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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나라를 위한 눈물의 기도!
성경본문 : 느헤미아서 1장1절-11절
설 교 자 : 박 한 서 목사 <2016년 6월 26일 주일 오전>
사랑하는 행복가족 여러분 !
6월은 호국의 달로 '나라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6월 달에는 '현충일'이 있습니다. 이 날은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6월 25일은 6,25전쟁 66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6,25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찌 이 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덴마크>의 영웅인 '<그룬트비>' 목사가
전쟁의 폐허 속에 자원도 없고 돌 자갈밭 투성 이었던
그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땅을 사랑하자'는
표어를 가지고 국민의 정신을 개혁한 결과 <덴마크>는
오늘날, 지상 낙원이라고 할 만큼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젊은이들은 호화로운 파티에 들어갈 때
먼저 선조들이 굶주리며 고생했던 것을 상기하기 위하여
맛없는 까만 보리 빵과 냉수를 먹고 나서 파티 장에 들어가
좋은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논다고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라고 봅니다.
과거에 고생하던 때를 쉽게 잊어버리는 백성은
과거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찌 이 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을 잊고 삽니다.
행정 안전부가 조사를 했습니다.
6.25의 발발 연도를 묻는 질문에
청소년은 58%, 성인은 36.9%가 몰랐습니다.
북한이 6.25를 일으켰다는 것도
청소년은 36%, 성인은 20%가 몰랐습니다.
다른 조사에서는 서울의 초등학생 35%가
6.25를 대한민국이 일으켰다고 답변 했습니다.
북한은 6.25가 북침이라고 강변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6.25가 내전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미군정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6.25는 명명백백한 북한의 남침입니다.
66년 전,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는 생명의 땅이 아닌,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역시 진멸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큰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참고 성경<출애굽기>32장31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참고 성경 <출애굽기>32장10절).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탄식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기도했습니다.
<출애굽기>32장31-32절 말씀에
31절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절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의 생명을 건 기도로 인해
<이스라엘>은 진멸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 한 사람의 기도로 <이스라엘>이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교회가 역사의 중심입니다. 기독교인이 역사의 책임자입니다.
세계적인 중보기도 사역자인 <신디 제이콥스>'는
이 땅의 뉴스들이 크리스천의 성적표임을 기억하라.
그것은 자신의 중보기도가 성공했는지 보여주는 잣대가 된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통해 이 땅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지옥문이 우리를 밟고 일어설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6.25는 한국 교회와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역사를 기억할 때 우리는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66년 전의 6.25전쟁을 되새겨봄으로, 오늘 한국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① 우리는 6,25를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6,25를 통해서 상처 있는 역사를 지닌 민족은
그 아픔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는 교훈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과거에 배고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성공한 후에도, 아무리 먹을 것이 풍부해진 뒤에도
그 때를 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그 때를 망각하면 그 사람은 방종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면 또 다시 그 아픔의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지어서 먹을 것을 많이 쌓아 놓았어도
밥을 먹고 난 후 밥알을 남기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젊은 며느리들이 설거지를 하다가 밥알을 하수구에
버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리가 났습니다.
과거에 일시 고난을 당한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초년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이를 선하게 해석을 했습니다.
고생은 사람들에게 한때 아픔도 주고, 고됨도 주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고생은 일생을 살아가는데
아주 좋은 경험이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 고 고백했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는 그 정복 기념으로 <로마>시에 개선문을 세웁니다.
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로마>는 기념주화를 발행합니다.
그때 발행된 기념주화에
'<유데아 데비크라'>라는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그 말의 뜻은 '우리가 유대인을 부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글귀 옆에 <로마>병정을 세워 놓고 그 병정의 발 앞에
<유대>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거기에 서 있는 <로마>병정의 손에는 승리의 단술 병이 들려 있고,
<유대>인 여인의 손에는 패배의 쓴잔이 들려져 있습니다.
