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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8 - 몽골 러시아를 점령하고는 유럽을 침략하여 중세 유럽을 유린하다!
잭 웨더포드의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에는 1937년 황모파 라마승들이 수백년간 경배
해온 흑마 말총으로 만든 영기와 징기스칸의 영혼은 스탈린의 부하들에게 파괴
되었는데..... 승려를 살해하고 여승을 강제 폭행하며 유물과 경전을 불태웠으니 3만명의
몽골인이 처형당했다는데 이는 러시아인들이 예전에 “타타르의 멍에” 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칭기즈 칸이 유럽을 밟은적은 없지만 호라즘의 칸을 추격하던 수부타이와 제베가 카프카스로 빠졌다가
1223년 칼가강 전투에서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을 섬멸했으니.... 러시아 공국들의
야전 전투 역량이 뿌리채 뽑혀 이후 몽골의 서방 진군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각개격파 당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공국들의 연합체 였으며 게다가 내부 도시들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목책에 둘러
싸인 마을이었고 나무를 많이 쓰니 몽골군의 화공에 속수무책이었는데,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황금 부대에 의해 우크라이나 지역은 초토화되었으며..... 북쪽 도시 몇개만이 살아
남았는데 몽골군이 발길을 돌렸던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세금을 대리 징수하던 모스크바 였습니다.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군은 카스피해까지 진출해 루스 지역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
냈으니.... 1221년 몽골군의 병력은 2개 투멧(12,000 ~ 20,000명)으로 정찰대 정도였고,
한차례 전투 후에는 물러났는데..... 그러나 1229년 바투의 원정대는 십만이 넘는
대군이었고 루스(러시아)는 몽골에 완전히 복속당해 200년간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13세기 러시아는 슬라브인들이 세운 공국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통일은 어려웠는데, 주력은 민병대로
구성된 보병(스메르디) 이었고, 방패와 도끼, 창, 활,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보병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갑주가 부실했기 때문에 화살 공세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영주들은 드루지나 라고 부르는 용맹스러운 중장기병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도시
에는 성곽이 많지 않았으며 도시 주변을 둘러싼 방책은 목책이었기 때문에 수성전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킵차크 지역에는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살고있었는데,
러시아 공국들을 약탈하거나 중앙아시아에서 용병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220년에 이미 수부타이는 킵차크족을 공격하고 그들의 칸을 죽였으니.... 이때
부터 킵차크인들은 몽골과 원수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킵차크인
중 하나였던 코텐은 생존자들을 규합하여 루스(러시아) 지역으로 달아났습니다.
1221년 수부타이와 제베는 카스피해 남부(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 왕국의 게오르그 4세의
군대와 격돌했는데, 몽골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정면 충돌을 피해
경기병을 보낸 다음 퇴각하는척 상대를 개활지로 끝어내 포위섬멸했으며.....
두번째 전투에서도 조지아군을 패퇴시켜 코카서스 산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했습니다.
킵차크족 코텐은 인맥이 있던 루스 공국으로 넘어가 대공과 귀족들을 충동질하자 대공들은 처음에는
믿지않았으나 결국 1223년 키예프를 중심으로 남부의 18개 공국이 연합군을 결성해 몽골을
치기로 했으니 숫자는 3만에서 8만으로 보는데 전투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칼가강에서 벌어졌습니다.
몽골군은 호라즘을 공격중이었으니 칭기스 칸의 명령에 따라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군은 몽골군과 싸울 의도가 없다고 속인후 기습해 후발대 천여명을 살상하는데 성공
했으나, 이후 몽골의 본대와 맞붙게 되고 루스 연합군은 몽골군의 위장 퇴각 전술에 휘말리고 맙니다.
몽골인들은 지속적으로 퇴각하여 루스군을 본토에서 최대한 격리시킨 뒤 강가에서 우회해
각개격파로 킵차크족을 물리첬고, 달아나는 킵차크인들이 후방의 루스군과
충돌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자...... 그대로 돌격해 루스(러시아) 군 까지 전부 괴멸시킵니다.
키예프 대공은 후방 진지에서 패잔병들을 기다렸으니 철수도 못하고 포위당하여 항복한
다음에는 처형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와중에도 중장기병인 드루지나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몰살당했으며 킴차크족 코텐은 살아서 헝가리로 도망칩니다.
