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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경기외고 국제부 최미영(36) 부장교사. 그의 가방엔 학교 홍보물과 미국 대학 입학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가득했다. 14박 15일 동안 미국 10개 도시, 17개 명문대를 도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신생 학교인 경기외고를 미국 명문대에게 알리고, 미국 대학들의 생생한 입시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최 교사 소지품 중엔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힌 수첩이 있었다. '펜실베이니아대학에 입학하려면 SAT 점수는 2200점을 넘어야 한다' '예일대 비(非)교과는 해외봉사활동이 잘 먹힌다'는 등 국내 유학업체 사이에 떠도는 정보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최 교사는 직접 발로 뛰면서 현지 대학에서 정보들을 확인하고 보완해 나갔다. 최 교사는 "보름간 출장을 위해 석달간 이메일과 국제전화로 미국 대학 입학사정관들에게 사정해가며 일정을 잡았다"고 말했다.
외고들은 "우리가 영재 교육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대원외고는 언어영역(국어)과 수리영역(수학)의 하위권 학생을 2학급만 따로 묶어, 밤 10시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실시한다. 대원외고 관계자는 "상위권 학생은 이미 최고 수준이므로, 외고 사이의 경쟁은 중·하위권에서 판가름난다"고 말했다.
실제 국어·수학에서 대원외고 학생들의 성적 상승은 놀랍다. 대원외고의 현재 고3 학생들의 전국 모의고사 자료에 따르면, 1학년 3월 모의고사에서 수리영역 1등급이 65%뿐이었지만, 2년 반 뒤인 지난 9월 모의고사에서는 84.4%가 1등급을 기록했다. 언어영역에서는 1학년 3월에 60%만 1등급이었지만, 현재는 75.2%가 1등급이다. 처음부터 실력이 좋은 외국어영역은 상승률이 90%에서 91.5%로 미약하다. 대원외고 관계자는 "남들은 선발 효과라고 해도 우리가 볼 땐 학교 교육의 힘"이라고 했다.
부산외고는 '교원평가'라는 단어가 쓰이기도 전인 2000년에 자체적으로 교원평가를 실시했다. 교사들은 학생에게 '수업이 도움이 됐느냐' 등 10문항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받고, 결과는 개별적으로 통보받고 있다. 이인식 부산외고 교감은 "교사 평가를 누가 좋아했겠느냐"며 "하지만 외고는 선택받지 못하면 학교를 닫아야 하기에 늘 그런 위기감 속에서 일했다"고 했다.
외고에서는 다른 인문계 학교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갖가지 혁신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미국 대학에서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AP(대학과목 선이수제) 과정이 수도권 상당수 외고에 개설돼 있다. 교사들이 해외나 국내 원격 연수를 받아 자격증을 따야 개설 가능한 프로그램이다.
지금의 유학반 개설도 외고가 주도했다. 1998년 교육당국이 비교 내신제(외고생에 한해 수능성적에 비례해 내신을 산정하는 것)를 폐지하자, 상위권 학생들이 많아 내신에서 불리하던 대원외고부터 유학반을 신설했다. 김일형 대원국제중 교장(당시 대원외고 국제부장)은 "내신 때문에 외고가 2류로 밀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구책으로 시도한 해외 유학반이 지금의 한국 고교생들의 아이비리그 돌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2005년 개교한 한국외대부속 용인외고 학생들은 2학년 때 논문을 써야 한다. 강경래 교사는 "미국 대학은 물론 국내 대학 입시에서도 비(非)교과 성적을 높여두면 유리하다는 생각에 논문을 작성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 고교 대상 모의고사를 주관하는 대성학력평가연구소의 이영덕 소장은 "모의고사 결과를 분석 해보면 외고생들은 1학년 이후 3학년까지 진폭은 작지만 꾸준히 상승한다"며 "학교 내에서 상위권 학생끼리 경쟁하는 구도에다, 교사간, 학교간 경쟁이 동시에 벌어지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잘뽑았을 뿐이다… 입학 후에도 학원 전전
당초와 달리 입시 위주 교육… 절반이 서울 강남·고소득층
서울 A 외고 1학년 김모군(16). 초등학교부터 학원을 다니며 공부해 남들 부러워하는 외고에 입학했지만 그는 요즘도 학원 다니느라 생고생이다. 아침 6시면 학교로 달려가 밤 10시 수업이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가서 새벽 2시가 넘어서 귀가한다. 학원에서 그는 영어, 수학 등 수능 대비 수업을 받는다.
김 군은 “외고의 경우는 영어 수업 시간이 너무 많아 수능을 잘 치려면 수학 등을 학원에서 더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외고는 외국어 전문가 양성이란 취지 때문에 하루 평균 2시간 이상 영어 수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 민주당 김춘진 의원이 수도권 외고 학생 130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91%(1195명)가 ‘연중 학원에 다닌다’고 답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김성천 부소장은 “외고가 진짜 잘 가르친다면 왜 이처럼 많은 외고 학생들이 학원을 다니느냐”고 반문한다.
외고의 성적이 좋은 것은 우수학생을 뽑은 효과일 뿐 학교 역할은 미약했다는 주장은 결국 외고의 해체·폐지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영재(英才)를 독점하는 외고가 글로벌 명문대 합격생을 많이 배출했다고 자랑하면 일반고 교장들은 억장이 무너질 것”이라며 “우리도 그런 인재 보내주면 더 많은 학생을 더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학교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 한국교육개발원(KEDI) 강영혜 박사는 지난 2007년 국어 점수를 놓고 분석을 해본 결과, “외고가 단순 점수(원점수) 비교로는 일반고를 상당히 앞서 있지만 학생과 학교를 둘러싼 경제적, 문화적 각종 환경 등을 모두 반영하면, 특별한 차이가 없더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강 박사는 당시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특목고의 효과가 학교 교육의 효과라기보다 좋은 배경과 가만히 둬도 스스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뽑아 얻게 되는 ‘선발 효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김성열 원장은 “최상위권 학생의 경우 중하권보다 성적을 올리기가 어렵다”며 “최상위권 학생을 조금이라도 성적을 올리거나 현상 유지를 시킨다는 것은 외고의 교육효과가 있다는 의미”라고 반박했다.
외고 합격생이 사교육 혜택을 많이 받는 서울 강남 지역이나 고소득층 출신에 편중되는 현상 역시 ‘선발 효과’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대원외고의 작년 신입생 중 서울 강남·서초·송파 3구 출신이 50%였다. 김 부소장은 “외고들의 교육과정과 방과후 프로그램 등을 봤는데, 글로벌 인재를 키운다고 하지만 결국 입시에 초점 맞춘 것 아닌가”라며 “좋은 교육이라면 갖춰야 할 다양하고 창의적인 커리큘럼은 부족해 보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