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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3월 12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가 4,24ㄴ-30)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native place.
말씀의 초대
나병 환자인 나아만은 엘리사 예언자가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는다. 그러자 그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은 이스라엘이 믿는 하느님을 찬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신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난한 목수 집안의 아들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이 멀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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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나자렛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사제도 아니신 분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희년을 선포하시고, 선포하신 희년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진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고향 사람이며,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미 그들의 고향에서 겪은 어려움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면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은 분노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끌어내어, 산의 벼랑까지 끌고 가서 죽이려고 합니다.
열등감을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허영이나 교만에 빠지기 쉬우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른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고, 때로는 자기가 높아지려 노력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추락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어둡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고향 사람들도 이런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면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기쁨이라는 기적이 일어날 리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모습이 매우 좋아 보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닮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환영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거기에 참된 기쁨도 숨어 있습니다.
☆☆☆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편견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 요셉의 아들이며, 직업도 ‘평범한’ 목수였다는 ‘편견’입니다. 그들은 우월감에 젖어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형태로 ‘마음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자신의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편견을 깨려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위대한 엘리야 예언자도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녀는 시돈 지방에 사는 이방인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시돈 지방에는 돼지 키우는 집이 많아 유다인들은 대단히 부정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깨끗하다는 유다인들을 제쳐 두고 사렙타의 과부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편견의 우월감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비유의 말씀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사렙타의 이방인 과부도 엘리야 예언자를 맞이했는데, 어찌하여 당신을 외면하느냐는 ‘질책’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해치려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조용히 피신하십니다. 어리석음도, 난폭함도 참아 내십니다. 살다 보면 지난 일을 ‘들추어내는’ 사람들을 꼭 만나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복음의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양승국신부-
<고단수 예수님>
좋은 지도자, 제대로 된 리더로 존재하려면 ‘고단수’가 되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우리 예비 신부님, 수사님들을 교육시키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끊임없는 격려, 칭찬, 용서, 관대한 수용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큰 발전이 없습니다. 나태해지기 쉽고 흐트러질 가능성도 많습니다. 한 마디로 ‘군기’가 빠지지요.
그래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자극입니다. 때로 정확하게 부족함을 지적해줘야 합니다. 때로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따끔하게 야단도 쳐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강경일변도로 나가게 되면 교육의 효과가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적당한 순간을 포착해서 풀어주어야 합니다. 윤활유를 쳐줘야 합니다.
밀고 당기고, 쥐었다 풀었다를 계속 반복해가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을 잘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할 말은 한다’는 주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참으로 꼴불견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갖은 허세를 부리면서 거드름을 피우던 율법학자들, 교만과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던 바리사이들의 한심한 모습을 예수님은 절대로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솔직하게, 느끼는 그대로, 나오는 그대로의 말씀을 직설적으로 던지셨습니다. 폼 좀 그만 잡으라고, 깊이 반성하라고, 빨리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하고 싶은 말씀을 가감 없이 던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선민의식, 우월감에 잔뜩 사로잡혀 있던 유다 사람들을 향해 직격탄 한방을 날리십니다.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예언자 엘리야는 유다인들에게가 아니라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수많은 나병환자들 가운데 치유받은 사람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었다.”
정곡을 찌르는 예수님의 말씀에 분기탱천한 사람들은 합세해서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갑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입니다.
그런 순간 한 마디만 더 하면 건너오지 못할 강을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위기 상황을 파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즉시 입을 닫으십니다. 이제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이제 남아있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니, 이제 됐다, 하시면서 침묵 중에,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강약조절, 치고 빠지기에 전문가이신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신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관계 안에서 중요한 것이 적정선입니다. 때로 넘어서지 말아야 될 선은 넘지 말아야 합니다. 넘어서게 될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참담한 현실이요,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입니다.
편견과 소문
- 송동림 신부-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어느 해 아버지의 병이 발견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부터 고향 마을에는 아버지와 나에 대한 특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천주교 신부가 되기 위해 가족을 뒤로하고 신학교에 갔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이다. 당시 고향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도 많았고, 무속의 영향력이 컸다고는 하지만 그 소문을 전해 들으면서 마음이 무척 착잡했다. 특히 장남인 내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기에 본의 아니게 가족을 비롯해 특히 아버지께는 한동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복음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한테서 외면당하는 장면이다. 그들의 몰이해로 예수님이 이방인 지역에 가서 활동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설픈 편견 때문에 스스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편견은 사람이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생각하는 것, 마음에 드는 것만 보게 한다.
인간은 수많은 변화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과거의 특정 모습이 계속 고착될 수도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 있는 존재이고, 사실 늘 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 없다. 그러기에 만일 누군가가 편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예전 잣대로 그 사람을 재는 것과 같고 그한테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부정하는 자세와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예전 잣대로 재는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미 지난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뭐 대충 적당히 그럭저럭
- 김효준신부-
돼지고기를 먹고 탈이 날 때가 있습니다. 덜 익었는데 그냥 먹었기 때문입니다.
