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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손스침 철재 잡이에 묶어 놓았던 자전거, 봄이 다가서자 궁리가 연출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두 다리의 속성은 잘 버팀목 역할이다. 두 다리가 잘 훈련되지 않으면 직립은 애당초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기울어지면 직립의 기운이 상실되어 삶 자체가 그늘지게 되는 것이다. 자전거의 속성은 회전력이다. 달리면 회전력이 활발하게 되어 단숨에 이동거리를 넓혀 나갈 수 있어 자연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사물들을 보고 느끼는 감성에 영향으로 덩달아 행복의 보복도 커질 수밖에 없다. 동안 살아오면서 추억이란 이름을 빌려 사유의 채집공간에 담아 두고 있는 한강이란 주제의 아름다움은 이미 넘칠 정도로 많이 갖고 있다. 그것도 사계를 온전하게 담고 있어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지만 아직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바로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적 공간이 주는 의문일 것이다. 경험하며 지나온 것들은 대부분 현실에서 좋은 참고자료를 제공해 준다. 반추의 시간이 지나자 실증적 체험을 요구하는 마음이 다가왔다. 이젠 마음이 요구하는 청을 스스로 들어주어야 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술 한잔을 잔에 따르고 마시며 봄 나들이 동선을 하나, 둘, 셋... 그렇게 이어 나가면 포괄적 봄의 서사와 교향곡을 함께 묶어 여행 동선의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간추려 보면 한강의 본류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의 집합체가 바로 내가 갈 길이었다. 집을 나선 후 두미강을 건너 옛 중앙선 철길 따라 조성되어 있는 길을 달리면 되는데 길 아래 좌, 우측으로 물 길이 벗이 되어준다. 시작에선 좌측으로 한강 물길이 흐르지만 두미강을 넘어서면 북한강, 남한강물이 합수되는 두물머리를 지나치면 남한강 물길로 바뀌다 잠시 청계산과 부용산 맥에 가려져 물 길은 사라진다. 그러다 몇 개의 터널을 빠져나오면 신원역 부근에서 온전한 남한강 물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세와 터널과 강 경치가 교대로 봄기운을 느끼게 도와준다. 우선 팔당대교 넘어 능내리 부근을 지나면서 한국천주교의 발상적 기운이 서려 있는 마재를 눈여겨볼 수 있고 마을이름이 왜 능내리인가? 의문을 풀어 주는 한확의 묘를 통하여 왕릉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능내를 벗어나면 만나게 되는 나루터 강 건너 분원리 윗마을 강하리와 연결되는 나루였다.
옛 나루터의 풍광은 지금도 아름다운 강심이 느껴진다. 두물머리 합수점을 지나면 새벽 물안개와 연지에 피어나는 연꽃의 아름다움이 퍼줄처럼 맞춰지게 된다. 그리고 부용산자락에 숨어 있는 한음 이덕형의 역사 그날들을 새삼 챙기다 보면 캄캄한 터널의 암흑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암흑의 공포에 젖어들 무렵 다시 광명의 세계가 펼쳐진다. 옥천역 부근을 지나 아신역과 오빈역 사이에서 강변을 살피며 노을도 쉬어 간다는 들꽃수목원을 만나게 된다.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 수목원 부근에는 양근성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옆으로 물안개 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오빈에서 만나게 되는 양근 성지와 강아래에 숨어 있는 감호 석벽은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지식인 형체가 지금도 잡힌다. 그리고 이어서 만나는 양근대교 아래 모래턱 형장에서는 형장에 이슬로 사라지며 남긴 순교자들의 예수마리아 기도문을 듣게 된다.
성지를 참례 후 다시 북으로 이동하면 물안개 공원과 함께 부교를 넘어 양강섬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만나는 대교 아래 모래톱이 바로 천주교인들의 형장터이다.
곧이어 펼쳐지는 갈산을 지나 뚝 아래 강변에 수더분하게 자리 잡은 양근 숲은 이 지역이 왜 양근지방인지 단박에 익힐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뚝 양 옆으로 심어져 있는 벚꽃 가로수 행렬이 아름답다 벚꽃의 행렬은 남한강과 흑천 사이로 갈라지면서 끝이 나지만 약 8km 이상 남한강의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개군 내리에는 100년 이상된 산수유나무 7천여 그루가 마을을 감싸고 있어 매년 3~4월, 노란 산수유꽃이 장관을 이룬다. 이 마을에서는 산수유꽃을 빌려 산수유 꽃 축제를 개최하며 특산물을 함께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늘 여행의 끝지점으로 선정한 곳이다.