칼가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야전 병력이 사실상 궤멸되었고 이때 수부타이는 분열된
루스의 공국들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는데..... 다만
본인과 제베가 거느린 군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정보만을 가지고 귀환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몽골에 대한 루스의 저항이 가장 강력했던 것이 바로 이 1223년으로 이후에는
단 한번도 그들의 군사적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했는데..... 물론 2차 침공
때의 루스 제후들이 1차 때 보다 무능력하고 멍청하거나 혹은 이기적이라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정보력에서 우세헸던 몽골군이 루스의 연계가 느슨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거점을 두들겨댄 탓에 공황 상태에 빠진
대공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바투의 원정은 1235년 후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출발시에는 5만명
내외였으나 볼가강의 볼가-불가르 왕국을 무너뜨리고 적인 유목민족
킵차크족을 대거 흡수한 후에는 15만명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공국들은 원래 류리크 가문으로 혈연관계가 있었는데, 1237년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인 블라디미르 공국이 가장 먼저 몰살을 당했고 로스토프,
유리에프, 야로슬라보가 차례로 함락되었으며 1238년 노브고로드를
치기 위해 몽골군이 움직였을 때 이제 루스 북부에는 온전한 도시가 거의 없었습니다.
토르초크에서의 민병대의 선전으로 바투가 노브고로드를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을 때
에도 이는 마찬가지였으며.... 몽골군은 후방에 위험을 놔둔 채로 퇴각해야
하는 위기에 빠졌으나, 루스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눈 뜨고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1239년에는 키예프를 함락시켰는데.... 키예프는 돌로 된 단단한 성벽으로 지켜지고
있었으며 할리츠키 휘하의 수비 병력도 잘 싸웠지만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멸했고 도시는 초토화되었으며, 키예프가 무너지자 남부 루스 전체가
무너졌으니..... 살아남은 공국들은 속국이 되어 몽골에 상납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러시아 여러 공국들은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아닌 분권적 연합체에 가까운 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니 각각의 공국들은 중심 도시와 주변의 배후지를 영토로 삼아 독립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범 루스(러시아) 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과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완전히 남남이었던 것은 아니니 외부의 적이 공격하면 연합해서 맞섰던 것입니다.
류릭 왕조는 수백년간 러시아 공국들이 통합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한 사례는 여러번 있었지만 교통,
통신, 행정기술 한계상 광대한 러시아 전체를 통합하는 정치적 구조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분할
통치가 이뤄졌는데 그 중에 수장격인 키예프 공국이 다른 공국들에게 종주권을 인정받는 형태였습니다.
터키 아나톨리아 동부와 카프카스 남부 지방들이 차례대로 몽골군에 점령을
당하거나 아직까지 전쟁을 치루거나 조공을 바치는 와중에,
조지아 왕국은 1238년 부터 1327년 까지 백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1250년대 이후 조지아는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전에 돌입했고 다비트 나린을 선봉으로 3년
동안 긴 전쟁을 치뤘으며, 이후 다비트 데메테르 2세와 다비트 8세에서까지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게오르기 5세 대왕 시대에 들어서서 결국에는 몽골을 완전히 캅카스지방 밖으로 몰아냈고
1200년대 초반 전성기 시절의 조지아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게 되지만, 14세기 말에는
몽골의 후예인 티무르 제국의 침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게 되고, 16세기가 되어야 겨우 회복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체첸 지방을 여러차례 공격했고 지금의 러시아도 힘들어하는 이들 전투민족
들은 2~ 3차례의 전면전 공격에도 특유의 게릴라 공격으로 버텨내고 더
이상 침략의 의미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몽골 제국은 포기하는데....
체첸은 두번의 침공을 이겨냈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은 탓에 긴 후유증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킵차크족의 칸 코텐은 킵차크족 생존자들을 규합해 헝가리의 벨라 4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가톨릭
으로 개종했는데.... 하지만 몽골은 수만명이나 되는 투르크족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는
데다가 또 헝가리 평원에 광대한 목초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투는 계속 서쪽으로 진군합니다.
하지만 킵차크족의 칸 코텐은 몽골군이 도착하기 한참 전에 죽었는데.... 벨라 4세가 그를
중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위협을 느낀 기득권층에게 살해당한 것이니, 이에 분노한
킵차크인들은 헝가리 땅에서 한바탕 분탕질을 친 뒤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 갔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인들의 주력은 중장기병이었으니 유럽인들이 몽골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
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니.... 십자군 전쟁의 사례를 보면 알수 있듯 당시
유럽의 기사들은 중장갑에서 비롯된 강력한 충격력을 갖춘 막강한 돌파력을 자랑했습니다.
