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별 짓을 다 한다. 해마다 심던 마늘을 올해부터는 안 심기로 했다. 자급자족할 정도는 심을 생각이었지만 단감 수확과 마늘 파종이 겹쳐 시기를 놓쳐버린 점도 있다. 마음 한 쪽은 홀가분하고, 마음 한 쪽은 허전하다. 당장 내 년에 먹을 양념 마늘조차 사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위축되기도 한다. 마늘 농사를 지으면 푸지다. 지인이 오면 선뜻 마늘 한 봉지 선물로 따 넣어 주기도 했는데 농사를 접어버리면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마늘을 사 먹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지레 주눅이 든다. 남편에게 텃밭에 한 두둑만 심자고 했었다. 거름만 넣어 두둑만 지어주면 마늘 심는 것은 내가 한다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결국 씨 마늘 단은 밭으로 못 가고 시렁에 걸려 연말을 맞았다. 김장철에 시장에 내다 팔아먹으면 되겠다. 생각했지만 그것도 놓쳐버렸다. 마늘 몇 접가지고 오일장 가기가 귀찮아졌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한 때 마늘을 몇 마지기나 심었었다. 마늘을 트럭 가득 싣고 도시 아파트에 갖고 가서 팔기도 했다. 오가는 친인척에게 선물로 마늘 한두 접 내 놓기 일쑤였고, 형제자매에게도 일 년 먹을 마늘을 보내기도 했다. 어머님이 지금보다 건강해서 마늘 밭을 두량해 주실 때 이야기다. 온전히 우리 몫으로 떨어져버린 마늘 농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버겁기만 했다. 어머님은 마늘 심을 때가 되면 날마다 독촉을 하셨다. 다른 집에는 마늘 다 심었는데 왜 안 심느냐고. 그 말이 듣기 싫었다. 마늘 심어 거두어 들여 놓아도 어머님의 등살을 면할 수 없었다. 나만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 불러 마늘 가져가라고 호통이시니 도시 살이 하는 자식들도 넌더리를 냈다. 도시 자식들은 봉투를 주지만 우리는 농사짓는 대신 일 년 양념할 마늘을 시댁에서 갖다 먹는다는 것이 다르다.
올해는 서울 형님이 어른들 생신에 못 왔고, 마늘을 가져 갈 짬이 없었다. 지난해, 마늘 소동이 있었다. 형님도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마늘을 사 먹겠다고 선언했었다. 나도 우리 먹을 마늘만 심겠다고 했었지만 여전히 형제자매들 나누어 먹고도 남을 정도의 마늘을 심었다. 그 마늘을 거두어 시렁에 걸어놓았다. 나는 또 마늘이 남으면 뒤처리가 내 차지라 미리 마늘 몇 접 팔자고 했었다. 지인이 밭 마늘을 사겠다고 해서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님은 자식들 나누어 줄 욕심에 한 접도 팔게 없다고 했었다. 어머님 허락 없이는 마늘을 팔수가 없어 접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형님과 동서도 마늘을 조금만 챙겨 갔고, 씨종자 할 마늘은 어머님 손을 거쳐 시렁에 걸렸다. 막상 마늘 심을 철이 다가오자 또 성화를 대는 것이 어른들이고, 일에 치어 허덕대는 남편과 나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제발 좀 가만히 계시라고 하다가 결국에는 마늘 안 심자. 로 결정이 나 버렸던 것이다.
평생 가정주부로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어머님은 마늘 한 톨도 아까워하신다. 아버님의 유별난 마늘 사랑 탓도 있다. 흑마늘을 만들어 놓고 장복하시기를 즐기고 생마늘을 즐긴다. 어머님이 흑마늘을 만들었다면 마늘이 남아 돌리 없지만 올해는 흑마늘 만드는 것조차 손 놓아버리셨다. 이미 치매가 중증으로 진행 중인 어머님은 흑마늘 만드는 것도, 마늘 까는 것도 아주 싫어하신다. 끼니 차리는 것조차 시아버님이 무서워 억지로 하고 있는 실정인데다 툭 하면 아프다고 누워 꼼짝도 않으신다. 어머님 나름의 반격이지만 시아버님 성정이 변할 리 없다. 시아버님은 몸에 좋다는 것은 뭐든지 만들라 하고, 사 들이지만 정작 그것을 요리할 사람은 어머님인데 어머님이 환자가 되자 어머님이 하던 일이 몽땅 내 일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 손발 들어버렸다.
"저 마늘 다 우짜끼고?"
결국 어머님은 내게 하소연을 하고, 어머님의 근심덩이를 덜어드려야 하는 책임과 의무감으로 나도 몸살을 앓는다. 김장할 마늘을 가져와 깠다. 김장을 끝내고도 마늘이 많이 남았다. 내년에 마늘을 사 먹어야 하니 마늘을 시나브로 까서 저장할 방법을 찾는다. 기계에 갈아서 냉동실에 얼리는 방법이 있지만 무조건 다 얼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나브로 퍼질러 앉아 마늘을 깠다. 요즘 젊은 아낙은 깐 마늘을 사 먹는다. 마늘을 까먹을 시간도 없단다. 다들 직장에 다니는 탓도 있다. 돈 버는데 깨끗하게 껍질 까서 씻어 나온 마늘을 사 먹는 것이 편하다는 주의다. 마늘을 까고 앉았으려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 이미 뿌리 부분이 도도록해지고, 파란 촉이 나오기 시작한 마늘이다. 속에서부터 영양분을 빨아들여 푸른 촉으로 올리는 마늘을 보며 안타깝다. 흙속에 들어가 자라고 싶어 하는 마늘의 마음을 읽는다. 미안하다.
안 되겠다. 빨리 처리하는 게 낫다. 진주 큰 마트에 가서 공장에서 나오는 국산 깐 마늘의 가격을 알아보고 읍내 장사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마늘을 까 줄 테니 사겠느냐고. 마트에서 파는 가격으로 사겠느냐고. 까는 대로 가져오란다. 마늘 까는 것이 귀찮아 깐 마늘을 받는다는 지인이다. 옛날 어머니들은 누구나 수작업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요즘 어머니들은 바로 먹을 수 있게 만들어 나온 것이나 기계로 맞춤 나온 것을 돈으로 사서 쓰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니까 모두 돈 벌이에 혈안이 되고, 돈 타령을 하는 것이 아닐까. 대형 마트에 가면 차고 넘치는 것이 물건이다. 없는 게 없다. 구미에 맞는 것을 찾는 것도 돈만 있으면 해결된다.
두 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마늘을 까면서 참 별짓을 다 한다 싶다. 시렁에 걸린 채 썩혀버리는 것은 마늘에게 미안한 일이다. 누군가의 식탁에서 양념으로 거듭난다면 마늘도 좋아할 것 같아서 마늘 까는 수고를 달게 하기로 했다. 농사꾼 아낙으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가 도맡았던 농사일을 조금씩 놓아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삼십 여 년이 넘도록 참 많은 농사를 짓고, 또 놓아버리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하다. 이젠 하나 씩 비우면서 살아야 할 나이란 것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