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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색평론 전국 독자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이계삼
1.
“샘이서울일이있어서먼저조퇴한다청소랑야자잘부탁한다” “ㅋㅋㅋ안녕히다녀오세요(^.^)” 밀양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반장과 이런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6월 마지막 주 금요일, 놀토를 끼고 2박3일간 서울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서울 갈 일이 생길 때, 기분은 그닥 나쁘지 않다. 귀향한지 7년이 되었고 그럭저럭 나는 고향에 다시 뿌리내릴 수 있었으나, 때때로 목마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이야기가 통하고, 생각과 정서가 비슷한 벗들은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들에 대한 그리움은 끊어내지 못했다. “거긴 희망 없다. 소돔 고모라 같은 데서 살지 말고, 나처럼 옮겨라”고 호기롭게 말하기도 하였으나, 실은 때때로 내가 그들을 만나러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의 첫 번째 일정은 <우리교육> 기획회의다. 작년도 올해도, 이름만 올려놓고 기획안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는 정도만 했을 뿐, 매달 하는 기획회의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편집부실에 들어오니 후끈한 기운이 느껴진다. 6월26일인데, 아직 7월호 마감을 못한 모양이다. 7월 1일 이전에 책이 나오기는 힘들 것이고, 그래서인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월간지의 마감이란 대개 끝내고 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파김치가 되어버리는 고단한 일정이라고 알고 있다. 하룻밤을 새고 이틀째로 들어가는 기자도 있다 하고, 기자들의 면면에서 극도의 피로가 느껴진다.
회의실에 앉아 기획위원들을 기다리면서, <우리교육>과의 첫 만남을 생각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펑크난 학점을 떼워 가면서 한편으로 친구들과 교육 모임을 만들어 교육 관련 책을 읽어나가던 때에 <우리교육>을 처음 만났다. 벌써 십수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그때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잡지를 잘 만들 수 있을까, 교육 잡지뿐만 아니라 그 당시 나오던 다른 인문 교양 잡지들과 비교해 봐도 <우리교육>의 수준은 우뚝했다. 공부하다 머리도 식힐 겸 도서관 잡지실에서 <우리교육> 과월호를 뽑아서 읽는 게 큰 낙이었다. 교사가 되자마자 <우리교육> 아카데미를 들으러 다녔고, <우리교육>에 처음으로 글을 발표하게 됐을 때(지금은 출판부에 있는 최연희 기자가 다른 매체에 실린 내 글을 재수록했으면 한다고 연락을 주었고, 그때부터 <우리교육>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설레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우리교육>이 매우 중요한 잡지라고 생각한다. <우리교육>은 교육 현실을 짚고 교육 담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는 몇 안 되는 매체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최근 10년동안 <우리교육>은 조금씩 힘들어져왔다. 그것은 <우리교육>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국 교육의 ‘수준’이 <우리교육>이 생산하는 담론을 받아안을 형편이 못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우리교육>이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될 뿐, 새롭고 않고 깊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부분, 현장의 실천 역량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제건, 필자를 구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고 기자들은 호소하곤 했다. 그럴 것이다. 한두마디 논평들이야 하지만, 그것을 정식화시키고 문제제기하는 일에는 다들 손사래를 친다. 교육 운동의 역량은 꾸준히 지속적으로 지쳐왔고, 소중한 공간들은 하나둘씩 위축되어 왔다. 공동운명체로 출발했던 많은 공간들이 이제는 생산자와 소비자,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가 되었다. 지금 <우리교육> 기자는 겨우 여섯 명, 취재기자 다섯 명, 사진기자 한 명, 이들이 초등판 중등판의 그 많은 꼭지들을 관리하고, 기획 기사를 준비하고, 필자들 현장통신원들과 연락하고, 취재를 하고, 독자들의 반응을 체크하고, 신간 리뷰에 문화 리뷰에 때때로 전국으로 출장을 다닌다.
