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강 화력 정관장이 필승 카드 박정환을 내세워 Kixx에 완승을 거두었다 |
정관장은 역시 센 팀이었다. 18일(목) 저녁 한국기원내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2013 KB바둑리그 1라운드 3경기 첫날 대국에서 정관장이 한웅규, 박정환의 연이은 승리로 KIXX를 2대0으로 제압했다.
정관장은 리그 개막전 부터 모든 감독과 전문가들이 지목한 최강팀. 뚜껑을 열어보니 그것이 허사가 아님이 드러났다. 제1국 양 팀의 4장 대결에서 한웅규가 Kixx의 노장 안조영을 상대로 2집반 차의 승리를 거둔데 이어, 두번 째 판에선 랭킹 2위 박정환이 등판해 김승재에게 146수 만에 항서를 받아 냈다. 결과 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상대를 압도한 승리였다.
첫 날 2승을 챙긴 정관장은 이튿 날도 여유 만만이다. '설마 세 판을 다 지겠어?'하는 소리가 검토실에서 자연스레 나온다. 반면 벼랑에 몰린 Kixx의 검토실은 비장감이 흘렀다. 오늘 하나라도 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감독과 선수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 대조적인 분위기가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 낼까, 19일 대국도 귀추가 주목된 2차전이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Kixx의 선수들은 이런 심적 부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정관장의 선수들은 고비 고비에서 임기응변의 수를 잘 찾아냈다. 19일(금) 한국기원 내 바둑TV스튜디오에서 벌어진 2013 KB국민은행 바둑리그 1라운드 3경기 둘째 날 대결에서 정관장이 안성준 박승화의 활약으로 Kixx에 4대1 승리를 거두었다. 우승 후보다운 힘찬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 노장 안조영의 투혼, 그러나 역전은 없었다(1라운드 3경기 제1국)
안조영은 2007년 28세라는 늦은 나이에 원익배 십단전서 우승하면서 '반상의 대조영'으로 불리었다. 세계대회에서 구리를 두 차례나 반집으로 이겨 '반집의 제왕'이란 칭호도 얻은 적이 있다.
하지만 빠른 세대 교체의 흐름 속에 어느새 변방으로 밀려났고, 이번 KB 리그엔 Kixx의 4지명으로 출전하게 됐다. 현재 랭킹도 한웅규가 28 위 인데 반해 34위. 이창호 9단보다 네 살 어린 나이지만(34세) 승부를 하는 프로들 사이에선 이 정도면 이미 노장급에 속한다.
반면 한웅규는 요즘 바둑계를 호령하고 있는 소위 '90후(後)세대' 다. 한창 때의 나이인 데다 지난 해 삼성화재배와 비씨카드배 본선에 진출하는 등 탄탄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 당연히 대국 전 예상은 한웅규의 우세였다.
대국의 초반 흐름은 백을 든 안조영이 괜찮았다. 우하귀에서 일찌감치 흑의 사활이 걸린 패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백의 입장에서 보면 꽃놀이성 패. 안조영은 이 패의 댓가로 흑의 좌하귀를 연타했는데 이 결과는 백이 잘됐다는 얘기가 많았다.
"재밌게 돼가는 것 같은 데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지켜 보던 최명훈 감독의 얼굴이 이 순간 환해졌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아쉽게도 얼마 가지 않았다. 곧이어 안조영이 상변 백말을 버리는 과정이 잘못돼 한웅규에게 일당백의 대가를 허용했던 것이다.
이후 세불리를 느낀 안조영은 이리저리 흑을 엮으려 했지만, 한웅규는 아웃 복싱으로 안조영의 공세를 피하면서 한사코 반면 10집의 우세를 지켜 나갔다. 결국 끝까지 다 두고 계가를 해보니 불과 두 집 반의 차이. 하지만 프로 바둑에선 이 것이 하늘이 두 쪽 나도 뒤짚어지지 않는 차이라니 무섭다.
▲ 정관장은 KB리그의 레드삭스팀? 붉은 색의 팀 컬러 만큼이나 선수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 정관장의 4지명 한웅규 4단(오른 쪽). 한 번 잡은 우세를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 '좋았었는데 어디가 문제였을까..' 복기 중 생각에 잠긴 안조영 9단
▲ '역시 상변이 이상했지?' 대국후 의견을 나누는 두 선수
■ 박정환, '주장이란 이런 것' (1라운드 3경기 제2국)
첫 판을 정관장이 승리한데 이어 저녁 9시에 시작한 두번째 판에선 양 팀의 1지명 박정환과 김승재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주장 대결인 동시에 물러설 수 없는 라이벌 대결이다.