동선을 만들어 놓고 손스침 철제 파이프 곁으로 다가갔다. 묶은 후 채워 놓은 회전 비밀번호 키를 돌려 풀었다. 기능 점검을 한 후 현관 앞에 세워 놓고 실내로 들어와 준비물을 챙겼다. 물, 물티슈, 약간의 행동식, 선글라스, 장갑, 마스크, 모자, 카메라, 여벌상의, 등을 아주 작은 sack 챙긴 후 집을 나선 시간은 정각 10시, 큰길, 작은 길을 선택해 가며 횡단보도를 이용하며 강변 자전거 길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 풍향을 체크하니 맞바람이었다. 하루종일 바람의 방향은 지속될 것 같았다. 집을 나서면서 바람막이 웃옷을 선택한 것을 잘한 일이었다. 다소 쌀쌀한 기온이 섬찟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온이 오르면서 적절하게 적응할 것이다. 2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컨디션을 끌어올리며 달려 나갔다. 강 언저리에 자연적으로 자라난 버드나무는 이미 숲형태를 갖춰 나가고 있었다. 제비꽃도 흔하게 보이고 쑥도 많이 자라 있어 쑥을 캐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벌써 검단산과 예봉산 협곡인 두미강에 도착하였다. 잠시 쉬며 등뒤 풍경을 조망하려 등을 돌리자 삼각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삼각산은 북한산의 옛 이름이다. 백운대를 정점으로 동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 길게 늘어 선 암봉이 만경대이고 우측 단독바위산이 인수봉이다. 세 봉을 연결하면 삼각형태를 이루어 삼각산이라 불렀다. 일제 식민지 시대 한강 이북에 있는 산이라 하여 북한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인 것이다.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보면 두미강 협곡 즉 팔당협곡이 정면으로 잘 보인다. 팔당댐 아래 암초사이를 흐르는 강물에도 봄이 확연하였다. 산자락 곳곳에도 연둣빛 첫물이 들면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작은 미약하지 여름을 맞이하며 성숙해지는 것이 숲이다. 과실이 맺으면 성장하고 성숙되어 가다 결실을 맺는 것이 섭리인데 가을은 결실을 거두고 나누고 저장하여 혹독한 계절을 이겨내는 실용으로 쓰임을 갖는다. 지금은 폐선이지만 강변 따라 철길이 열려 있어 창밖을 바라보는 멋이 좋았었는데 전철화하면서 내륙으로 철로를 끌어안고 터널을 뚫어 이용하여 강변의 경치구경은 옛일이 되어 버렸다. 대신 폐선을 자전거 길과 함께 걷는 길도 만들어 놓아 함께 이용할 수 있어 실용적이다. 특히 팔당 옛 어부 마을에서 옛 철길로 올라서서 능내리까지 자전거길은 아늑하면서도 풍경이 아름답고 몰입할 수 있어 좋은 길이다. 협곡인 두미강 암초지대에서 옛 뗏목꾼들이 타고 내려온 뗏목이 난파되어 사상자가 많이 생겨 봉안 안부 쪽으로 당집이 무려 여덟 집이나 생겨 팔당이란 지명이 생긴 것이다. 전용구간이라 다른 신경 쓸 없이 편안하게 달리며 멋진 풍광을 보며 환희심을 모을 수 있게 달릴 수 있었다. 봉주루도 새롭게 인허가를 받아 새 식당건물 건축에 여념이 없었다.
