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가문의 점령 전쟁
삿 1:22-26
22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삿 1:22-26 /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승리] 요셉 집안 사람들도 벧엘을 치러 올라갔는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 23) 요셉 집안 사람들은 정탐꾼을 보내어 옛날에는 루스라고 불렀던 벧엘의 사정을 몰래 살펴보게 하였다. 24) 정탐꾼들이 벧엘로 다가가 몰래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성에서 어떤 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정탐꾼들은 그 사람에게 다가가 `이 성읍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어디냐?' 고 물었다. 그 길을 알려 주면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25) 그러자 그 사람은 성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성읍으로 들어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칼로 쳐죽였으나 길을 알려 준 그 사람과 그의 가문 사람들은 살려 주었다. 26) 그 사람은 나중에 헷 사람들이 자리잡아 살고 있던 땅으로 가서 그곳에 성을 세우고 그 이름을 루스라고 붙였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그곳을 루스라고 부른다.
본문은 요셉 지파의 점령 전쟁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 가문과 함께 하시니라(22) 요셉 가문은 일반적으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가리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기업을 함께 배당받았고, 연합군을 이루어 배당받은 지역으로 함께 나아가게 됩니다. 벧엘의 본래 이름은 루스로 야곱에 의하여 벧엘 즉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게 됩니다(창 28:16-19). 사실 벧엘은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벧엘을 점령하지 못하였고, 벧엘이 요셉 지파의 땅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요셉 족속의 땅이 위협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의 가문이 이곳을 점령하러 가게 된 것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정 시대까지 늘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요셉 가문은 벧엘을 성공적으로 정복하게 됩니다.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께서 요셉 가문과 함께 하시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루스라 하는 벧엘을 점령하다(23-26) 요셉 가문은 벧엘의 점령을 위하여 전략을 신중하게 세웁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낸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여리고와의 전쟁에 나아갔고, 그 결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는 모습은 이때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여호수아에게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것처럼 요셉 가문도 믿음으로 전쟁에 나아갔고, 신중히 전쟁에 임하여 여호수아와 동일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여리고 전쟁 당시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을 만난 것처럼, 벧엘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을 정탐꾼들이 만나게 됩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 가문과 함께 하셨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정탐꾼들이 말하는 “성읍의 입구”는 일반적인 성문이 아니라 요새화된 벧엘에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전술적 요충지나 비밀 루트를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 정탐꾼들은 기생 라합과 같이 보호의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요셉 가문은 벧엘을 점령하게 되었고, 이 사람과 그의 가족은 멸망당하는 벧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벧엘에서 살아남은 이 사람들은 현 시리아 지역인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또 다른 루스를 건축하고 살게 됩니다.
적용: 때때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뜻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어려운 일을 이겨내고 주은 열매를 거둔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사탄의 출입구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두려움의 감정으로 공격을 받고 있다면 이것은 사탄의 악명 높은 화살인 것입니다. 사탄을 이기기 위해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를 시인하고 붙잡음으로 거짓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사탄을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 설 교 >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삿 1:22-36 / 박상일목사
오늘은 사사기 4번째 시간으로 사사기 1장 22-36절까지 말씀을 통해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코로나로 인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카페에 말씀을 올렸었는데 새로운 마음으로 지난시간에 나누었던 말씀들을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첫 시간과 둘째 시간에 은혜의 사사시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사기 1장 1절과 마지막장 21장 25절에 보면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로부터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까지의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사는 재판관들이나 통치자들 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시를 세우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원주민들의 신을 섬기게 되었고 그 징벌로 이방 나라들의 침략을 받게 되어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그 위험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해 주기 위해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뒤에 왕을 세우지 않았으며 사사조차 세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재적인 인간 왕이나 강력한 인간 지도자를 배제하고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제나 강압이 없는 ‘자유의 때’에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준수하길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적으로 여호수아 사후에 강력한 인간 지도자를 세우지 않았으며 사사조차 세우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표준에 미치지 못하여 이러한 자유의 때를 순종이 아니라 방종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제와 강압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자유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 때를 진정한 순종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사사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그들이 오늘 살아가고 있는 가나안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이며 약속의 성취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가나안 땅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사사시대와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구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의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준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의 때를 진정한 순종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겐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16절에서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겐 사람들은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중에 거주했습니다.
