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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고향 사람들
마오쩌둥의 고향은 후난성 샹탄현 샤오산충(韶山冲) 마을이다. 풍광이 수려한데다 물이 풍부하여 얼른 보아도 농사짓고 살기 좋은 곳이다. 필자는 몇 년 전 마오쩌둥의 고향과 옛집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곳은 이미 성역화되어 주말이면 수만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면 하나 정도 넓이가 성지로 되어 있다.
현지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처녀를 한나절 가이드로 고용하였다. 총명한 가이드는 가는 곳마다 똑부러지게 설명을 하였는데 첫마디가 “주석의 집안이 부자였다.”는 것이었다. 가보니 실제로 그랬다. 집도 커다랄 뿐만 아니라 집밖에 문전옥답이 펼쳐져 있었다.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저수지라고 하기에는 작은 방죽도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전기에 보면 중농 정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우리 기준에서 보면 중농이 아니라 부농이라 할 만하였다. 전기에 보면 마오가 때리는 아버지에게 “연못에 뛰어들어 죽겠다.”고 반항했다고 하는데 가보니 실감이 났다. 마당 바로 옆이 연못이었던 것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아버지가 때리면 연못에 뛰어들어 헤엄을 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헤엄을 치지 못하여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고 하였다.
마오는 그곳에서 소년시절까지 보냈다. 고향마을에는 마오를 예뻐하는 친척 아주머니가 살았다는데 놀러 가면 늘 돼지고기 요리를 해주었다. 약간 단맛이 나는 일종의 돼지고기찜인데 이름이 ‘홍샤오로우’이다. 마오쩌둥이 즐겨 먹어 지금은 유명한 요리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투신한 뒤 고향 땅을 밟지 못하였다. 따라서 고향의 친우들은 물론 친척들과 수십 년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신중국 설립 행사인 개국대전 후 마오쩌둥은 몇몇 친척들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마오쩌둥은 가장 먼저 사촌 동생인 마오쩌롄(毛澤連)과 이종사촌 동생인 리커(李軻)를 만났다. 마오쩌롄은 마오쩌둥보다 스무 살 아래였다.
마오쩌둥이 어릴 때 마오쩌롄의 집안은 식구가 많아 살림이 어려웠다. 그래서 마오쩌둥의 어머니가 마오쩌롄의 누나인 마오쩌젠(毛澤建)를 집에 들여 양녀로 삼았다. 마오쩌둥의 어머니는 인정이 많고 인자하여 마오쩌둥이 잘 따랐으며 평생 그리워하였다. 마오쩌젠은 마오쩌둥보다 손아래였는데 마오는 친누이처럼 여기고 잘 대하여 주었다. 마오쩌둥이 도시로 나갈 때 그녀도 함께 데려가 공부하게 하였고 결국 함께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1928년 5월 마오쩌젠은 체포되었다. 그녀는 마오쩌둥의 동생이라 하여 한층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다음해 8월 그녀는 24살의 나이로 처형을 당해 짦은 생에를 마쳤다. 마오쩌둥이 마오쩌롄을 각별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연유가 되었다.
이종사촌인 리커는 고향마을 부근에서 살았다. 마오쩌둥의 집에서 겨우 십리(중국의 1리는 500미터에 해당한다.) 정도 떨어져 있었다. 리커의 모친은 마오쩌둥의 고모였는데 마오는 어릴 때 고모가 매우 귀여워하였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소년 시절 시간만 나면 고모를 만나러 가곤 하였다.
