해 보려해도 분명한 원인이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어렴풋한 이미지들이 떠오르는 것도 같지만 그것은 저 너머 무의식 세계의 이미지들처럼 어둡고 희미하기만 하다. 생각의 고리는 다른 쪽으로도 이어진다. 불현듯 요즘 들어서 그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불길한 이미지들이 굉장히 많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다. 마치 그것들에, 내가 스스로 아무 의미 없는 불길함을 가져다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렇다면 나는 불행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사람인가. 잠깐동안 무슨 미스터리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 착각은 샤워를 마친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오면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그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도 되지 못했다. 유난히 흰 피부와 간드러지는 그녀의 신음소리가 나의 흥분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조시켰고 나는 잠시동안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나자 우리는 둘 다 바닥에 축 늘어진 채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꿈에서 완전히 깨어난 나는 내 몸이 온통 피투성이이며 바닥의 그녀는 전혀 숨을 쉬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였고 두 눈을 부릅뜬 채 흰자위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몸에 난 상처들은 칼자국들임에 틀림없었다. 바로 나의 오른 손에 큼직한 칼 하나가 쥐어져 있었기에! 언젠가 꾸었던 지독한 악몽이 생각났다. 이럴 수가~! 그 꿈은 다름 아닌 예지몽이었던가! 죽음을 경고하는! 꿈 생각에 바라본 그녀의 목에는 깊은 칼자국이 나 있었다. 머리를 잡고 조금이라도 세게 흔들면 금방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나는 차분히 사태를 정리했다.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분명 내가 그녀를 죽인 것이다. 내 손에는 날카로운 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고 그 칼날에는 그녀의 몸에서 금방 빠져 나온 피로 가득하다. 이것으로 나는 또다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15년 전 그 때처럼. 어떤 생각하나가 번개처럼 떠오른다. 혹시, 15년 전 그 날도 13일의 금요일이었던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달력을 바라보았다. 머리 속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13일의 금요일! 분명 그 날도 13일의 금요일이었으리라. 그래서 난,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기분 나쁜 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힘없이 쥐어뜯었다. 나는 15년 전 13일의 금요일에 살인을 하고 15년이 지난 13일의 금요일에 또다시 살인을 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로 이제부터는 착실하게 잘 살아보려고 했건만~! 바닥 가득히 번져 있는 피. 나는 그녀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민했다. 불현듯 15년 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때도 나는 똑같은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시체를 토막내어 하수구에 버렸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다시 움켜쥐었다.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의 결심이 서는 순간 나는 시체를 욕실로 옮겼다.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옮기듯. 톱으로 그녀의 몸을 차례차례 썰어나갔다.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썰듯. 무려 다섯 시간동안 계속된 작업이었다. 욕실은 피바다였다. 욕실 하수구 구멍으로 피의 냇물이 소용돌이치며 꾸르륵 빨려들었다. 방바닥에도 여기 저기 피가 튀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그 피들은 어느 정도 응고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스물 두 개의 검은 봉지에 나누어 담아졌다. 그리고 세제를 풀어서 바닥을 청소했다. 그것은 대청소였다. 하지만 집안에 가구라곤 포마이카 책상하나가 달랑 전부였기에 청소는 생각보다 빨리 끝맺을 수 있었다. 핏자국들은 모두 지워졌으나, 피비린내만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밖은 어느새 깜깜했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서 몇 번이나 깊게 숨을 들이켰다. 피비린내 때문에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창 밖이라고 그리 신선한 공기는 아니었다. 어둠 저 아래로부터 피어올라오는 오물들의 악취는 오히려 피비린내 만 못할 정도였다. 잠시 창가에 기대어 서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몸을 틀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스물 두 개의 검은 봉지들을 창 밖으로 집어 던졌다. 검은 봉지들은 거미줄 뭉치에 휩싸이며 어둠 속으로 낙하했다. 균열된 틈 아래로 떨어지며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갔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그 아래엔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썩은 하수구 국물, 죽은 고양이들의 체액, 버려진 쓰레기들이 벌레들과 뒤엉켜버린 거대한 산. 어찌됐건 오물들은 오물들과 섞여져야 하는 법이다. 어차피 이런 곳에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시청 앞에 떨어진 담배꽁초 하나에는 신경을 써도, 이런 후진 곳에서는 쓰레기가 썩어가든 시체가 썩어가든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을 것이다. 왠지 그것이 정해진 진리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나의 시야에 두 가지가 잡혔다. 그것들은 연속으로 내게 불길한 징조들을 각인 시켜 주었다. 그 첫 번째는 붉은 거미였다. 비오던 아침에 보았던 그 붉은 왕거미. 그것은 아직까지도 그 맞은 편 벽에 접착이라도 된 것처럼 딱 들러붙어 있었다. 어둠 속이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마치 심판자 같은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확인하려는 순간, 나는 창틀에 있는 또 다른 뭔가를 보았다. 정말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것에 손을 가져가서 만져보았다. 끈끈한 액체였다. 그것은 침이었다. 축축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걸로 봐선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에 흘려놓은 것임이 분명했다. 이런 망할~! 그 기형아 녀석이다! 그 망할 놈의 기형아 녀석이 불과 얼마 전까지 창밖에 서서 침을 흘리며 나의 방안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녀석! 녀석은 다 보았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부터 토막낸 봉지까지 모두 다. 빌어먹을~ 이제 어쩐담. 그 녀석을 찾아내어서 죽여 버려야하나. 벌써 누군가에게 말해버렸으면 어쩌지?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그 망할 거미를 보고 나서부터 내가 너무 흥분해 있었던 것 같다. 흥분하지 말자.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 불운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녀석은 자폐아가 아닌가. 다시 말해서 정신나간 녀석이다. 그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든 사람들은 헛소리로 여겨버릴 것이 분명하다.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어쩌면 그 침은 내가 무의식중에 흘린 침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침착해지자. 더 이상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만들지 말자. 모든 것은 다 끝났다. 깨끗하게 마무리 될 것이다.
