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남.자.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자봉 할 때였다. 나쁜 남자라는 큰 네글자. 그리고 한 여인의 나체와 거울 속의 기분 나쁜 남자의 얼굴, 고풍스런 침실. 이 요소들이 조화가 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포스터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매진 열풍. 아마도 야하지 않을까...하는 그런 생각으로 예매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 그리고 김기덕이란 세 글자 때문이라던가. 아니면 나처럼 이 오묘한 포스터 때문에..
영화제 기간에는 자봉의 신분으로 영화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개봉하기만을 기다렸던 영화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쾌한 기대감만은 아니였던 것은 내 애인 창녀 만들기가 부제였기 때문이리라. 여자로써 들으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부제가 아닌가 ...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준 포스터는 영화를 보고 만감이 교차하여 그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읽은 심영섭의 글을 보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실레가 사람을 알 수 없는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뒤틀리고 고립된 존재로 보았다면 그것은 그가 대상 인물에 잠재한 정신적인 갈등을 느꼈기 때문만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자기 인식이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모든 초상화는 화가의 내면의 풍경과 흡사하며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키는 거울이다. 초상화는 실레가 비틀린 바깥세상과 인연을 맺는 자신만의 방식인 것이다.”(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에곤 실레> 중에서)
1910년 에곤 실레가 그린 가장 흥미로운 자화상은 <거울 앞에 선 누드를 그리는 자화상>이었다. 이 그림을 제외한 많은 실레의 자화상은 흔히 두 가지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퀭한 눈으로 스스로 성기를 드러내어 자위를 하는 그림이나 고통으로 울부짖으면서도 그것을 영광스러워하는 자신을 순교자로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 자화상만은 예외적이었는데, 실레는 자화상을 제작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인 거울,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누드모델과 함께 등장한다.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실레가 그러하듯 모델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가는 몸매와 작지만 단단한 가슴을 가진 여자는 흘러내린 스타킹과 엉덩이에 걸치고 있는 손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녀의 음모에 시선이 가도록 배치된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것은 실레의 시선이다. 그는 자신의 모델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모델을 그린다기보다 이 그림을 볼 관객을 쏘아보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의 최후의 작품 중 하나인 <가족>을 제외한 실레의 초상화들은 비록 그가 옆모습의 포즈를 취할 때라도 관객을 쳐다보는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덕 감독 스스로가 공인하고 있고, 또한 <파란 대문>과 <나쁜 남자>에 연달아 등장하며 은근히 오마주를 바치고 있는 에곤 실레의 그림 중 하나는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놀랄 정도로 <나쁜 남자>의 포스터와 닮아 있다. <나쁜 남자>의 포스터는 마치 실레의 <거울 앞에 선 누드의 자화상>과 정반대의 각도로 그려진 김기덕 영화세계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신체포기 각서를 쓰고 사창가의 작부가 된 여자는 전신을 드러내어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본다. 자신의 얼굴 대신 그의 얼굴이 비추어진 거울을 보며 어쩌면 그녀, 창녀가 된 백설공주는 자신의 포주와 자신이 하나되었음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남자의 시선은 여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나신에 시선이 가도록 전시해놓은 뒤, 정작 그는 짐승의 눈빛으로 관객이라는 먹잇감을 포획하고 있는 것이다. 』
심영섭의 표현에 의하면 이 영화에는 김기덕 자신의 자기인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발표된 후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아야만 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혹평을 대부분의 남성들은 호평을...심영섭 역시 여성이라 그런지 그녀의 글은 페미니즘 적인 요소가 농후했다. 그녀가(말빨에 반해 그녀의 팬이 된 나이지만) 김기덕을 맹렬히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김기덕이란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김기덕식 표현의 이 영화 첫장면은 더러운 환경의 억압에서 건달로밖에 살수 없는 한기가 엘리트 계층의 대학생 선화에게 기습 키스하여 선화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에서 한기는 선화에 대한 호감을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한 이유가 한기 자신의 신분 때문인가?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라도 욕망을 분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일로 인해 한기는 선화를 자기 자신이 속해있는 더러운 환경으로 타락시켜 버린다. 그리고 거울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관찰한다. 여기서 한기의 선화에 대한 사랑이 플라토닉적인걸까 아니면 관음증, 사디즘 적인 사랑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를 두 번이나 보고 나서도 어느 것이다 확정지을 수 없었다. 이 둘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한기만의 사랑방식으로 선화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한기의 부하인 명수의 선화에 대한 사랑은 한기의 사랑과 대조된다. 한기의 사랑이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이타적인 사랑이라면 명수의 사랑은 자기 욕망만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사랑이다. 한기의 사랑을 이타적으로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김기덕 감독의 능력인 것 같다. 정말 나쁜 남자인 한기를 측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김기덕식 표현방식에 놀라울 따름이다. 김기덕은 영화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성상품화 시키지만 남성은 여성을 그렇게 만들고도 관객들이 남성을 측은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에 그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김기덕을 비난하는 것이다. 나도 이점에서는 김기덕의 표현방식을 비난하고 싶지만 이게 현실에서도 있음직한 아니 일어나고 있다라는 사실 때문에 김기덕의 도덕성까지 의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국졸 후 공장에서의 생활을 통해 이 사회 가장 밑바닥의 인생을 몸소 겪고 그것을 영화에 표현한다는 김기덕의 말을 생각하면 이 나쁜 남자의 창녀 만들기가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김기덕을 비판하는 대분 분의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접해보지 못한 텍스트 적인 인생을 산사람들이 대분 분이다. 그러니 김기덕의 영화에서 표현되는 여성성의 비하를 비판하는 것이리라. 나도 김기덕과는 완전 다른 텍스트 적인 인생을 살아왔지만 이러한 김기덕의 시각에서도 현실을 보고싶었다. 그래서 처음 영화를 봤을 땐 김기덕에 대한 분노감, 저렇게 까지 여성을 비하시키는 이유가 뭘까? 남성우월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의 감독이란 생각에 비판받아 마땅한 인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기덕에 대한 사람들의 호평과 혹평을 읽고 한번더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에 대해 비판만 할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충분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감독이라 주목받고 혹평과 호평이 줄을 잇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아직 남성위주의 사회인 이곳을 김기덕 식으로 현실보다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이 사회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뒤통수를 치는게 아닐까?
