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성도의 인간관계
본 문 : 약 2:1-13
야고보서의 중요한 관심은 성도들의 성숙한 인격에 있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성숙하지 못한 성도는 진리를 말로만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그리스도인의 성숙도를 테스트하는 방법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께서 예배드리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예배당을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대로 하면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원문에 보면 금가락지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손가락마다 금가락지를 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한자리 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안내하시는 분이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들을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하면서 특별 대우를 합니다.
그런데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 올 때는 당신은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고 하면 이런 사람은 성숙하지 못하고 진리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옛날 유대인 회당에는 특별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 특별석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자리, 낮은 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서 문제가 있고 시험에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우리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간관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도의 인간관계를 성공적으로 형성할 수 있습니까?
1. 주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모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인격을 통치하시는 주님으로 모실 때 비로소 주님에게서 인간관계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인간관계를 가져야 할까요?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나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이런 본능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주님의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교회를 계급 사회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정신은 사람이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에 따른 높은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높아지는 것만이 꼭 훌륭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높은 지위를 탐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 본능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릇된 인간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영광의 주님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외모로 보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킬만 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편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적이었던 바리새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세요. 마태복음 22장 16절에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적에게까지 인정되도록 완벽하게 편견을 배제했습니다. 편견이 없는 태도로 인간관계를 갖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겉으로 나타난 사실만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동기의 순수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교회에 수억 원을 드린 부자보다도 엽전 두 잎을 드린 혼자된 여인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보시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이 얼마나 다른 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더구나 주님은 현재의 모습보다 가능성을 보십니다. 주님은 사람을 평가하실 때 현재 그 사람의 모습대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만났던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식한 어부요, 의지가 약한 사람이요, 감정의 변화가 심해서 시간마다 달라지는 세련되지 못한 그의 인격을 보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너는 시몬이니 장차 게바(반석)라 하리라”(요 1:42)) 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튼튼함을 말합니다. 누가 봐도 반석이란 말이 베드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를 가리켜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주님을 위해서는 죽는 자리까지 가겠다고 큰소리치던 베드로, 그러나 사태가 불리하면 작은 계집종 앞에서도 주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반석이란 이미지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연약한 시몬 안에 있던 위대한 장래의 가능성을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관점에서 사람을 본다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주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실 때도 그 속에 있는 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과연 마태는 위대한 복음서 기자로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사람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과연 마태는 위대한 복음서 기자로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사람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젊은이들이 배우자를 택할 때도 상대방의 현재의 모습을 평가하지 말고 그 사람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아야 합니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지금은 좀 어려워도 두고두고 좋아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발전하고 성장하고 성공합니다. 그래서 행복이 점점 더해갑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개인의 구주로 모신 우리는 그 주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는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성도를 형제와 자매로 보셨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건 마귀 자식이다.”라고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목자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사람들을 긍휼과 자비로 대하셨습니다. 아마 베세다 들에 때가 되어도 식사도 못하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 깊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눈으로 사람들을 대한다고 하면 이 세상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루기 힘들고 아무리 보아도 싫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주님 같으면 저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성도는 누구를 대하던지 주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은 주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외모로 취했습니다. 그래서 멸시와 천대 속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교훈하시며 부탁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주님이 사람을 선택한 기준이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할 때는 조건이 없으십니다. 무조건 선택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애정으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내가 하나님이라면 벌써 이 지구를 박살내고 말았을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인내와 은혜로 대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우리로 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하시는 것을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택하실 때 지혜있는 사람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능한 사람을 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문벌 좋은 사람을 구원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 절에 보세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문벌을 보고 택하셨다면 그 사람이 천국에 가서 뭐라고 할까요? “나는 문벌이 좋아서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돈을 보고 택하셨다면 그는 말할 것입니다. “나는 돈이 많아서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만일에 하나님께서 권력을 보고 택하셨다면 그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서 “나는 권력이 많아서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천국은 아무도 자랑할 수 없는 곳입니다. 조건 없이 그저 은혜로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감사 감격하는 장소, 거기가 바로 천국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복음을 처음으로 접했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평소 농담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가 하루는 세상에 평범한 사람이 많은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사랑하시는가 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은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빌립, 무디, 모두가 그랬습니다. 물론 때때로 하나님은 문벌 좋은 사람도 택하십니다. 지혜있는 사람도 선택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범한 가운데 위대한 역사를, 많이 행하십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는 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차별이 없이 사람을 대하시는데 우리가 오히려 차별과 편견에 빠집니다. 사람을 은혜로 대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그가 싫어하는 이방인에게 보냅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의 가정에 그를 보내어 그가 거기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에 교회안에 사회적인 차별이 있다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교회는 넉넉하고 권세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의 교제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옛날부터 인간의 편견은 역사속에 뿌리를 내려왔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애굽사람은 유대인을 편견으로 대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식인과 비지식인, 권력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항상 대두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뜨리는 것은 복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점에서 참된 인간의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의 편견은 없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런 신앙은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가난이 저주요, 부요가 꼭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와 가난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얼마나 올바른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3. 말씀하신대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지키는 최대의 방법은 우리의 삶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이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지 못하면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말씀을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신 말씀 8절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이웃 사랑하는 것을 내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최고의 계명이라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이 죄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참 사랑은 감정보다 의지에 관련됩니다. 사랑의 장이라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세요. “사랑은 오래참고” 했습니다. 참을 수 없을때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정의할 때 대개 감정적인 황홀한 느낌, 떨리는 감격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감정의 무드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의지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려는 의지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려는 의지의 결단입니다. “사랑은 오래참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싫은 사람의 인격과 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긍정적으로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도모합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장 9절에 보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보던지 “저 사람도 하나님이 지으셨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만큼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들어와 계실만큼 사람은 존귀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보통으로 기능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소유나 권력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그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신 고귀한 생명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들어가 거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고 말씀대로 대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죄인입니다.
4. 우리의 행위는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자 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아주 신중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마지막은 심판입니다. 우리의 언행 심사가 심판을 받습니다. 13절에 뭐랬어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을 대할때 믿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이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 인간을 대하실 때의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목자 없는 양떼처럼 유리하는 사람들을 보셨을 때 주님은 같이 아파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지셨던 긍휼의 마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표면에 드러난 것은 가난한 자와 부자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성도의 인간관계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형성해야 할 인격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대하나 주님을 배워서 은혜로 대하고 말씀하신대로 사람을 대해서 심판의 날에는 그리스도인의 완성된 인격자로 인정받는 우리 하나 하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존재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