마오쩌롄은 안질이 있어 한쪽 눈이 거의 실명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베이징에 와서 마오쩌둥을 보고 눈도 치료하려고 하였다. 마오는 말할 수없이 바빴지만 시간을 내어 두 동생을 만났다. 마오쩌둥은 아들인 마오안잉을 시켜 베이징의 병원에서 사촌 동생의 눈을 치료하게 하였다. 마오쩌롄은 한 달 가까이 입원하여 오른쪽 눈을 치료하였다. 리커도 병원에서 치질 수술을 받고 함께 퇴원하였다. 그러는 사이 11월이 되어 베이징 날씨가 차가워졌다. 그들은 솜옷을 가져오지 않아 추위를 탔다. 그들이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자 마오쩌둥도 말리지 않았다. 대신 트렁크에 옷을 넣어 선물하고 여비를 약간 주었다. 영수의 집안 동생치고는 소박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마오쩌둥의 두 번째 부인인 양카이후이의 오빠 양카이즈(楊開智)도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오가 처남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청첸과 천밍런의 기의로 후난성을 접수하던 시기였다. 양카이즈는 편지에서 모친이 건재하다고 썼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손자인 마오안잉과 마오안칭 그리고 양잔(楊展)의 근황을 궁금해한다고 하였다. 양잔은 양카이즈의 딸로 21살 때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
마오쩌둥은 장모가 건재하다 하니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는 바로 답장을 써서 외손자들이 잘 지내며 특히 마오안잉이 외할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고 썼다. 마오쩌둥은 또 “조카 양잔이 화북의 항일전쟁에서 영예롭게 희생되었다. 수백만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되었으니 너무 비통하게 여기지 말라.”고 썼다. 양카이즈는 그때까지 딸의 생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후난에 가서 고향도 돌아보고 친구들도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바빠서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들인 마오안잉에게 대신 고향에 가서 인사하라고 하였다. 바로 그무렵 처남인 양카이즈의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양은 편지에서 “자신이 창사에서 청장 자리 정도를 맡았으면 좋겠다.”청했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당치않은 요청이었다. 1949년 10월 9일, 그는 후난성위원회 부서기 겸 창사시 군사관리위원회 부주임인 왕서우다오(王首道)에게 이렇게 말했다. “양카이즈에게 베이징에 오지 말라고 해라. 그곳에서 능력에 따라 적당한 업무를 주되 절대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면 안된다.” 마오쩌둥은 장모에게 약간의 도움을 보냈다. 그리고 양카이즈에게 전문을 보내어 타일렀다. “허황된 희망을 가지고 베이징에 오면 안된다. 후난성에서 배정하는 업무를 하라. 정상적인 규정에 따라야 하고 정부에 어려움을 주면 안된다.”
양카이즈는 베이징 농업대학을 졸업한 지식분자였다. 그는 성위원회에서 배분한 대로 성 정부농업분야에서 일하였다. 그는 좋은 실적을 올려 여러 번 베이징에 와 회의에 참석했다. 마오쩌둥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마오는 그에게 “열심히 노력하니 성적이 좋다.”고 격려하였다. 그들은 늘 편지를 주고받았다. 1976년 여름 이미 병세가 위중했던 마오쩌둥은 양카이즈가 베이징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보고 싶어하였다. 양카이즈는 마오를 찾았으나 이미 의식이 없었다. 마지막 상봉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마오안잉(毛岸英)의 혼례를 치르다
1949년 10월 15일, 신중국 개국대전을 치른 지 보름 후 마오쩌둥은 장남 마오안잉의 혼례식을 치렀다. 혼례식 장소는 공산당 지도부의 거주지인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였다. 마오쩌둥은 장남의 혼사를 최대한 간소하게 치렀을 뿐 아니라 축의금도 받지 않았다. 마오는 자신이 입던 외투를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마오안잉과 류스치 부부의 신방은 배정받은 기관 숙소중 하나였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혼례식을 매우 기꺼워했다. 그는 혼례 전 아들과 며느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혼례식은 일생의 큰 일이다. 그날 너희들에게 밥 한끼 얻어먹어야겠다. 너희들이 초청하고 싶은 사람을 일러다오.”
마오안잉과 류스치(劉思齊)는 의논하더니 마오쩌둥에게 명단을 건네주었다. 덩잉차오, 차이창(蔡暢), 캉커칭(康克清), 셰줴짜이(谢覺哉)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명단을 보더니 마오쩌둥은 “너희들 덩 숙모만 부르면 안된다. 저우 숙부도 함께 불러야지.” 하고 웃었다. 덩 숙모는 덩잉차오를 가리키는 것이고 저우 숙부는 남편인 저우언라이였다.
마오는 또 초청할 사람들을 더하였다. “차이 숙모를 부르면 리푸춘도 부르고 캉 숙모를 부르면 총사령도 불러야지. 셰 선생을 모시면 왕딩궈(王定國)도 청하고.광메이와 샤오치도 불러야지. 비스 동지는 위취안산(玉泉山)에서 정양하고 있으니 그냥 두지. 혼례식을 간소하게 한다는데 나는 찬성이다. 구식 습관은 버려야 해.” 광메이와 샤오치란 국가 부주석인 류샤오치와 왕광메이 부부를 가리킨 것이었다. 비스 동지란 고혈압등 지병으로 정양하고 있는 런비스였다.