돼지고기는 반드시 잘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상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덜 익은 돼지고기를 먹고 탈이 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설프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겉이 잘 익었으니까 속도 잘 익었으려니 하는 어설픈
생각이 어이없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어설픈 생각은 우리의 몸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마찬가지로 어설픈 신앙은 우리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많은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님 역시 고향 사람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어설픈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가족을 잘 알고, 그분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그분의 삶을 잘 알고
있다는 ‘어설픈 지식’이 지금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어설픈 지식일 수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은총과 사랑은
-김찬선신부-
나아만과 엘리사.
세속 임금의 신하와 하느님의 사신.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하느님의 치유를 받고자 멀리서 옵니다.
그리고 치유를 받기 위해 정성을 다 하는 뜻에서 많은 봉물 가지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뜻에서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만나주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그저 요르단 강 물에 몸을 씻으라고만 합니다.
엘리사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신답습니다.
세속의 권세를 그리 대단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대단한지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 그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세속의 권세뿐 아니라
인간의 정성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나아만의 정성을 높이 사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도 나아만의 치유를 위해 정성을 들이지 않는 듯 보입니다.
아무런 성의가 없는 듯이 심부름꾼을 시켜 처방만 내립니다.
이에 나아만은 그렇게 성의도 없고 정성도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의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거며,
또 도랑물 같은 요르단 강 물로 무슨 병이 낫겠냐고 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의사가 성의도 없고 정성도 기울이지 않으면 그 치료는 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은 인간의 성의나 정성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치유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치유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치유하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언젠가 입시를 앞두고 학부모들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미사를 드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마고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대답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일어나 가면서 다시 한 번,
“신부님, 정성껏 미사를 드려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을 다시 앉히고는 하느님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는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다 믿는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당신이 당신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더 사랑하심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믿는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불안해 하냐고 일침을 놓고
보시다시피 제 정성은 믿을 것이 못되니
제 정성을 믿지 마시고 하느님을 믿으시라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족속보다 더 당신 마음에 들거나 예뻐서
또는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당신 마음에 더 들어서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은사는 순전히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의해서이지
인간이 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하느님,
제 하는 짓 보고 구원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과 사랑으로 구원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멘.
새벽을 열며
미국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교실 복도를 걷다가 얼굴이 갈색인 동양계 학생이 흑인 학생에게 '초콜릿!'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신체적인 약점을 꼬집어 별명을 일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 선생님은 흑인 아이를 초콜릿이라 부른 아이를 불러 세운 후 엄한 표정으로 그 아이에게 물었어요
" 그 아이에게 초콜릿이라 부르는 이유가 뭐지?"
그러자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어요
" 그 애는 제 친구거든요, 그 아이와 얼굴생이 흰 토니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을 다른 아이들이 삼총사라 부르지요."
선생님은 맹랑하게 대답하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 친구들은 너를 뭐라고 부르지?"
아이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코코아요"
선생님은 피부색에 빗대어 부르는 별명이 듣기에 거북하지 않느냐고 묻자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 얼굴색은 코코아 색과 정말로 비슷한걸요!"
선생님은 자기의 얼굴색이 코코아색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아이가 의아스러웠어요. 그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너희들은 토니를 무어라고 부르지?"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답해요
"눈송이요"
선생님은 처음에 아이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었지요
신체적인 약점을 가지고 별명을 붙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떤 편견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편견 때문에 그런 별명을 불렀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별명을 자신있게 불렀던 것이지요
결국 아이들이 편견을 가진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눈과 마음속에 편견의 씨앗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런 편견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학력이 높아야 하고 능력와 재주가 많아야 인정을 해 주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 정치, 경제 , 문화등 모든 부분의 지도계층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일류 학교 츌신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는 각종 비리, 불법거래, 뇌물수수와 호화사치, 벤처 사기, 온갖 부도덕과 부패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속에 있는 편견의 그물들을 걷어 내어야 할때입니다. 그런 다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넓은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은 세상을 참 슬프게 하지요. 우리의 생각은 자주 그리고 많은 부분이 옳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편리한대로 생각합니다. 이제 더이상 보이는 것에 현옥되지 맙시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더욱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나다!