박정환과 김승재는, 나이는 김승재가 92년생으로 박정환보다 한 살 위지만 입단은 2006년에 같이 했다. 먼저 두각을 나타낸 쪽은 김승재였다. 김승재는 입단 3년차인 2008년 오스람코리아배 신인왕전서 우승하면서 대번에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후 성장이 멈췄고 그 공백을 단숨에 박정환이 따라 잡았다.
그리하여 현재 랭킹은 박정환이 2위, 김승재가 11위. 제법 큰 격차지만 김승재는 박정환을 상대할 때 만큼은 모든 의지를 불사른다.
라이벌이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지만 인정은 절대 않는 관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승재 마음 속엔 박정환이 언제든 이길 수 있는 상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대가 이젠 거인이 되버린게 아무래도 부담이었을까. 바둑은 초반에 흑의 김승재가 너무 실리를 빼앗기면서 일찌감치 박정환의 우세로 기울었다. 집이 없으니 공격을 통해 큰 걸 얻어낼 수 밖에.
김승재는 집이란 집은 모두 내주고 위 아래 둘 중의 하나면 잡으면 된다는 식으로 판을 몰아 간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잡히면 안되는 돌을 끌고 나오는 스토리가 있었는데 이게 너무 고단하고 무리스러워 보였다. 더구나 박정환은 사활에 관한 한 귀신도 울고 간다는 존재가 아니던가.
결국 김승재가 노리던 두 개의 백 대마는 모두 아무 탈 없이 살아 갔고, 반상엔 너덜해진 흑의 포위망만이 잔해로 남게 됐다. 더 이상 둘 수 없게 된 김승재가 얼마 후 백기를 들었고 둘의 손가락 복기가 시작됐다. 146수. 기대에 비해 빠른 종국이었다.
"박정환이가 센 건 맞어. 하지만 김승재도 오늘은 평소의 바둑이 아니야. 입단 동기라서 그런 지 너무 박정환을 의식한 것 같애."
이 날 심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대국을 지켜 본 강훈 9단이 스튜디오를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라이벌 대결에서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다는게 가능한 일일까. 거꾸로 라이벌이란 서로가 의식하고 있음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해서 맺어진 관계라는게 맞는 말 아닐까.
▲ 여유로운 정관장의 검토실. 부잣집이라 그런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 반면 Kixx의 검토실은 바둑이 안 좋은 때문인지 분위기가 내내 가라 앉아 있었다
▲ 검토를 지켜보는 Kixx의 최명훈 감독. 평소 농담을 잘 하는 성격이지만 이 날은 내내 말이 없었다
■ 실패로 끝난 이영구의 '벼랑끝 Kixx 구하기'(제3국 정관장 안성준 대 Kixx 이영구)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를 바둑판에서 보는 듯 했다. 주인공은 이영구요, 구해야 할 대상은 벼랑에 몰린 팀이다. 죽을 힘을 다해 팀을 구하고자 하는 이영구의 절절함이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차이라면 영화에선 톰행크스가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데 성공하지만 현실의 이영구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반 들어 독일 병정 같은 안성준의 집요한 십자 포격 속에서 이영구는 죽을 힘을 다해 탈출구를 찾아냈다. 새까만 흑 진영 속에서 패에 의지하며 대마를 살려낸 것이다. 그러고도 바둑은 만만치 않았지만 이 충격으로 안성준이 흔들리면서 이영구의 Kixx 구하기는 성공하는듯 보였다.
판은 시종 엎치락 뒤치락 했다. 이영구 쪽에서 이길 찬스도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다 놓쳤다. 그리고 승패가 걸린 마지막 수상전 상황에서 이영구에게서 결정적인 실착이 튀어 나왔다. 쌍립을 해서 수를 늘렸으면 상대가 대책이 없는데 그만 끼움수를 당하면서 대번에 망해버리고 만 것이다. Kixx의 속절없는 3대0 패배. 이영구의 사력을 다 한 '팀 구하기'가 실패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 제3국 안성준(오른쪽)과 이영구의 종국 직후 장면. 이 판을 안성준이 이기며 3대0 정관장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 Kixx의 2지명 이영구가 패배후 크게 아쉬하고 있다.
■Kixx의 수확, 노장 이희성의 승리(제4국 홍성지 대 이희성/ 제5국 박승화 대 한상훈)
이 날 정관장에 4대1로 패한 Kixx지만 수확이 있다면 제4국(장고대국)에서 31살의 노장 이희성이 Kixx의 2지명 홍성지의 대마를 잡는 쾌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희성은 82년생으로 13살인 95년에 입단해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10대 초반의 입단은 타이틀 홀더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런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2004년 오스람코리아배 신인앙전에서 우승.이제 본 타이틀 도전만 남은듯 보였는데 , 어찌된 일인지 거기서 멈췄다.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LG배 세계기왕전 본선 무대를 밟았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2011년엔 리그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다가 지난 해에 락스타리그 선수로 겨우 명함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런 이희성이 올해 폭발하고 있다.