혼례식 날 마오안잉은 평상복을 입었다. 신부인 류스치도 화장기 없는 얼굴에다 새로 산 헝겊 꽃신을 신었다. 혼례식 복장치고는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행복해하였다. 마오안잉은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어린 신부도 수줍은 얼굴이었지만 활짝 웃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혼인 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순탄하기는커녕 애달픈 비극으로 끝이 났다. 결혼하고 불과 반년 뒤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
혁명가의 딸 류스치
류스치는 본래 초기 공산당원인 류첸추(劉謙初)와 장원추(張文秋)의 딸이다. 류첸추는 옌징대학(베이징 대학교의 전신이다. 옌징대학교 교사와 대부분의 학과를 베이징 대학교가 이어받았다. 이공계는 칭화대학교로 이어짐) 출신이고 모친은 후베이 여자사범대학교 출신이니 둘 다 인텔리였다.
1927년 북벌군 정치부 간부로 있던 류첸추는 연인인 장원추와 함께 우창(武昌 : 우한시의 일부이다.)에 있던 마오쩌둥의 처소로 찾아갔다. 당시 마오쩌둥은 국민당 농민운동 강습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오쩌둥에게 국내정세와 농민문제를 듣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와 결혼생활에서 아들 셋을 두고 있었다. 그때 양카이후이는 막 셋째 아들인 마오안룽을 출산한 뒤였다. 양카이후이가 땅콩과 밤을 가지고 나왔을 때 마오쩌둥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혼인하면 아들을 낳으라고 하지만 두 사람은 딸을 많이 낳으시오. 나는 아들이 셋이니 서로 사돈합시다.” 장원추는 수줍어서 대꾸하지 못하고 옆에 와 있던 마오안잉과 놀고 있었다. 그때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은 다섯 살이었으며 둘째인 마오안칭은 네 살이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마오쩌둥이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류첸추와 장원추 두 사람의 자녀가 차례로 마오쩌둥의 며느리가 된 것이다.
몇 개월 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공산당원을 학살하였다. 우한에 있던 류첸추와 장원추는 그 와중에도 혼례식을 치렀다. 두 사람의 혼례식 날이 4월 26일이니 상하이 사변 직후의 일이었다. 혼인 후 류첸추는 공산당 푸젠성위원회 서기를 맡아 떠나고 장원추는 후베이성 징산(京山)현에서 비밀공작을 맡았다. 그후 1929년 4월 류첸추는 산둥성 서기를 맡고 장원추는 부녀부장을 맡아 신혼부부가 삼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였던 저우언라이가 두 사람을 배려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불과 일 년 뒤인 1930년 8월 류첸추는 체포되어 1931년 산둥성 성도인 지난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장원추는 임신 중이었는데 당에서 사람을 보내 상하이로 피신을 시켰다. 장원추는 상하이 중공 중앙기관에서 일하던중 여아를 낳았다. 류첸추는 생전에 장원추에게 아이를 낳으면 남녀를 막론하고 스치(思齊)라고 부르라 하였다. 뒷날 류스치는 류송린(刘松林)으로 개명했는데 마오쩌둥은 여전히 스치라고 불렀다. 류스치는 유복녀가 되어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류첸추가 총살을 당한 뒤 류스치는 엄마를 따라 상하이, 홍콩, 난창, 베이핑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장원추가 당의 지하공작을 위해 계속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 1937년 장원추는 딸과 함께 옌안으로 갔다. 혁명 수도에 갔으니 체포의 위험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마오쩌둥, 8살된 류스치를 수양딸로 삼다
1938년 초봄의 어느 날 저녁, 마오쩌둥과 중공 지도부는 옌안 중앙 당학교에서 연극을 보고 있었다. 그날 공연한 연극은 ‘버려진 아이’였다. 백구에서 힘겨운 투쟁을 벌이던 부부가 체포된 뒤 그 딸이 겪는 고초를 그린 연극이었다.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이런 여자 아이가 울며 “엄마, 엄마”하고 불러 사람들을 울렸다. 아이역을 맡은 사람은 바로 류스치였다. 류스치는 그때 옌안 유치원 학생이었다. 활발한데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연극의 주인공을 맡았다. 극중 소녀와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 실감 나는 연기를 하였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마오쩌둥은 연극을 보고 깊이 감동하였다. 그의 세 아들도 상하이에서 ‘기아’가 된 일이 있었다. 그는 두 번째 부인 양카이후이와 사이에 마오안잉, 마오안칭, 마오안룽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양카이후이가 피살된 뒤 아이들은 기구한 곡절을 겪었다. 마오안잉은 엄마와 함께 감옥에 갇혔다가 양카이후이가 처형된 후 석방되었다. 그후 세 아들을 당 조직이 거두어 아이들은 삼촌인 마오쩌민(毛澤民), 숙모 첸시쥔(錢希钧) 슬하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하이 당 조직이 파괴되고 관련자들이 붙잡혀 처형을 당하거나 투옥되었다. 이번에도 이들을 돌볼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셋은 몇 년 동안 상하이 거리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후 1936년 상하이 지하당이 안잉과 안칭을 찾아내어 소련으로 보냈다. 셋째 마오안룽은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세 부인과 사이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두 번째인 양카이후이가 세 아들을 낳았고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이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허쯔전은 낳은 아이들을 대부분 잃고 막내딸인 리민(李敏)만 건졌다. 1929년 3월 허쯔전은 첫 딸을 출산했으나 그때는 홍군이 결성된 지 얼마되지 않아 이리저리 쫓겨 다닐 무렵이었다. 마오쩌둥은 첫 딸을 어느 농가에 맡겼다. 마오는 눈물을 흘리는 허쯔전에게 “지금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소. 혁명이 승리하면 다시 찾아다 키웁시다.”하며 달랬다.