<5>
"당신이요? 망각수를 제공해준다는 자가?" 검은 망토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집어 쓴 괴물 같은 녀석은 의심 가득한 내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않는다. 그저 희미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일 뿐이다. 고객에 대해 상당히 불손한 태도다. "그럼 긴 말 하지 말고 당장 그것을 내놔보시오." 그렇다. 나는 지금 망각수를 찾고 있다. 도저히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죄 값을 치른 첫 번째 기억은 내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로 저지른 그 기억만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서 삭제해 버리고 싶다. 그렇지 않고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것이 대량의 술과 공기청정제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된 이유다. 솔직히 아직 반신반의 하지만 해괴한 몰골의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오히려 점점 더 믿음이 가는 듯하다. 이내 녀석에게서 쉰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상당히 거북스러운 소리다. "정확히 무엇을 삭제하고 싶은지 말하시오. 정확하게 말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내놓았다. "조금 전 내가 죽인 여자에 대한 모든 기억을 없애주시오. 그녀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적절한 설명이 되리라고 본다. 그 여자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없어지면 나에겐 그녀를 만난 기억도, 집으로 데리고 온 기억도, 살인을 한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잠시 후 녀석은 괴상하게 생긴 기구를 끄집어내더니 뭔가를 열심히 작동시킨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쉽사리 믿어지진 않는다. 마치 요란한 마술쇼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윽고 그 기구에서 손가락 만한 캡슐이 나왔다. 녀석은 그 캡슐을 내게 내밀고 나는 홀린 듯 그것을 받아들인다. 투명한 캡슐 속에는 붉은 액체가 들어있다. 아마도 이것이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 망각수인가 보다~! 내가 그것의 뚜껑을 따려할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마지막으로 해야할 중요한 의식이 있소. 여기 이곳에 피로 사인을 해 주시오." 참으로 웃기는 짓이다. 3류 공포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얘길 해대다니. 하지만 푸른빛을 띠는 녀석의 눈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오싹해지는 게 어서 녀석이 원하는 데로 해주고 속히 그곳을 벗어나고만 싶어진다. 나는 검지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피를 냈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괴상하게 생긴 그 기구를 내게 내밀었다. 내가 그곳에다 황급히 사인을 할 때였다. 바로 그 짧은 순간, 내 시야에 정확히 포착된 것이 있었다. 내 사인란 바로 위쪽에 큼직한 숫자가 있었다. 13 숫자는 정확히 13을 가리키고 있었고 내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그 숫자는 14로 바뀌었다! 사인을 마침과 동시에 13 에서 14로 바뀌어 버리는 그것은 대체! "당신은 세 달 사이 벌써 14번째입니다." 뭔가가 내 머리 속을 갉아먹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독한 현기증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온 몸의 피가 몸밖으로 분출하는 듯한 아찔함에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지기 직전 내가 본 것은 그 기구 속에서 선명하게 번쩍이고 있는 14 라는 숫자였다. 14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나는 그 동안 무의식의 저편에서만 몽롱하게 기억되어지던 모든 수수께끼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옴을 느꼈다. 나는 옛 기억들을 되짚어 나가 보았다. 출옥 후 나는 13명의 여자들을 죽였고, 바로 오늘 밤 또 한 명을 더 죽여버린 것이다.(그제 서야 나는 내게 특별한 성도착증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15년 전 첫 살인.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숨겨진 광기의 본능. 나는 관계를 맺는 모든 여자들에게 흉기를 휘둘러서 그 비명소리를 즐겼던 것이다) 내가 첫 살인을 한 날은 분명 13일의 금요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13일의 금요일이 아닌 '13'이라는 숫자가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 때마다 나는 이곳을 찾아와서 그녀들과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다 지워버렸다. 