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820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충청도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빼어나고
지금은 제천시에 딸린 하나의 면이 된 청풍의 동편이 단양이다.
토지는 메마르고 백성들은 가난하여, 검소하며 아껴 쓰는 풍습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단양의 풍속이다. 『여지도서』 「형승」조에는 “동남쪽으로 죽령이 압도하듯 버티고 있고, 서북쪽으로 금수산(錦繻山)이 우뚝 솟아 있으며, 강물이 한강으로 통하니 동남쪽의 길목이 되는 지역이다”라고 실려 있다.
금수산의 주산이 되는 망덕봉(望德峯) 꼭대기에 큰 무덤이 하나 있는데,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 벌초를 하면 소원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벌초를 하므로 잡초가 없고 금잔디만 덮여 있다. 단양의 고구려 때의 이름은 적산현(赤山縣)이다. 충숙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작의 기문에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니, 그 청숙(淸淑)한 기운이 반드시 헛되게 축적될 리가 없다”라고 하였고, 조선 전기의 문신 신개는 “천 바위와 만 구렁에 한강이 돌았고, 돌을 깎고 언덕을 따라 작은 길로 행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퇴계 이황은 단양을 두고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참으로 구하던 바에 맞다”라고 칭송했고, 조선 숙종 때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이인상은 이곳을 지나며 “나그네 꿈이 만 울림에 놀라 깨니, 가랑잎만 어지러이 창문을 두드리네. 모를레라 이 밤에 강물에 흐른 비, 구봉을 얼마나 깎아내는지”라는 시를 남겼으나,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단양은 옛 이름이 도전리였던 신단양으로 옮겨졌다.
단양 석문
단양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전세(田稅)는 대부분 뱃길을 이용해 서울로 갔는데, 『여지도서』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미(大米, 쌀)가 26석 6두, 소미(小米, 좁쌀)가 43석 9두, 태(太, 콩)가 119석 12두다. 1월에 거두어들인다. 물이 불어나기를 기다려 관아 앞 하진(下津)에서 배에 싣고, 청풍의 황강(黃江), 충주의 금탄(金灘), 강원도 원주의 흥원창, 경기도 여주의 백석강(白石江), 양근의 대탄(大灘), 광주의 두미강(斗尾江)을 거쳐 댓새면 한강에 다다라 서울에 도착한다. 쌀은 광흥창에 바치고, 좁쌀은 별영청에 바치며, 콩은 선혜청과 광흥창, 군자창에 나누어 바친다.
구담봉 © 유철상
이곳 단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여러 문인들이 글을 지어 남겼는데, 미수 허목이 지은 『단양산수기』가 재미있다.
목이 오랫동안 떠도는 나그네가 되어 다니다가 11년 봄에 낙동강을 건너고 죽령을 넘어 단양으로 내려와, 운암(雲巖)의 수석을 구경하고 북으로 강위에까지 올라갔으니, 여기는 대가 호서(湖西)의 산수가 집중된 곳으로 강을 끼고 있는 것이 모두 산이다. 물이 꾸불꾸불 감돌아 흐르는 곳이 되어서 파란 물결이 끝없이 맑으며, 바위 사이에 돌다리와 모래밭이 있는데, 모두 곱고 깨끗하여 볼 만한 것들이다.
물을 따라 동북쪽으로 십 리쯤 올라가면 마진(馬津)이 있는데, 여기에 와서 산이 더욱 높고 물이 더욱 맑고 깊으며, 절벽은 더욱 깎아지른 듯하다.
목은 조금 가다가는 자주 걸음을 멈추고 이리저리 돌아보며 즐기다가, 인하여 석벽 밑에 배를 띄우고 놀면서 피리도 불고 시도 읊조리고, 따라간 몇 사람들로 하여금 일제히 노래를 부르게 하여 함께 어울려 마음껏 즐겼다.
이때에 아침 안개가 활짝 걷히자 먼 산과 깊은 물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고, 층암절벽 사이에 철쭉꽃이며 푸른 소나무가 맑은 물에 거꾸로 비치는데 맑기도 하다. 새는 날개 펴고 날기도 하고, 고기는 뛰놀기도 하니, 고기와 새들도 나의 이 즐거움을 즐기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고기와 새의 즐거움을 즐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 나와 고기와 새가 모두 서로 아랑곳없이 제각기 그 낙을 즐긴다면 그 즐기는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도담삼봉단양팔경의 하나로 남한강 상류 한가운데에 세 개의 기암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가운데 큰 봉우리에는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수각이 있다.
지금은 충주댐에 수몰되어 그 정취를 찾을 길이 없지만 허목의 글을 보면 그 당시의 풍경이 산수화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단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매포읍의 시멘트 산업이다. 매포는 원래 단양군 북일면에 있던 지역으로 안동천변에 있었고, 옛날에 매질포관(梅叱浦館)이 있었으므로 매질포 또는 매포(梅浦)라고도 불렀다. 이곳에 ‘파지 않아도 나올 정도’로 무진장 묻혀 있던 석회석을 원료로 시멘트를 만들기 위해 ‘삼천리표 시멘트 공장’이 들어선 것은 1962년이었다. 그 뒤 1964년에 ‘호랑이표 현대 시멘트 공장’이 들어섰고, 1969년에는 ‘천마표 성신 화학공장’이 들어섰다. 조용했던 시골 마을이었던 매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인구가 1만 명이 넘게 불어났다고 한다. 지금도 매포읍에서 만들어진 시멘트가 전국으로 옮겨져 곳곳의 공사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