그때 <유대>는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영원히
그 나라를 지배하고 이 세상 위에 군림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복자는 단술 병을 들고 서 있고, 패배자는 실패의 쓴잔을 들고
정복자 발 앞에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 2천년이 지난 오늘은 그 <로마>는
이 지구상에서 간 곳이 없고, 그때 패배의 쓴잔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던 유대인들은 오늘 세계에 남아
그 어느 민족보다도 자신 만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과거의 승리에 도취해서 살아가면
그 영광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실패한 사람은 어쩌면 그 실패가 내일에 살아남게 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해서 더 악착같이 살아남게 하는
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승리했다는 사람, 성공했다는 사람,
입지적인 인물들은 모두 그 옛날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민족도 대단한 민족입니다.
6,25이후에 우리민족이 이루어낸 발전은
유대인들을 능가하는 발전을 이루어 냈습니다.
참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 기적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에 당했던 그 아픔의 역사가 기반이 되어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민족에게 자생력을 길러 주었고, 인내력을 길러 주었고,
개척정신을 길러 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아픔의 역사를 지닌 민족은
과거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 6,25를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1) 66년 전, 대한민국은 분열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수만큼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에 미 군정청 설치, 신탁통치, 친일파 처리,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대우, 남한 내 단독정부수립 등과 같은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이념과 사상에 따라서 갈라졌습니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서로 옳다고 싸웠습니다.
친미와 반미, 친탁과 반탁이 치열하게 대립했습니다.
그 분열의 틈을 타서 북한은 무장공비를 침투시켰습니다.
빨치산에 의한 전복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곳곳에서 파업과 폭동,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당시의 혼란을 잠재우고 민족을 바른 길로
이끌 지도력은 없었습니다.
국가가 혼란스러우면 교회라도 바로 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분열의 역사를 써나갔습니다.
해방과 함께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져,
남과 북이 쪼개지기 전에 교회가 먼저 쪼개졌습니다.
장로교 내에서 고려 파와 기장이 이탈하고,
이후 통합과 합동으로 한 차례 더 분열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를 외쳤지만, 현실에서는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6.25는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국론 분열보다 더 무서운 것이 교회 분열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될 때, 한반도가 하나 됩니다.
(2) 6,25는 북한의 남침이 분명합니다.
다른 날도 아닌 주일 새벽에 북한은 남침을 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에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선전 포고도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협상을 제의하고 있었습니다.
남북통일 최고 입법회의를 서울에서 열자고 제의했습니다.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제의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그 말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비상 경계령이 해제되어 국군의 1/3이 외출 중이었으며,
대공포, 자주포, 전투기 같은 무기도 없었습니다.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무차별로 공격했습니다.
결국, 전쟁이 발발한지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7월 20일에는 대전까지 후퇴했습니다.
만약에 북침이라면, 이렇게 쉽게 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북한 공산당은 지금도 평화를 말하고 민족을 내세웁니다.
공산주의에 속지 맙시다. 북한 공산당은 믿을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북한 주민은 사랑하되, 북한 공산당은 경계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우리를 도와준 <미국>과 유엔 참전국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 그 날, 대한민국은 북한 병력의 2분의 1도 안 되었습니다.
국방 경비대가 막 갖춰지기 시작할 때였고, 주한미군은 이미 1년 전에
철수한 상태였습니다. <소련> 때문에 유엔 연합군의 참전도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셨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만에 안보리에서 북한 철수 촉구 결의안이,
3일 만에 유엔군 참전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7월 중순까지 총 52개국이 결의안에 지지했습니다.
즉각적으로 2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연합군이 파병되었습니다.
외교력이 강하지도 않던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엔 연합군 중 가장 많은 군인을 보낸 나라가 <미국>입니다.
참전을 먼저 결의하고 주도한 미군은 총 6만 2천 812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후에도 1960년까지 약 21억
달러를 원조했습니다.
우리의 아픔만 기억하지 말고,
이 모든 나라의 도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체 유엔군 인명 피해만 16만 명입니다.
