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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저는 말로만 듣던 미아 7동 일명 삼양동이라는 이곳을 찾아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이사를 와서 보니 외부에서 듣던 미아 7동 그대로였습니다. 참으로 가난한 마을이었습니다. 저는 몇 달 동안 살면서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왜 우리 마을 사람들만이 이렇게도 가난하고 못살아야 하는가 대부분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은 전체가 시내 각처에서 이사를 해온 철거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으로 이사를 하여 오기 전 천막과 판자촌으로 형성 되었던 미아 7동 일대가 서울시의 특별 배려로 현지 개량 시범 동으로 지정을 받고 시비 7천만원의 지원을 받아 주택으로 완전 개량하고 무허가 건물이나마 양성화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택을 개량하는데 소요 되는 자금을 주민들 각자가 자 부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저희 마을 주민들은 참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려움 속에서 현지개량이 끝나고 주택지로서 완전히 양성화 되자 15개통으로 구성 되었던 미아 7동이 1975년 3월, 31개통으로 확장 개편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가 살고 있는 통에서도 통장을 새로 위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저희 통에는 통장의 직분을 맡아 볼만한 여가와 통장의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여 줄만한 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웃에 살고 있는 강봉진씨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당시 강봉진씨는 자신이 이곳의 통장으로 위촉을 받고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면서 저에게 통장의 직분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가 52세였습니다. 저는 강봉진씨에게 ‘제 나이 50고개를 넘어 이제 노인당에 나가서 소일이나 하오 있지, 청승맞게 무슨 통장이요.’하고 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수일 동안의 끈질긴 설득에 저는 결국 굴하고 통장의 직분을 맞게 되었습니다.
<안일했던 과거 씻기 위해 통장 직 맡아>
저는 과거 50평생을 무위도식하면서 지내온 그 모든 나의 죄과를 씻기 위하여 늙어 필요 없는 이 몸이나마 작은 내 마을을 위해서 무언가 봉사하여 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1975년 7월 15일 저는 제10통의 통장으로 위촉 받았습니다. 기왕에 통장으로 위촉을 받은 이상 무엇이든지 한 가지라도 보람 된 일을 해보자고 생각하고 통장으로써 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을 제 나름대로 구상하여 보았습니다.
1. 이웃과 이웃끼리 소외감에 싸여 완전 격리 되어 있는 주민들에게 사랑과 협동심을 심어주자.
2. 주민의 공복으로서 주민들의 심부름꾼이 되자.
3. 지저분한 뒷골목에 주민들의 부담 없이 “보도블록”을 깔아주자.
저는 다음날부터 주민들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고 가정 형편을 분석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석한 결과를 일일이 통적부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던 붕 전국적으로 주민등록증의 갱신이 단행 되었습니다. 각 통 별로 2일간의 날짜를 지정하여 신 주민등록증의 교부수속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통 주민들의 태반이 자신들 주민등록증 교부신청서의 기재 요령은 물론 각자가 직접 기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민 전체의 교부신청서를 써 주기로 하고 통적부에 의하여 수 일간에 걸려 모두 대필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정된 주민등록증의 지문채취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본적지 조회가 끝나야 주민등록증이 발부 되는데 이 조회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주민들은 항시 동사무소에 매일같이 쫓아 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사무소에서는 동 직원의 일력 부족과 사무의 복잡성 때문에 일대 혼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일터로 나가야만 하는 주민의 형편으로서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찾는 데만 매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주민들을 위하여 제가 대신하여 찾아 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민등록 갱신업무에 주민에게 편의>
저는 통 담당 직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의하고 저 혼자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들의 본적지 조회가 끝나는 것을 확인하고 본적지 조회가 끝난 주민들의 주민등록증을 동 직원으로부터 이수 받아 저의 통 주민들 각 가정을 일일이 순방하면서 수령인일 받고 교부하여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석 장도 갖다 주고 어떤 때는 다섯 장도 갖다 주고 이렇게 하기를 거의 3개 월 동안에 걸쳐 저의 10통 주민들의 주민등록증을 완전히 교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10통 주민들은 개개인이 그 복잡한 동사무소에 일일이 찾아 다니지 않고서도 자기 집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편안하게 주민등록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10통 주민들은 저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달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발부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출생신고를 안 한 사람, 사망한 사람인데도 사망신고가 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실제로 혼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주민등록표상에 동거인으로 되어 있는 사례 등 허다한 미 정리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음날 미 리 된 호적관계의 모든 것을 해결하여 줄 것을 결심하고 인쇄소로 달려가서 각종 신고용지를 사비로 구입하였습니다.
