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저녁에 노란 금쟁반 같은 보름달이 창가로 떠오르더니 밤이 이슥해지자 그 금쟁반 같이 노란 보름달은 어느새 중천으로 떠 올라 희디 흰 색으로 바뀌어 강물 위에 찬란한 은물결을 찰랑이게 하더군요.
어제는 교대3회 동기 주영희(재경 총동문회 제14대,제15대 재무총무)가 2 주간의 여정으로 뉴욕엘 왔다가 돌아가는 날이었지요. 좋은 가정에서 우수한 2남1녀의 삼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길러 놓더니 그 단 하나의 고명딸이 뉴욕에 사는 바람에 잠깐 다니러 왔다 가는 길이었습니다. 삼성증권 뉴욕지점의 법인장인 남편을 따라 함께 온 친구의 딸은 마침 저가 살고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약 10 분 거리에 살고 있었지요.
이게 웬 떡인가!
우리는 의기투합 했고, 때맞춰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함께 동행하지 못 한 친구 남편을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우리에겐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이기에 친구가 머물다 간 2주는 혼자 있는 저에게도 황금같은 휴일이었습니다.
열 네 살, 철부지 어린 소녀들로서 만난 저희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교육대학까지 함께 다니는 깊은 인연을 가졌었지요.
서로 중의 어느 한쪽이 너무 잘 나거나 두드러지지 않고 그만 그만 한 품성에, 날뛰지 않는 성격에, 곁에 있는 둥 없는 둥 그저 묵묵함 하나로 한 번도 틀어짐 없이 50 년이란 세월을 한결같이 함께 버티어 온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맘 속을 훤히 드려다 보듯 잘 알았었지요.
저는 시간을 아껴가며 한 번이라도 더 친구를 만나고 보내려고 애썼었지요.
맨해튼의 5th 에비뉴로, 쎈트럴 파크로, 뮤지움으로...
맨해튼 나갈 때는 자동차를 가져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한 터이라 버스를 타고 털털거리며 맨해튼으로 나갈 때도 즐거웠고, 쎈트럴 파크 나무그늘에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네잎클로버를 찾는 것도 즐거웠고(저는 네잎 클로버 두 개를 찾아서 친구와 그녀의 딸에게 선물하였지요), 마루 위에 시원한 대자리를 깔아 놓고 배를 깔고 엎드려 아잇 적 얘기로 깔깔거리며 추억을 더듬는 것도 즐거웠고, 친구와 친구의 딸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친구를 쏙 빼닮은 그녀의 딸을 보는 것도 참 즐거웠습니다.
Sea Food 를 파는 식당에서 껍질 채 바싹 튀긴 참게를 통채로 먹으며 우리는 행복하게 웃었고, 만두 속의 국물이 특별하게 맛난 맨해튼의 유명한 중국집에서는 뜨겁게 갓 찐 만두의 얇은 표피 위로 새콤한 식초 간장을 솔솔 뿌려 함께 마주 쳐다보며 저녁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해질녁의 석양을, 연분홍 노을 속에 잠겨 서서히 저녁의 시간 속으로 침몰하여 들어가는 맨해튼의 빌딩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어릴 적을 기억하고, 남아있는 우리의 미래의 꿈에 대해 얘기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웃었습니다. 버스 속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중학생마냥 꼭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또 하루는 뉴욕에서 30여년을 지낸 중학교 동기 하나를 더 불러, 가도 가도 끝없는 숲길을 따라 한 없이 자동차를 타고가서 지금은 작고하여 후손조차 없는 어느 대 부호 예술품 수집가의 홈 뮤지움을 견학하기도 하였지요.
6월24일부터 8월12일까지, A Garden of Great Music "Caramoor" 라고, 그곳에서 펼쳐질 인터내셔날 뮤직패스티벌 공연장의 준비하는 모습도 보았었지요. 미술품 수집가인 두 부부가 평생을 모아 놓은 전시품들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거실과 침실의 모든 벽지는 중국산 비단에 사람이 손수 그린 그림으로 된 것이었고, 거실의 천장, 방과 방 사이의 철 대문은 금속 위에 칠보로 장식한 아름다운 꽃과 새의 모형이었으며, 중앙의 샹데리아와 높고 낮게 걸린 벽의 燈들은 그야말로 가지각색의 문양으로 조각 된 아름다운 예술품이었습니다.
금박을 올린 새장, 그 새장을 두 팔로 받치고 있는 피에로의 노랑색 꼬깔 모자와 선연한 빨강색의 윗도리, 부부가 쓰던 침실에는 붉은 대리석 기둥에 용트림이 되어 있었으며, 구석 구석에 걸려 있는 명화들, 중국산 쑥옥으로 된 병풍은 뒷쪽에 전등을 두어 그 빛이 짙고 옅은 쑥옥(玉)을 통하여 새어나와 사군자를, 십장생을 잘 돋보이도록 절묘하게 만든 것이었지요.