아랍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기사단의 돌격은 마치 쏘아진 화살과 같아서, 이들이 돌격을 시작한 이상
막아내기 힘들어 단번에 전황을 뒤집을수 있을 정도였다고히며, 철갑류는 화살에 대해 뛰어난
방호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몽골이나 튀르크 이슬람등 유목민 군대는 개별 싸움에는 불리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몽골군에게 연전연패했는데, 몽골군이 이들을 상대한 방법은
두 가지니 하나는 노포, 투석기, 불화살(재료의 특성상
부가적인 효과) 등 단순한 화살 이상으로 강력한 투사 무기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는 비교 우위라 할수 있는 경무장으로 인한 기동력과 지구력을 이용해 추격하는 기사
들이 지칠때 까지 후퇴하면서 유인하다가 마침내 탈진하면 역으로 반격을 가한 것
인데..... 단순한 위장 퇴각, 포위 섬멸등 초원전술을 적절히 활용하여 적의 약점을 찌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유럽 군대 장교단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두번째 방법만으로도 쉽게 무너졌으니 그 전까지
이들은 전투력이 높은 소수 기사들 중심으로 싸우는게 전쟁의 주류였던지라 적군이 정면 충돌하지
않고 후퇴해 유인하는등 조직력과 관련 노하우가 필요한 대규모 전투를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투는 군대를 넷으로 나누었으니 목표는 헝가리였는데.... 본대 외에 바이다르는 북쪽으로, 구유크는
남쪽을 경유하도록 했고, 카단은 폴란드와 독일로 부터 건너올 원군을 막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특히 당시 폴란드는 분할공국 시대로, 신성로마제국 마냥 나라 전체가 내전으로 사분오열되어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었으니.... 폴란드 귀족들의 초청을 받고 이주한 독일계 기사들이
북쪽에 정착해 튜튼 기사단으로 뿌리박는데도 거기에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카단군이 폴란드를 황폐화시키면서 크라쿠프로 향하자 볼레슬레프 4세는 가족들과 패물을 챙겨
모라비아로 달아났으며, 시장인 블라디미르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근위대
와 함께 몽골군에 맞섰고 타타르인들이 이들을 살육하는 동안 시민들은 안전하게 피신
할수 있었지만 몽골군은 사방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행하니 피난민에다가 공황상태를 야기합니다.
크라쿠프를 함락시킨 카단은 브로츠와프를 우회하여 실롱스크로 향했고, 1241년 그곳에서 동유럽
땅에 발을 들인 이래 처음으로 군대다운 군대를 만났으니, 실롱스크의 헨리크 2세 포보즈니는
몽골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영지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각지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했고 보헤미아왕에게서 원군을 약속받았는데, 하지만 보헤미아군
보다 카단이 먼저 도착했고 헨리크는 보헤미아군의 도움 없이 싸워야 했는데... 4월 9일 양군은
레그니차 평원에서 격돌했고, 몽골군은 "또!" 위장퇴각에 이은 포위 전술로 폴란드군을 전멸시킵니다.
헨리크는 전사했고 기사들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으니, 몽골군은 전사한 폴란드 군의 시체에서 전리품
으로 귀를 모두 잘랐으며, 특히 헨리크는 머리가 잘린 뒤 창끝에 꿰였는데... 그러나 몽골군
또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니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에다가 튜튼기사단도 참여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헨리크는 그야말로 모을수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달달 긁어모았으니 광산의 광부들도 무장시켜 전장에 내
보낼 정도였는데, 광부들은 포로로 잡혀 바투의 사유지에서 부역에 시달리게 되며 레그니차 전투후
몽골군은 보헤미아군의 참전을 막기위해 폴란드 남부와 중부를 약탈하다가 헝가리의 본대와 합류합니다.
폴란드는 몽골의 침공을 대홍수와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빗대어 표현하는데... 때문에 북부에서
자리를 잡던 독일 튜튼기사단에 대한 견제를 더더욱 할수가 없었고 분열된 폴란드는
몽골 침공으로 치명타를 맞았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들의 견제까지 겹치면서 이후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가 집권해 다시 폴란드를 통합할 때까지 혼란스러운 세월을 맞습니다.
훗날 발슈타트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는 군사학에서도 나름대로 의의를 가지는데, 기동력과 조직력
의 우위를 살려 화력과 개인 단위의 전투 능력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를 제압했기 때문이니다.
몽골은 중장기병의 갑주를 둔하고 무능한 겁쟁이들의 산물로 치부하기 까지 했지만 프랑크인
기사단은 매우 강력한 전사들이었으니, 몽골군 또한 중장기병을 운용하기는(통상 30%)
했으나, 이시기까지 몽골군의 중장기병은 유럽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가벼운
경장기병에 가까웠고 운용면에서도 유럽인들의 운용방식인 충격기병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결정적으로 몽골군이 승리한 주 원인은 '장교단들의 능력부족' 인데 또한 카이두는 폴란드군
을 포위한후 화약무기를 쏟아부었는데, 이 무기는 연기와 악취를 일으켜
시야를 제한하여 일부 폴란드군이 적의 계략을 염려해 퇴각하게 만드는 효과도 보였습니다.
