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한국영화 부흥의 싹이 된 영화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결혼 만들기] 이후 로맨틱 코미디야말로 제작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스터 맘마]나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같은 영화들이 계속 흥행 성공함으로써 확실하게 보답되었다. 보릿고개와 이데올로기의 강박증에 사로잡혀 선진조국과 경제부흥을 외치던 구세대와 가장 확실하게 결별하는 장르로서 로맨틱 코미디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동구권은 몰락했고 오랫동안 우리들을 옥죄었던 군사정권은 물러났으며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외국 자본이 밀려들었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자 OECD에 가입되었다.
영화의 주 관객층이 20대라는 점에서, 그들은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자신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세계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 원한다는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가장 유용한 장르였다. 고도성장의 달디단 경제적 과실을 맛보고 자란 신세대들은 이제 더 이상 구질구질한 삶의 일상에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로맨틱 코미디는 이 세계가 유쾌하게 살만한 것임을,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녀의 애정 문제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준다. [쉬리] 이전까지는.
그러나 세계는 변했다. [쉬리]의 성공 이면에는 IMF의 충격이 내재되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토대가 그렇게 튼튼한 것이 아님을, 순식간에 사상누각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비로소 천둥벼락처럼 깨달았다. 그래서 거시적 안목으로 내 삶과 이 세계를 다시 한 번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때 남북분단이라는 체제에 대한 관심은 가장 우선적인 것이다. [쉬리]에 이어 [공동경비구역 JSA]가 성공한 것도 이런 정치, 사회사적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므로 IMF의 터널을 통과한 로맨틱 코미디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90년대 초반처럼 관객들에게 시치미 뚝 떼고 이 세계가 즐겁고 유쾌한 것임을 강조할 수는 없었다. 그 시기, 로맨틱 코미디는 더 이상 매력적인 장르가 못되었다. 흥행 성공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은 거의 없었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지난한 한국영화사적 흐름을 끄집어낼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순수한 사랑만으로 유쾌한 재미를 주는 모습에 관객들은 속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주영주는 사기 전과가 있는 범죄자로서 현재 가석방 중이다. 그녀의 결혼 사기극에 걸려드는 순진남 최희철은 충청도 소도시 용강의 순진한 약사다. 이러한 인물 설정 자체가 남녀의 역할이 전도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다. 6,70년대 같았으면 적어도 순진녀에게 사기남이 접근하는 내러티브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전도된 성적 역할로 [그녀를 믿지 마세요]를 끌고 가는 사람은 시종일관 주영주 역의 김하늘이다. 물론 이 세계를 파괴하거나 해체하지 않는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대로, 전복적 상상력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역시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웃음에 이어 감동까지 주려고 제작진들의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최근 한국 영화는 단순한 웃음만으로 관객들이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지웃음을 유발하는 위장적 제스처에 그동안 관객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반증이다. 관객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에 표를 몰아줌으로써 의사표시를 한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류의 영화들이 만들어지도록 실력행사를 한다. 장르 영화의 출발이다.
영화는 주영주의 캐릭터 구축에 도입부를 할애한다. 그것이 승패의 가름을 결정하는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푸른 죄수복을 입고 감옥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 첫 장면에서부터, 주영주의 이중적 캐릭터는 구축되기 시작한다. 교도관과 가석방 심사위원들을 속여서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석방되는 주영주의 사기술은 가령 [스팅]이나 [캣치 미 이프 유 캔]류의 고급화 된 지능범은 아니다. 감성적이다. 내면연기 운운하며 감옥 동료들에게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술에 대해 일장 연설하는 주영주의 캐릭터는 이 영화가 사기라는 자극적 소재를 동원해서 지적 쾌감을 주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순진하다. 주영주도 순진하고 영화도 순진하다. 주영주가 처음부터 최희철의 약혼자를 빙자하며 사기극을 벌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기차 안에서의 반지 소동 등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대기 위해 노력할 때부터 이것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가석방 중이기 때문에 오해받지 않도록, 동석한 남자의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훔쳐간 소매치기를 쫒아가 그것을 다시 훔치는 것도, 기차 안에 가방을 놓고 내린 죄로 최희철을 용강까지 찾아가는 것도, 모두 의도된 사기극은 아니라는데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치 채야 한다. 이제 결말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주영주와 최희철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해피엔딩에 이르게 될 것인가를 지켜보는 일이다. 전개방법은 정석대로 나간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일차적 재미는 순식간에 필요에 의해 거짓말을 줄줄 읊어대는 주영주의 천변만화하는 연기술에서 나온다.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난 주영주는, 악어의 눈물은 예사로 흘리며 진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 최희철만 제외하고 주변 사람 모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물론 돋보기를 들이대고 하나하나 시비를 걸자면 엉성한 것도 많다. 비논리적인 부분도 눈에 띈다. 그런데 우리는 웬지 그냥 그녀 편이 되고 싶어진다. 바로 그 심리적 부분이, 이 영화가 성공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갑내기 과와하기]에서 로맨틱 코미디의 맛을 본 김하늘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스크린 데뷔작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만큼 예상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준 상대역 최희철 역의 강동원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사실 전반부의 영화적 호흡은 사기극이 갖는 속도감에 비해 조금 느리다. 용강의 최희철 집에 살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상이한 캐릭터가 구석구석 살아나고 있는 것은, 이 영화가 주영주의 일방적 사기극이 되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 올바르게 살아가는 전직 교장선생님 아버지,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을 운영하는 착한 시누이와 고모부 내외까지, 각각의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모두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이 영화의 종착역에 도착해야 한다. IMF라는 고통스러운 터널을 통과한 2천년대의 로맨틱 코미디는, [그녀를 믿지 마세요]처럼 갈등은 있고 상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해서 대화합에 이르게 된다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이 뻔한 결말이라고 해도, 여자 전과자 사기범을 등장시켜 이렇게 고통스러운 좌절을 거쳐 해피엔딩에 이르게 되는 과정 자체는 매우 힘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아슬아슬하다. 용강의 히어로, 고추남자를 선발하는 과정 같은 경우가 그렇다. 마치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전국노래자랑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유치찬란해질 수 있는 마지노선 근처를 어슬렁거리지만 무리수를 범하지 않는 영리한 내러티브와 캐릭터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