-전삼용신부-
EBS 다큐 프라임에서 남녀의 차이를 알아보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먼저 남, 녀 각 8명씩의 아이들을 택해서 실험을 합니다. 그들은 남, 녀 쌍을 이루어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즉, 남부터미널 앞에서 만나서 검은색 자동차에 타고 남부터미널 뮤지컬 댄싱쉐도우 간판을 지나 방송국까지 데려왔습니다. 운전자는 자신은 강남구에 산다고 하고 차 안에서 노래는 비발디의 사계를 틀어주고 제목까지 모두에게 똑같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차의 색깔은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남자는 대부분 기억했습니다. 남자들은 운전자가 강남구에 산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기억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남부터미널에서 만난 것을 기억했지만 여자아이들은 지하철이나 그 주위를 대답합니다. 물론 비발디의 사계를 기억하는 것은 여자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1분 내에 자전거를 그려보라고 했더니 남자는 페달과 체인, 프레임 등 핵심적인 것들을 잘 그려냈지만 여자들은 자전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잘 그려내지 못했습니다. 기울어진 물병을 그려도 물도 함께 기울여서 그립니다. 물은 언제나 수평인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사람의 얼굴과 나이 등에 대해 기억을 잘 했지만 공간의 변화에 대해서는 둔감하였습니다. 물론 언어능력에서는 여자가 훨씬 더 뛰어납니다. 주차는 남자가 더 잘 하죠. 남자는 여러 가지 일을 절대 동시에 못 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순서를 정해서 체계적으로 일을 해 나갑니다. 여자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금방 공감을 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들은 과연 남자가 더 낫고 혹은 여자가 더 잘 한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이런 차이를 주셨을까요?
이것은 사과와 오렌지가 서로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른 것이지 누가 더 낫다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둘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어야 완전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이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상대의 잘못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물론 구조상 말로는 남자가 여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남자는 통합적 체계화 능력이 뛰어나고 여자는 상대의 감정에 대해 큰 공감화 능력이 있습니다. 남자는 사회 활동에, 여자는 아기를 키우는 등의 가정 살림에 적당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여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합니다. 나와 다른 상대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혼자서는 절대로 온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그렇듯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면 인간은 불완전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려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 지낼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도 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서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하느님, 즉 ‘나’가 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 자아가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좀처럼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당당히 예수님은 “어떤 예언자도 자신의 고향에서는 대접받지 못한다.”하시며 그들의 심기를 건드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해 봐야 그들이 화만 낼 것임을 아십니다. 그렇더라도 당당히 해야 할 말을 하시고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다만 한 명이라도 그 말을 듣고 회개한다면 모두가 당신을 미워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이런 미움들이 계속 증가하여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있느냐?”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예언직 때문에 죽어야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만이 필요할 뿐이고 자신이 하느님입니다. 이것이 내가 버려야 할 자아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본래 우리들은 ‘나’라고 한 그분으로부터 나온 피조물일 뿐입니다. ‘나’라는 이름은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나’가 너무 강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나의 ‘나’ 때문에 우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특별히 그 분이 찾아오셨던 고향이 우리들이라면 우리가 나자렛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도 우리의 부족한 점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부족함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처럼 그 채워주려는 마음에 화를 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한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백화점에 들러 양복과 외투를 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포장지를 뜯었어요. 그런데 아들의 것으로 샀던 양복의 안주머니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손에 끼워 드렸지요. 어머니 손에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해요.
“어머니, 양복주머니에 반지가 들어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따라서 이 다이아몬드는 어머니의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아들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자초지종을 백화점 주인에게 말했지요. 백화점 주인은 이 말에 이렇게 답변을 해요.
“이 옷을 사셨으니, 이 반지 역시 당신의 것이지요. 굳이 이렇게 돌려주지 않아도 될 텐데 왜 반지를 제게 돌려주시려고 하십니까?”
이 말에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옷만을 샀을 뿐입니다. 즉, 이 반지를 산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저희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이거든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들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참, 때로는 구별이 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더 못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으라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못된 짓만 하라는 말씀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를 범하면서 못된 삶을 영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차별 없이 이 세상 사람들을 받아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기 위해서 똑같이 생활하는 것일까요?
종종 이런 분들을 만납니다. 주일에 미사 한 번 참석한 것으로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씀하시는 분, 자기를 위한 기도만을 바치면서도 기도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착각하시는 분,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하면서도 왜 다른 이들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느냐고 큰 소리 치시는 분…….