능내리에는 한확의 묘가 있다. 한확 두 누이가 명나라 황제 성조와 선종의 후궁으로 연달아 뽑혀 진헌사로 누이를 호송한 조선의 관료이다. 1435년 중추원사를 거쳐 판한성부사·병조판서·의금부제조·이조판서·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451년(문종 1) 사은사로 다시 명에 다녀왔고, 1452년(단종 즉위) 좌찬성에 올랐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측에 가담한 공으로 우의정에 오르고 정난공신 1등, 서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면서 좌익공신 1등,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양반의 묘택이 능침처럼 보여 오고 가는 사람들이 능이라 불러 능내리가 되었다고 한다. 따님이 바로 인수대비이다. 이 지역 강안(江岸) 새들이 모여 앉아 지저귀는 소리가 너무 좋아 조안(鳥岸)이라 불린 곳이다. 강마을이 바로 마재이며 다산 정약용의 생가이며 18년 동안 유배생활 끝에 풀려나 다시 돌아와 여유당이란 옥호를 짓고 머물다 여유당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혀있는 곳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혼맥으로 한국천주교난과 얽혀 참혹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집안이다. 능내에서 운길산 역까지 길은 참 순하다 맞바람을 피할 수 있으니 회전력이 쉽게 이어져 빠르게 달려 나갈 수 있었다. 앞서가는 젊은 처녀들의 한 무리가 경쾌하게 느껴졌다. 같은 녹색의 자전거를 보니 서울 도시에서 빌려 주는 자전거가 분명하였다. 6명이 일사불란하게 잘 달리더니 한 사람이 건널목 안전기둥을 들이박고 나뒹굴게 되었다. 쿵 소리와 함께.... 동행하고 앞서가던 처자들이 동시에 몰려와 야단법석이었다. 다행히도 별부상이 없이 일어서는 것을 확인히고 조심하라 이르고 앞서 나갔다.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갈리는 두물머리 강을 건너 곧장 달리면 남한강으로 접어들게 된다. 다리로 올라서서 내륙으로 들어섰다. 세조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수로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양수리(兩水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와 기이하게 여겨 다음날 조사해 보니 운길산에 고찰(古刹)의 유지가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 그 바위굴 속에서 16 나한을 발견했으며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게 되어, 이곳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어 수종사라고 했다는 전설이 내려 오지만 수종사에는 현재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은 그 이전이며 세조연간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인 아닌가 한다. 수종사는 또한 다산 정약용이 강진 다산초당에서 18년간 유배에서 풀려나 마재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을 위하여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가 수종사로 와 머물며 다산을 만나 차를 나누던 곳이 바로 수종사다.
원래 수종사로 올라가던 길은 연세중학교 옆길 따라 오르는 길이 옛길이었다. 그곳은 조안면 송촌리 사제마을로서 한음 이덕형 사저가 있던 곳으로서 관직에 머물다 물러나 있다 죽은 곳이다 이곳은 수종사 사하촌이었다. 한음은 강 건너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82번지에 부인 한산 이 씨와 합장되어 있다. 옛 철교로 사용하던 다리 위에 나무판재를 깔아 자전길을 만든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넘으면 양수역이 나온다. 부용산 자락을 스쳐지나 터널로 진입하였다. 조도가 바뀌니 깜깜절벽이었다. 300m 여 미터 진입해 들어 서자 시야가 안정되었지만 맞바람이 극심하고 한기가 몰려왔다. 꼭 냉탕에 뛰어든 것처럼 오한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여명을 향해 나도 모르게 빠르게 달려 나갔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완연한 봄기운과 함께 온난의 극치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진달래가 만개된 사실이 봄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였다. 다시 터널을 지나자 신원역이 나왔다. 양평 신원리는 몽양 여운형의 고향이며 생가를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복원하게 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복원하였는지 모르겠다. 가정법률사무소를 만들어 법률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법률자문을 하던 이화여대 출신 이태영박사가 학창 시절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웅변대회에서의 열변의 모습을 본 후 부친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양부를 자처하던 인물이 바로 몽양이었다. 독립운동과 진보정치가였던 좌성향의 정치가 몽양은 극우청년에 의하여 피살되어 생을 마감한 후 북한산 동쪽 자락 수유리에 묻혀 있다. 신원역을 지나며 나도 모르게 몽양에 대하여 떠올리고 있었다. 신원리 부근에서 부터 어깨와 목이 무거워지기 시작하였다. 휴식터에 자전거를 세우고 몸을 풀어주었다. 엉덩이 부분도 약간의 통증이 있어 가벼운 체조를 이용하여 이완시켜 주었다. 오랜만에 타면 늘 있는 증상들이다. 그리고 근육이 소멸되어 간다는 뜻도 깃들어 있는 증세들이다. 노년에는 근육 지킴이 소중한 건강관리법이라 할 수 있다.
스트레칭을 한 후 다시 페달을 밟았다. 양평 국수리를 지나면서 저 멀리 청계산으로 마루를 보았다. 참 청계산이란 이름이 많다 국수리에서 시작되는 청계산은 양수리까지 뻗어 부용산까지 연결되며 남한강과 북항강의 멋진 경치를 보며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산이다. 국수리를 지나면서 마을 길과 접속되면서 자전거의 고유의 길과 멀어져 통행에 신경 써야 한다. 다시 터널을 지나고 나면 내리막길이 이어져 쏜살같이 달리게 된다. 얼굴에 와 닺는 봄바람이 솜사탕 피부처럼 느껴진다. 아~~ 너무 느낌이 좋다. 그런 사이 길은 강변으로 이어졌다. 옥천 부근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다시 고가밑으로 길이 틀어지고 옥천으로 나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급하게 핸들을 틀면 양평으로 접근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핸들을 다시 좌측으로 틀어 오르자 앗~~ 하는 외마디를 질렀다.
