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중상주의(mercantilism)의 기원
독립과학으로서 체계를 갖춘 경제학, 즉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그것에 조응하는 생산 및 유통의 여러 관계를 객관적, 법칙적 그리고 총체적으로 해명하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Adam Smith에 의해 그 골격을 형성하고 F. Quesnay는 특수한 환경 아래에서 그의 직접적인 선구자이기도 하다. 스미스는 영국에 있어서 산업혁명의 개시를 배경으로 갖고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생산 양식으로서 확립되어지려 하였던 시기를 대표하는 것에 의해 그의 학문체계를 수립할 수가 있었다.
스미스 이전의 근대사회는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으로 되기까지의 시기, 봉건제 말기에 성립한 독립 생산자층이 그들의 생산수단을 상실하여 프롤레탈리아로 되고 이리하여 자본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시기, 즉 자본의 본원적 축적(=원시적 축적)의 시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과학으로서 경제학에 있어서도 분석 대상이 그때까지는 아직 성숙해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는 결국 여러 개념의 萌芽的 形成期에 머무르고 있었다. 중상주의란 이 원시적 축적기의 경제 이론이며 소박하고 현상적이기는 하지만 경제과학 발생사의 단계로서 학설사사상에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근세에 있어서 경제학의 역사는 중상주의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 통상이다. 중상주의를 낳은 시대는 경제사적으로는 근대 자본제사회의 성립기이며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절대군주국가의 시대이다. 욕구충족을 기초로 하였던 중세 봉건경제사회에 있어서의 생산은 자급자족하기 위하여 또는 봉건영주를 위해 행하여졌고 생산자는 상호의 생산물의 과잉분을 교환하였기 때문에 상품생산을 목적으로 한 조업은 부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성지회복이 목적이던 '십자군'은 동서문명의 접촉을 가져왔으며 서유럽의 대외발전상 새로운 기운을 형성하였다. 항해술 발달, 신항로 발견, 미대륙 발견 및 금광 발견과 채굴은 화폐경제의 발전을 가져왔다.
동로마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이탈리아로 수많은 학자들이 망명해 왔다. 이들 학자들에 의해 서양 문화는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소위 르네상스는 중세로부터의 탈피운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과 교회 권위에 대한 인권 제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4세기에 시작하여 15, 16세기에 이르러서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알프스를 넘어 북방으로 파급되었으며 문예부흥의 혁신적 풍조는 종교적인 면에서 Martin Luther에 의해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 신교는 국민적 독립과 개인주의적 입장을 지지하고 인간의 이윤추구를 위한 상업과 무역이 비로소 존중되기 시작하였으며 부의 획득이나 사용능력을 착하게 생활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화폐 중요성이 인정되었고 자본은 축적되고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세까지 지배해왔던 지방적인 지배력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 통일적인 지배를 구하는 기운이 일어났다. 무역이나 상업의 여러 측면에 있어서 봉건제후 중 유력자인 국왕이 조정하여야 할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국경에 있어서의 관세징수, 지방의 여러 권력자간의 대립 조정, 특허권 부여문제, 화폐제도 통 일 등의 문제가 일어났다. 이러한 새로운 추세에 따라 근대국가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화폐경제 발달과 더불어 자본주의적인 조직형태가 나타나고 경제의 경영기초도 점진적으로 변동하여 영리주의가 세력을 확장하였다. 경제적인 합리주의는 경제 운영에 있어서 계획성과 탄산성으로 나타났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르네상스와 인도주의에 의해 도입된 개인주의적인 사색 그리고 경제적 사고 발달과 결합하여 판연한 경제상의 개체주의로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중상주의적 사고와 정책의 기원이 싹텄다고 말할 수 있다.
