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0강
VIII. 세상에서의 삶
이제 우리는 신자가 (불신적)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사도가 무엇이라고 권고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곳에서도 우리는 교회(중생된 교인들)의 삶을 이중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지속적인 교제)을 통하여 얻는 능력으로 새로운 창조에 속하여(고후 5:17), 현세로부터 속량을 받아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아직 육신을 지니고 살아야 하고, 이 때문에 현재의 실존은 현 세상에 속해 있다(갈 2:20).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이중적 관계, 즉 현세로부터 속량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존재임과 동시에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하는 현세의 실존이라는 이중적 관계가 이들의 윤리적 행실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우리는 당시 젊은 교회들이 수많은 문제에 당면했으며, 사도가 이들의 질문과 문제에 세심한 목회적 권면을 준 것을 보았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사는 교회의 삶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성화는 하나님께 자기 삶을 바친다는 적극적 의미와, 죄로 인한 모든 불결함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있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첫 번째에 관해서는 “강한 자”와 “약한 자”에 관한 장(로마서 14장, 고린도전서 8-10장)이 가장 중요하고, 약간 조금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골로새 교회의 율법주의적이고 금욕적 경향에 대항하고(골 2:16 이하), 목회서신에서는 거짓교리에 대항하여 가르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1) 강한자
“강한 자들”은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의 것을 향유하는 데에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자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전 6:12)는 관점에 서 있고, 여기에는 “내 권리”(고전 8:9; 9:4-6: 엑수시아), 혹은”내 자유”(고전 10:29)가 부각된다. 바울은 물론 이런 식의 자유의 개념을 비판하지만(아래를 참조), 그럼에도 그 원칙이 정당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롬 14:14).
이곳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자유가 주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믿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자유는 고린도 교인이 매우 강조하는 지식과 결부되어 있다(참조: 고전 8:1 이하). 바울은 이 지식이 자유의 토대라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지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는 단 한분의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의 주심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떠한 신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땅과 그 위에 충만한 모든 것은 주의 것이므로, 우리는 시장에서 구입한 것을 모두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10:23-26).
2) 금욕적 – 율법적 사고
바울은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디도서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기반으로 좀 더 강한 어조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거리낌을 조장하고 미신을 만들어내는 이단적 교훈에 대해 경고한다. 골로새 교회에서는 이 이단이 초자연적인 “능력들”에 대한 두려움과 천사 숭배 신앙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것은 율법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요구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모든 능력들과 천사들의 머리시므로 그분이 다스리시지 않는 곳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미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러한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과 디도서 1장에서도 이와 같은 논거를 들어서 교회에 들어온, 이와 비슷한 율법적-금욕적인 사조를 비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올바로 깨닫는 자는(참조: 고전 8:1 이하), 거짓 교사들이 먹기를 금지한 것이 모두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임을 알고 있다. 이것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은 것은 버릴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 전체의 속량(구속)을 약속하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신자가 이것을 영접할 때 드리는 기도를 통해 거룩해지기 때문이다(딤전 4:1 이하). 바울은 이러한 복음의 핵심적인 사상을 근거로 금욕적이고 율법적이며 영성주의적인 모티프를 이렇게 극명하게 배척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고전 3:22-23에서 웅장한 어조로 선포되었다: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엄청나게 큰 자유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말씀을 잘 이해하여 주어진 자유를 잘 누려야 한다.
2. 약한 자를 고려한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자기에게 속한 큰 자유를 스스로 제한해야 할 때가 있는데, 이것은 약한 자를 고려해야 할 때와, 자유를 남용하여 죄에 빠질 수 있는 경우이다.