이런 분들이 주장하는 신자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고향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있다면서 그리고 전부터 알고 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섣부르게 판단하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전혀 보려고 하지 않고 단지 예전의 모습 그리고 예수님의 일가친척 모습만을 보고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고향 사람들에게 다른 고장에서 보였던 놀라운 기적들을 행해 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성서의 예를 들어 이방인들이 오히려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받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아주 적은 의무의 실천만으로 신자라고 주장하는 이의 모습은 고향 사람들과 똑같지 않나 싶습니다. 자신이 신자로써 이렇게 행동했으니 그리고 예전부터 예수님을 알았으니, 이 정도는 내게 베풀어 주셔야 한다는 섣부른 착각과 판단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신자라고만 말만 하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즉 사랑을 더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총의 선물이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냥 예수님을 아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아는 만큼 더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그래서 “저는 크리스챤이거든요.”를 자신있게 외치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앙인답게 생활합시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양승국신부-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대형 교통 사고를 겪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자신의 두 발로 병실을 나서기까지 1년이란 세월이 걸렸고, 그간 겪었던 고통은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되 할수록 자매님에게 일어난 일은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구겨진 차 속에서 목숨을 건졌고, 다들 가망이 없다고들 했었는데...자신의 두발로 퇴원을 하다니...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누군가가, 아니면 어떤 큰 힘이 자신을 늘 떠받치고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기쁜 일은 몸의 회복과 동시에 마음도 완벽히 회복된 것입니다. 자매님은 한마디로 개과천선하게 되었습니다. 참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자매님 얼굴만 바라만 봐도 그분의 신앙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잘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고로 인한 회심 이후의 자매님은 가까운 사람들 특히 남편과 자녀들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앞길을 사사건건 가로막는 사람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흔적을 느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또한 매일 처리해야할 사소하고도 잡다한 집안 일들조차 하느님과 연결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긍정적이고도 낙관적인 삶의 자세"였습니다.
매사에 불평불만이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던 아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다보니 처음에 남편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던데...혹시라도 이러다 아내가 갑자기?"하는 걱정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자매님은 전과는 달리 이유 없이 다가오는 십자가나 난데없이 닥치는 병치레, 우울한 마음, 작은 실패, 좌절, 실망들조차도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선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내가 변하니 남편도 덩달아 변화되었습니다. 남편이 변화되니 자식들도 신명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과 너무도 가까이 살았기에 자신들 사이에 이미 와 계셨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때로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자주 우리 가까이 와 계신다든지 바로 우리 옆을 지나가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음을 열지 못하기에, 우리의 눈이 순수하지 못하기에 그분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우리에게 필요한 일 한가지는 우리 삶 가장 가까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얼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배우자의 삶 안에 계시는 하느님, 시어머니, 며느리, 직장 동료, 친구들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체취를 느끼는 일입니다.
본성이 평온하고 행복한 사람은 나이 드는 것에 결코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 성격의 소유자에게는 젊음도 늙음도 똑같은 짐이다.(플라톤)
은혜의 선택성
-남상근 신부-
예수님께서 고향 마을인 카파르나움에 들르셨을 때 사람들은 이적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다른 곳에서 보였다는 치유와 구마의 능력에
대하여 익히 들은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냉담하셨고 오히려 그들의 부아를
돋우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바로 구약의 두 사례, 곧 엘리야 시절에 시돈 지방 사렙타의
한 과부에게만 내린 하느님의 돌보심과 엘리사 예언자 때에 시리아
사람으로 나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의 치유 사건을 거론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내린 하느님의 은혜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는
닫혀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화가 치밀어 주님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 위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야말로 선택된 민족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는 다름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이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입니다. 은혜 받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받을 자격이 없으면 됩니다.
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없음을 자랑하는 것은
못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직 수행을 위해서는
-전삼용신부-
우리는 얼마 전 최진실씨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먹고 살기 때문에 인기가 추락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을 견뎌내기 힘들어합니다. 이런 심적 부담으로 많은 연예인들이 자살을 택했습니다.
언젠가 무한도전 정신감정 편을 보았는데 정준하씨가 인기에 가장 많이 집착하는 사람으로 분석이 나왔습니다. 인기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공허해지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유명 드라마 작가 김수현씨가 팬미팅을 가지며 잇단 연예인들의 자살에 대해 쓴 소리를 하였습니다. 특별히 故최진실씨를 언급하며 “지금 인기가 있더라도 언제나 예전과 같은 위치에서 모든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인기도 위치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진실양이 그걸 끝까지 움켜쥐려 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인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뜬구름과 같고, 아침이슬 같은 것입니다. 타고난 능력에 재능과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겠지만 그로 인해 얻는 인기는 보너스일 뿐입니다. 그런데 남과 비교를 하고 자기를 비하해 열등감을 느낍니다.”
요즘은 연기자 장자연씨의 자살로 또 시끄럽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장자연씨는 연기를 하기 위해 매도 맞고 술접대와 성상납까지 했다는 유서가 공개되었습니다. 과연 인기가 무엇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습니다.
이런 와중에 연기자 한예슬은 참 성숙된 모습을 보여서 좋습니다. 그녀는 드라마 ‘타짜’에서 그동안 이어오던 흥행 행진이 잠시 주춤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기는 하늘이 잠시 내게 빌려준 것일 뿐입니다. 앞으로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연기에만 전념할 것입니다.”