가족들이 선물받은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거실, 주방에서는 바깥의 푸른 정원이 역광으로 비추여 비단같은 부드러운 녹색으로 빛나고, 침실과 거실, 그리고 서재, 그 사이 사이로 지나가는 복도에는 코너마다 서로 다른 燈이 鑄物로 된 아름다운 조각으로 걸려있고, 창에는 聖畵를 그린 스탠드그래스가 어둠 속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맨해튼에 살면서 여름이 되면 이곳 까라무어에서 지냈다고 하더군요. 단 하나의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자 이곳을 홈 뮤지움으로 만들었으며 딸마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이 집을 뉴욕주에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여름이면 야외 음악홀을 만들어 뮤직페스티벌을 연다고 하더군요. 세계각국의 성악가, 연주가들이 모여 한 여름밤을 장식하는 무대에는 우리나라 조수미씨도 참가한다고 하였습니다. 80에이커나 되는 넓은 정원에서 아이들은 뛰어 다니고 정원의 곳곳에는 조각과 분수와 은은한 外燈이 켜져있고, 야외 음악홀로 들어가는 입구의 복도는 특별하게 설계되어 사람들이 걷는 발걸음 소리, 얘기소리 조차 에코가 되어 울려 퍼지는 환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 여름밤을 베토벤과 바흐와 멘델스죤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의 홈뮤지움 안내를 자원 봉사로 맡은 친구와 올해 7월엔 꼭 한 번 다시 와서 공연을 보기로 약속하였지요.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그러나, 그 어떤 아름다운 음악도, 연극도 혼자서 보는 것은 슬픈 일이지요. 곁에 사랑하는 이가 있어, 오래 해묵은 술과 같이 훙허물 없는 친구가 있어 모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다면 그날의 음률은 몇 갑절로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녹아날 듯 푸른 잔디밭에서 우리는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고, 슴슴한 풀냄새 지줄대는 새소리에 서로 다른 세 그루의 육십 여년 된 청청한 나무로 다시 태어난 듯한 즐거운 시간을 가졌더랬습니다. 같이 숲길을 거닐며 같이 웃다보니 우리의 몸에서는 어느새 싱그러운 풀내음, 향긋한 나무내음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보낸 소중한 나날들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떠나는 날,
저는 가게에 나와 앉아 이제쯤은 딸네 집에서 출발 하겠구나! 이제쯤은 공항에 도착하였겠구나! 아! 이제쯤은 비행기를 탔겠구나! 하고 속으로 미루어 짐작 하였습니다. 서울 있을 때, 남달리 죽고 못 살 정도로 보고싶다거나 사흘을 건너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이도 아니었건만 객지라는 것이, 떠나면 한참 동안을 못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사람의 간장을 그렇게 애닯게 하였습니다.
얼른 애기를 갖지 않는 딸에게 불만을 터뜨리며 심술을 부리던 친구를 바라보며 저는 생각하였지요. 아마도 공항에 나가는 순간이 채 못되어 딸과 마음 상한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그러고는 열 네 시간 비행하며 내내 더 잘 해 주지 못하고 떠나온게 된 것에 대해 마음 짠해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지요.
그렇게 어미의 마음은 다 똑 같은 것 일 겁니다.
넓고 넓은 미국 땅을 떠나 친구가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이 왜 그리 제게 서운하게 느껴지는건지...저는 텅 빈 집안이 더욱 썰렁하게 느껴지고 이튿날 가게에 나와 앉아서도 온 미국 전체가 다 텅 빈 것 같이 허전하게만 느껴지는군요. 아침에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넓게 트인 하늘에 유유히 걸려 있는 흰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눈시울이 써느름해지더니 눈물 한 줄기가 양 눈을 적시더군요.
情이란 게 이런 것일까요?
아직도 비행기 속에 있을 사랑하는 친구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 친구에게 神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진심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한사람이면 평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진정한 친구를 둔다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아닐까요? 선배님 여러모로 부럽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라는 유행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먼곳에서 항상 건강하시기 바라면서.....
첫댓글 언제나 마음 따뜻한 선배님의 우정 부럽습니다. 멋진 추억 행복한 시간 오래도록 간직하시기를~~
진심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한사람이면 평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진정한 친구를 둔다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아닐까요? 선배님 여러모로 부럽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라는 유행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먼곳에서 항상 건강하시기 바라면서.....
이웃에 사는 친구가 내 집에 찾아와도 반갑기 그지 없는데 그 먼 이국에서 친구와 만나서 지낼 수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언제나 조용하고 맘씨 고우신 주영희 선배님과 정금자 선 배님의 깊은 우정이 참 아름답고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