그들이 피 흘려 지키려 했던
자유와 평화를 우리도 지켜야 합니다.
이 땅 어디에서도 공산주의를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한반도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본주의,
가장 좋은 정치 이념인 민주주의를 뿌리내려야 합니다.
(4)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지켜 주셨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만에 안보리에서
북한 철수 촉구결의안이 채택되었고,
3일 만에 유엔군 참전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때 <소련>이 반대하면 참전 결의안이 부결됩니다.
그런데 소련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더 놀라운 기적은 낙동강 전선을 지킨 것입니다.
당시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전쟁은 끝난 것과 같았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총알받이로 희생을 당하며
55일 동안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위태하던 낙동강 전선을 지킨 것은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연합군은 수세에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낙동강의 날씨는
B29기가 뜰 수 없는 악천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기도회를 요청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구국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셨고,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에
B29기의 폭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여
수도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지키셨습니다.
(5) 6.25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국군 피해만 총 62만 1천479명입니다.
전사 13만 7천899명, 부상 45만742명,
실종 및 포로 3만 2천838명입니다.
유엔군 피해는 총 15만 4천881명입니다.
전사 4만 670명, 부상 10만 4천280명,
실종 및 포로 9천931명입니다.
민간인 피해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사망 및 학살 37만 3천599명, 부상 22만 9천625명,
납치 및 행방불명 38만 7천744명, 피난민 32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천만 명입니다.
북한 민간인 피해자도 대략 150만 명입니다.
육체적 생명만 피해 입은 것이 아닙니다. 한반도가 찢겼습니다.
국토와 문화재가 파괴되었습니다. 윤리와 양심이 사라졌습니다.
각종 시설과 인프라도 파괴되었습니다.
교회도 2,122군데나 파괴되었고,
목회자 535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의 전쟁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아픔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만약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상상할 수 없는 피해가 생깁니다.
우리 모두 깨어 기도해서 나라를 살리는 의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6) 지금도 한반도는 6,25가 진행 중입니다.
저들은 핵을 만들고 있습니다.
6,25는 금년으로 66주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아직도 6,25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6,25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동차를 사면 타보고 싶고 달리고 싶습니다.
또 사람이 총이 있으면 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사람이 칼을 손에 쥐면 써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북한도 핵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온갖 유혹과 협박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한사코
핵을 가지려고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온 세계가 북한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는데
그들에게 핵이 몇 개만 있어 보십시오.
아마 세계는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북이 핵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기도로 막아야 합니다.
(7) 지금도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반미 세력이 있다는 것이 매우 위험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여러모로 6.25전쟁 직전과 비슷합니다.
6.25가 발발하기 전, 한반도는 혼란했습니다.
정부 수립 전부터 전국은 반탁운동으로,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군 철수 주장으로 혼란했습니다. 이때, 북한 공산당은
미, 소의 철수를 주장했습니다. 속임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철수를 반대했지만,
국민은 미군 철수를 주장했습니다. 친북 세력들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국민을 선동한 것입니다.
결국 1949년 6월에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습니다.
미군 철수 1년 후, 북한은 남침을 강행했습니다.
한국은 제대로 전투 한 번 못해보고 낙동강까지 밀려났습니다.
66년 전처럼, 지금도 주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미동맹을 가볍게 생각하고, 반미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이는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닙니다.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이 우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휴전선에는 800문의 포가 서울을 향해 있습니다.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것만으로도 전쟁 억지력에 큰 도움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러시아>의 충돌을 막을 수 있습니다.
주한 미군이 없다면, 힘의 균형이 깨질 수 있습니다.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을 너무 좁게 보지 맙시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미국>은 우리에게 필요한 나라입니다.
서로 잘 협력해야 합니다. 물론 비판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미동맹이 깨져서는 안 됩니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협상할 것은 협상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바라는 평화통일을 앞당길 수가 있습니다.