가난하고 아미 것도 모르는 주민들을 위하여 미 리 된 호적을 무료로 대서해서 주고 본적지로 직접 발송하거나 혹은 동사무소를 통하여 정리하여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시간에 쫓기는 주민들에게 동사무소에서 발급하는 모든 증명을 주민들로부터 부탁을 받아 주민들을 대신하여 제가 직접 배달부 노릇도 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일이나마 주민들의 심부름을 해주는 동안 주민들은 더욱 저에 대한 인식을 날로 새로이 하여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민들의 민원 도맡아 처리에 앞장>
저는 이러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저희 동내 주변환경을 깨끗이 할 것을 결심하고 그 다음날부터 조기 청소를 실시하였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빗자루를 들고나와 동내 주위를 돌아 다니면서 청소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저희 동네 주민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자기 집 앞을 아침마다 말끔히 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주민들 각자가 자진하여 아침 청소를 하여 저희 동네는 정말 깨끗한 동내로 변하였습니다.
저는 다시 다음의 할 일을 구상하였습니다. 우선 급한 것이 저희 동내 뒷골목 포장이었습니다. 저는 뒷골목 보도블록을 깔기 위한 자금염출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난한 저희 마을 주민들에게 그 자금을 부담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폐품을 수집하여 그 폐품을 판 돈을 모아서 저는 뒷골목의 보도블록을 깔아 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저는 저희 동네 주민들에게 휴지 빈 병 할 것 없이 무엇이든 버리지 말고 모아 둘 것을 당부하고 그 다음 날부터 손수레를 직접 끌고 동내로 나섰습니다.
<뒷골목 포장을 위하여 폐품 수집에 나서>
각 가정을 돌아 다니면서 폐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폐품을 팔아 모은 돈을 한 푼 한 품 마을 금고에 예탁하였습니다. 1 주일에 한 번씩을 동네에서 뜻을 같이하는 어머니들과 같이 폐품 모으기를 1 년여,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폐품을 팔아 모은 돈이 4만 원이 되었습니다. 비탈길을 손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뒹구르기를 몇 차례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과 피로한 가운데서도 모이는 그 돈을 보면 그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또 하나의 괴로운 일이 저의 앞에 몰아 닥쳤습니다. 그것은 저희 10통 2, 3, 4 반쪽 대다수의 세대에 전압이 약해서 형광등이 들어 오지 않는다는 주민들의 진정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다소 당황하였습니다. 일단 한전에 건의하여 보기로 하고 건의서를 한전에 보냈습니다. 한전 측 답변은 명약관화하였습니다. 당분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2, 3, 4반을 통하는 도로상에 전주가 없기 때문에 우선 전주를 새로이 신설해야 되기 때문에 그 예산이 당분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냥 주저 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다음 날부터 한전에 근무하는 저의 학교 후배들 몇 사람을 찾아 다니면서 저희 동내 실정을 호소하고 사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공과 사가 그렇게 용이하게 해결 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최후 수단의 방법으로 저희 마을 실정과 주민들의 가난한 생활상태를 소상하게 적어 눈물 어린 진정서를 한전에 보냈습니다.
<낮은 전압 사정도 의외로 빨리 해결>
그런데 이것이 왠 입입니까? 약 1 주일 후 한전에서는 전주와 변압기, 전선을 차에 싣고 와서 드디어 공사를 완료하였습니다. 그날 밤부터 저희 동네는 형광등이 밝게 비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이날 이었습니까? 물론 저희 동네주민들도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적으나마 동네 위하여 일을 보게 된 보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밝아지는 우리 마을은 그 동안 여러 가지 세금과 적십자회비, 방위성금, 불우이웃돕기 등 각종 공납금 납부성적이 가장 불량하던 저희 통이 이제는 납부 성적이 가장 우수한 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지금까지 해오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힘이 저의 뒤에 있었습니다.