2) 중상주의의 배경
중상주의(重商主義)란 유럽 중세적 봉건사회의 말기에 발생하여 특히, 15세기 중엽부터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특히, 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경제정책 및 그에 관련하는 여러 사상의 총칭이다. 이 시기에는 기독교도들이 십자군원정으로 동서문명이 상호 교류하게 되었으며 항해술의 발달, 신대륙의 발견, 인도항로의 발견 및 금광의 발견과 채굴 등은 내외경제를 발전시켰다. 이에 따라 화폐의 중요성이 인식되었으며 자본의 축적으로 새로운 산업이 발생·발전하게 됨으로써 중세까지 지배하여 왔던 지방적인 지배력만으로는 불충분하여 통일적인 지배력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유럽 및 신대륙, 유럽 대 동양간의 무역을 발달시키는 크나큰 계기가 마련되어 연안무역의 영역으로부터 원양무역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유럽의 일부 국가는 대외무역의 힘을 경주하였다. 따라서 대외무역에 의하여 금·은 등 귀금속과 재화가 막대하게 유입됨에 따라 봉건제도와 중세적 도시국가는 드디어 붕괴되었고, 한편, 중앙집권적 국가의 지도하에서 화폐를 중심으로 한 개방적인 교환경제가 확립되었다. 또 이로 말미암아 일 국이 타국에 대한 무역정책과 태도를 수립할 필요가 생겼으며, 바로 여기에서 중상주의라고 하는 최초의 상업정책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아래 그 당시의 경제사상은 어디까지나 금·은 등의 귀금속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상권을 확대하여 그 방법으로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장려하는 일련의 보호 간접적 무역정책에 편중하고 있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으며, 그 당시의 학자들이 이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 후 Adam Smith가 이 시대의 국가적 정책 혹은 사상의 공통부분을 발견하고 그의 대표저서 "國富論(1776)"에서 중상주의를 system of commerce 라고 하였다
3) 중상주의의 의의
13세기경부터 18세기에 이르는 그 사이에 행해진 경제상의 정책이나 논조를 총괄하여 사람들은 이것을 '중상주의'라 부른다. 결코 중상주의는 하나의 계통적인 논술도 아니며 또한 개인 혹은 어떤 학파의 손에 의해 창작된 것도 아니다. 다만 수세기에 걸쳐서 행해진 무수한 경제적 시책, 이것을 설명하는 또한 옹호하는 수많은 논작의 집적으로 인정하는 경향에 지나지 않는다.
중상주의의 萌芽는 이미 13세기에 있어서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소위 중상주의시대는 중세의 붕괴로부터 '자유방임주의'가 성하였던 때까지이다. 소위 초기자본주의 시대, 근대국가생성 시기에 행하여진 경제상의 정책 내지 상상을 가리켜 중상주의라고 부른다. 중상주의가 가장 성하였던 시기는 영국에 있어서 Oliver Cromwell, 프랑스에 있어서 Jean Baptiste Colbert, 그리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Friedrich der Groß)가 활약하였던 시대인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후반, 즉 Adam Smith의 『國富論』이 출간되었던 때이다. 외국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상공업보호체제를 Victor Riquti, Marguis de Mirabeau나 케네가 상업적 제도(syste memercantile)라고 불렀고 이것을 계승한 스미스는 system of commerce가 중상주의의 語源이라고 볼 수가 있다.
중상주의의 개념을 어떠한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경제학이 독립과학으로 성립한 이후 많은 해석이 행해졌으나 대체로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종류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좁은 의미의 해석은 이미 아담 스미스에 의해 주어졌다. 그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國富論』4편에서 "경제학은 국민과 군주를 다 富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국민을 富하게 하는 경제학상 두 개의 다른 主義가 생겼다. 그 중의 하나는 重商主義(System of Commerce)라고 불렀고 다른 하나는 重農主義(System of Agriculture)라고 논하였다. 그리고 그 특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한나라의 富의 증대는 외국무역의 번영에 의해 또한 그 정도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과 외국무역을 매개로 하는 국민의 富를 증대하기 위하여서 국가는 각종의 강력한 보호와 통제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담 스미스의 해석은 그 후의 중상주의의 해석에 대해 하나의 초석을 제공하였으며, John Stuart Mill이고 John Ramsay McCulloch등은 대개 이러한 해석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해석에 대해 중상주의의 본질은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착안되어 양자의 결합에 있다고 하는 넓은 의미의 해석이 나타났다. Gustav von Schmoller와 Karl Bucher는 이러한 의견을 따르고 있다.