(8) 우리는 공산주의의 허구성과 잔인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방주사를 맞은 지 오래되면
약효가 없어져 예방 효과가 없는 것과 같이,
공산주의를 체험한 전후세대들이 사라져 가고 있고
공산주의 사상을 잘 모르는 세대에서는 북한 <김정은> 정부의
하수인들의 끊임없는 의식화 운동과 자생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친북 세력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통합 진보당의 사태를 보와 왔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는 악(惡)의 영입니다.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상은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칼 막스>는 '신(神)은 필요 때문에 고안된 정신적 허구'라고 외쳤습니다.
또 그는 공산당 선언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다 같이 단결하고
자본가의 재산을 빼앗아 공동소유로 만들자'고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권을 부정하고,
무자비한 살생과 계급투쟁의 혁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곧 바로 반동으로 처단됩니다.
그래서 투표를 하면 100% 찬성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주장을 비판하면 모두 민족 반역자가 됩니다.
북한 체제가 그래서 오늘까지도 오로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동지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남쪽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공산주의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예외 없이 망했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되면서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공산주의는
선을 가장한 악한 사상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모두 비참하게 망한 것을 보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찌하여 다른 나라에서 폐기 처분한
공산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이
틀렸음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 공산주의 경제 체제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경제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것을 갖기 원하는 존재인데
공산주의 경제 이론은 '노동자, 농민, 무산대중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지식 계급이나 유산 계급의
재산을 빼앗아 골고루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일 뿐입니다.
'내 것'이 되지 않는데 누가 열심히 노력하고 창의력을 발휘합니까?
공산주의 경제 이론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선을 가장한 악한 사상에 속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 공산주의는 영혼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정신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 죽이는 것을 짐승 죽이듯
거침없이 살인 만행을 일삼습니다.
<소련>의 <스탈린>이 4,500만 명을 죽였고,
<모택동>은 6,500만 명을 죽였습니다.
㈃ 공산주의는 폭력주의 입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가 북한에 가서
테러하는 법을 배워 간다고 합니다.
㈄ 공산주의는 무신론이며 교회 말살 주의자 들입니다.
공산주의는 물질의 존재만 인정하는 유물론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신론이며 교회를 말살하는 집단입니다.
북한에 그 많던 교회가 다 파괴되었고 많은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투옥하고 <아오지> 탄광에 보내어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을 줍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에게
공산화 적화 통일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 합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가 어떻다는 것을 잘 깨닫고
또 후손들에게 잘 가르쳐야 제 2의 6.25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9) 이제 우리(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기도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도 기도할 수 있으면 희망입니다.
하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6.25 당시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려났습니다.
더 이상 피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낙동강 전선을 지킨 것은 기도였습니다.
당시 수세에 몰려있던 연합군이 할 수 있었던 것은
B29기로 공중 폭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천후로 B29기가 뜰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부산에서 200명의 목사님들과
일주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사 쾌청한 날씨를 주셨습니다.
B29기의 폭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지켜졌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연합군은 새로운 전략을 짰습니다.
9월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전개되었고,
9월28일에는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기도의 힘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참 멋진 신앙인 이었습니다.
첫 국회를 개원하는 날 <이승만>대통령은
모든 국회의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기도로 모든 것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 후에 군대에 군목 제도를 창설하였고
학교에는 교목제도를 창설하였습니다.
그 때 놓은 주춧돌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나라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천년 동안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일어났습니다.
종교 개혁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타났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에서 독재자 <무솔리니>가 나왔습니다.
동양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에 <김일성> 괴뢰정권이 세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기도가 없으면 희망도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 때 그 기도가 나라를 살렸듯, 지금 우리의 기도가 대한민국을 살립니다.
다른 것이 애국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애국입니다.
② 우리도 본문의 애국자 <느헤미야>의 눈물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⑴ 오늘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의 눈물이 나옵니다.