기획회의를 하면서도 마음이 흔쾌하지 않았던 것은,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번 마감을 끝내고 나면 녹초가 된 몸으로 다시 8월호를 시작해야 한다. 휴식,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기획회의에서는 활발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뚜렷한 결론은 보지 못한 채 뒤풀이로 들어갔다. 단골로 다닌다는 홍대 앞 식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군산에서 오신 최병우 선생님이 불쑥 이런 제안을 하셨다. “8월호는 기획위원들이 한 번 덤벼보자, 기자들 짐을 좀 덜어주자!” 이심전심이랄까, 그 자리에 함께 한 기획위원들의 마음이 그랬다. 이렇게 마음을 모아 시작된 것이 이번 ‘15인 15색’ 기획이다. 내 몫의 글을 써야 할 일이 아득했지만, 내내 무겁고 불편했던 마음이 풀렸다.
자리를 파하고, 홍대 앞에서 택시를 타고 친구네로 갔다. 금요일 밤, 홍대 앞은 그야말로 흥성거린다. 다들 싱그럽고, 그래서 부럽다. 십여년 전 서울 살 때, 이곳에 오면 이상하게 주눅이 들었고 어쩔 수 없이 내 출신성분을 떠올리곤 했다. 문화적 열등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젠 그 모습들이 싱그럽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으니, 그 사이 나도 나이를 조금 먹긴 먹은 것이다.
2.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밥을 얻어먹고는 어린이책시민연대 서울지부의 회원 연수장으로 간다. 북한산자락에 있는 팀수양관이다. 후텁한 날씨였는데, 100여명이 모였다. 내가 맡은 강의의 제목은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이다. 이미 같은 주제로 여러 차례 강의를 했는데, 특히 학부모들과의 만남이 흔쾌한 것은 이 아주머니들이 강의를 정말 열심히 들어주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의 질곡도, 희망의 원천도 모두 ‘엄마들’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아주머니들은 강의만 듣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실천으로 옮기는 분들이다.
언젠가 울산에서 강의할 때, 아이들이 학교에서 지내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함께 보는 시간, 맨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한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등굣길에 학교 정문 앞에서 일제고사 반대 1인시위를 했다는 어느 아주머니의 말씀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애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학교 앞에서 1인시위를 하면서 그 학교 아이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다 볼 수 있었다. 즐겁고 들뜬 표정으로 학교 오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등교하는 아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
달 착륙선에 탑승한 우주비행사가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별을 볼 수 있었듯이, 그 아주머니는 그날 한 시간의 체험으로 우리 교육의 전체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은 귀하고 귀하다, 할 수 있는 한 꼼지락거려보자, 그래서 우리가 ‘고래뱃속의 이물질’(후지타 쇼조)이 되자고 나는 말했다. 우리 교육에는 답이 없다. 그러니, ‘어둠을 탓하기보다 작은 촛불을 켜자’(사티쉬 쿠마르)고도 이야기했다. 거기에 한마디 더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상고 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것도,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으로서는 사실상 실패했다. 여기서 얻을 교훈이 무엇일까. 국가권력을 접수한다고 해도,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 그것은 노무현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이 체제의 한계이고, 구조화되어 있는 압도적인 어떤 힘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희망은 우리 스스로의 영토를 넓혀가는 길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이런 아주머니들이 만든 풀뿌리 모임이 그야말로 천금처럼 소중하다고, 립서비스가 아니라 내 진심을 전했다.
3.
