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일본의 인류학자들은 '학술인류관'을 만들어 조선인을 전시했다. 사진 제공=KBS
조선인을 전시물로
일본에서 열린 박람회는 1871년 10월의 ‘교토박람회(京都博覽會)'가 최초였다. 민간 회사가 주도한 것이었다. 교토박람회사 주최로 교토 니시혼간지(西本願寺) 대서원(大書院)에서 열렸다. 이때는 아직 새로운 전시관을 마련하지 않았던 때라 기존 건축물을 사용했다. 교토박람회는 1개월에 1만 1천 명 정도가 입장했다. 이후 일본에서 박람회가 대유행하게 되었다.
1877년 8월 21일 제 1회 ‘내국권업박람회'가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개최된다. 내국권업박람회는 만국박람회는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자국만의 박람회였다. 정부가 주관한 박람회로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내국권업박람회는 5회에 걸쳐 전국 3개 도시에서 열린다. 1877년, 81년, 90년에는 우에노 공원에서 95년에는 교토 오자키(岡崎)에서, 1903년에는 오사카 천왕사(天王寺)에서 각각 열린다. 우에노 공원이 일본 박람회의 근거지가 된 곳임을 알 수 있다. 전국민의 시각을 우에노에 집중시킨 것이다. 이로써 우에노 공원은 전국 명소가 되었다.
지방 도시에서는 ‘품평회(品評會)', ‘공진회(共進會)'라는 이름으로 개최된다. 공진회는 박람회보다 격이 낮은 것이었다. 공진회라는 이름이 처음 들어간 박람회는 1879년 9월 내무성의 권농(勸農), 상무(商務) 두 개국이 공동 개최해 요코하마(橫浜)에서 열린 제 1회 ‘제차공진회(製茶共進會)'가 최초이고 1882년에는 농상무성이 제 1회 내국회화공진회(內國繪畵共進會)도 연다.
조선에서 열리는 박람회는 공진회라는 이름으로 열리게 된다. 이것은 우리 농상공부(農商工部) 상무과(商務課)에서 주관했다. 우리 나라 박람회의 효시는 1907년 경성박람회이다. 통감부가 침략의 한 수단으로 연 것으로 국제박람회 성격은 아니었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박람회라는 이름은 규모와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1903년 4월, 제 5회 ‘내국권업박람회'가 오사카에서 열린다. 이 박람회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들은 파리에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오사카의 천왕사에서 열린 이 박람회는 일본 정부 최대의 국가적 이벤트로 치러졌다. 규모도 최대였다. 제 4회 교토 박람회장의 10배였다. 천왕사 공원 외에 금궁(今宮)까지 이어진다. 하나의 박람회장 촌(村)이 형성된 것이다. 이 박람회장이 현재의 천왕사 공원이다. ‘대례봉축(大禮奉祝) 교통전기박람회'라고도 한 이 박람회는 교통과 전기의 발달과 그 중요성을 대중에게 알리는 전시회였다.
시설물은 교육관, 참고관, 미술관, 체육관, 대만관, 오스트리아관, 연극장 그리고 학술인류관 등을 두었다. 이외에 동물원도 만들었다. 여기서 대만관은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들어간 것이고 오스트리아관은 만국박람회 모방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방객은 530만 명이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열린 박람회 규모로도 사상 최고였다. 박람회는 오전 8시 개장해 오후 6시에 문을 닫았다. 일부는 10시까지 입장시켰다. 이때는 권업보다 오히려 오락으로 흐르는 박람회였다. 분수령이었다. 이때는 가이드 북까지 만든다. <오사카와 박람회> 책이 그것이다. 1902년 12월에 만든다.
이 박람회는 큰 문제를 야기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술인류관에서 조선인, 류구인(琉球人), 아이누인 그리고 대만의 고산족(高山族) 등을 진열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실지로 현지인을 전시한 것이다.
1907년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동경권업박람회'에서는 ‘외국제품관'이 들어선다. 외국제품관은 1907년 3월 준공된다. 미국 시카고 박람회장을 모방한 것이었다. 일본인 건축가 니이노미 다카마사(新家孝正,1857-1922)가 설계한 것이다. 그는 1899년에는 우리 나라에도 건너와 제일은행 인천 지점을 설계한 바 있다. 이 건물은 인천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 7호이다. 1997년 이후 폐쇄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이 박람회 외국제품관 구역에 우리 조선관이 들어선다. 조선이 통감부 아래에 들어가 있었으나 외국이므로 참여시킨 것이다. 우리 나라로서는 일본 박람회에 첫 참가한 것이 된다. 만국기 중 우리 나라 태극기도 보인다. 이때부터 ‘입장권'이 ‘관람권'으로 바뀐다. 박람회장은 야간에는 일루미네이션을 설치 시노바쥬노이케(불인지, 不忍池)에 건물이 떠오르듯 보이게 했다.
