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성전기사단
-바티칸 시국(State della Citta del Vaticano)-
이탈리아의 로마시에 위치한 면적 0.44㎢ ,인구 1000여명의 세계 최소국인 바티칸 시국.
이탈리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바티칸 리라라는 화폐 단위를 사용하는 이 조그만 나라는 세계 가톨릭교를 관장하는 교황청이 있는 성지라 불리 우는 곳이다.
-교황청 산하 신앙교리성(Congregatio de Doctrina Fidei)-
지금 이 곳에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신앙교리성의 장관을 포함한 몇 몇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신부의 복장을 하지 않은 한 사내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뱀파이어 킹이라......”
신앙교리성의 장관인 에오르 추기경이 말끝을 흐리자, 옆에 있던 발로아 대주교가 소리쳤다.
“뱀파이어 킹이라니요!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합니다.”
회의실 안에 있던 나머지 추기경들과 주교들 역시 동조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사내의 음성이 방안에 퍼졌다.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뭐요?”
발로아 대주교가 되물었다.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라고 확신하시는지 물었습니다. 확신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지요.”
그의 말에 무안함을 느낀 대주교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안에 있던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여기 모인 성직자들 중 뱀파이어를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일반인들이 들으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내용이었지만,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형제는 확신하시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오르 추기경이 사내를 향해 묻자, 그가 대답했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형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무엇입니까?”
이어진 추기경의 물음에 사내의 굳게 다문 입술이 열리면서 단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킹을...죽여야만 합니다.”
좌중에 싸늘한 침묵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흠...꼭 그래야만 하오? 동기가 어찌 되었든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동안 성전기사단의 피를 부르는 엑소시즘을 금하고 봉인령을 내렸던 것인데......”
성전기사단이라니? 이미 그들의 존재가 역사의 어둠속으로 사라진지 칠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추기경의 입에서는 놀랍게도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성전기사단(Poor Knight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
구호기사단(Hospitalers), 튜튼 기사단(Teutonic Order)과 함께 중세 3대 기사단의 하나로 불리었으며, 이교도로부터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창설되었다고 전해지는 최강의 종교기사단.
그러나 성전기사단이 군사적 세력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에 이르자, 본래 성전기사단의 창설의미는 점차 퇴색해졌고, 이후 십자군 영지의 마지막 요새였던 아크레가 이슬람에 의해 함락되면서, 성전기사단의 존재이유 역시 무의미해 지고 만다.
그 와중에 1304년경 성전기사단이 입단식 때 이단 행위를 한다는 소문이 유럽전역에 확산되자, 프랑스의 단려왕 필리프 4세(Philippe le Bel)는 1307년 10월 13일, 당시 교황이었던 프랑스인 클레멘스 5세로 하여금 성전기사단원의 체포를 명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결국 왕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클레멘스 5세는 같은 해 11월 성전기사단원의 체포를 명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1311~1312년에 열렸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15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성전기사 수도회의 해체가 결정되고, 1314년 성전기사단의 마지막 기사단장이던 자크 드 몰레(Jacques de Molay)가 화형을 당하면서 성전기사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여기까지가 역사서에 기록된 실화였고, 숨겨진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기사단의 해체 직전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와의 비밀회담을 통해서, 성전기사단의 전 재산을 넘기는 조건으로 기사단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 때 일반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성전기사단의 후예들이 ‘그림자 정부’ 또는 ‘죽음의 상인’이라 불리 우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의 전신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성전기사단에게 프리메이슨의 존재는 소멸시켜야 할 어둠의 세력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후 성전기사단은 비밀리에 교황청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어둠의 세력에 맞서기 위한 집단으로 성격이 변했다.
존재가 공개되어 있는 구마사제인 엑소시스트(Exorcist)들이 교황청의 지시에 의해서만 영적인 엑소시즘을 행해왔다면, 성전기사단은 비밀리에 능동적이고도 물리적인 엑소시즘을 진행해왔다.