16절에 겐 사람들이 등장을 하는 것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악을 행하는 모습에 대해서 이들과 비교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4장에 등장하는 헤벨의 아내 야엘이나 예레미야 35장에 기록된 레갑 사람들의 모습은 겐 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그들의 삶을 지켜내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반대로 계속해서 타락해 갑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겐 사람들과 같이 순수한 신앙을 지켜나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 네 번째 시간인데 오늘 살펴볼 주제는 바로 사사시대는 이미 승리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족속들은 가나안 문화에 젖어들고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범죄하여 이방민족으로부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던 시대였습니다.
사사기 1장에서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과 또다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1장 23절에 보면 이미 가나안 전쟁을 끝이 난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미 가나안은 정복되었지만 또다시 새로운 싸움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오늘 여호수아가 죽은 후의 싸움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미 싸워 승리한 후에 남아있는 족속들을 몰아내는 싸움입니다. 이미 모세와 여호수아에 의해서 33명의 가나안 땅의 왕들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요단 동쪽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쳐 죽였고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있던 31명의 왕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분배된 땅으로 가서 그 지역에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멸하는 싸움 즉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면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여호수아와 갈렙이 되어 자신의 땅을 정복하는 싸움을 싸우면 됩니다. 여호수아 14장 6-15절에 보면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헤브론을 달라고 요청해서 그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14장 12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렙은 그 믿음대로 그 땅을 정복하였고 드디어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이스라엘은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여호수아와 갈렙이 되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을 믿음으로 정복하는 일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 즉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써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30세부터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사단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은 사단과의 첫 번째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이 땅의 권세자인 사단을 결박하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하시며 사단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또 다시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하시면서 이기셨습니다. 또 마귀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사단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유혹 명예에 대한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이 후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셨지만 사단은 예수님께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귀신들이 쫓겨나고 약한 것들과 불치병들이 치료되었습니다. 결국 사단은 자신의 최후의 힘인 사망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이미 승리한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땅을 정복하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사사기 1장 1-2절에 말씀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 유다가 선봉에서 자신의 분배지역의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9절의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으므로 그들이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이 철 병거가 있음으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21절에서는 베냐민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고 여부스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도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제 요셉 가문이 그들의 땅을 치러 올라가서 벧엘을 쳤습니다. 그러나 27절 이하에서는 므낫세가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9절에서는 에브라임이, 30절에서는 스불론이, 31절에서는 아셀이, 33절에서는 납달 리가, 34절에서는 단 족속이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멸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목적을 앞세워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묵살했습니다. 이는 곧 직접적인 불순종입니다.
둘째 불성실입니다.
요셉지파의 불순종에는 한결같이 불성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들은 원주민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힘이 부족해서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다분히 불성실하여 그러했습니다. 불성실은 불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불성실은 하나님의 뜻과 원리와 방법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기심입니다.
요셉족속이 강해졌을 때 요셉 족속은 아모리 족속을 종으로 삼고 일을 시켰습니다. 이 말은 가나안 족속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시각을 보여줍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을 경재적인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재산을 늘려줄 도움이 되는 가나안 족속을 멸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객전도’ 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족속과의 싸움에서 이미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약속의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왔음에도 오히려 불순종과 불성실 그리고 이기심으로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죄와 싸워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6절에 보면 요셉가문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20절까지 유다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고 21절에서는 베냐민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고 이제는 다른 지파들의 정복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나머지 지파중에서 가장 유력했던 요셉가문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셉가문은 벧엘을 정복하기 위해 먼저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는 장면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냈던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두 경우는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벧엘을 점령하려고 하는 요셉 가문은 그 성읍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명령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땅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명령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장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셉 가문이 보낸 정탐꾼들은 성읍에서 나오는 사람을 만나 성읍에 대한 안내를 해 주면 그를 선대하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의 경우에는 라합이 먼저 그들을 선대했으니 자신의 아버지 집을 선대할 것을 맹세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이 라합과 언약을 맺은 것과 요셉 가문에 보낸 정탐꾼들이 벧엘 사람과 언약을 맺은 것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라합이 먼저 정탐꾼들을 선대하고 나서 언약을 맺을 것을 제안했고 정탐꾼들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요셉 가문이 보낸 정탐꾼들은 먼저 주도적으로 벧엘 사람들에게 언약 맺을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땅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부주의 또는 불순종입니다.