자유란 말은 바울서신에서 다른 관점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앞에서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독교적 사랑 아래 종속되어야 한다. 별도로 설명하지 않고 몇 가지 중요한 구절만 인용한다:
o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o 고전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o 롬 14:1-8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3. 성화의 관점에서
이것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관점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의 성결이라는 생각과, 이 자유로 말미암아 세상의 불결함에 물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한 자들”뿐만 아니라 “강한 자들”도 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방종으로 변질할 때에 “강한 자들”도 지배하는 새로운 권세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유를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지나친 것은 새로운 종살이(속박)를 불러올 수 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혼외 성행위를 경고한다. 음식과 배(위장)가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고 단지 건강을 위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다는 말이 맞지만, 먹고 마시는 자유가 육신 전반에 적용되어 육신을 음행에 내어줄 자유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유 이해는 새로운 종살이를 의미하고, 몸이 성령님의 전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규정에 어긋난다(고전 6:12-20). 자유는 단지 주님 아래 순복하는 것에 제한을 받아야 하므로, 자유를 사용할 때는 이러한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은 좁고 편의주의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면 안 되고 이것은 “무엇을 하든 주님을 섬기는데 유익이 되는 한에서”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 동일한 원칙은, 만약 다른 신들을 섬기는 곳에 신자가 있어야 할 경우에는 좀 더 강화된 형태로 적용된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유로 신자가 이교도의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당시에는 이것도 우상숭배의 한 프로그램에 속했다: 역자 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전혀 별개의 문제로 본다. 우상숭배는 마귀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예를 거울삼아 누구도 자기 신앙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참조: 고전 10:1-11). 왜냐하면, 아무리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우상숭배로 유혹하는 마귀의 세력이 허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에 참가하는 사람은 마귀들과 교통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의 상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마귀의 상을 선택할 것인지라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이곳에서 “지식”이나 자기 믿음의 강함을 근거로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강한 자인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22).
이 예들은, 교회가 세상의 좋은 것들에 참여하는 것에 관해서 취해야 할 근본적인 관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교회의 소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신자들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신자는 세상에 대해 그러하다(갈 6:14). 즉, 바울은 세상의 좋은 것들과 기쁨들에 눈을 감았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이고 피조된 것들을 죄악된 것으로 보거나, 어떤 것들을 자연적인 용도를 따라 사용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죄를 피하고자 하는 온갖 금욕적인 요소는 그에게 이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함 속에서 사는 세상이나 율법적인 자기 의에 빠져 사는 세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 받았고,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을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는 그는 더는 세상에 대해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관점에서
끝으로 세상에서의 삶의 수용과 교류에 관련된 바울의 권면에서 “성결”(거룩함)의 모티프 외에도 “시간”이라는 모티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바울이 특별한 경우의 결혼에 대해 권고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바울은 고전 7:25-31에서 다음과 같이 급진적으로 권고한다.
o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o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o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o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o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o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o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이러한 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시간이 한정된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 세상의 은사에 대해, 그리고 삶에서 겪는 불행에 대해서 주는 바울의 권면이 매우 조심성스럽고 신중하기 때문에 긴장이 가득찼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울의 권면을 더 큰 맥락 속에서 보면, 세상에서의 삶이 주는 은사와 가능성을 피하고 삼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런 것들을 사용하고 세상의 삶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는 자들, 기쁜 자들, 매매하는 자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 또한 체념한다거나 비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바울은 모든 것을 이 세상의 무상성(세상이 지나간다는 것)과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시간이 짧다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 시간이 매우 짧다는 사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얼마나 짧은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때때로 상이하게 언급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큰 긴장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진전과 시간의 짧음 사이에 있는 „아직“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구원에 대한 기대[1]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대는, 한편으로는 신자가 현재의 삶을 수용하는데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참조: 고전 15:19),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고“ 시간은 짧다는 지속적인 유보 아래에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바울의 권고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는지는, 세상에서의 삶의 각각의 면모를 살펴보면 드러날 것이다.
[1] 우리 구원은 이미 완결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 완결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소유했음에도 최종적 성취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늘 긴장 가운데에 있다.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0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에 수록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