망각수는 그녀로 인해서 내가 망각수를 마셨다는 그 사실마저도 깨끗이 지워버렸던 것이다. 목이 잘려나간 채 창가를 서성이던 여자의 악몽. 그것은 바로 그 전날 밤 내가 죽인 열 세 번째 여인의 환영이었다. 나는 그녀 역시 살해한 후 토막내어 창 밖으로 시체를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렇다! 창 밖, 그 아래론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신체조각들이 빼곡이 버려져 있을 것이다. 썩은 악취를 풍기면서. 온갖 벌레들을 동반한 채. 그 벌레들은 가끔씩 벽을 타고 내 방안까지 기어 들어왔다. 그 벌레들에 대한 왜곡된 기억이 바로 달팽이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아, 아. 이제서야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그날 아침 맞은 편 벽에 붙어 있던 붉은 왕거미는 사실 전날 밤 시체를 버릴 때 튀었던 핏자국이었다. 핏자국! 바로 그것이 조금 전에도 보았던 그 붉은 왕거미의 정체였다. 언제나 이 때쯤이면 머릿속이 소독 방역을 한 것처럼 뿌옇게 흐려지곤 했었다. 피의 사인을 마치는 순간, 이제껏 망각수를 마신 기억들이 무덤에서 올라오는 시체들 마냥 꾸역꾸역 피어올랐다. 호흡하기가 곤란해져왔다. 숨겨져 있던 모든 진실들과 한꺼번에 대면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무섭고 잔인한 것이었다.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고문을 받는 듯한 고통이었다. 나는 스스로 불편한 기억들을 삭제시켜 나감으로서 나의 죄를 면제받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형아 녀석은 창문을 통해 기막힌 장면들을 다 보았을 테지. 내가 광란의 살인을 저지르는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망각수가 강제 삭제시켜 버린 내 검은 기억들을 그 바보 녀석이 다 훔쳐서 인지하고 있는 꼴이라니! 나는 서둘러 캡슐을 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그것을 마셨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내 머리 속에서만은 그런 기억들이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한다고 14명을 살해한 그 사실이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닐 테지만(빌어먹을 기형아 녀석의 머릿속에는 영수증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스스로를 위장하며 억지로라도 제거시켜 나갈 수밖에. 그것만이 나의 신경을 보호하는 길이니. 망각수가 내 식도를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모든 꺼림칙한 기억들이 구름처럼 하얗게 덮어진다. 14! 아마도 나는 이제부터 무의식적으로 14라는 숫자에 강한 거부반응을 느끼게 될 것이다. 13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14 라는 숫자에 숨겨진 끔찍한 비밀은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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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올렸던 '기억의 지배자' 시리즈 중 '13일의 금요일'편을 아주 미미한 수정을 해서 올렸습니다. 보신 분들이 아마 많을 것이라 생각되네요. 어제가 13일의 금요일이고 해서 한 번 올려보았습니다. 예전 작품이라 역시 현실성보다는 추상성에 많이 기댄 글이 듯합니다~
지금 새로운 단편을 쓰고는 있는데 언제 올리게 될 지는 모르겠네요. 완성하는데로 올리겠습니다.
모두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첫댓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제이슨 친구님의 작품이군요.잘 보고 갑니다~ 어제 수련회 갔었는데 13일의 금요일이라고 무대 장치가 다 고장이 났더랍니다. 웬지 더 소름끼치는 내용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소설 부탁드립니다
13일의 금요일... 저는 오히려 이 날이 더 기분좋은 하루던데~^^ 사람마다 느끼는게 다른 것 같아요.. 소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과연 내용이 한층 더 심오하군요.. 앞으로도 좋은 소설 부탁해요!!^^
왜 사진 안올리셨어요? 사진 올려주신다고 그러신거 같은데..ㅠ.ㅠ 제이슨님 알라븅븅~ ㅎㅎ
어 본건데 ; 어디서 봤더라 -ㅁ-....;;;;;;;;;;;;;;;;;;;;; 아 이놈의 기억력 ㅠㅠㅠㅠㅠㅠㅠㅠ
ㅎㅎㅎ 역싀 제이슨님 글 재밌습니다..쾌감ㅇ ㅣ 온다는 ㅎㅎㅎ
아 제이슨님 오래동안 뜸하시더니 계속 좋은글을 준비하고 계셨나보네요 기대됩니다. 건필하세요~
재미잇당>< 그나저나 심리에만 기대어져서 형사는 등장하지 않네요,형사 나오는것도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넘 재밌게 잘 봤습니다...글고 제이슨 친구님 부산에 거주하시는거 맞아요 아마 해운대 쪽이라고 들은 듯
아웅... 오랜만에 들렀는데 제이슨님 글보고 가네요. ㅎㅎ;;; 잘밨습니다.. 건필이염 ^^*
오랜만의 제이슨님의 글, 잘 읽고 갑니다^ㅡ^
기억의 지배자 고거 맞죠...씨리즈 물...ㅎㅎ
망각수.....흠흠.... 직면하기 싫은 현실에 대한 회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검은 그림자?? 제이슨 님의 갈고리에 걸렸네요 ㅎㅎㅎ 즐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