벧엘 사람이 정탐꾼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성읍의 입구를 알려줍니다. 요셉 가문은 그 사람이 알려 준 입구를 이용해 벧엘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었던 그 사람과 그 가족을 살려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주의 또는 불순종 때문에 벌어진 이 사건은 또 한번 미묘한 타협을 만들어냅니다. 요셉 가문이 살려준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새롭게 정착한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성읍을 새로 건축하고 루스라고 불렀습니다. 루스는 그들이 살던 벧엘의 본래 이름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은 요셉가문은 루스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루스가 계속 존속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요셉 가문은 벧엘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벧엘의 한 사람과 언약을 맺고 그 성읍을 정복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벧엘을 정복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성을 정복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요셉가문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요셉가문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후 싸움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이 싸움들이 실패하게 된 원인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요셉가문처럼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그 땅을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이미 승리한 싸움을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뿐입니다.
스가랴 4장 6절 말씀에 보면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글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조금 열심히 하면 좀 더 성적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사실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공부에 좌절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음으로 인해서 공부에 대해 좌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을 나무라고 잔소리하는 것 보다는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격려를 해서 그 아이가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는 좌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새 힘을 얻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죄와 싸워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요셉가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벧엘을 정복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의지했다면 그들의 나머지 땅도 금방 정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이미 그들에게 주신 땅이며 하나님이 함께 싸우시는 땅이기에 그것을 믿고 나아가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모든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죄와 세상의 유혹을 넉넉히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고 의지하며 죄와 싸울 때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십니다.
두 번째 자기 유익을 따르면 타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7-29절에 보면 요셉가문에 속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0-33절에서는 나머지 지파들, 즉 스불론, 아셀, 납달리도 마찬가지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그 땅에서 주도권을 잃어 가면서 그들과 동화되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에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노역은 가나안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과 섞여 살면서 점점 그들의 관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요셉 가문의 경우에는 22절에서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지파들의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셨다는 언급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점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스불론은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에브라임과 스불론이 가나안 족속과 함께 살았지만 그래도 기준은 그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셀과 납달리의 경우에는 그들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객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은 쫓아내지 않은 것이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가나안 사람들의 노동력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온전히 쫓아내지 않은 것은 결국 그들에게 주도권을 내어 주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요즘 재미있게 보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개는 훌륭하다’ 라는 프로그램입니다. 개통령으로 불리는 강형욱 조련사가 나와서 개들을 훈련시켜 줍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통제가 안 되는 개들이 나와서 개과천선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 개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개들이 주인이 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보곤 합니다. 개는 개이고 주인은 주인인데 주인이 개에게 자신이 주인으로서 행동을 못하니까 개가 주인이 돼서 통제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그들에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죄는 너무나 교묘합니다. 지금 보이는 죄를 잠시 눈감아 주면 모든 유익과 편안함과 부와 성공을 소유할 수 있을 것처럼 유혹합니다. 그래서 한 번만 죄와 타협하고 넘어가며 눈감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죄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게 하고 더 큰 죄악의 삶으로 빠져들게 만듭니다. 지금의 유익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기억하며 지금 당장은 해가 되더라도 죄를 단호히 끊어야 합니다.
셋째 죄에 거하면 은혜에서 떠나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의 주도권이 바뀐 최악의 경우를 보여 준 것은 단지파입니다. 27-33절까지는 그래도 문장의 주어가 이스라엘 지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34절의 주어는 아모리 족속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전세의 역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단 자손은 아모리 족속의 힘에 밀려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요셉 가문의 힘 때문에 아모리 족속이 노역을 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단 지파는 땅을 정복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로 단 지파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된 사건이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의 실패를 기록한 1장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모리 족속의 경계를 언급하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36절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을 용납하고 함께 거주했는데 결국 그들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며 복을 누리게 하셨음에도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에게 쫓겨나 다시 나그네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삶은 어떠합니까? 단 자손과 같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따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죄를 방치하고 타협하고 용납할 때 그 죄가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다 놓치게 합니다. 잠깐의 유익을 위해 영원한 복을 다 빼앗기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끊고 전심으로 회개하며 성령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혜를 다시 충만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과 지혜를 의지할 때 우리는 실패 할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유익을 따라 타협하다 보면 점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고 주객이 전도되게 됩니다. 단 지파의 모습처럼 결국 자신의 기업을 빼앗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성령님을 통해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죄와 싸워 이기며 하나님 나라의 복을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죄와 절대로 타협하지 맙시다
