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는 배가 다른 이복형제였다. 와스카르의 어머니는 쿠스코에 있던 정통 왕족 출신이었고 무엇보다 와이나-카팍의 정후(正后)였기 때문에 적통왕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아타우알파의 어머니는 와이나-카팍이 멸망시킨 키토(Quito)왕국 마지막 왕의 공주였으며 새로 정복된 지역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와이나-카팍의 후궁이 된 여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타우알파는 장성한 후 와이나-카팍을 따라다니면서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는 정작 적통 왕자들인 두 형보다 아타우알파를 더 아꼈다. 와이나-카팍이 콜롬비아 지역에 간 이유는 앞서 말한 데로 그 지역을 정복하고 위무하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복민들로부터 이상한 족속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이방인’들을 찾으러 간 것이다. 와이나-카팍은 이 이방인들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퍼뜨린 병에 걸려 죽었고 이방인들에게 제국이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비록 와스카르가 적통 왕자였는지는 몰라도 군사적인 재능은 아타우알파가 월등하였으며 아울러 그는 아버지를 따라 북방의 정복전쟁에 종군하여 전쟁으로 잔뼈가 굵었고 언제나 부황의 곁에 있었다. 와이나-카팍이 키토에서 죽는 순간 임종을 지킨 것도 아타우알파였다. 이 때문에 황제를 섬겼던 제국군의 장군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와스카르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전임 사파-잉카인 와이나-카팍을 따라 북방정벌에 나선 정예 병력은 모두 아타우알파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이에 와스카르는 쿠스코 전통 귀족들의 병력을 모아 아타우알파와 싸웠다. 아타우알파는 성급하게 선봉군을 이끌고 싸우러 나섰는데 중간에 투메밤바 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에서 마음을 놓고 놀 정도로 와스카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첫 전투인 칠로팜파에서는 와스카르 곁에 남아있던 유능한 장군이자 왕자인 아토크의 활약으로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아타우알파군이 불시에 기습을 당하여 패하고 아타우알파는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와스카르군이 승리를 자축하며 술에 취하는 바람에 아타우알파는 한 여인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 수 있었고 키토근처에 모인 정예병력을 모두 거느리고 반격에 나섰다. 평화로운 쿠스코 인근에서 모은 병력이 치열한 정복전으로 단련된 북방의 정예군을 이길 리가 없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아타우알파의 북방군은 장군인 차쿨치막과 키즈키즈 등의 지휘하에 쿠스코군을 연파하고 1532년에는 쿠스코를 점령하고 와스카르를 포로로 잡는다. 아타우알파는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와스카르의 일족을 멸살(滅殺)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와스카르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키토에 머물고 있던 아타우알파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즉위를 하기 위하여 쿠스코로 향하였다. 그러나 쿠스코로 가는 도중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 근처의 온천에 들러 휴식을 취하면서 전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이 와중에 근처에 수염난 이상한 족속들이 와있다는 말, 그리고 이들이 몇몇 사나운 부족들과 싸워 이겼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만나게 된다. 에스파냐와 피사로 카하마르카 근처에 와있던 이방인들은 다름이 아니라 콘키스타도르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느린 168명의 에스파냐 병사들이었다. 에스파냐 엑스트라마두라의 트루히요(Trujillo)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피사로는 또 다른 콘키스타도르이며 멕시코의 정복자가 된 에르난 코르테스의 6촌형 뻘이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줄인 이름이며 원래 이름은 Hernan Cortes de Monroy y Pizarro). 두 사람 다 콘키스타도르이고 가까운 친척이며 아울러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지만 피사로와 코르테스는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다. 일단 출신부터 따지자면 코르테스는 중급 정도이기는 하지만 귀족 출신이고 어린 나이에 타 지역의 대학까지 다닌 엘리트였다. 코르테스의 부모는 그가 중급귀족의 신분을 넘어 출세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피사로는 가난한 군인의 아들, 그것도 적자가 아닌 서자였고 그나마 부모가 교육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청소년기까지 글을 알지 못하였다. 출신도 좋지 않고 교육도 받지 못한 청년 피사로가 에스파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를 뒤로 하고 1509년에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된다. 아메리카로 간 그는 1513년에 다른 콘키스타도르인 바스코 드-발보아의 원정대에 지원하여 파나마를 가로질러 ‘남쪽바다’, 즉 태평양을 발견하는 여정을 같이 했다. 발보아는 지금의 콜롬비아 북부 지역의 총독이 되었고 이후 다빌라란 인물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듯이 발보아 같이 획기적인 공을 세우면 시기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었고 발보아는 그의 공을 시기한 다빌라의 모함을 받아 새로이 발견한 태평양 지역을 에스파냐의 왕실에게 바치지 않고 자신의 개인 왕국으로 만들려 했다는 누명을 쓴다. 이에 발보아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피사로는 다빌라의 편에 서서 발보아를 체포하여 법정에 세운다. 발보아는 결국 왕실에 대한 불충을 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되고 피사로는 다빌라를 도운 대가로 시우다드 파나마(파나마 시티)의 시장이 된다. 에스파냐의 식민지들은 배신과 모략의 땅이었고 피사로가 이에 편승하면서 그의 인생 역시 배신과 모략으로 얼룩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