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하나님의 질문 공세에 욥은 정말 힘겹게 입을 뗐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알지도 못하고 지껄인 것에 대해 부끄러워 손으로 입을 가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의 참된 고백이라 할 것이다. 감히 어떤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자가 있으랴!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 누구나 다 욥처럼 항복 선언을 하고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동안 잘 알지 못하고 한 말이 창피해서 입을 가릴 수밖에 없다는 반응을 보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믿음이 없는 자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변명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천지만물의 주 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깊은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고 인간인 너마저 내가 지었다고 하실 때, 믿음 없는 자의 대응은 ‘이왕 나를 지으셨다면 내가 멋지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이끄실 것이지 왜 몸이 병들게 만들고, 특별하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자녀들 다 비명횡사하게 하시고, 많은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게 하십니까?’ 하고 나올 것이 틀림없다.
욥처럼 “나같이 보잘것없는 자가 주께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입니다.”(40:4) 라는 반응이 나온다는 자체가 주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이고, 그분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증거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마지막 부분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이 어찌 편지 말미에 사랑하는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쓸 수 있을까 의심이 간다. 하나 이것은 주를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전하는 글이기에 이런 말에 당연히 ‘아멘’으로 받을 것이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 자 모두가 바울의 이런 편지 글을 통해 다시 한번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고 성도로서의 사명을 깨닫는 계기로 삼을 것이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처럼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분처럼 세상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할 지혜도 힘도 없다. 이것은 오로지 창조주의 권능이며 지혜이다. 하마가 엄청난 힘을 지지고 살아가지만 그가 먹는 것은 겨우 초원의 풀이다. 이 짐승은 땅 위에서도 물속에서도 자유자제로 활동하며 거리낌이 없다. 이렇게 독특하게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때문에 된 것이지 그 어떤 인간도 이런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개입하거나 동참한 적이 없었다.
또 흔히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해 내뱉는 말 가운데, ‘하나님, 내가 이러 이러한 것을 주께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정성을 보셔서라도 내게 은혜를 내려 주세요.’ 라는 것이다. 시간도 받쳤고, 물질도 받쳤고,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피조물의 자세를 망각한 발언인지 모른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께 뭔가를 드릴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먼저 하나님께 뭔가를 드려서 그에 대한 보답을 하나님께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준 것이 있다고 갚아라 할 자가 누구인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다.”(41:11)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욥을 생각해 보아도 그는 분명 하나님에게 많은 것을 드렸다고 생각했다. 물론 물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지만 그 물질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기도 했고,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 그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었고, 외롭고 쓸쓸한 자가 있다면 위로하고 격려하며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욥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며 피조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덕분이다. 그러기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했으니 하나님도 내게 뭔가를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발상은 크나큰 오산이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창조주가 지으신 피조물 중 일부이다. 이런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 따라서 내 만족과 기쁨을 위해 살아서는 아니 되며 오로지 주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에게는 불평이나 원망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오직 기쁨과 감사만 있을 뿐이다. 어떤 환경도 다 주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조성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범사에 주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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