삿 1장 22~26절 / 안효관목사
성경을 읽다 보면 종종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쟁을 할 때 한 사람도 남겨두지 말고 모두 죽여라.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백성을 한 사람도 남겨두지 말고 다 죽여라. 가나안 백성들을 철저히 진멸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가나안 거민을 한사람도 남겨두지 말고 없애라고 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도록 하시면 좋을텐데 왜 다 몰아내라고 하시는가?’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원주민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몰아내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무당들과 창녀들이 난무했고,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남자들은 무당들이고 여자들은 창녀들이었다.’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해서 가나안 땅을 주시며 거기 거하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건져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죄로 물든 세상에서 죄와 타협하며 죄악 가운데 사는 백성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는지’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죄로 물들어 있던 가나안 원주민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가나안 원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다 쫓아내든지, 아니면 죽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과 타협하고 그 땅에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론 가나안 원주민과 함께 살던 초창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어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결국 하나님께서 염려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들 영향으로 그들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죄악으로 몰고 간 이러한 문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 지파의 실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셉 지파는 자기들에게 할당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먼저 벧엘을 점령하러 나섰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향하신 하나님은 뜻은 무당과 창녀들로 가득 찬 가나안 원주민들을 모두 몰아내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나안 땅에 새롭게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 지파가 벧엘 족속을 치러 올라갈 때, 요셉 지파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 지파가 벧엘을 공격한 과정을 보면 예전에 여호수아 군대가 여리고성을 공격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성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보낸 것이나, 그 성에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받았고, 이스라엘에게 협조하고 도움을 준 사람에게 장래를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와 같습니다. 그리고 성을 점령할 때에 그 성을 철저하게 멸망시킨 것을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공격하던 방법으로 요셉 지파가 벧엘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정탐꾼이 벧엘을 정탐하러 가야하겠는데, 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의 입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벧엘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을 잘 찾지 못하도록 성문을 철저하게 위장해 놓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전쟁에 대비해서 그렇게 해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요셉 지파의 정탐꾼은 성문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그 성에서 나오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성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합니다.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24) 여기서 ‘선대하겠다’는 말은 ‘책임을 져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벧엘 사람은 정탐꾼의 말을 듣고 입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 지파는 벧엘을 공격하여 철저하게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 사람을 살려주었습니다. 25절 마지막에 보면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리고성을 멸망시킬 때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일이었습니다. 26절에 보면, 벧엘이 멸망당할 때 약속대로 생명을 건진 그 사람과 그 가족은 황폐해진 벧엘을 떠나서 ‘헷 사람의 땅으로 가서 거기에다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고 불렀습니다.
벧엘에서 성문을 정탐꾼에게 알려주고 생명을 보장 받은 그 사람은 가나안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에서 살려준 ‘라합’이라는 여인은 여리고성이 멸망당하고 자신의 생명이 보장되자, 가나안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해서 완전히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라합처럼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요셉 지파의 정탐꾼에게 성의 입구를 가르쳐준 벧엘의 배신자일 뿐입니다. 믿음 때문에 정탐꾼을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 지파는 그 사람을 살려 주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새로운 성읍을 건축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던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 벧엘을 멸망시키면 내가 꿈꾸는 나만의 성을 건축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벧엘이 멸망당하자 곧바로 헷 사람의 땅으로 가서 자기만의 성읍을 건축하고, 그곳 이름을 ‘루스’라고 부르면서 거기에서 새로운 가나안 문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여러분! 요셉 지파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암이라고 진단을 받고 수술 받아야 할 사람은 수술을 할 때 암세포가 퍼져있는 곳을 철저하게 도려내야 합니다. 만일 암세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 남아 있는 암세포 때문에 다시금 암이 재발하게 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버릴 때에는 철저하게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죄의 세포가 남아 있으면 그 작은 세포 하나 때문에 그 문화와 삶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으로 물들어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라고 하셨을 때에는 뿌리까지 철저하게 도려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미신과 음란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지파는 지금 중요한 뿌리를 하나를 남겨놓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는지’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망각해버리고, 단순히 그 성읍만 빼앗으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려준 그 사람이 어디로 가서 어떤 짓을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헷 사람의 땅에 가서 루스라는 성을 건축한 그 사람은 그곳에서히 자기가 오랫동안 섬기던 우상을 섬기며, 미신과 음란이 가득한 가나안의 문화를 그대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요셉 지파는 결국 그 사람이 미신과 우상숭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요셉 지파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목적하는 벧엘이라는 성을 빨리 빼앗기 위해서 가나안 사람과 타협을 했습니다. 