허쯔전에 낳은 두 번째 아들은 마오안홍(毛岸紅)이다. 이 아들은 마오쩌둥과 허쯔전이 장정을 떠나며 또 다른 삼촌인 마오쩌탄(毛澤覃)과 허이(賀怡) 부부가 맡았다. 두 사람은 장정을 떠나지 않고 유격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던 것이다. 마오쩌탄은 조카의 장래를 걱정하여 경호원의 집에 맡겼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마오쩌탄이 국민당군과 싸우다 전사하는 바람에 마오안홍의 소식이 끊겼다. 허쯔전의 다음 아이는 불행하게도 장정 중에 태어났다. 엄마가 무리한 행군을 거듭하는 바람에 조산한 아이는 곧 숨을 거둬 이름도 얻지 못하였다. 그 일년 후 마오쩌둥과 허쯔전은 장정 중 구이저우 경내를 떠돌고 있었다. 그때 허쯔전이 딸을 출산했으나 어느 농가에 맡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낳은 애들을 모두 잃어버린 허쯔전은 며칠 뒤 아이를 찾아왔다. 하지만 자신은 떠나야 하는 몸, 아이를 다시 농가에 보냈다. 그때 마오쩌둥은 “다른 방법이 없소. 우리의 혁명은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오.”하고 우는 아내를 달랬다.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직후 허쯔전은 또 딸을 낳았다. 이 아이가 허쯔전 소생으로 유일하게 키운 리민이다. 리민은 네 살 때 허쯔전이 병 치료차 소련에 갈 때 따라갔다. 그 바람에 아버지와 떨어져 10년간 소련에서 자랐다. 소련에 도착한 뒤 허쯔전은 다시 아들을 낳았으나 감기가 폐렴으로 전이하여 세상을 떠났다. 허쯔전처럼 불행한 엄마도 보기 드물 것이다. 허쯔전은 마오쩌둥이 장칭과 중혼하는 바람에 남편과도 영영 헤어지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네 번째 부인인 장칭과 딸을 얻었는데 리나(李纳)라고 이름을 지었다. 마오의 자녀중 막내가 된 리나는 형제 중 가장 안정적인 환경에서 태어나 부모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다시 연극 ‘버려진 아이’로 돌아간다. 마오쩌둥은 연극이 끝난 뒤 마지막 장을 다시 보고싶어하였다. 그래서 류스치는 다시 해어진 옷을 입고 “엄마, 엄마” 하고 길거리를 헤매야 하였다. 마오쩌둥은 연극이 끝난 후 어린 배우를 자기 옆으로 불렀다. 무릎에 배우를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오가 “네 이름이 뭐냐, 엄마 아빠는 누구냐?”하고 묻자 류스치는 손으로 뒤쪽에 앉은 천쩐야(陳振亞)와 장원추(張文秋)를 가리켰다. 마오쩌둥이 손을 흔들어 그들을 부르자 부모가 급히 다가왔다. 천쩐야가 마오쩌둥에게 설명해 주었다. “저 아이는 류첸추 열사와 장원추 동지의 딸입니다. 류 동지는 1931년 지난에서 국민당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저는 저 애의 계부입니다.”