제가 동네 일을 보는 동안 저의 아내는 음으로 양으로 저희 동네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주민들의 협조와 주민들의 융화를 간구하면서 제가 하는 일에 적극 도와주었고 제가 못하는 일들을 처리해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미아 7 동 사무소의 직원 인력 부족으로 주민등록부표작성과 기타 신 주민등록번호 등 곤란을 초래할 때는 저와 아내는 동사무소로 내려가 일 주일이고 삼 일이고 동행정의 보조 역할도 하였습니다.
<제 안사람도 새마을운동 대열에>
1976년 3월이었습니다. 배종원 동장님께서는 제 아내더러 미아 7동 새마을 어머니회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저의 아내가 결혼전 경리직에 종사하였던 것을 아시고 마을금고 회계원까지 겸직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아내는 우리 두 사람 모두 마을 일에 매달릴 때의 가정 형편을 걱정하여 망설였습니다만 백동장님의 부탁을 쾌히 승낙하기로 하였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선봉에 서서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첫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하는 부부가 되어 내 마을과 내 이웃을 위하여 봉사할 것을 둘이 굳게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동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77년부터는 서울시의 방침에 따라 50세를 초과한 사람은 통장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제는 76년 12월 31일자로 통장 직을 사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임 여희지 동장님께서 77년 1월 24일 저를 10통의 새마을지도자로 다시 이 마을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장에서 다시 새마을 지도자로>
다행스럽게도 제 후임의 통장에는 그전부터 저와 뜻을 같이하던 정언묵씨가 위촉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지도자로써 신임 통장과 합심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슴 깊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정통장이 저를 불렀습니다. 정통장은 나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형님! 이제부터는 통장이다, 새마을지도자다, 이러한 사이에서 벗어납시다. 형님과 동생의 입장에서 서로 손을 잡고 모든 일을 해나갑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가슴을 치는 사랑과 소망의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일 큰 일 가리지 않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잘 못 된 것은 서로가 충고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도시 새마을 운동의 파도소리가 저희 마을에도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다시 새로운 사업에 대한 구상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을금고 사업의 육성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면 자조 협동하는 첩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마을 주민들 가정을 한 집 한 집 찾아 다니면서 마을금고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고 계몽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을 금고 회원이 되어 줄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여유가 없게 살고 있는 저희 마을 주민들이라 저의 끈질긴 설득과 종용에 마음은 이었지만 좀처럼 참여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설득의 길에 나섰습니다. “하루에 담배 두 개피씩만 절약합시다”. “한 끼에 쌀 한 숟갈씩만 따로 모읍시다””반찬 살 때 단돈 십 원씩만 때어 놓읍시다”이렇게 설득하기를 20여일 저는 돈가방을 둘러메고 각 가정을 순방하면서 마을금고의 출자금을 모았습니다.
<마을금고육성을 위해 온 동리 헤매>
1977년 2월 5일에 첫 번째로 출자금을 모아 마을금고에 출자하고 저금 통장을 찾아 각 가정에 나눠 주었습니다.
2월 5일 출자금 1만 2천원
2월 11일 1만 3천원
2월 18일 1만 6천원
2월 25일 1만 7천원
이런 식으로 매월 4회 혹은5회씩 각 가정을 순방하면서 출자금을 모아 마을금고에 예탁하였습니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와 출자금을 모두 모으고 마을금고에 출자금을 예탁하고 나면 12시가 됩니다. 어떤 때는 지칠 대로 지쳐 허기가 지고 쓰러질 뻔한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축 액이 많을 때면 이것 저것 다 잊어버리고 용기가 북돋곤 합니다. 마을금고에 대한 육성만은 기필코 성공의 열매를 맺으리라, 저는 두 입술을 꼭 깨물었습니다.
4월이 지나고 5월, 6월 저는 쉬지 않고 뛰어 다녔습니다. 저희 동네 주민들도 이제 끈질긴 노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기만 하면 말 없이 출자금을 내주곤 합니다. 마을금고에 가면 저의 아내가 돈을 받고 저의 아내도 기뻐하고 위로하여 줍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을 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도봉구청으로부터 저희 동네에 전달이 왔습니다. 태릉에 보도의 ‘백색 블록’을 ‘적색블록’으로 교환 작업이 시작 되고 있으니까 ‘백색블록’을 가져다 미아7동에서 사용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달을 받은 저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우리 마을 뒷골목도 이제 보도블록으로 깨끗이 포장하게 되었구나’ 하고 저는 마치 춤을 출 것 같은 기분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저와 정통장은 즉시 화물차 2 대를 전세 내어 보도블록 2천 개를 운반하여 왔습니다. 저희 마을 주민들도 서로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다음날 우리 주민들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너도나도 서로가 다투어 보도블록 포장공사에 합심하여 일했습니다. 누구 한 사람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폐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화물차 운반비와 기타 경비를 지출하고 드디어 저희 마을 뒷골목 포장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손수레를 끌고 폐품을 모으기 1년유여, 그 보람을 이제 찾은 것입니다.