"조선 동물 두 마리가 있었는데 우스웠다."
"Chosun animal had two was ridiculous."
- 도쿄권업박람회를 관람한 어느 서양인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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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8일 kbs 역사스페셜 방영
KBS1 ‘역사스페셜’이 ‘조선인 전시’ 사건을 통해 과학의 이름으로 이뤄진 ‘인종론’의 역사를 추적한다.
1907년 3월 일본에서 열린 ‘도쿄권업박람회’. 각종 진기한 볼거리와 여흥거리가 많았던 바로 이곳에서 많은 조선인을 분노케 한 일이 발생한다. 박람회 흥행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수정관 안에 조선인 남녀 두 사람이 있었다. 난간을 사이에 두고 일본 관람객들이 안에 있던 조선인을 구경하는, 그야말로 ‘인간 동물원’의 모습이었다. 일본인에게 동물처럼 관람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이곳에 무슨 이유로 전시됐던 것일까.
조선인 전시는 1903년 오사카에서 있었던 제5회 ‘내국권업박람회’에서 먼저 이뤄졌다. 이를 주도한 이는 쓰보이 쇼고로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인류학자. 대규모 박람회장에 350평이라는 규모로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하루에 1000명 이상의 관람객을 맞았던 ‘학술인류관’. 그곳에 대만인, 아이누인, 류큐인 등과 함께 두 명의 조선 여인이 전시됐다. 일본 관람객들을 교육한다는 명목이었다.
2008년 대학로 한 공사장에서 유골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당시 유골조사를 의뢰받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총 28명의 유골이며, 50년에서 100년 전 사이에 어떤 목적을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수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이 있었던 곳.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연구에 몰두했던 ‘체질인류학’이 바로 유골 출토의 비밀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건강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건강하지 못한 인구를 도태시키려 한 일본.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이나 전 국민 보건캠페인은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정책들이다. 박람회 인간전시를 비롯한 20세기 초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제국주의 시선을 추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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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침략 미화
1914년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처음 열린 전시회는 ‘동경대정박람회(東京大正博覽會)'였다. 이 박람회는 해외 침략을 미화하기 위해 치러진 것이었다. 박람회는 이제 국가 사업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 박람회는 3월 20일에서 7월 31일까지 5개월간 우에노 공원에서 열렸는데 동원 인원이 무려 746만여 명이었다. 당시 일본 인구의 10%가 구경왔던 것이다. 도쿄 인구의 3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동원 규모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군국주의와 박람회가 병립하는 형태였다. 군국주의는 박람회를 통해 힘을 얻고 점점 더 국수주의화해 나갔다.
아울러 전시 건축물이 인기를 끌게 된다. 건축물의 형태에 제관주의적(帝冠主義的) 양식이 들어간다. 파빌리언 형식의 상업용 건축물이 이때부터 본격 등장한다. 이 전시회를 통해 ‘윈도- 쇼핑'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백화점이 활황을 맞는다. 즉, 아이 쇼핑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조선관, 만주관, 몽고관(蒙古館) 등이 세워졌다. ‘조선관'은 영문으로 ‘Korean Building'이라 했다. 그림으로 보이는 조선관은 지붕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과장법을 써서 그린 것 같다. 조선관의 설계는 일본인 건축가 쿠니에타 히로시(國枝 博, 1879-1943)가 맡았다. 그는 1905년 동경제대 건축과를 졸업했고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에 관여했다.
조선관은 우리 나라 경복궁(景福宮)의 한 전각(殿閣)을 모델로 한 것 같다. 지붕선, 박공, 벽, 창문 등이 원형에 가깝도록 건축되었다. 부속 휴게소도 쿠니에타가 맡아 했다.
1917년 제 1회 ‘화학공업박람회'에는 2층 짜리 조선관이 나타난다. 역시 우에노 공원 불인지에서였다. 2층 짜리 건물로는 처음이었다.
1922년 3월 우에노 공원에서는 ‘평화기념 동경박람회'도 열린다. 이 박람회에 우리 조선관과 조선 끽다점(喫茶店)이 세워졌다. 대만관, 만몽관(滿蒙館) 등과 이웃하는 것이었다. 조선관은 지상에, 끽다점은 연못가에 세워졌다. 조선 전통식의 이 건물들은 불인지에 세워졌다. 조선관은 경복궁 경회루(慶會樓)를 본 딴 것으로 매우 큰 규모였다.
지방 소도시에서의 박람회
1926년 봄에는 지방 소도시에서도 박람회가 열린다.
