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관계 혹은 직장에서, 우리는 할당된 사회적 역할을 연기한다.
우리는 그 대본을 해석하고,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 즉 부모나 아이, 어머니나 아버지, 고용주와 고용자, 경찰과 범죄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하나의 “마음의 그림”을 시각적으로 소묘하고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지만 보완적인 인물 역에 종사하는 타인들을 위해 그 가시화된 그림을 육화한다. 그 각각의 역할을 연기하는 가운데, 어떤 특별한 타인이 우리를 알아봐주면, 그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한다.
우리를 받쳐주는 조연배우의 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그들 역시 우리의 눈 속에 있다.
상호간의 차이는 한 쌍으로 된 두 눈의 망막 표면들 사이에서 펼쳐진다. 일련의 조절된 식역(識閾)을 가로질러 그 두 사회적 연기자들을 실어 나르는 하나의 서사선이 그 표면들 사이로 지나간다.
동일한 서사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우리는 서로 차이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서로가 닮아있다. 나 자신과 나의 반영적 보완자 간의 차이는 움직임을 허용하는 최소한의 차이이다.
시야 축은 약간 비틀린 각을 이루어, 상호간에 자기-규정적 인지는 항상 미세하게 빗나간다. 이와 같은 원근법적 이접(perspectival disjunction)은 융합을 예방할 정도로 불균형을 창출한다.
정지 상태로부터 구제되었기 때문에,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최소한의 변화, 즉 동일성과 대체로 일치되는 비대칭-유발의 역동적 왜곡만이 있다. 우리는 성장을 한다.
나이가 들어, 심지어 어떤 역할들이 뒤바뀌어, 어쩌면 부모가 되어, 어쨌든 유년기를 다 써버리고 성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든 육신이 아무리 뒤틀리고, 정신이 아무리 집중력을 잃어간다 해도, 우리 자신 이상으로 더 자랄 수는 없다.
특별한 순간들은 눈에 띄게 뚜렷이 나타나, 가족사진 앨범 속에 완벽한 그림이 된다: 생일, 졸업, 결혼, 기념일, 승진축하, 퇴직 등. 평범하고, 늙은, 일상 속의 우리는 형식화된 포즈들로 사진에 찍혀 보존되어 삶의 구절들의 연속을 통해 나아간다.
우리의 삶은 연속으로 이어지는 타블로에 담겨, 즉 체계적으로 그러나 조용하게 과녁을 빗나가는 형편없이 진부한 대본에 구두점을 찍는 연속 샷에 담겨 우리의 눈 앞을 지나간다.
연속적인 진행은 있지만 진정한 변형, 즉 감지하기 어려운 운동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거기엔 우리가 다시 등장한다. 우리 자신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죽는다. [이것이 현대-스타일의 유토피아이다]
첫댓글 이거 읽기 넘 어렵다,,,어질어질,,헤롱헤롱,,,,,ㅠㅠ
세줄 읽고 못 보겠다. 잠온다..
결론은 죽는다! ㅋ
집에 컴터 놓으셨나봐요? ㅋㅋㅋ
컴은 있어요..ㅎ 인터넷이 안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