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파도를 맞으며
파도가 약 10초 간격으로 쉬지 않고 해변의 바위들을 친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그 파도 또는 그 파도를 맞는 바위에 비유한다. 도전과 어려움이 쉴 새 없이 계속되는 거 같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 것 같다. 그런데 인생이 정말 그런 거라면 생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했던 거처럼 말이다.(욥 3,1) 살아내느라 고생만 하고 결국은 죽어 사라지는 슬픈 이야기인 거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파도 같은 세상살이를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짊어지는 걸까? 파도가 없어지거나 잔잔해지기만을 바라는 걸까? 그러면 그다음은? 쉬고 놀고 먹고 마시고? 그게 인생이라면 그것 또한 불행이다. 우리 신앙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말한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느뇨?’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救)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사람이 천주를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반드시 어떻게 할 것이뇨?’ ‘사람이 반드시 천주교를 믿고 봉행할지니라.’
천주교를 믿고 봉행하는 게 영혼 구원이다. 그것은 있는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최고의 모범이다. 죄인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만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기까지 내 사랑을 크고 넓고 깊게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우선으로 선택하고, 가난한 사람이 교회의 중심인 이유다. 그들은 도움과 돌봄이 필요한 이들, 우리 연민과 사랑을 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껏 가난을 없앤 위인은 없다. 성인도 예수님도 하지 못하셨다. 가난을 없애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고 봉사하고, 그리고 희생하는 거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자기 영혼을 구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은 집사의 일이다. 식솔들을 맡기고 떠난 주인의 뜻을 기억하고 그들을 잘 먹이고 잘 살아가게 봉사하는 거다. 가난이 그들의 삶을 짓누르지 않게, 포기하지 않게, 하느님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거다. 가난 때문에 몸을 불의의 도구가 되게 하거나(로마 6,13),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로마 6,16) 되지 않게 하는 거다. 파도를 없앨 수는 없어도 그 파도를 맞으면서 하느님을 잊지 않게 할 수는 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죽겠다, 못 살겠다고 하는 불평들도 하느님 앞에 가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될 거다. 하느님, 그분 한 분만이 내가 태어나고 파도를 맞으며 살아가는 단 한 가지 이유다.
예수님,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시는”(루카 12,48) 줄 압니다. 스스로 더 가난해지고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불평과 험담을 내다 버립니다. 불평과 걱정할 시간에 좋은 일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며 어머니처럼 자신을 떠나 하느님과 가까워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