1977년 12월
돈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각 가정을 순방하면서 마을금고 출자금을 모으기 1년이 되었습니다. 한 푼 한 푼 모아 마을금고에 출자한 돈이 160만원이 넘어섰습니다. 저희 주민들은 160만원을 저축한 것입니다. 한 집에 통장을 하나씩 갖게 되었습니다.
<숙원의 뒷골로 포장 이루어져>
저희 미아 7동 31개나 되는 통 중에서 저희 10통이 마을금고 출자금 실적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옛 격언이 있습니다. 이 격언이 정녕 나를 위한 것이 아닌가. 저는 다시 보이지 않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가난과 실의에 쌓였던 저희 마을엔 활기가 넘쳤습니다. 반상회에 모였던 저희 마을 주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감격에 넘쳐 모두가 박수를 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민 모두가 약속했습니다.이제 우리도 ‘하면 된다’’서로 협동하고 서로 열심히 힘을 합하자’’모두 용기를 내어 가난을 없애자’하고 힘차게 외쳤습니다. 하늘은 정녕 하려고 애쓰는 저희 마을에 복은 내려 주신 것입니다. 주민들에게 설득하고 종용한 그 보람이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주민들 모두가 협동한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진 것입니다.
1978년 4월 14일 저는 저희 동 새마을지도자 협의회장인 김진수 지도자와 협의하였습니다. 거리 질서를 확립하기로 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저와 김진수 지도자는 각기 전자 ‘메가폰’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계몽하였습니다.
1. 버스는 차례로 줄을 지어 질서 있게 탑시다.
2. 사람은 항상 안전한 인도를 이용합시다.
3. 길을 건널 때는 좌우로 살펴 손을 들고 조심조심 건넙시다.
4. 담배꽁초나 휴지는 길가에 버리지 말고 가까운 쓰레기통에 버립시다.
5. 운전기사는 교통법규를 킵시다.
이렇게 우리는 외쳤습니다. 새마을 모자를 쓰고 어깨에는 계몽 띠를 두르고 둘 이는 매일 아침이면 차도로 나와 주민들을 선도하고 계몽하였습니다.
10일이 지나고 또 보름이 지나고 보니 이제 눈에 띄게 저희 마을의 거리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복잡한 출근 시간이 명랑하고 깨끗한 거리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던 수련장에>
1978년 4월 30일
저는 너무나도 부족하였던 지도자로서의 소양과 참인간의 교육을 받기 위하여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에 입교하였습니다. 제가 그리고 그리던 수련장이었습니다. 지도자이기 이전에 노쇠한 저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고 삶에 대한 등불이 되어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11일간의 교육중 ‘저는 지금까지 저의 마을에서 그리고 저의 가정에서 과연 무엇을 해왔는가’라고 깊은 참회와 반성에 잠겼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새마을의 기수가 되어 무에서 유를 창조한 빛나는 역사의 주인공들의 성공사례에 저는 한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여러 지도자의 마을을 돌아보면서 저는 부끄러움과 저의 무능함을 한탄하였습니다.
연약한 지도자로서 개인의 영화와 몸소 얻은 학사의 명예마저 버리고 황폐한 돌산을 맨손으로 개간하여 에덴동산을 이룩한 그 엄청난, 너무나도 장한 지도자들의 업적에 비하여 저는 그저 머리 숙여 그들의 앞날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를 빌 따름입니다.
저는 지금 숙연히 저의 두 눈을 감고 저에게 말하여 봅니다.”너는 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라. 너는 언제나 너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너는 너의 남은 삶을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너의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너의 조국을 위하여 희생하라. 그리고 너의 모든 이웃들을 영광 되게 하여라. 그리하여 네가 죽어서 저 하나님 품에 안길 때 너는 그 때 비로소 말하라. 내가 내 마을의 지도자였노라”고
1978년 6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