슈몰러는 그의 논문 "중상주의와 그 역사적 의의"에서 '중상주의는 그 진수에 있어서는 국가건설이다. 국가건설이라는 것은 동시에 국민경제의 건설이다. 그 본질은 결코 화폐 증가라든가 무역 차액 학설 속에서나 관세장벽 보호관세 및 항해조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 및 그 조직 국가 및 그 제도를 전면적으로 변혁하는 것, 지방적·영역적 경제정책에 대신하는 국가적, 국민적 정책을 가지고 행하는 곳에 있다'라고 진술함으로써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정치적, 경제적 측면의 평행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넓은 의미의 해석은 중상주의를 16세기 이후의 근세적 국가성립기에 있어서의 국가주의적 경제상상 및 경제 정책으로 총칭하고 있다. 중상주의는 일반적으로 근세의 서유럽의 본원적 자본 축적기에 있어서의 경제정책체제 및 그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사상 내지 경제이론 체계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 이후 2세기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한 연구가 행해졌음에도 불구하오 아직 중상주의란 무엇인가에 관해 공통의 이해에 도달하고 있지는 못하다. 본원적 축적의 전개과정과 그 촉진주체의 이해의 相異에 의해 기본적으로는 두 개의 견해가 존립한다. 즉 하나는 중상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상업자본에서 구하고 있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초기산업자본에서 구하는 견해이다. 전자에 의하면 중상주의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즉 중상주의 정책은 먼저 첫째 절대주의의 경제정책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중상주의정책은 반드시 절대왕정의 붕괴와 그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왕정 이후에 비로소 체계화되었다. 절대주의와 운명을 같이하였던 것은 절대주의적 중상주의이며 왕정붕괴 후에 체계화 된 중상주의정책은 이것에 대해 의회 콜베르주의로 구별된다.
중상주의 정책은 절대주의를 주체로 하는 것으로부터 의회를 주체로 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정책간에서 단순히 단절만을 보고 연속의 측면을 간파하는 것은 일면적이며 주체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목적 내지 내용에는 발전적으로 연속하는 것이었다. 절대주의에 의해 수행된 중상주의 정책의 본질은 근세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체로서의 상업자본을 유대로 하는 식민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경제정책이었다. 자본 형태에서 볼 때 중상주의 정책의 주체는 상업자본이었다. 중상주의 정책은 상업자본이 민족 국가적 중앙권력과 제휴한 곳에서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상업자본은 Manufacture를 기초로 하고 근세 적인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특권적 또는 독점적인 외국무역에 종사하는 상업자본이었다.
후자는 시민혁명을 중시하고 시민혁명은 봉건적 권력으로부터 부르주아적 권력에로 지배의 교체를 실현하였기 때문에 각국에 있어서의 뉘앙스 차이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과 이후를 통하는 정책체계의 일관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자의 그것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본원적 축적의 과정은 이미 절대주의 시대에 시작하여 시민혁명을 분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절대 왕정 하에서 본원적 축적=근대자본주의의 생성을 억압하고자 하는 정책체계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이것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정책체계가 각각 본질과 역사적 단계를 달리하는 국가권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초기자본주의국가의 정책목표는 국가권력에 의해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강행하고 사회구조 속의 前자본주의부분을 소멸시켜 자본주의체계의 전면적 지배를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본래의 중상주의란 정책체계로서는 시민혁명에 의해 성립된 자본주의국가의 본원적 축적을 위한 조직적인 정책에 한정된 일이며 그 주체 내지 추진력은 극단적으로는 초기산업자본, 특히 Manufacture자본이었다.
