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 최고의 바보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복된 희망을 품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날이 누구에게는 죽음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되고 누구에게는 아무도 구해 줄 수 없는 고통이 된다. 그날이 기쁨이 되는 것은 많은 도전을 견디며 믿었던 모든 것이 사실로 확인되고 상상했던 거보다 훨씬 더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혼란스러운 곳에서 살기 때문에 내 믿음이 시련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때는 믿음이 필요 없이 다 보고 그냥 다 알게 된다.
그날이 고통이 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 속에서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후회가 아무도 모르게 나만 알고 거기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인데도 이렇게 괴로운 데, 그것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영원히 없어지는 게 날 거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 여기서 후회는 치료고 약이니 감사할 일이고 경고이기도 하다. 헤어 나올 수 없는 후회라는 끔찍한 벌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희망의 표현이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주님이 나를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어주신다. 내가 하느님을 믿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건 내가 죄인이고 동시에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증거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주님은 나를 회개시켜 그 식탁에 앉게 하시려고 오늘도 나를 섬기신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주님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같은 분이시니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내 시중을 들어주신다. ‘엄마 밥’ 하면 밥이 나오고, ‘엄마 양말’하면 양말이 준비됐던 거처럼 말이다. 이제는 밥이나 양말 따위가 아니라 나를 아름다운 영혼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신다.
죄인이 하늘나라 시민법을 따르려니 힘든 게 당연하다. 나는 불완전하니 내 믿음도 불완전하다. 마음먹은 대로, 내가 알고 있는 선한 지향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못한다. 선종(善終)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뼛속까지 죄스러움이 들어가 있다.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오늘도 목숨을 내놓으시는 그분은 도대체 얼마나 바보 같은 분인지 모르겠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0-21)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이가 한 말이니 정말 믿을만하다. 죄를 반성하고 죄스러움을 성찰하는 건 유쾌하지 않지만, 주님이 이런 나를 사랑하고 섬기신다는 믿음은 그 후회와 괴로움을 기쁨과 감사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의 기다림은 믿음이다. 믿음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오늘도 이웃사랑이라는 기름을 넉넉히 준비해 놓는다.
예수님, 저를 들여다보면 희망이 없지만 고개를 들어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그건 세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희망입니다. 죄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고의 바보, 주님을 믿음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오늘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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