“최근 전 재산 9조원을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난 대만 포모사그룹의 창업자 왕융칭이 유언장에 남긴 ‘돈은 하늘이 내게 잠시 맡기신 것’이라는 말에 크게 감동 받아 나도 그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인기는 김수연 작가의 말대로 뜬구름과 같고 아침이슬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잡으려다간 우울증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꼭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쓴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에이, 좋은 게 좋은 거다. 괜히 이런 말해서 사이만 안 좋아지겠다.’하며 해주어야 할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 상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괜히 미운 사람 만들어서 자기만 힘들게 되지 않으려는 어쩌면 하나의 자기편의주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좀처럼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당당히 예수님은 “어떤 예언자도 자신의 고향에서는 대접받지 못한다.”하시며 그들의 심기를 건드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해 봐야 그들이 화만 낼 것임을 아십니다. 그렇더라도 당당히 해야 할 말을 하시고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다만 한 명이라도 그 말을 듣고 회개한다면 모두가 당신을 미워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이런 미움들이 너무 증가하여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있느냐?”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예언직 때문에 죽어야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하여, 혹은 좋은 관계만을 소중하게 여겨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 참 사랑은 자신의 것을 찾지 않습니다.
감히 하느님 사랑을 독점하려 들지 말지니!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은 선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저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하느님 사랑이 이스라엘의 독점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이 독점하고 싶어도
당신이 주시고 싶은 대로 주시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분노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이 자기들만의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사랑도 자기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절대로 다른 이에게 양보하거나 나눠줄 수 없고,
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음으로써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우리 집단에 속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우리 집단,
우리 교세를 확장하려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하느님을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가톨릭교회도 아니고 진정한 종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나 어떤 집단에 의해 독점 당하실 분이 아니고
누구 또는 어떤 집단만을 사랑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어떤 집단이 독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집단은 하느님을 아이콘화(iconize)하는 것이고
그런 신앙은 그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을 독점하지 말고
다른 사람,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도 모든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환영받지 못한 예수
- 이정배 목사-
오늘 본문은 고향에서 예수님이 배척받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메시지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임재한 성령께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그리고 눌린 자에게 각기 필요한 대로 은혜를 베풀라는 것이었지요. 누구라도 홀로 슬프고 혼자만 즐거울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은혜의 해의 본질이자 예수 탄생 때 성모의 기대와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엄청난 말씀이 선포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람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보였습니다. 과거에 사로잡힌 그들은 오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재차 청천벽력의 말씀을 전합니다. 자신들을 의당 하느님의 사람으로 생각하던 유다인들을 향해 엘리야 시대에 구원받은 자가 단둘뿐이었다는 내용이지요.
엘리야가 궁핍했을 때 기름을 갖다 준 여인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더러운 물에 몸을 담가 문둥병을 고친 이방나라 장군 나아만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인과 이방인만이 구원을 받고 나머지 유다인은 아니라고 하니 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듯합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리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없었다면 그 메시지는 오늘까지 이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과 회당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미 모든 것을 갖고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묻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런 정신(ethos)이 오늘의 교회에 선포되고 있는가? 이런 메시지를 듣고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교회로 발길을 옮길 수 있는 것일까?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수의 기사를 읽으면서도 우리는 내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이지요. 저 역시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고민이 적지 않습니다. 이념논쟁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으나 오늘의 현실을 보며 예수님의 말씀과 선포가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할까에 대한 질문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새벽 4시 30분쯤이었습니다. 성당 문을 열고, 불을 켜놓기 위해서 문을 나서자마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성당과 밖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의 잠금 장치가 부서져 있었고요. 저는 순간적으로 지지난달에 찾아왔던 도선생님이 또 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약간의 긴장이 생깁니다. 성당에서 사무실 쪽으로 내려가는데, 사무실 앞의 쓰레기통이 쓰러져 있고 뚜껑은 부서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저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도둑이 들었구나.’
이제는 긴장감을 넘어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혹시 저 구석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덮치면 어떻게 하지?’
‘몽둥이라도 하나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구 있어요?”
사실 도둑이 들었다면, 도둑도 누군가 나타나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목소리를 듣고서 스스로 도망가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성당은 너무나도 조용했습니다. 저는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성당 문과 쓰레기통 외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깨끗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낮에 강제로 문을 열려는 사람에 의해서 성당 문의 잠금 장치가 부서진 것이고, 쓰레기통 역시 어떤 사람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도둑의 소행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단순히 문과 쓰레기통을 보고서 도둑이 들어왔다고 생각을 했고 또한 두려움도 함께 간직하고 있었지요.
이러한 지레짐작의 모습들. 어쩌면 우리들이 자주 행하는 커다란 잘못의 시작이었습니다. 지레짐작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너무나 많았거든요.
오늘 복음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을 지레짐작합니다. ‘저 사람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 구세주가 아니다.’라고 그들은 지레짐작을 했고, 또한 단정 지었습니다. 즉,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야기만을 하지 않는 예수님을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는 악행을 행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우리 역시 지레짐작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 이렇게 엄청난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노력을 하셨으면 합니다. 그러한 노력이 지레짐작하여 예수님을 거부하는 행동들을 하나씩 없애도록 할 것입니다.