100여명의 어머니들 속에 파묻혀(?) 점심을 먹고, 용산으로 간다. 이번에 서울에 오게 되면 꼭 용산 참사 현장에 들리겠다고 생각했다.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에 내리면 예전 국제빌딩 뒤편 대로변에 남일당 건물이 있다. 영화 <마더>를 보고 나서, 김혜자가 고물상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그 할아버지의 고물상 벽에 붙어 있는 ‘남일당’ 달력이 종종 생각났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 장면에서만큼은 봉준호가 너무 까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얼마 뒤에 불타 없어질 고물상 한쪽 벽에 ‘남일당’이라고 선명하게 박혀 있는 달력을 봉준호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비춰주었다. ‘이 영화를 감상하시는 여러분, 용산을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상기시키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한국 사회와 긴장하는 그의 역량을 과시하는 재기발랄한 한 소품이었던 것일까. 어느 편이든, 나는 ‘남일당’은 그런 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용산 참사 현장은 생각했던 대로, 완연히 지쳐있고, 쓸쓸하고, 그래서 한없이 무거웠다. 남일당 건물 앞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의 농성 천막이 있고, 그 옆에 빈소가 있다. 전경들 몇십명은 건물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다. 저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국방부 시계인지, 내무부 시계인지, 한없이 느려터진 시간들의 무뚝뚝한 권태가 툭툭 떨어진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차직하면 후닥닥 달려들 것만 같은 맹렬한 결기도 있다. 헬멧과 방패, 진압장비들이 햇빛에 번들거리는 모양새가 그렇다.
둘러볼 것 다 보고, 빈소에 절을 하고 돈을 조금 냈다. 방명록에 뭐라 쓸까 생각했는데, 그냥 ‘기도하겠습니다’라고만 썼다. 이런 자리에 와서 너무 비감해하면 안 된다. 억지로 비감해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건물에서 다섯명이 불에 타 죽었고, 경찰 한 명이 같이 죽었다. 그것은 2009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분명한 책임들을 나눠 갖고 있는 지옥도의 한 풍경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할 수만 있다면 잊고 싶어하는 사건이라는 것, 저들 다섯은 공권력의 판단으로 보자면, 경찰 한 명을 끌어들여 집단 자살했던 것이고,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여섯 달이 되도록 단 한 차례의 대화도 거부하고 있고, 단 한 마디의 사과도 받아내지 못함으로 인하여 장례조차 치르지 못해 시신이 여섯 달이 넘도록 냉동고에서 꽁꽁 얼어있다는 것.
어제부터 오늘까지, 잠을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많은 일정을 소화한 탓에 몹시 피로하다. 4대강 집회에 가기 전까지 눈을 좀 붙이려고 근처 PC방에 들어가 긴 의자에 몸을 파묻는다. 내 곁에는 서울내기 꼬마들 셋이 따로 따로 앉아 게임을 하고 있다. 자꾸 귀가 간지러워 눈을 뜬다. 아이들의 욕설 때문이다. 게임을 하면서 학교 아이들을 한 놈씩 도마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하는 모양이다. “그 새끼, 존나 븅신이야. …… 씨바. 그 년은 기집년이 담임한테도 개기고, 술 담배 존나 쎄고, 울 학교 짱 먹는대. 남자 애들 다 깨졌어. ……… 말도 꺼내지 마. 그 새끼, 지 엄마한테도 질질 싸는 새끼야. 나한테 발렸어. 씨바, 존나 병신 새끼”
한 녀석은 붕대로 한쪽 팔을 칭칭 감았고, 한 녀석은 안경잽이고, 또 한 녀석은 고도비만이다. 세 녀석이 다리를 달달 떨며, 게임하면서, 쉴새 없이 욕을 한다. 얼핏 보니, 녀석들이 하고 있는 게임이란 날카로운 칼을 든 군인이 적군의 아지트에 숨어들어서 곳곳에서 마주치는 적군들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게임이다. 초현실적인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갑자기,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의 대사가 생각난다. “넌 엄마도 없냐?…” 아니, 엄마가 아니라, “니들은 축구공도 친구도, 산도, 나무도 …… 없냐?” 불현듯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다. 바깥은 34도의 폭염, 남일당 건물에서 20미터 떨어진 한 피시방에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곰팡이 포자들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다.
4.