몇 세기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뱀파이어 일족을 비롯한 어둠의 존재들이 빛의 역사 속으로 쉽사리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완충 역할을 감당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어둠의 세력이 잠잠해지고 시대가 급변하면서, 성전기사단의 존재 여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결국 성전기사단은 교황청의 계륵 같은 존재가 되었고, 기사단을 방치해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교황은 그동안의 공을 참작해서 해체대신에 무기한의 봉인령을 내린다.
교황의 봉인령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대부분의 성전기사단원들은 그대로 잠적하거나 임의대로 기사단에서 탈퇴하여,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에오르 추기경이 말끝을 흐리자, 순간 사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정치적인 이유로 성전기사단을 봉인했으면서, 교리의 한 부분으로 궁색한 변명을 대는 그가 얄미웠던 까닭일까? 그러나 사내는 이내 씁쓸한 표정을 숨기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 킹이 위협적인 이유는 단순히 그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힘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어둠의 세력들을 규합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이유입니다.”
“흠...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세요.”
“예, 추기경 예하. 뱀파이어 일족에는 ‘그의 심안이 열리는 날, 어둠의 역사는 빛의 한 부분이 되리라.’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뱀파이어 킹을 지칭
하고, ‘심안이 열리는 날’의 뜻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진정한 뱀파이어 킹이 되기 위한 정신적인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어둠의 역사는 빛이 한 부분이 된다는 내용은 말 그대로 어둠의 존재인 뱀파이어들이 본격적으로 빛의 역사, 즉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성직자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기 시작했다.
어둠의 존재들이 빛의 역사에 개입하겠다는 의미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인간들을 굴복시키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들이 악마라 부르는 뱀파이어 양 세력 간의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뱀파이어 일족뿐만 아니라,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다른 어둠의 존재들까지도 뱀파이어 일족의 편에 서서 개입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열쇠인 뱀파이어 킹의 존재는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뱀파이어 킹.
어둠의 존재들이 빛의 역사로 들어오기 위한 통로!
추기경들과 대주교들의 놀란 표정을 뒤로 하고, 사내의 단호한 음성이 재차 방안에 퍼졌다.
“그렇기 때문에 뱀파이어 킹을 방치해 둘 수 없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그의 말에 에오르 추기경이 또 다시 물었다.
“흠...그럼 내가 도울 일은 무엇입니까?”
추기경의 물음에 사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진다.
“다른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사내는 길게 심호흡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봉인령의 해제.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순간 주위에는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고, 이내 모두의 시선은 신앙교리성의 장관이기도 한 에오르 추기경에게 쏠렸다.
이제 그의 결단만이 남아 있을 뿐!
잠시 후......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겨 있던 추기경의 입술이 열렸다.
“좋습니다. 이 시간 이후부터 성전기사단의 봉인령을 해제하겠습니다. 그리고 엑소시즘 활동을 재개하는 것도 허용하겠습니다. 교황성하의 재가는 조만 간에 반드시 얻도록 하지요.”
얼마나 기다려 왔던 순간이던가?
에오르 추기경의 대답에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말을 잇는 사내.
“감사합니다. 추기경 예하.”
“나한테 감사할 필요 없어요. 다만 성전기사단이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일을 감당해 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반드시 어둠의 존재가 인간의 역사에 기록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추기경의 단호한 음성에 이어, 사내의 힘 있는 대답이 방안에 퍼졌다.
“빛과 말씀을 수호하는 성전기사단의 단장 아자브 드 데온. 기사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주어진 사명을 반드시 감당할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아자브 드 데온.
성전기사단의 단장이자, 한 때 최강의 엑소시스트라 불렸던 인물.
냉정한 성격과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결코 아깝지 않은 실력으로 어둠의 존재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던 자.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데온은 천천히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추기경의 음성이 들린다.
“Deus beatus vos!(신의 가호를 빕니다!)”
축복을 기원하는 인사.
짧은 시간이 흐르고, 교황청의 밖으로 나온 데온의 머리 위로 신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 중 하나인 만월이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를 필두로 어둠의 존재들에 맞서기 위해 존재하는 성전기사단이 또 한 번의 비상을 꿈꾸리라.
그들의 비상은 곧 어둠의 몰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