지레짐작 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부족함 많아보이는 사제
-허찬란 신부-
제 고향은 대한민국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의 산간 마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생각나는 일은 감귤 선과, 똥돼지 우리 청소, 제사입니다. 제사 때면 모든 식구가
캄캄한 방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기도서에 몇 사람이서 머리를 모아 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앓으셔서 한 달에 한 번 병자영성체를
모셨는데 신부님이 오시면 대청 마루 밑에서 절을 한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는 증조부요, 조카들에게는 고조부부터 신앙생활을 한 셈이니 집안에
천주교가 뿌리내린 지 참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향 어른들은 많이 돌아가셨고, 땅도 수도원의 일부로 편입되었지만 가끔씩
고향에 가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명절이나 제사로 친지들과 고향에
모일 때면 교회식으로 기도를 하고 차례를 지내는데 그 주송은 늘 집안 어른들의
몫입니다. 물론 집 밖을 나와서는 집안에서 귀하게 난 사제로 존중해줍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른들의 눈에는 비록 제가 사제일지라도 부족함이 많은 듯
보이시나봅니다. 신앙의 집안에서 나고 자랐고, 식구들이 신앙으로
하나임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사제이자 구교 집안의 뿌리 깊은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새로운 힘을 주는 사람, 예언자
-최성기 신부-
◆「거꾸로 보기」 혹은 「뒤집어 보기」라는 이름의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다. 시점을 달리해서 보면 같은 주제라도 새롭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일 게다. 하지만 이렇게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볼 수 있는 것은 안전한 형태로 제시된 주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한 연구자는 모차르트의 음악, 셰익스피어의 희극 등을 분석하면서 이들 안에서 특정한 미학적 전개 방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것이 두 번 반복된 다음 전혀 새로운 것이 드러날 때(A-A-B) 사람들이 감동하게 되고, 웃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익숙함을 뒤집어 새로운 것을 드러낼 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익숙함이란 새로운 것이 드러나기 위한 안전한 토대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가 매력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뒤집어 보기, 거꾸로 보기에 능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예언자들은 뒤집어 보기의 명수였다. 백성들이 이스라엘이 망할 리 없다고, 다윗 왕조는 현실적으로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때 그들은 하느님의 재앙을 선포했다. 유배 이후, 망해가는 예루살렘을 보고 희망을 잃었을 때 그들은 찬란히 밝아오는 예루살렘을 이야기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꿰뚫어 진실을 볼 줄 아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안전한 토대,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전함에 머물 것인가? 새로움에 문을 열 것인가? 예수님을 만난 나자렛 사람들이 가진 물음이었다. 이 물음은 오늘날 우리한테도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누리는 율법과 성전 제의와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 머무를 것인가? 내가 믿는 종교가 주는 혜택, 교리와 전례와 전통 안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내 삶에서 시시각각으로 만나게 되는 ‘거꾸로 세상을 읽고, 뒤집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알아보고, 내게 주어진 신앙 유산을 풍요롭게 하고 새롭게 할 것인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사순시기다. 이 시기에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는 예언자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과 다르게 세상을 드러내 주고 뒤집어 보여줄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나를 생각하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새로움에 눈뜨게 하고, 내가 익숙하게 여기는 것에 새로운 힘을 주는 우리 시대의 예언자를 만나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예언자가 되어주는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벽을 허물 수 있는 방법
- 정필종 신부 -
찬미 예수님! 요즘 우리나라 사회를 읽는 코드 내지는 키워드 중 하나는 ‘양극화 현상’입니다. IMF 이후 보다 그 정도가 더 해만가는 양극화는 부동산 문제, 고령화, 청년 실업 등 현재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 중에서도 단연 선두에 설 정도로 심각한 지경입니다. 제가 무슨 경제학자나 정치가가 아니기에 여기에서 그 해결책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양극화 현상 이면에 있는 우리내의 생각을 한 번 읽어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중에 무슨 일을 제대로 한 번 해보려면, 실력보다는 학연, 지연, 혈연이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이런 선입견은 서로 간에 불신과 분쟁 그리고 다툼을 낳게 됩니다. 이런 면들이 우리 모두를 하나를 묶지 못하고 숱한 문제점만을 야기한 채, 서민들의 생활고만 가중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벽들을 허물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여기에 조용한 빛을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라는 빛을 말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그분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할 사명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그 사명을 말과 행동, 즉 자신의 온 삶을 불살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예언자란 시장통 한 가운데 굳건히 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안위와 개인적인 삶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그는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체현해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우리에게 소개해줍니다. 엘리야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라는 나병환자를 고칩니다. 그것도 나아만이 성질을 낼 정도로 우스운 방법으로 쉽게 고쳐버립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요르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나아만이 결코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만의 방법이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만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의 진위를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방식이라면서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거론하십니다. 이것이 회당에 있던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만의 방식, 하느님을 바라보는 그들만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집 내지 독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이런 아집과 독선으로는 결코 우리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물 수 없습니다. 자기 본위의 삶으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누군가는 손을 들어 하늘의 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달을 바라보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달을 가리키고 있는 그 손을 자르고, 심지어는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채여 주시는 분에 불과합니다. 그런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평신도교령」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봉사 직무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이(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신자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신다(1코린 12,7 참조).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시어”(1코린 12,11)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1데드 4,10) 사랑으로 몸 전체를 완성해 나가게 하신다(에페 4,16 참조). 아주 단순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은사를 받았으므로 모든 신자에게는 교회와 세상에서 인간의 행복과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이 은사를 사용할 권리와 의무가 생긴다(2항).