벧엘을 좀더 쉽게 점령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힘쓸 때에 우리에게도 이런 유혹이 찾아옵니다. ‘고생하지 말고 네가 목적하는 바를 쉽게 이루는 방법이 있다’고 우리를 유혹하며 적당하게 죄와 타협하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에서 우리는 적당하게 죄와 타협하면 얼마든지 쉽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적당하게 거짓말을 하고 조금만 남을 속이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쉽게 돈을 벌 수도 있습니다. 뇌물을 주고 아첨을 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쉽게 승진을 하고,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쉽게 쟁취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성적을 끌어올릴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나 양심을 제처 둔다면 죄와 타협하면서 얼마든지 쉽게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거나 그런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정도를 걸어야 하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리 편에 서야 합니다.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더라도 우리는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죄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 지파 하나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죄악으로 물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 지파가 그렇게 적당하게 죄와 타협하면서 쉽게 성 빼앗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지파들도 쉬운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어갔습니다. 전쟁을 해보다가 힘에 좀 부친다 생각하면 전쟁을 그만 두고 가나안 백성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전후가 모두 그런 말씀입니다. 21절에도 보면,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유다 자손이 이미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성은 불살랐는데, 사람들은 다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여부스 사람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판자촌을 형성하고 무리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베냐민 자손은 그런 여부스 사람을 더 이상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 방방곡곡이 다 그랬습니다. 27-36절까지의 말씀에도 보면, 모든 지파가 자신들에게 주신 기업의 땅에 가나안 백성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그냥 함께 살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2:9절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전쟁을 통해 왕을 죽이고 빼앗은 성읍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무려 31명의 왕을 죽이고 31개의 성읍을 빼앗았습니다. 그 31개의 성읍들의 이름이 27절 이하에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미 여호수아가 왕들을 다 죽이고 다 점령해 놓은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땅을 기업으로 받아 정착하며 살아야 할 지파들은 그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우두머리들은 다 죽였는데, 살아남은 일반 백성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34절에 보면 단 자손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밀려서 산골짜기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27-36절에서 반복되는 문구가 세 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말이고, 두 번째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다”는 말이고, 세 번째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사역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 세 문구는 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려 했는데 힘이 부치다는 이유로 다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가나안 원주민들은 기를 쓰고 그 땅에 붙어 있으려 했습니다. 쫓아내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원주민들은 자기들을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면서 조건을 제시합니다. ‘당신들 농사 지어봤소? 당신들 40년 동안 광야생활하면서 농사의 ’농‘자도 모르지 않소. 우리는 오랫동안 여기 살면서 농사를 지어온 농사의 전문가들이오. 우리를 쫓아내지 말고 여기서 살게 해주면 우리가 당신들의 농사를 지어주겠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가 있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을 것이 걱정이 없었는데, 이제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씨를 뿌려야 하고,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하고, 어떻게 추수를 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가 당신들의 종이 되어 당신들의 농사를 지어 주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잘 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쫓아내려 해도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놈들, 힘들여 쫓아내지 말고 차라리 우리를 위해서 농사를 짓는 종으로 부려먹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아예 같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자신들을 우상숭배와 죄악에 빠지게 만드는 암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을 그 때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선 당장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고 편하고, 또 쉬운 방법이니까 그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선 당장 편하고 이득이 된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렸습니다. 자기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사명을 잊어먹는다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결심하고” 그 땅에 빌붙어 살려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죄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기를 쓰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대적 마귀는 지금도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특히 죄의 유혹 앞에서 우리는 단호해야 합니다. 작은 유혹이라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작은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고 죄악과 타협하다보면 우리의 신앙이 근본적인 것까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인정에 끌려 죄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이익 때문에 적당하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죄와 타협하는 순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죄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게 되게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자주 성찬식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 자손이나 우리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셉 자손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하면서 너무 자주 죄악 가운데 뒹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죄된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다시 한번 용서를 받고, 죄악된 세상을 이길 힘이 우리 자신에게 없기에 주님의 능력을 우리 안에 공급받기 위해서 우리는 성찬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쓰나미와 같이 거대한 물결로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유혹과 죄악의 파도를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 머물 때에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우리 주님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성찬식에 참여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유혹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