오카야마(岡山) 시에서 1월 20일부터 5월 18일까지 ‘대일본권업박람회'라는 명칭으로 열린다. 이 박람회 제 1회장에 조선관이 세워진다. 단층의 전시관과 2층짜리 식당이 세워진다. 아사히 맥주에서 세운 것이다.
1931년에는 또 다른 소도시에 조선관이 세워진다.
그 하나는 하마마쓰(浜松) 시 전국산업박람회이다. 3월 시제(市制) 20주년 기념으로 시스오카(靜岡) 현 하마마쓰 시에서 열린 것이다. 68만 명을 동원한 박람회였다. <조선과 건축>지에 의하면 여기에 세워지는 조선관은 건평 80평 규모로 ‘조선식 궁전조(宮殿造) 양식'을 채택했다고 했다. 설계는 조선총독부 관방(官房) 회계과가 맡아 했다. 공사는 가나자와(金澤) 시 팔일시옥청태랑(八日市屋淸太郞)이 했다.
본관과 부속가로 나눠졌는데 본관은 50평으로 진열장과 진열대가 놓여진 진열관으로 사용하고 부속가는 매점사무소, 숙직실, 변소로 30평짜리였다. 공사 기간이 불과 21일 걸린 것이다. 개장 하루 전 준공되었다.
또 하나는 가고시마(鹿兒島) 시에서 열린 박람회 ‘국산진흥박람회'였다. 가고시마 시 외압지(外鴨池) 유원지에서 열렸다. 조선관의 규모는 40평으로 소규모였다. 구조는 ‘조선식 누문조(樓門造)'를 본땄다고 한다. 성곽, 문루 형식을 보면 우리의 지방 읍성을 모방한 것 같다. 전시관은 2층으로 1층에는 진열장과 진열대, 사무실, 숙직실, 변소 등으로 되어 있다. 전시실은 35평이고 나머지가 5평이었다. 2층은 누각 12평과 발코니 즉, 노대(露臺)로 되어 있다. 설계는 조선총독부 관방 회계과에서 했고 공사는 경성 어성정(御成町)에 있던 염빈풍길(鹽浜豊吉)이 했다. 총공사비는 2천5백15원으로 평당 62원이 들었다.
1933년에는 미야자키(宮崎)시에서 주최한 ‘조국 일향(日向) 산업박람회'에 조선관이 세워졌다. 조선식 궁전조로 지어졌다. 역시 35평 규모였다.
요코하마 부흥박람회가 야마시타 죠(山下町) 해안공원에서 1935년 3월 26일 열렸다. 여기에도 조선관이 세워졌는데 “여러 관 중에서 최고로 이채를 띄어 인기를 모았다. 고대풍의 극채색으로 된 특이한 건물은 단연 타관을 압도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1936년에는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축항기념 하카다(博多) 대박람회(1936.3.25-5.13)에도 조선관이 들어섰다. 조선관은 조선식 누문과 성벽을 이미지로 설계했다고 하는데 경복궁 광화문을 복사한 것이었다. 해태상까지 그대로 갖다 놓았다. 3층 목조인데 1층은 164평, 2층은 30평, 3층은 18평으로 212평의 규모였다. 1층이 주전시장이고 2층은 귀빈실과 접대실로 되어 있다. 이 조선관은 지금까지 일본에서 열린 박람회 조선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같은 해 오사카 시에서 열린 ‘빛나는 일본박람회'에도 조선관이 세워졌는데 형태, 규모는 하카다 박람회와 같았다.
기후(岐阜) 시 약진기념 일본 박람회 조선관과 진산시(津山)시 희진선(姬津線) 전통(全通) 기념 산업진흥 박람회의 조선관도 그 규모나 양식은 유사했다.
조선관은 어디로 갔나
이후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일제를 통해 우리 건축을 보여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자발적인 박람회 참가를 통한 우리 건축의 세계화를 이룰 수 있는 계기가 상실된 것이다.
어쨌든 열세 번 정도 일본의 여러 도시에서 열린 박람회에 우리의 건축물, 조선관은 세워졌다. ‘조선관'과 끽다점, 식당, 정자 등의 형태였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우리의 건축 역사이기도 하다. 조선관은 단순한 전시관으로 보다 일본에 우리 건축을 소개한 역할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건물은 순수 조선 풍의 건축이라기 보다 약식(略式) 건축물로 세워졌다. 설계할 건축가, 집을 지을 건축 장인들도 문제였고 전시관 공사 기간도 짧았다.
사실 일본 각지에 살던 재일동포들은 이 조선관들을 보고 또 다른 감정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그들은 일본에 오기 전 경복궁을 들어가 본다거나 조선풍 건축물에 관심을 가질 그러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박람회가 대도시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우리 동포들도 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박람회가 끝난 후 조선관이 어떻게 되었는지, 또한 조선관에 전시되었던 진열품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 삼태극 전문 학술위원 서울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