이처럼 교회는 이미 우리에게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추구하도록 우리가 불림을 받았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것이 본인 스스로 생각할 때는 미약할지라도 적어도 모든 인간의 행복과 교회의 건설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고 소중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세워 놓은 숱한 벽들을 허무십니다. 그런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벽도 미세한 틈을 통해서 허물어집니다. 우리 각자 자신들의 올바른 삶의 자세가 결국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
-양승국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구세주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보통 큰 경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해왔던 고향마을 사람들! 예수님께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 정겨웠던 사람들, 꿈과 추억을 만들어준 따뜻한 이웃들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 예수님께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계셨던 사람들이었기에, 그 어떤 사람들에 앞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하고 싶으셨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대상자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경한 사람으로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즉결심판에 처하려고 합니다. 일정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습니다. 죽입시다! 옳소! 하는 식의 인민재판식으로, 다수의 폭력으로 예수님 한 사람을 처단하려고 합니다.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구사일생으로 궁지에서 빠져나오셔서 자신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고 단죄하는 나자렛을 영원히 떠나십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다보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고향마을을 등지십니다.
이제 고향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비록 동향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복음의 수혜자가 됩니다.
세례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수도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많다고 해서, 성당 가까이에 산다고 해서, 단체장을 맡는다고 해서 절대로 신앙의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나가려는 매일의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족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가 몸담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지 진지하게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강영구신부-
말씀이신(요한1,1) 예수님,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저희들이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시리아 장군 나아만처럼 말씀인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희의 가슴을 열어주소서.
저희들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이라 믿고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저희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보다 훨씬 더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당신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들입니다(갈라3,2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저희를 당신의 몸인 신비체神秘體의 지체肢體(1고린 12,27)라고 가르칩니다.
당연히 당신의 말씀이 저희들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요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당신 자신이 바로 말씀(요한1,1)이심으로 당신이야 말로 저희들의 삶의 길잡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당신은 지금 고향 나자렛 사람들을 한탄하셨듯이 오늘 저희들을 한탄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저희들이 당신 몸의 지체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말씀보다 나의 주장과 고집을 내세우고, 당신의 뜻보다 나의 욕망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사렙다 마을의 과부도, 시리아 장군 나아만도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히브4,12)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한 그들은 이방인이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한편,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당신과 동향인同鄕人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말씀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말씀이신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저희가 말씀이신 당신께 순종하는 삶으로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시리아 장군 나아만처럼 구원받게 하소서.(一明)
나자렛을 방문하신 예수
-조욱현 신부-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위하여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보아왔고 그 가족들의 형편이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잘 아는 어떤 사람이 크게 되면, 그것을 칭찬하면서도, 깎아 내리려는 마음이 있다. 개천에서 용 났네!, 미꾸라지가 용이 되었네! 등이다. 이것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과 같다. 자기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을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학력 수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일가 친척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는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외면하면 하느님의 손길은 다른 백성에게로 향한다는 사실을 당신과 유서 깊은 나자렛에서 옛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이 회개하기를 촉구하신다. 즉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엘리야 시대에 3년 반의 가뭄 때에 하느님께서는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의 과부에게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과,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환자를 외면하시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 만을 치유시켜 주신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알아들으라고 하신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 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 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박해로, 죽음에로까지 가게 하는 인간의 잔인성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지식으로, 혹은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만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 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나자렛 사람들과 다른 점은 어떤 것이 있는지 묵상해 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냉랭한 마음
-박 요한 신부-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예수님의 마음과는 달리 예수님을 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태도는 냉랭합니다.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선포하지만 그 가르침은 아예 외면당합니다. 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예수님을 벼랑으로 밀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나에게서도 이런 잔인함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간혹 편견이나 아집은 진실을 외면하게 하고 때로는 은폐하고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잔인하게도 아니다 싶은 이, 그 중에서도 약한 이에게는 유감없이 그 본모습을 드러내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다인의 모습에서 주변 동료나 신자들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권위로 위협하고 싶은 나를 발견합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이 기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을 보는, 들을 수 없었던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만지는 기회였습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요한 1,18)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을 알려주신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하느님은 평범한 우리 중에 오실 수도 있고, 우리 중에 누구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싫었을까요?