중상주의라는 단어는 어떤 때는 경제정책의 특수한 체계로서, 그리고 다른 때는 경제학적 견해의 특수한 체계, 즉 특수한 敎說로서 이해되고 있다. 실천으로서의 중상주의는 말하자면 이론으로서의 중상주의에 선행하였다. Richard 2세 시대(1377-1405)에 있어서 국왕은 런던시에 대해 영국의 복지 파멸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채용되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자문하였다. 이 자문에 대한 해답 중에는 그 후 이에 대립한 다른 견해에 의해 대체되어질 때까지 영국의 전체 경제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어떤 견해의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 즉 해답에 우리들은 외국인으로부터 구매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외국인에게 판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되고 있다. 영국에 있어서의 초기 입법의 모든 특성은 이 원칙에 따르고 있다. 이것은 二重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가능한 한 다량의 주화를 외국으로부터 끌어들이는 것과 다음에 국내에 이것을 보유하고 다시 그것이 손실되는 것을 막 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Richard 2세나 당시 런던 상인들이 어떤 이론 혹은 어떤 투철한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런던 상인들은 국왕에 대한 그 답서에서 모든 상업계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던 바의 필요, 즉 화폐의 필요를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입법도 역시 상인들의 답서 속에 표현되어진 것과 같이 생각되는 원리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바로 화폐 필요에서 출발하였다고 생각된다. 중상주의적 실천이 이론적으로 천명되고 중상주의적 이론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뒤의 일이다.
일부 학자들은 중상주의 속에 경제 정책적 성질을 띤 여러 방책의 체계만을 보았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몇몇 체계의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은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 직접적으로 실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의 책은 경제정책의 체계였고 이론경제학의 체계는 아니었다. 이론경제학을 구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행해지기는 했으나, 이러한 시도를 제외시키고 생각하면 국민경제학의 여러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경우에는 물론 이러한 체계는 경제 정책적인 성질을 띠고 있었다'라고 서술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부 論者들은 중상주의를 경제정책에만 관계시켜 경제학으로부터 그것을 제외시키고 소위 이른바 실제의 양면 사이에 차이를 보지 않았다. 실제에 있어서 중상주의는 국가권력에 의해 실현되어진 실제적 여러 방책의 체계인 동시에 또 이론이기도 하다.
4) 중상주의(重商主義)의 내용
(1) 중금주의정책(重金主義政策)
중금주의는 중상주의 초기에 실시하였던 정책으로, 한 나라의 부는 금·은 등 화폐량에 정비례하므로 금·은의 국내유입을 촉진시키고 국외유출을 억제하려는 정책이다. 결국, 중금주의는 부의 기준을 금·은 등 귀금속의 국내축적량에 두었다. 중상주의 초기에 있어서 금·은의 채굴과 그 수입이 장려되고 금·은의 수출이 금지된 것은 이 중상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이는 주로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에서 실시되었다. 중상주의시대에 있어서 거의 모든 나라가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중앙집권적 국가제도를 확립하는데 막대한 지출이 필요했다는 점과 동시에 교통의 발달과 신대륙 및 신항로의 발견에 의하여 화폐의 유통이 급진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2) 무역차액정책(貿易借額政策)
중상주의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금·은의 수출을 금지하고 그 수입을 장려함으로써 귀금속의 국내 축적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상품의 수입에 의하여 금·은이 수출된다는 점이 인식되었다. 따라서, 당시 몇몇 나라에서는 직접적으로 금·은을 획득하는 것보다 무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를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무역차액정책이란 금·은을 직접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함으로써 무역차액으로서 금·은을 유입하려는 것이다. 무역차액론은 영국의 토머스 먼(Thomas mun)에 의하여 확립되었는데 초기에는 개개의 거래에서 무역차액을 얻는 개별 무역차액론에서 뒤에는 전체 거래에서 무역차액을 획득하려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3) 산업보호정책(産業保護政策)
중상주의 후기에는 국내시장확보와 외국시장의 확충을 통한 산업자본축적에 주력하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성숙된 그들의 공업을 후진국의 저임금 노동경쟁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무역차액을 획득하고 또 국내의 고용수준을 확보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산업보호정책이다. 산업보호주의 정책하의 중상주의 체제에서는 그 정책이 다만, 대외무역에만 집중되지 않고 국내산업 및 노동문제에도 집중되었다. 당시 국내산업 및 노동문제는 대외무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정책의 목표가 산업 및 노동에 집중된 것은 국내산업을 보호함으로써 고용을 증대시키고 동시에 수출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리한 무역차액의 기초가 된다는 점이다. 후기 중상주의 시대에 있어서 산업보호정책의 중요한 수단은 관세였으며, 관세를 통하여 외국상품의 수입과 소비를 억제하는 동시에 국내산업을 보호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