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의 성서이야기 17
-'藤尾正人 인터넷성서이야기'에서-
번역 김 복 례
성경과 술에 대하여
이 글은 2001년 9월 11일 저 뉴욕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났던 날, 세례를 받은 한 일본 여대생이 그 후 대학과 가까운 교회에 다니면서, 가진 의문, ‘술과 신앙에 대하여’ 질문해 온 것에 한 대답입니다.
교회에 따라서는,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술 마시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모두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또 사도 바울도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 마시라’고 디모데에게 충고합니다.(딤전 5:23)
그것(술을 금한 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특히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의 생활태도에서 유래했습니다. 카톨릭교회에 항의하여 일어난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처럼 자신의 죄를 신부님께 고해하여 용서받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이때의 죄는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매일 실패하며 짓는 죄를 말합니다. 세례를 받고 통째로 용서받은 죄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은 단번에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나, 매일 이런저런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는 스스로 자신의 신앙의 맥을 진단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른지 어떤지를 돌아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활을 추구해가면 좋겠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이란 무엇일까.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청교도는 생각했습니다. 즉, ‘옷은 추위와 더위를 막으면 충분하므로 여분의 옷은 가지지 않는다. 음식도 영양을 위해 분명히 먹어야 하지만, 아무거나 먹지는 않는다. ‘금욕적 청교도’라 불리는 사람이 할 일이다. 게다가 술과, 담배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숙한다. 연극이나 구경꺼리 조차도, 이것도 저것도, 예를 들면 잠까지도 너무 많이 자면 안 되었습니다.
이 청교도가 17세기 신대륙에 건너와,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일본에 전해진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청교도의 신앙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일본에서도 기독교라고 하면, 금주 금연이 간판처럼 되었습니다. 후에 영국성공회나 독일 루터교회 등, 금주 금연이 아닌 교회들도 들어왔지만, 이미 일본에서는 금주 금연이 기독교의 간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나 루터교회 목사들도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구, 목사님이신데 담배를 피우십니까?” 하고 신자들이 놀랐으니까요.
여기에 일본개신교의 불행이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술 담배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죄의 용서와 부활입니다. 술 담배는 신앙생활의 부차적 문제입니다. 부차적 문제에 걸려 핵심이 흐려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냥 그리스도 신앙과 연결하지 말고, 건강문제로 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세계각국의 기독교를 보면, 카톨릭•희랍 정교•러시아 정교는 금주․금연이 아닙니다. 영국의 성공회나 독일, 북유럽의 많은 루터교회도 아닙니다. 즉 대부분의 교회들은 술을 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술은 마시는 사람에 따라 가정이 깨지고, 해악이 되므로, ‘기독교부인생활개선회’라는 단체도 생겨 활동하는 중입니다.
다행이도 패전후에는 개신교도 술과 담배, 특히 술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바뀌어, 신앙의 부차적문제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열성적인 교회는 지금도 강력하게 주장하여, 일요일의 성스러운 빵과 함께 마시는 포도주도, 알콜이 아닌, 포도즙을 사용할 정도로 신경을 씁니다.
행여나 저의 이글을 읽고,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라 믿고 계시는 분과 논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는 것을 건드리면 격분하기 때문입니다. 논쟁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금주사상이 어떻게 교회에 들어왔는가, 세계 교회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것, 금주 금연의 교회는 오히려 소수파라는 것, 술을 먹어도 죄는 아니라는 것, 그러나 술을 마시지 않는 습관이 더 좋다는 것을 확실히 분별하고 있으면 됩니다. 사도 바울도,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주의 성전인 몸을 망가뜨리는 일입니다.”라고 에베소 신자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술과 담배, 중심과 주변>
처음으로 일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정열에 불탔던 미국선교사.
만리길 바다를 건너 일본에 왔습니다. 1858년의 일이었지요.
그후 150년, 그리스도교는 온나라에 전해졌고, 수많은 인재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전도는 오해도 하나 가져왔습니다.
최초로 오신 선교사, 브라운, 시몬즈, 헤본씨.
성실하고 훌륭했던 그분들은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습니다.
강조하여 가르쳤던 이 두 가지가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간판으로!
그리스도교의 간판은 예수 그리스도 뿐인데,
신앙의 주변문제인 술, 담배가 중심에 척 앉아서,
술 마시는 사람을 흘겨보고, 담배 피우는 사람을 구석으로 몰았습니다.
예수님은 술 마시는 사람을 저주하지 않았고, 포도주를 마셨는데 말입니다.
담배는 몸에 나쁘고, 술이 과하면 몸의 파멸.
그러나 술과 담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활의 구원과 아무 상관없어요.
진리는 하나. 그리스도의 세례, 아니 무세례!
어느 것이 제일이라 자랑하기 시작하면,
주변으로만 눈이 가서 핵심을 놓치고 희미해집니다.
아아, 우습다, 우리 프로테스탄트 150년의 풍경 한 자락.
(너의 하나님이신 주를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제1의 율법이다. 마태22:37)
<상대를 위해 그만두는 자유>
전도집회를 부탁받아 지방에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루터파. 저녁 집회 전에 신자의 집에서 식사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술을 권해 왔습니다. 루터파는 술담배를 금하지 않습니다. ‘집회전이니까’ 하고 사양했더니, “아니에요, 한 잔 하는 편이, 혀가 잘 돌아가지요.” 하며 강권하여 할 수 없이 조금 응대해주었습니다.
세계의 교회 중 ‘금주 금연’을 지키는 곳은 소수입니다. 그런데 왜 일본에서는 메이지 이래 다수파가 되어, 신앙의 핵심에 들어왔을까요? 최초의 선교사가, 그리스도교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 뒤로 영국 성공회나 루터파 등 술담배를 금하지 않는 교파가 들어왔습니다. 이쪽 목사님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아이고! 목사님, 담배를 피우십니까?” 하고 놀라므로, 신자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금기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훌륭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에밀・브루너 박사가 일본에 왔을 때, 어느 교회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선생님, 교회에서 담배는….”이라고 주의를 받았습니다. 박사는 일본체류중 금연하였습니다. 이도 훌륭합니다.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약한 사람에 대해서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고전 9:22)
<소감>
우리 한국교회도 일본 못지않게 술담배에 대해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러한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직도 후지오씨만큼 자유롭게는 말하지 못합니다.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좋아하는 신자를 보면, 아직 ‘신앙이 어리거나 성실하지 못한 교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글을 처음 읽을 때, ‘허걱~’ 하고 놀랐습니다. 과연 이대로 번역하여 발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었습니다.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대표적인 편견이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유대인들이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조상대대로 지켜온, 식사할 때 손씻는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15:11)” 씻지않는 손으로 먹은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 더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관점에서 보면, 술과 담배가 사람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 더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에 관계되지 않습니다. 그대가 음식의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술과 담배가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글을 읽는 여러분께 권합니다. “건강을 위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서도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첫댓글 신앙잡지 성서신애 10월호에서 발췌함.
의외로 술담배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술담배뿐이겠습니까?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한다라고 가이드라인을 정해놓고, 스스로를 볶아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맞어요^^ 대다수의 분들이 기독교인들의 덕목을 나열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신앙이 있네 없네 하며 흉을보지요~윤리도덕과 선악의 행실은 인간들이 모여 이룬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의 질서일진대도 말입니다.선생님의 합당한말씀에 위안을 받는 분들이 많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