PC방을 나와 남일당 건물 앞 빈소에서 유족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버스를 탄다. 서울광장으로 가는 길이다. 서울광장은 경찰과 전경버스가 완전히 장악했다. 대한문 앞에 노사모 회원 한 무리가 앉아 있고, 빽빽한 전경 대오 속에 틔워놓은 출입구를 통해 서울광장으로 겨우 들어간다. 그 드넓은 광장에 사람은 고작 100명 남짓.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최초의 전국집회인데, 사람이 너무 적다.
아침부터 오마이뉴스에서 실시간으로 상황을 중계해주고 있었다는데 좀 의외다 싶다. 집회를 불허하는 경찰에 맞서 민주당, 창조한국당, 민노당, 진보신당 야4당 국회의원들이 몸으로 싸우면서 광장에 주저앉아 버텨서 겨우 확보한 공간이다. 올들어 제일 덥다는데, 이렇게 사람이 안 모인 건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발언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 거의 아홉시간동안 계속되어왔단다.
우리는 서울프라자 호텔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는데, 서울광장 본무대에는 저녁에 무슨 커다란 공연이 있는지, 시시때때로 엄청 큰 음악이 울려 퍼져서 우리 목소리를 단번에 앗아갔다가는 되돌려주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러다가 좀 있으면 경찰 저지선 앞에서 신경전을 벌이던 시민들을 경찰들이 낚아채가고, 순식간에 시위대가 달라붙어 큰 몸싸움으로 번지고, 좀 있으면 국회의원들이 이들을 빼내기 위해 경찰 책임자들을 만나는 일이 반복된다.
오후 네시가 되니 겨우 천명 남짓 사람이 모였다. 이제 본집회가 시작되었다. 방송차량이 못 들어와서 책가방만한 앰프로 집회를 한다. ‘노찾사’를 비롯해 여러 팀이 준비하고 있는데, 결국 공연을 포기한다. 뒤쪽에는 아예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연사들의 발언은 참 좋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도, 창조한국당의 이원일 의원도, 민주노동당의 강기갑 의원도, 진보신당의 노회찬 대표도, 다들 어찌나 말씀들을 잘 하시는지. 아, 역시 저래서 대중정치인이구나 싶다.
운동권 집회에서 들을 수 있는 발언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일상적인 어휘들이 사용되고 메시지가 간명해서 알아듣기가 쉽다. 강기갑 의원의 말씀, “서민들은 화장실 변기에 오줌 누고나서도 물 아낀다고 두 사람 세 사람 오줌 눈거 모아서 겨우 물 내리는데, 이명박 정부는 우리가 이렇게 아끼고 아끼는 그 소중한 물을 한참에 다 똥물로 만들 참입니다, 여러분~~” 노회찬 대표의 말씀도 좋다. “우리가 왜 저런 일을 위해 몇십조의 세금을 내야 합니까. 부자들 감세해주고, 그 돈 메우려고 담배값 술값 올린다고 합니다. 이름이 죄악세랍니다. 4대강 사업 굳이 강행한다면 우리는 ‘조세 저항’ 해야 합니다. 세금 내지 맙시다.” 열화와 같은 박수.