그리고 명수가 선화가 도망가는 것을 도와주고도 다시 돌아왔으면 하고 말하고 한기가 다시 선화를 데려오는 것을 보면 건달이라는 신분과 창녀라는 신분은 서로 사랑할 수 있지만 건달과 대학생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선화를 창녀로까지 타락시켜 한기 자신과 동등한 신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건달과 창녀 이들은 처음부터 이런 밑바닥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러운 환경에서 태어나 그 환경을 벗어나려 발버둥치다가 결국 벗어나지 못해서 더러운 현실인 것을 알면서도 적응하며 살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선화가 처음엔 한기가 쳐놓은 덫에 걸려 창녀가 되어서 현실을 부정하다가 나중엔 오히려 적응하여 그 생활을 즐기는 것과 동일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쁜 남자의 도덕적 역겨움의 주체는 한기, 선화도 아닌 더러운 환경 그 자체다. 더러운 환경으로 인해 한기 자신도 건달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것이고 창녀들도 역시 돈이 필요해서 자의든 타의든 그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고 선화 역시 더러운 환경으로의 변화로 인해 창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도 역겨운 것은 왜일까? 텍스트 교육을 받은 우리가 도덕적 행위 주체라는 생각 때문에 이 영화가 역겨웠던 것 같다.또한, 순결을 강조하고 동물적인 본능보다는 이성적인 사고를 먼저 하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어서 이들의 성상품화, 동물적인 본능이 우선시되고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서 역겨움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리고 한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사 "깡패새끼가 무슨 사랑이야, 깡패새끼가"는 한기 자신이 이미 더러운 환경에 적응하고 이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건달로만 규정지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인 것 같아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한기는 선화를 사랑하지만 자기 자신이 깡패라 사랑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고 선화를 자기와 같은 신분으로 타락시켜 지켜보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주황색 트럭을 이용하여 다른 남자에게 선화의 몸을 팔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삐뚤어져 있는 한기의 사랑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도 한기의 더러운 환경 탓일까? 김기덕이 영화에서 왜곡된 사랑방식을 표현하는 것은 어릴 때 아버지의 구타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한기의 이런 삐뚤어진 사랑방식이 더러운 환경 탓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김기덕의 영화는 직설적인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것을 까발린다. 김기덕은
『누구나 바르게 태어나 바르게 살다 바르게 죽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마치 복병처럼 나타난 타인에 의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삶을 만나게 되고 피할 수 없이 그런 삶에 길들여진다. 2001년, 이 긴장된 도시 안에서 아무리 날카롭게 경계심을 세워도 어느새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나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 태어남부터 죽을 때까지 불행한 기운이 감도는 한 나쁜 남자가 있다. 너무나 검어서 흰 것이 때처럼 느껴지는... 그의 순수한 눈빛은 한 여자의 일생을 불행으로 바꾼다.
그것이 너무나 잔인해서 마치 신의 계획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더러운 환경 자체가 운명이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는 한기의 시각으로 표현함으로써 한기가 나쁜 남자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선화가 착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도...더러운 환경자체가 이들의 운명이 되어 나쁜 남자 나쁜 여자로 만든 것이다.
교수님...제 생각을 두서 없이 나열 한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보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서...
한 학기 동안 감사합니다 건강하시옵소서~~~^^*
첫댓글 김기덕 감독은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는 있지만 잘 표현 못하는 감정들을 잘 표현하는거 같네여.. 다른 글보다 저랑 비슷하게 느끼고 계신것 같아~~그냥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