그 눈물의 배경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그들을 <바벨론>에 붙여 70년의 노예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잡혀갔던
그가 출세하여 왕궁에서 왕의 술시중을 드는 관원이 되었습니다.
포로로서는 대단한 성공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성공하면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고 다른 것에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국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넘어 너를 생각했고 우리를 넘어
나라와 민족을 생각했으며 더 나아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고민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남의 나라에서 성공했지만
언제나 고국의 그리움으로 삶의 갈증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찾아온 사촌형제 <하나니>로부터
고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나라가 침공 당해서 <예루살렘>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져서
백성들이 탄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옛날에 붙잡혀 오기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생각에 머뭅니다.
1960년대 <미국>에 이민을 간 어느 장로님이
주일날 예배 때 강단에 올라가 이런 대표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전쟁위험이 상존하고 지옥 같은 한국 땅을 떠나
천국 같은 이 땅에 와 살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이런 사람은 한국 땅에 전쟁이 터졌다 하면
우리가 그때 잘 빠져나왔지 하고 전쟁을 구경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 날부터
금식하면서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동포들과 이 고난을 함께 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은 축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닥사스다> 왕이 그런 <느헤미야>를 보고
'네 얼굴이 왜 그러냐?
네 몸에 병이 없는 것을 내가 아는데
네 얼굴이 왜 그리 상했느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내 나라가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고 내 백성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는데 내 어찌 잘 먹고 평안히 쉬리이까?
내가 금식하며 기도 중에 있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닥사스다> 왕이
'저는 비록 포로로 이 땅에 잡혀 왔지만
저는 진정한 백성이고 지도자이고 신앙인이구나' 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내가 무엇을 도와주랴'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휴가를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고국에 돌아가 탄식하는 내 백성을 위로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성이 있는 곳에 감동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방법이 나옵니다. 하늘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는 허가를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보게 됩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고국의 소식을 듣고 그냥 앉아서 기도했겠습니까?
본문 <느헤미아서>1장4절 말씀에
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눈물로 기도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내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 나라가 건강한 것이 참으로 복입니다. 또 다시 이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 고난 받는 그런 불행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 민족이 구원받고 복음화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애국은 반드시 총과 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애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무릎으로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무릎을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내어놓아야 합니다.
애국도 종류가 있습니다.
총칼을 들고 나아가 싸우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애국은 총과 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무릎에 있습니다. 무릎으로 하는 애국을 해야 합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애국을 해야 합니다.
<시편>126편 5절-6절 말씀에 보면
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6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눈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울음과 눈물입니다. 그 후 일생동안 수많은 울음과 눈물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기뻐서 우는 눈물, 슬퍼서 우는 눈물,
때로는 억울해서 우는 눈물, 때로는 외로워서 우는 눈물 등
수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떠나가게 됩니다.
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살다가,
눈물 속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러한 눈물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각기 의미가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우는 울음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생명의 신호입니다.
살아가면서 흘리는 눈물은 인간다움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사악한 사람을 향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며 증오하게 됩니다.
인간다움의 요소는 사랑인데, 눈물이 없다는 것은
인정이 메마른 증거로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난 뒤 그 사람의 죽음을 두고
주위의 사람들이 슬퍼하는 정도에 따라
그가 살아온 삶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눈물이 고상한 눈물인가?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통회하는 눈물이 고상한 눈물입니다.
<다윗>은 <시편>6편6절 말씀에서
6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뉘우치며 흘린 눈물이 침상을 띄웠고 요를 적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정결케 하시고 넘치는 복을 주셔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더 없이 귀한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흐르는 빗물이 더러운 것들을 씻듯, 뉘우치는 마음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죄악을 씻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시편>51편17절 말씀에
17절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 다음 고상한 기도는 뭐니 뭐니 해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의 <느헤미야>처럼 금식하고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19장41절-44절 말씀에
41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절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절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절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⑵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인가?
㈀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불신자인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이삭>이 그랬습니다. 이방인들이 그와 친숙해지려고 존중했습니다.