마오쩌둥이 장원추를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하였다. 장원추가 마오쩌둥에게 옛날 이야기를 하였다. 자신과 류첸추가 우한에서 마오쩌둥의 집에 갔던 일과 마오가 한 이야기를 설명하자 마오도 기억이 되살아났다. 1927년 4월 우창에서 만났던 연인들이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류스치에게 이야기했다. “얘야, 내가 양아버지가 되면 어떠냐? 그럼 너는 내 수양딸이 되는 거야.” 류스치는 조금 생각하더니 “좋아요.” 하였다. 아마 엄마인 장원추가 권했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은 웃더니 “내 딸이 되었으니 아무 때나 집에 와서 놀거라.”하였다. 연극이 끝난뒤 마오쩌둥은 류스치의 손을 잡고 그의 요동으로 갔다. 장원추와 천쩐야도 함께 그의 집에 가서 환담했다.
다음날, 마오쩌둥은 사람을 보내 류스치를 데려왔다. 그 뒤 류스치는 마오쩌둥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놀았다. 그때 마오안잉은 소련에 있었다. 마오안잉과 류스치의 나이 차이는 여덟살이었다. 하지만 겨우 여덟살이던 류스치가 마오쩌둥의 맏며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류스치는 또다시 어린 몸으로 파란을 겪어야 하였다. 1939년 류스치는 부모와 함께 옌안을 떠나 소련으로 갔다. 그들이 신장성 디화(迪化: 지금의 신장성 성도인 우루무치의 옛이름)에 이르렀을 때 신장성 정부에 붙잡혀 억류되었다. 우루무치에서 천쩐야는 백러시아 의사에게 독살을 당했다. 생부에 이어 의부까지 죽은 뒤 1943년 4월까지 류스치는 모친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때 감옥에는 마오쩌둥의 동생인 마오쩌민과 공산당 신장성 관계자들이 함께 갇혀 있었다. 이중 마오쩌민은 1943년 국민당 신장의 군부 인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 국민당과 공산당의 회담을 거쳐 신장성 감옥에 갇혀 있던 공산당원 130여명이 석방되었다. 이들은 국민당 신장성 주석인 장즈중 부대의 호송을 받아 옌안으로 돌아갔다. 옌안에 돌아온 다음 날 류스치는 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오쩌둥이 투옥했다가 석방된 사람들을 접견할 때 함께 만난 것이다. 마오쩌둥은 한눈에 장원추를 알아보고 수양딸의 안부를 물었다. 장원추가 자신의 뒤에 있던 류스치를 가리키자 마오쩌둥은 깜짝 놀랐다. 8년만에 만났더니 류스치가 이미 다 큰 처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류스치의 나이 16세였다.(한국 나이로는 17세) 그후 곡절 끝에 마오안잉과 류스치는 연애 과정을 거쳐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마오안잉, 한국전쟁에서 전사하다
한국전쟁이 폭발하고 9월 15일 미군 7만여명이 인천에 상륙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UN군이 한반도에 들어오자 중국은 위협을 느꼈다. 한국군과 UN군이 압록강에 다다르자 중국 지도부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2일, 중앙 서기처 회의를 소집하였다. 10월 4일에는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전쟁 참전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북한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원군’을 파견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衛國: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지원하고 나라를 보위하는 것)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마오안잉이 마오쩌둥과 조선인민지원군 총사령인 펑더화이에게 출전 의사를 밝히고 수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펑더화이는 난색을 표시했지만 마오쩌둥의 권유도 있어서 부득이 마오안잉을 데려가기로 하였다.
그 무렵 류스치는 급성 맹장염에 걸려 베이징의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마오안잉은 병원에서 이틀 밤을 지낸 뒤 10월 15일 새벽에 비행기로 선양에 갔다. 떠나기 전날 밤 마오안잉은 류스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내일 멀리 출장을 가오. 가면 통신도 어렵고 편지가 늦어질 수 있소.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오.” “도대체 어딜 가는데 그래요?” 류스치가 묻자 마오안잉은 “조선반도에 가오. 가길 아시오?” 하고 되물었다. “알아요. 지금 한창 전쟁 중이라던데.” 류스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왜 거길 가야 하나요?” 마오안잉은 웃으며 “거기서 당신 생각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떠나간 마오안잉은 웬일인지 편지 한 장이 없었다.
마오안잉은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부에서 러시아 통역 겸 기밀비서를 맡았다. 그는 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와 두 명의 부사령원인 덩화(鄧華), 홍쉐즈(洪學志)와 함께 생활했다. 참전한 지 한 달 조금 넘었을 때인 1950년 11월 25일, 마오안잉은 미군 폭격기 B-29의 공습을 받았다. 마오안잉은 그때 작전실에서 전보를 보내고 있었다.
