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醫學)의 성인 장중경(張仲景, 150?∼219?)
본명은 기(機 혹은 玑)라고 하며, 남양군 열양읍 출신이라 한다. 출생 연도는 150∼154년 사이, 사망은 215∼219년으로 추정되며, 호는 ‘중경(仲景)’으로 상한론(傷寒論)의 교신저자(交信著者)다. 동 시대의 인물인 화타(華佗), 동봉(董奉)과 함께 건안삼신의(建安三神醫)라 불린다.
장중경(張仲景)의 본명은 장기(張機)이며 고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내과의사이다. 동한 말기 전란과 역병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시의 유명한 문인 조식(曹植)은 그때의 암울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건안(建安) 22년, 병마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집집마다 시체가 뒹굴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온 식구가 떼죽음을 당하거나 한 민족은 모두 병사하여 역사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벼슬은 효렴을 거쳐 장사태수에 이르렀다고 하나 정사인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그가 장사태수를 지냈다고 해서 장장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일부 학설에 따르면 손견 사망 이후 장사태수를 하다 유표에게 반란을 일으킨 張羨(장선)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으나, 장선이라는 사람이 의술에 능했다는 기록이 없어 학계에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게다가 생몰년도도 맞지 않는데, 장선은 서력 200년에 병으로 사망했지만 장중경은 그 이후까지 생존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라는 의견이 정설이며, 이 경우 장중경은 장선이 죽고 그 아들이 유표에게 항복한 뒤에 장사 태수가 되었다가 조조에 의해 한현(韓玄)이 장사 태수로 임명될 때 갈렸다고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이 추측이 맞다면 한현의 전임 태수인 셈이다.
장중경의 스승 장백조(張伯祖)는 한나라 영제(靈帝)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후에 장사 태수에까지 오른 인물로 의학이란 “위로 군주의 병을 치료하고 아래로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며 평소에는 건강을 지켜 장수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여겼다. 장백조의 자필 전기에는 “우리 가문은 본래 2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번창했다. 그러나 건안 원년(196년)이래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에 이 중 3분의 2가 죽어나갔다.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이 돌림병으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돌림병의 해로움에 대해 통감하고 있었다. 이에 과거의 선례를 꼼꼼히 찾아보고 민간에 유행하는 여러 가지 요법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종합하고 자신의 실전 의료 경험까지 망라하여 ❮상한잡병론❯ 총 16권을 완성했다. 이는 동한, 서한시대 이전의 의학을 집대성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현재에는 ❮상한론 傷寒論❯과 ❮금궤요략 金匱要略❯ 두 권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상한론❯은 차가운 기운에 의한 발열성 질병을 논하고 있으며 발열성 전염병의 치료방법을 변증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금궤요략❯은 내과의 각종 병과 외과, 부인병 등에 대해 논하고 있다.
다만 그의 관직 수행 여부에 상관없이, 바로 다음 세대의 의학가인 황보밀이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의 서문에 장중경의 일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존재 자체는 확실했던 것 같고, 아마도 벼슬을 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젊은 시절부터 유명했던 의술은 마을의 의사였던 장백조라는 사람으로부터 배웠다고 하며, 그 계기는 삼황오제 전설 속의 신의(神醫) 편작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업적이라면 역시 상한론의 원전인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의 저술일 터이다. 당시 의술은 침구가 주류이고 탕약은 부차적인 것으로서, 탕약의 복용에 대해 정리된 학설이 없어 약초의 효능 정도만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통합적인 의료 체계가 잡히지 않고 민간요법만 중구난방으로 떠돌던 상황.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탕약을 침구와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장중경(張仲景)이다. 따지고 보면 시대도 황제내경에서 얼마 되지도 않고, 황제내경은 워낙 학설의 짜집기가 심하고 후대에 개찬된 것도 많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동급의 원전을 써낸 셈이다.