길이 재공사 관계로 파헤쳐 놓아 내가 소유한 자전거로는 달리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갈 수는 있지만 타이아 폭이 좁아 펑크나 휠이 휘는 일이 발생하면 이후에 심각한 난처에 빠질 수도 있어 운행을 멈추고 끌고 가기로 하였다. 걸으니 오히려 편안하였다. 페달짓으로 뭉쳤던 허벅지가 풀렸다. 그렇게 3km 걸었더니 정비된 자전거 길이 나왔다, 오빈역부근이었다. 남한강으로 진입하는 길로 들어서면 들꽃 수목원을 만날 수 있고 자동차 전용 극장으로 한 때 유명세를 탔던 곳도 부근에 있었다.
들꽃 수목원 강변에 있는 광장이다.
강건너 보이는 빌딩 숲이 있는 곳이 양평이다. 원래 고을 이름은 양근, 일제 때 지평과 합쳐지면서 양평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양근이란 이름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바로 옆에 양근성지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강변 쪽으로 감호라고 새겨진 바윗돌이 있는데 그곳 아래가 감호이고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당시 지식인들과 권철신, 일신형제가 모여 앉아 시화나 토론을 갖던 곳이다.
양근성지 순교 복자님들이시다.
권철신, 일신 형제들의 순교로 완성된 양근성지 마재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앵자산 동쪽 기슭 주어사는 권일신이 강학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 참여한 인물들은 전부 남인계열이었다. 박해시기에 유배로 고난을 겪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아니면 옥사나 유배지로 향하다 심문을 당하며 온갖 악형의 영향으로 객사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권철신, 일신 형제였다. 특히 이들은 명망이 높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학문을 좋아하던 정조가 아꼈던 학자였다. 존경받은 학자를 천주교로 안내한 사람은 바로 이벽이었다. 이러한 대학자가 천주신앙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선교의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야행을 하게 될 것이 우려되어 주마간산의 힘을 빌려 달리다 갈산에 이르렀다. 동산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나서면 일직선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
아름다운 벚꽃 길이 이어진다. 우측 강변아래 산책길 주변은 이미 버드나무 가지에 새잎들이 무수하게 달려 있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강둑 위로 끝없이 펼쳐진 벚꽃나무 향연은 흑천 위에 놓인 다리에서 끝이 난다. 가파른 길을 치고 올라 다리 중심에 섰다. 흑천의 세력도 만만하지 않은 강 줄기다. 허기가 졌다. 흑천을 좌측에 두고 달려 양평해장국 거리에 도착하였다. 해장국 맛과 내용물로 유명한 음식점 옆에 자전거를 세우고 해장국을 시켜 시장기를 달래 주려 안으로 들어섰다. 만석이었다. 늘 만석이다. 늦은 점심시간인데... 알고 보니 앞쪽 자리를 전부 치우고 손님을 받지 않고 주방 앞에 30여 개의 식탁만 개방하여 생긴 현상이었다. 저녁시간까지 휴식을 취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잠시 지체하다 어렵사리 앉아 상을 받았다. 양지를 수북하게 담아주고 그 속에 선지 커다란 한토막이 담겨 있어 콩나물이 아삭거리는 식감과 국물이 참 시원한 맛이 식탐을 부르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산수유마을을 돌아와 보고 빠져나와야 하기에 서둘렀다. 이미 산 밑으로는 노을빛이 삼삼하게 물들고 있었다. 돌아 나오니 이젠 힘이 부쳤다. 원덕역으로 다가 가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자리에 앉았다. 구리역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왕숙천으로 빠져 강변을 달리다 암사대교로 달라붙어 강을 건너 자전거 전용도로를 이용하여 집에 도착하니 기분 좋은 피로가 일시에 몰려들었다. 여행이란 것은 안개를 많이 닮은 것 같다. 미혹에 빠져 다가갔다가 겆히면 온갖 사물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통찰하며 사변의 길을 걷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짓이 바로 여행이 아니던가! 나 이외 세상을 떠돌며 새문명을 침탈하듯 방랑하는 것이 여행이라 한문으로 여행이라 적을 때 군사 旅(여) 자를 사용하여 旅行이라 적는 모양이다. 스르르 잠이 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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