마오안잉은 일차 공습 때 방공호로 갔다 폭격기가 돌아가자 작전실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폭격기가 되돌아와 다시 공습을 가했던 것이다. 폭격기가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사령부 건물이 불덩어리가 되었다. 새카맣게 탄 시신을 분간할 길이 없었는데 사람들은 허리춤에 찬 독일제 권총과 팔목에 두른 소련제 시계를 보고 마오안잉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마오안잉의 권총과 시계는 스탈린에게 받은 것이라고 한다. 마오안잉의 전사를 알게 된 펑더화이는 직접 전문을 기초하여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마오쩌둥은 방에서 자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기밀비서인 예즈룽이 작은 목소리로 “주석”하고 불렀다. 마오가 눈을 떠 바라보자 예즈룽은 아무말 없이 전보를 건넨 뒤 옆에 서 있었다. 마오는 한참 동안 전보를 보고 또 보았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는데 기록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이라고도 하고 아무 표정도 없었다고도 적혀 있다. 마오는 낮은 목소리로 예즈룽에게 말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데 한 사람의 일만 생각할 수는 없지.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의미있는 죽음이다.”
맏아들이 전사하자 마오쩌둥은 말할 수 없이 침통하였다. 그래도 마오는 며느리인 류스치에게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류스치의 나이 겨우 스무살,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 같았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당부하자 누구도 류스치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류스치의 모친인 장원추도 사위가 전사했다는 것을 딸에게 알리지 않았다. 3년이 지났을 때 류스치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류스치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때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는 어리고 철이 없어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게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처음 일년 동안 류스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점점 마오안잉이 왜 편지를 보내지 않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지금은 공산당 천하이고 통일된 나라인데 왜 편지를 보내지 못하나, 영수의 아들이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이렇게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류스치는 시아버지를 찾아가 묻기로 하였다.
“아, 그건….” 마오쩌둥은 류스치의 질문에 말을 흐렸다. 손가락에 낀 담배가 다 타들어 가도록 침통하게 있던 마오쩌둥은 마침내 대답을 하기로 하였다. “스치, 네가 안잉하고 정이 깊다는 것을 안다. 가족 간의 이별은 가슴이 아프지.” 마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나하고 카이후이 아줌마하고 이별할 때 그 사람은 따라오고 또 따라오고 계속 따라왔단다. 나는 아줌마에게 우리 금방 만날 거요. 돌아가 보시오. 했는데 가지를 않는 거야. 그 자리에 서서 계속 나를 보고 있어. 그래서 나도 자꾸 뒤를 돌아보며 작별했지.” 마오는 잠시 쉬었다 다시 이야기했다. “삼년 뒤 나는 불행한 소식을 전해 들었지, 그리고도 쩌민 삼촌, 처탄 삼촌, 쩌젠 고모, 추슝(楚雄) 오빠… 모두 희생 당했어.” 마오쩌둥은 류스치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려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자 류스치도 알아들었다. 류스치는 마오쩌둥의 무릎을 부여잡고 큰 소리로 울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중난하이에 한참동안 울려 퍼졌다.
마오쩌둥도 우는 며느리를 달래기 어려워 한참 기다렸다. 류스치가 울음을 그친 뒤 마오는 자기가 먹는 수면제를 꺼내어 건네 주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한 개씩 먹어라.” 류스치는 돌아갔다. 수면제는 어머니인 장원추에게 맡기고 몇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중에 결국 수면제를 찾아 먹고 간신히 잠을 잤다. 그뒤 류스치는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등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류스치가 걱정이 된 마오쩌둥은 소련 유학을 권했다. 환경을 바꿔주면 우울한 분위기를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류스치는 모스크바에 가서 수리학을 전공하였다. 하지만 도중에 적성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마오쩌둥은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소신껏 하라고 격려하였다.
1957년 류스치는 중국으로 돌아와 베이징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 그후 류스치는 중국 고전문학을 좋아하게 되어 마오쩌둥과 상의하였다. 마오쩌둥은 “중국 고전문학을 좋아한다니 좋구나. 고전을 알려면 역사도 알아야 한다.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지.” 하고 좋아하였다. 마오쩌둥은 유명한 독서광이었다. 당장 길다란 도서목록을 꺼내더니 류스치에게 주었다. ‘사기, ’자치통감‘ ’삼국지‘ ’홍루몽‘ ’수호전‘ 요재지이’ ‘고문관지(古文觀止: 중국의 한문학 산문을 모은 책이다.)등이 적혀 있었다. “아유, 많기도 하네요.” 류스치는 한숨을 푹 쉬더니 “평생 읽어도 안되겠어요.” 하였다. 마오쩌둥은 “사람은 살면서 공부하고 늙어서도 공부해야 한다. 하루 끼니를 굶어도 되지만 책은 굶으면 안되지.”하였다. 그날부터 마오쩌둥은 류스치에게 고전문학을 들려 주었다. 마오쩌둥은 류스치가 오면 언제나 고문 한 편을 들려주고 해설해 주었다.