그의 저서로는 상한잡병론 이외에도 ❮요부인방(療婦人方)❯, ❮오장론(五藏論)❯, ❮구치론(口齒論)❯, ❮황소약방(黃燒藥方)❯, ❮변상한(辨傷寒)❯, ❮요상한신험방(療傷寒身驗方)❯, ❮평병요방(評病要方)❯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장중경은 위 저서에서 진맥과 임상 경험을 종합하여 총 20여 종의 병과 관련된 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현재 사용하는 방법과도 큰 차이가 없다. 위 저서들은 특히 방제학(方劑學: 약재의 적절한 조합 등 처방 구성을 연구하는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상한론❯에는 113개의 처방전이 기록되어 있으며 사용된 약재는 170여 종에 이른다. ❮금궤요략❯에는 총 262개의 처방전이 기록되어 있으며 사용된 약재는 214종이다. 여기에는 각 과에서 상용하는 다양한 처방전이 총망라되어 있다. 내복약으로는 환약, 가루약, 고약, 단약(丹藥: 환약 또는 분말 형태의 약), 탕제 등이 있으며 외용 처방전으로는 목욕, 훈약(薰藥: 불에 태워서 나오는 기운을 쐬어 병을 치료하는 약)을 비롯해 적이(滴耳: 귀에 약물 떨어뜨리기), 관비(灌鼻: 코에 약 불어넣기), 관장(灌腸), 좌약 등이 사용되었다.
중경의 처방전은 약을 많이 쓰지 않고 정확한 배율로 조제하여 치료효과를 높였다. 후대 중국 사람들은 그를 ‘의학의 원조’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그는 유행성 열병에 대해 여섯 단계의 변증법적 치료를 체계화했다. 열병을 ‘육경(六經)’ 즉, 삼양(三陽), 삼음(三陰)에 따라 여섯 유형으로 나누어 치료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는 각 유형별로 병세, 증상, 맥박 등을 정리한 후 음양표리(陰陽表裏), 냉열허실(冷熱虛實) 등의 요소를 감안해 치료했던 것이다. 유형별 맞춤 치료법과 약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도 이를 매우 존중하여 따르고 있다.
장중경은 “병의 원인을 규명하여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고 이 방법에 따라 처방을 내리며 처방전대로 약을 복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는 중국 임상학의 초석이 되었다. 장중경의 이러한 처방 원칙은 매우 신중하고 엄밀하게 확립되었다. 그는 고대 중국의 수많은 명의들과 달리 질병에 관한 각종 이론을 탐구하지 않았으며 마법이나 초자연적 역량 같은 것을 믿지도 않았다. 오직 임상 경험만을 토대로 질병의 원인과 증세를 규명했다. 그의 이러한 연구 태도는 후에 중국 의학사상 특수한 ‘경방파(經方派: ‘경방’은 경험에 따른 처방이란 뜻으로 임상의학을 중시하는 학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상한잡병론❯은 후대 임상의학 본보기가 되었으며 현재도 일부 의사들이 이 저서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처방을 내리고 있다. 당, 송 이후에는 일본, 조선, 동남아 등의 국가로 전파되어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저서를 아직까지도 연구하고 있다. 이처럼 후대 의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장중경을 중국 의학계에서는 ‘의성’ 또는 ‘의학의 원조’로 칭하고 있다
아무튼 화타와 동시대의 또 다른 의학의 별이지만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이게 다 삼국지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과 밀접하게 엮인 바가 없고, 이 때문에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황보밀과 맥결의 저자인 그의 제자 왕희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한의학계에서의 존재감은 장중경이 화타를 압도한다. 무엇보다 상한론은 현전하지만 화타의 저작은 현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 또한 장중경이 흔히 한의학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탕약과 침구 처방에 능했던 반면 화타는 절개를 동원한 외과시술 쪽으로 더 유명한 것도 한 몫을 했다. 뭐 두 사람 모두 건안삼신의(建安三神醫)에 꼽혔으니 위상 자체는 동급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이 고마워하며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에 장중경의 사당을 세웠는데,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년∼1976년) 때 홍위병(紅衛兵)들이 철저히 파괴해 버리면서 거기 남아 있던 그의 흔적들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