결국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화가 잔뜩 나서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마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은총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닐까요? 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받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는 눈이 뜨인 사람,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 받는 것이 은총입니다. 주님께 큰소리로 말씀드립니다. “눈을 뜨고 싶습니다.”
고향에서 예언자가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정호 신부-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우리 귀에 이미 익숙한 말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예수님에 대해 여러 복음은 그분이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처음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말씀을 듣고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을 하게 되지만, 순식간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면서 분위기는 냉랭해지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내용보다 그분이 어디서 그런 능력을 받았는지를 궁금해 합니다. 이런 반응은 뒤집어서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은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야 당시 사람들만이 확실히 알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근거만 살펴보아도 지금 세상과 사람들이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삶에 대한 편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을 이어 목수였습니다. 돌아온 예수님께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하고 예수님의 직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억합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삶의 터전에서 땀을 흘리며 사는 목수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나서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목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 출생에 얽혀 있는 사람들의 편견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은 예수님 부모가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 동네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누군지, 어머니 마리아가 누군지 너무도 잘 아는 곳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혼인할 무렵 일어난 불미스런 소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마리아가 요셉도 모르는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때가 이른데도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급하게 맞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가족이 베들레헴으로 떠난 후 한동안 돌아오지 않다가 어린 예수를 데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 돌아온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석연치 않은 출생을 알고 있는 그들이니 예수님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좋게 들릴 리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화를 돋우는 말씀으로 죽을 위기에 내 몰리십니다. 아예 사람들은 예언자에 대한 편견으로 그의 말이나 행동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그들을 환영하지 못하며 그런 그들에게 아무리 하느님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셔서 화를 자초하십니다. 사람들은 화를 내며 그분을 절벽으로 내 몰아 죽이려 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또 하느님의 뜻은 그렇게 우리와 별 차이 없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오고, 선포되고, 뿌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는 사람에 대한 편견은 그 사람의 진실을 곧잘 가치 없는 것으로 왜곡하거나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펼쳐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있어도 아니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 그에 대한 편견 때문에 하느님을 전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지금. 사람의 지독한 편견의 무서움을 바라보고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벗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공생활의 시작 -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40일간 광야 대피정을 마친 후 갈릴래아 지역에서 첫 활동을 하셨다. 그런 다음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으로 가셨다. 오늘 복음은 이곳 나자렛 회당에서의 활동(4,16-30) 그 후반부를 들려준다. 이곳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가 사실상 루가복음이 의도하는 예수님의 첫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마침 안식일이었던 터라 회당예배에 참석하신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아예언(이사 61,1-2)을 봉독하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라는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셨다. 이는 곧 예수께서 자기 사명을 계시하신 것이다. 고향사람들은 우선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칭찬과 탄복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3절)하면서, 그저 그렇다는 냉랭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유다인들은 매일 "쉐마, 이스라엘"(신명 6,4-5)을 기도하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봉독하고 이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따라서 예수를 그저 요셉의 아들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비밀폭로(계시)는 잠시 놀라움의 대상은 되겠으나, 결코 새로운 것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예수께서 기원전 900년경 엘리야가 이방인 과부를 돌보고(1열왕 17,7-16), 그의 제자 엘리사가 이방인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일(2열왕 5,1-14)을 들먹거려 배척의 빌미를 제공하신다.(25-27절)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른 나자렛의 지인(知人)들이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내 벼랑으로 떠밀어 죽이려 들자, 예수님은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자신의 갈 길’을 가셨다. 오늘은 그냥 피해가지만 ’또 다른 벼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때까지는 아무도 예수님의 길을 앞당기거나 막을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사순 제3주간 월요일뿐 아니라, 앞서간 16-23절을 합쳐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에 봉독된다. 같은 복음이라 할지라도 시기에 따라 그 뉘앙스가 다르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두루 묵상하는 연중시기의 분위기와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둔 사순시기의 분위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연중시기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개시와 사명의 선포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고,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는 말씀도 그저 전통적인 속담의 인용으로 들릴 뿐, 막 개시된 공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순시기의 오늘 복음은 상당 부분,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죽임을 당할 때면 늘 동네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을 동네나 진지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죽여라’는 율법규정(민수 15,35; 신명 17,5))에 의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처럼 회개의 설교를 선포하였다면, 예수 또한 요한과 비슷한 예언자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메시아예언(이사 61,1-2)과 ’하느님 은총의 해’의 선포가 성취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한다면, 예수는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 처벌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예고된 메시아라면 유다백성을 위한 메시아여야 하는데, 이방인 과부와 나아만을 들먹거리는 태도는 마땅히 유다인들의 분노를 싸고 그들의 배척을 초래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는 어떤 타협도 없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세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렇게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복음이 사순시기의 테두리 안에서는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이 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