㈁ <느헤미야>는 관심이 달랐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지금 <예루살렘>의 형편이 어떤가? 였습니다.
관심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내 조국의 형편이 어떤가? 가 <느헤미야>의 관심이었습니다.
고통당하는 내 동포들이 그의 관심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덕목을 갖춘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집니다.
자기 이익에만 집착합니다. 자기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라야 어떻게 되던, 이웃이야 어떻게 되던 관심이 없습니다.
성숙함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대한 배려요 관심입니다.
<느헤미야>는 <수산> 궁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호의호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살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오로지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의 관심은 과연 다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 모두도 이런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와 같이 나 외에 나의 이웃에, 나의 조국에, 나의 교회에,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ㄷ) <느헤미야>는 눈물이 달랐습니다.
<예루살렘>성의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그 자리에 앉아서 수일을 울었습니다.
이 눈물이 어떤 눈물인가? 자기의 고통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닙니다.
이별의 아픔 때문에 흘린 눈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의 무너짐을 바라보고
조국의 폐허를 바라보고 애통하며 흘린 눈물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도들 중 몇 천 명이라도
<느헤미야>와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나라는 지금과는 다릅니다.
성도들이 1억 명이 있으면 뭐합니까?
<느헤미야>와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성도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이 성을 사해 주시겠습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이 죄악 된 세상, 이 악한 세상을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자신의 문제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자식들 때문에, 내 사업 때문에,
내 가족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이 울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고귀한 울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와 민족의 문제로 가슴 앓았던 적이 있습니까?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이 눈물이 고귀한 눈물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6장33절 말씀에서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ㄹ) <느헤미야>는 슬픔과 한숨을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눈물로 끝낸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슬픔과 아픔을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사람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 만날 때 사람을 붙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본문 <느헤미아서>1장4절 말씀에
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계속 <느헤미야서>를 추적해 보면
이 <느헤미야>의 기도는 넉 달 동안 계속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ㅁ)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자신의 죄로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탄 것은
<느헤미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조상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기의 죄라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느헤미아서>1장6절-7절 말씀에
6절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버지의 집이 범죄 하여
7절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누구 탓이 아닙니다. 내 탓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먼저 자신을 살피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앙이 은혜를 받습니다.
(ㅂ) <느헤미야>는 자신이 높은 직책도
어려운 이 때를 위함임을 깨달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니>의 보고를 듣자
<하나님>께서 나를 술 맡은 관원의 자리에 올려주신 것은
이 때를 위함이 구나'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성숙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것이
이 때를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말은 <에스더서>에도 잘 나옵니다.
국가와 민족이 죽음의 위기에 당했을 때,
<모르드개>는 울면서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왕비 <에스더>야, <하만>의 음모로
민족이 죽게 된 이 위기 상황을 왕께 나아가 아뢰라'
그러자 <에스더>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나를 부르지 않은지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이 나라 국법으로는 왕이 부르지 않는데 나가면
왕비라도 사형을 당합니다.'
이 말을 들은 <모르드게>가 <에스더>야,
<하나님>이 너를 왕비로 세워주신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너 이때 쓰려고 <하나님>이 왕비 세워주신 것이지
너 혼자 호의호식하라고 왕비 세워주신 것이 아니야'
이 말을 듣고 <에스더>가 깨닫고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3일을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하고
왕께 나가 민족을 살렸습니다.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물질도 지위도, 명예와 재능도
<하나님>이 쓰실 목적이 있어서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아! 이 때를 위함이 구나'를 깨닫고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온전히 헌신하실 수 있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ㅅ) <느헤미야>는 '내가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느헤미아서>1장11절 말씀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11절 종 들의 기도를 들어 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이 사람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이 날은 내가 가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왕께 매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감동시켜 주셔서
내가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려운 문제가 부딪쳤을 때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헌신하겠습니다. 내가 이 일을 책임지겠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기도합시다. '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