한 번은 마오쩌둥이 ’춘희‘를 빌려오라고 하여 류스치가 빌려다 준 일도 있었다. 마오쩌둥은 책을 읽을 때 곳곳에 밑줄을 치고 방점을 찍고 동그라미를 그리는 등 온갖 표시를 하였다. 책이 울긋불긋한데다 곳곳에 주석을 달았다. ’춘희‘도 그 모양이 되어 돌아왔다. 류스치는 책을 보고 놀라 펄쩍 뛸 뻔하였다. 책에 온통 주석을 달고 표시를 다해 놓았던 것이다. 이걸 어떻게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말인가. 류스치는 책을 주인에게 돌려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양심이 찔려 책을 건네고 바로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 몇십 년 뒤 류스치의 여동생인 샤오화(邵華)가 그 일을 말하였다. “책 주인이 책을 분실했다. 그걸 가지고 있었으면 귀중한 보물이 되었을텐데.”
샤오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 소개하고 가기로 한다. 샤오화는 언니인 류스치와 함께 우루무치 감옥에서 4년을 지냈다. 그때 샤오화의 나이 한 살 때였으니 영아 시절에 감옥살이를 한 셈이다. 그결과 샤오화는 본의 아니게 빛나는 감옥투쟁 경력을 얻어 ‘소년 팔로군’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그녀도 어릴 때 언니처럼 연극배우를 하였는데 ‘황무지를 개척하는 오누이’ ‘피눈물의 복수’등을 공연하였다. 어릴 때부터 철저한 공산주의 투사로 큰 것이다. 언니는 친부와 양아버지, 그녀는 친부가 살해당한데다 고초를 겪었으니 그럴만도 하겠다. 1960년 22살의 샤오화는 37세의 마오안칭과 결혼하였다.
마오안칭은 마오쩌둥의 둘째 아들로 마오안잉의 동생이다. 마오안칭은 상하이에서 유랑 걸식할 때 국민당 특무에게 자주 얻어 맞았다고 한다. 그때 뇌를 다쳐 가끔 쓰러지곤 하였다. 그래도 마오안칭은 형인 마오안잉을 따라 소련에 유학을 갔다. 형 마오안잉은 그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형이 권하자 마오안칭도 소련 적군에 들어가 2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후 마오안칭은 평생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을 번역하거나 마오쩌둥과 양카이후이 전기 관련 글을 썼다.
마오안칭과 샤오화는 행복한 혼인 생활을 하였다. 마오안칭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였다고 하는데 샤오화도 마오안칭을 좋아하여 두 사람은 평생을 해로하였다. 샤오화는 베이징대학 중문과를 다녔는데 언니처럼 마오쩌둥의 논객이 되었다. 그때 언니와 마오안잉이 다정하게 토론하는 것을 보고 늘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마오안칭을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나중에 마오쩌둥과 관련해서 글을 썼는데 부인인 샤오화가 훨씬 많은 양이라고 한다. 나중에 샤오화는 군대에 들어가 소장까지 승진하였다. 마오안칭과 사이에 마오신위(毛新宇)를 낳았는데 그가 마오쩌둥의 유일한 친손자가 되었다.
류스치, 마오안잉의 묘를 참배하다
1958년 겨울, 마오안잉이 전사한 지도 벌써 8년이 지났다. 북한에 출병했던 지원군 마지막 부대가 중국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마오쩌둥이 류스치에게 이야기했다. “스치, 너는 아직 젊다. 앞날이 창창한데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속담에 ‘젊은 부부는 함께 늙는다.’고 했는데 너도 짝을 찾아야지. 늙어서 짝이 없으면 처량해서 안된다.” 마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안잉을 그리는 것은 안다. 하지만 평생 수절할 수는 없지. 그건 봉건시대 폐습이다. 네가 그러는 건 나도 찬성하지 않고 안잉도 찬성하지 않을 게다. 젊은 네가 의지할 데 없이 지내니 내 마음이 불안구나. 내가 네 짝을 찾아볼까?”