그러나 그 박수소리는 금세 남대문경찰서 경비과장이라는 작자의 경고 방송에 파묻힌다. 우리 쪽 앰프 몇십배의 출력으로 “여러분은 지금 불법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의법 조치하겠습니다” 운운. 국회의원이 줄잡아 열명 남짓 앉아 있는 자리지만, 경찰은 조금도 괘념치 않는다. 오늘 이 자리는 자유총연맹에서 먼저 신고를 해서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유령집회다. 우리쪽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대강 사업에서 수중보를 갑문으로 설계 변경하면 곧장 운하가 된다. 포클레인 삽날로 그 큰 강들의 바닥을 파낸다. 건기에는 평균 수심 50cm밖에 안 되는 강을 일년 내내 6m로 유지하겠다고 한다. 물은 썩을 것이고, 억조창생의 생명붙이들은 모두 파괴될 것이다. 이제 저 큰 강들이 다 인공하천이 될 판이다. 끔찍하다. 저렇게 엉망으로 망가뜨려놓은 강뚝 제방 에서 자전거를 타면 마음이 편한가. 그 물길에 배를 띄우고 배를 타면 기분이 삼삼한가. 4대강 사업 예정지로 수용 예정 판정을 받은 농토에서는 벌써 전쟁이 시작된 모양이다. ‘농사를 짓지 못할 소작 농민들과 환경단체 사람들이 좀 덤비겠지, 그러나 시간아 흘러라, 좀 있으면 사그라들 것이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때 그렇게 울부짖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람들은 냉정이 필요할 때는 과잉으로 분출했고, 힘을 모아 일어서야 할 일에는 냉정했다. 오늘 서울광장의 이 초라한 인파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뙤약볕에 앉아 있다가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일찌감치 등단해서 시집을 한권 낸 바 있고, 문단에서도 촉망받는 시인이다. 작년 이맘 때, 기륭전자를 위시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한창일 때,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 작가는 조세희, 송경동밖에 없나’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주 내밀하고 어두운 자의식을 드러내는 시를 써온 후배도 이런 시국에서 투사로 탈바꿈했다. 후배는 얼마 전 작가들의 시국선언을 조직하는데 나름 역할을 한 모양이고, 지금은 용산과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에 땀을 흘린다. 보기 흐뭇하고, 미덥다. 이런 모습들에서 한가닥 진한 위로를 얻는다.
5.
집회가 끝나고 후배와 함께 서울광장에서 서울역까지 걷는다. 후배는 아까 내가 다녀온 용산으로 가는 길이다. 고린내와 지린내가 진동하는 서울역 앞에서 후배와 헤어지고, 나는 삼화고속 버스를 타고 인천 형님의 숙소로 간다. 이번에 서울에 오게 된 다섯 번째 이유는, 형님이 실직을 했기 때문이다.
특수 용접 기계를 만드는 꽤 고급한 기술을 가진 형님도 이 경제 불황을 피해가지 못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형수와 조카들이 있는 밀양 본가에서 지내야 할 모양. 그래서 이삿짐 싸는 것을 거든다. 몇 달 전 서울 사시는 고모님의 칠순 때 사촌들이 모인 적이 있다. 아버지의 형제 남매되시는 어른들이 각기 자랑하느라 침이 말랐던 사촌형제들 일곱 중에 셋이 이미 실직상태였고, 거기에 형님까지 더해 이제 넷이 되었다.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중반까지 팔팔한 젊은 남정네들이 집에서 놀고 있다. 이것이 내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경제위기의 실상이다.
이삿짐을 다 싸고, 술을 한잔 하다가 형님과 언쟁이 붙었다. 중앙일보 애독자이며, 박정희와 이건희를 존경하는 형님은 비정규직법 해고 사태에 민주노총의 이중플레이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했고, 그 말에 내가 폭발하고 말았다. 형님에게 터뜨릴 울분이 아닌데, 갑자기 짜증이 났던 것이다. 폭음을 했고, 박정희와 이건희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끌어다 붓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밀양에서 형님의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봉고차를 끌고 올라왔다. 쓰라린 속을 쓰다듬으며 이삿짐을 싣고난 뒤 봉고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내려왔다.
2박3일간의 서울 여행, 내가 사는 시대의 풍경을 얼추 본 것 같다. 거기에 답답하고 옹색한 포즈로 끼여있는 내 모습도.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쌓여만 가는 세상의 문제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의 풍경을 미리 가늠할 필요는 없으나, 이 모든 것이 또한 이명박이라는 이가 대통령으로 뽑히고 난 뒤부터 새롭게 생겨난 문제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으나, 그러나 암담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서울 다녀온 뒤로부터 이곳은 긴 비가 내리고 있다. 지금은 길고도 지리한 장마의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다. 가끔 서울에서 만나고 보았던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서울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씩 시들어간다. 거기나 여기나, 다들 안녕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여름의 시작이었다.(우리교육 2009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