홍성지와의 대국 전 까지 이희성의 올해 성적은 무려 19승 1패(승률 95퍼센트)다. 강동윤(17승 5패) 박정환(16승 6패) 같은 쟁쟁한 선수들을 따돌리고 이희성이 기록 부문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이변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4월 10일 물가정보배 예선에서 이태현에게 패할 때 까지 17연승을 했다는 실도 놀랍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지난 달엔 KBS바둑왕전 본선에 올랐고, 얼마 전엔 신예 이동훈을 이기고 국수전 예선 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주식 시장에선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업이 어느 날 내실을 다져 흑자로 전환했을때 '턴 어라운드' 했다는 표현을 쓴다. '턴 어라운드'한 주식은 주식 시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주식으로 통하고 당연히 주가도 폭발적으로 치솟는다. 지금 바둑계에선 이희성이 그런 존재다.
이 날 Kixx의 2지명 홍성지와의 장고 대국에 출전한 이희성은 초반부터 당당한 포진으로 국면을 압도해 갔다. 중반 들어 교타자 홍성지의 교란작전이 있었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거꾸로 우변 1선에 치중하는 묘수를 던져 젊은 강자 홍성지를 궁지에 몰았고, 집부족증에 걸린 홍성지가 가운데 대마를 방치하자 빈틈 없는 수읽기로 돌수만 서른개가 넘는 대마를 잡아버렸다. 다승 선두를 질주하는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당당히 증명한 승리였다.
정관장의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서 벌어진 Kixx의 3지명 한상훈과 정관장의 락스타리거 박승화의 대결은 시종 팽팽했지만 후반 들어 한상훈의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박승화가 승. 이로써 1라운드 3경기는 정관장의 4대1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KB리그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비록 졌지만 장고대국에서 이희성의 진가를 확인한 Kixx는 향후 선수 운용에 있어 큰 부담을 덜게 됐다.
▲ 워낙 장고파여서 '진드기'로 불리었던 이희성. 2004년 이후 근 10년 만에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다.
▲ 정관장의 락스타리거로 본 리그에 출전한 박승화.
▲ 팀이 패한 상황에서 등판한 선수는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마련. 제5국에서 Kixx의 한상훈(왼쪽)이 막판에 흔들리며 좋은 판을 놓쳤다.
▲ 이희성과 홍성지의 제4국(장고대국) 장면. 노장 이희성(33)이 돌 수만 서른 개에 달하는 홍성지의 대마를 잡고 승리했다.
■ 주말 SK에너지와 신안천일염 의 대결, 혼전 예상
내일과 모레, 주말엔 1라운드 마지막 경기로 최철한의 SK에너지와 이세돌의 신안천일염의 대결이 펼쳐진다. 최철한은 내일(토) SK에너지의 두번 째 선수로 출전해 김정현과 대결하고, 이세돌은 다음 날(일) 신안천일염의 마지막 주자로 나와 이태현과 대국한다.
예상대로 둘이 각각 1승 씩을 챙긴다고 가정하면, 나머지 세 판에서 승부가 가려질텐데 ①김형우-류재형(앞이 SK에너지, 뒤가 신안천일염)의 대결은 KB리그에 강한 면모를 보여왔던 김형우가 ③박정상-강유택 전은 어린 강유택 쪽이 , ⑤변상일-온소진 전은 신인왕 변상일이 약간이나마 나아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SK에너지의 입장에선 오더가 잘 짜인 편. 하지만 올해의 KB리그는 이변이 속출하는 데다 비슷한 전력에선 당일 컨디션나 팀 분위기가 큰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기사제공 ㅣ 2013KB바둑리그 운영본부]
▲ 정관장의 김영삼 감독
▲ 본 경기엔 락스타 선수도 빠지지 않는다. 킥스의 홍일점 박지연과 새내기 한승주가 나란히 앉아 있다
▲ 이 날 정관장 검토실을 찾은 김신영 초단. 한웅규와 나란히 있는 모습이 오누이 같다.
▲ 정관장 김영삼 감독이 김미리, 문도원과 즐거운 얘기를 나누고 있다.
▲ 강훈 9단이 스튜디오 안에서 대국자의 착점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KB리그는 올해부터 모든 대국에 심판제를 도입했다.
▲1라운드 3경기는 정관장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