류스치는 마오 앞에서 다시 울었다. 그후 류스치는 동생인 샤오화에게 마오를 찾아가게 하였다. 샤오화는 “안잉 오빠가 돌아간 지 오래 되었는데 언니는 살아서도 못보고 죽어서도 못본다고… 아직 남편 묘도 찾지 못했으니 아내된 도리가 아니라고 했어요. 언니는 조선에 가 오빠 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 산소 청소도 하구요. 그러지 않으면 개가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마오쩌둥은 묵묵히 듣더니 좋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약법 3장’을 정해 주었다. 그런 것을 보면 중국 사람들은 약법 3장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첫째. 나라의 돈은 한 푼도 쓸 수 없다. 내 원고료에서 충당하겠다.
둘째, 조선의 당과 정부 관계자들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된다.
셋째, 조선에서 활동한 것이 조금이라도 보도가 되면 안된다.
류스치는 마오쩌둥이 정한 규칙을 준수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마오쩌둥은 류스치와 샤오화 자매가 북한에 함께 가도록 주선하고 여비도 주었다. 1959년 춘절 다음 날, 류스치와 샤오화는 마오쩌둥의 비서와 함께 단둥행 기차를 탔다. 압록강을 건너는데 찬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류스치는 심사가 들끓었다. 그들은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으로 갔다.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은 평안남도 회창군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에서 가장 큰 지원군 능원인데 134명의 지원군이 묻혀 있다. 마오안잉은 본래 전사한 대유동에 묻혀 있었다. 1955년 가을에 지원군 열사묘역이 조성된 뒤 이장해 왔다. 류스치는 중국 대사관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마오안잉의 묘소로 갔다. 그녀는 마오안잉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손으로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비처럼 철철 흘렸다. “안잉, 내가 왔어요. 아버지를 대신해서 왔어요. 이렇게 오랜만에 당신을 보다니, 너무 늦었지요?” 묘소를 떠날 때 류스치는 손으로 흙을 파서 손수건에 담았다. 그리고 작별했다. “안잉, 다시 올께요. 꼭 올께요.”
묘소 관리인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마오안잉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즉시 상부에 보고했다. 소식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전해지자 북한 정부는 류스치 일행을 접대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그러나 류스치와 중국 대사관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류스치는 심하게 운 데다 노독이 겹쳐 목을 상했다. 인후염이 생겨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류스치는 곧장 병원에 입원했다. 인후염에다 피로가 겹쳐 한참 앓았다.
마오쩌둥, 류스치의 재혼을 주선하다
마오쩌둥은 류스치가 마오안잉의 그늘에서 벗어나도록 배려하였다. 류스치는 대학을 졸업한 뒤 군사위원회 공병 분야 업무를 배분받았다. 류스치가 나이를 먹을수록 마오쩌둥은 조바심을 냈다. 여러 차례 재혼하라고 권하고 대상자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그때 공군쪽에서 공격기 교관인 양마오즈(陽茂之)에 대한 추천이 올라왔다. 양은 소련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는데 사람이 충후하고 바르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양마오즈에 대한 추천자료를 보고 기분이 좋았다. 출신이나 경력도 좋고 정치적으로도 믿을만 하였다. 마오는 추천에 동의 의사를 전하고 바로 류스치에게 편지를 썼다.
“딸에게
잘 지내느냐? 이제 결혼을 결심할 때가 되었다.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거라. 높은 것은 바라보기 힘들고 낮은 것은 눈에 차지 않고, 그게 너희들 같은 여성들의 폐단이다. 편지를 받으면 답장해 주기 바란다. 잘 있어라. 아버지가”
마오쩌둥은 사돈인 장원추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나는 사람들에게 스치 남자 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괜찮은데 당신 의견이 궁금합니다. 만족하다면 스치하고 만나게 하겠습니다. 그들 사이가 발전하면 당신이 혼례를 주관하시기 바랍니다.”
류스치가 양마오즈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1954년 양마오즈는 중국 인민지원군 공군 전투영웅 장지후이(張積慧)와 함께 소련 유학을 떠났다. 그들은 소련 홍기 공군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유학생 모임에서 류스치와 만났다. 하지만 서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만날 기회도 없었다.
류스치와 양마오즈는 마오쩌둥이 다리를 놓아 서로 사귀기 시작했다. 1961년 12월 31일, 류스치는 중난하이로 마오쩌둥을 찾아 결혼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마오쩌둥은 소식을 듣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마오는 자신의 시 매화를 노래하다.(卜算子·咏梅)와 ‘궈모뤄 동지와’를 직접 붓으로 써서 기념 선물로 주었다.
1962년 2월 두 사람은 베이징의 어느 후통에서 혼례식을 치렀다. 마오쩌둥은 비서 예즈룽을 시켜 300위안을 축의금으로 보냈다. 류스치와 양마오즈는 네 명의 자녀를 두고 화목하게 살았다.
이영민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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