이 일은 기존의 몽골인들에 대한 소문과 겹쳐져 "몽골인들은 말 뿐만 아니라 용까지 길들
이고 있는 악마들이다" 라는 소문이 퍼지는 계기가 되니, 헨리크가 전사한
장소에는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19세기 폴란드를 분할한 프로이센은 수도원
을 군사학교로 만들었고 600년전 그곳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숱하게 강의 했습니다.
바투의 본대는 헝가리로 순조롭게 진군하여 1241년 5만에 달하는 벨라 4세의 군대와 교전하는
데.... 몽골군은 페스트 근처를 약탈하며 헝가리군을 자극했고, 프레드릭 공작이
이를 격퇴했고 이후 벨라 4세는 몽골군 전위대를 격파하며 사요강 까지 헝가리군을 전진시킵니다.
4월에 헝가리군은 사요강까지 진출했는데, 강 건너편에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 본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벨라 4세는 몰랐지만 근처에 몽골군이 있다고 가정하고 보급품 수레를 사슬로
연결하여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였고, 몽골군 척후병들이 도강을 유도하는 데에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4월 11일, 헝가리군은 별동대를 보내 야간에 7km 를 전진해 몽골군 진지를 기습하려
시도했는데... 바로 그날 새벽, 몽골군 또한 헝가리군 진지에 야간 기습을
하기위해 강을 건넜고, 양군은 사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바로 직전에서 맞부딪칩니다.
활을 겨냥할수 없는 야간인데다 먼저 강을 건난지라 배수진 상황에 처한 몽골군은 그
특유의 기동력을 살릴수 없는 상황에서 중무장한 헝가리군과 맞서 싸우는 상황
에 처해 불리한지라 결국 다리를 내주고 철수했으며, 헝가리군은 다리를 점거합니다.
소식을 접한 몽골군은 계획을 바꾸어 수부타이가 별동대를 이끌고 후방으로 돌아가 강을 건너 헝가리군
본영을 공격하고, 그 사이 바투는 남은 부대로 다리의 헝가리군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바투가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한 탓에 헝가리군과 정면대결을 했습니다.
게다가 군을 둘로 나눈 탓에 수적으로도 열세였는데.... 헝가리군의 석궁에 대응해 바투는 7대
투석기(혹은 노포) 를 동원했으나, 전 병력을 동원한 벨라 4세의 맹공에 바토르 30명과
부관인 바카투가 전사하는등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수부타이의 별동대가 도착해
후방을 찔렀고 몽골군이 불화살로 응전하자 헝가리군은 포장마차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합니다.
피해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바투는 몽골군의 장기인 추격섬멸까지 포기할 생각도
했으나 수부타이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헝가리군 포장마차 진지까지
공격했고 이것도 쉽지가 않아 마찬가지로 공성무기 까지 동원해서야 겨우 파괴합니다.
헝가리군은 보급에 쓰인 수레를 쇠사슬로 연결해 진지를 구축했으니 포장마차를 공격하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은 몽골군은 공성무기를 동원해 공략했으니, 포장마차는
헝가리군에게 효과적인 방호를 제공했으나 동시에 행군속도를 떨어뜨린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다만 몽골군의 주 편제가 기병이고 강력한 투사무기(화약이나 타르, 송진)를 많이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포장 마차진은 기병에 대적할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이었으니, 몽골군에 공성무기가
없었다면 엄청 고전항뻔 했는데, 기병으로 마차 같은 장애물을 돌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고는 포위망을 느슨하게 하여 헝가리군의 도주를 유도하자 기동력 격차를 감안하지 못하고
도주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헝가리군을 끝까지 밀어붙여 궤멸시켰으니.... 헝가리군은
우골린 대주교가 전사하고 칼만 왕자가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벨라 4세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납니다.
이후 몽골군은 크로아티아 왕국과 불가리아 제2 제국을 상대하니... 벨라 4세가 크로아티아
와 협공해 다시 한번 몽골과 전쟁을 벌이지만 크로아티아는 패전하였고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벨라 4세의 탈출을 도우면서 몽골군대는 계속해 추궁에
들어가고 약탈과 학살이 점차 커지는 상황에서 몽골군 급작스럽게 후퇴를 하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불가리아도 공격했는데, 이반 아센 2세의 사망 이후 급속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던
불가리아를 황폐화 시키려고 했으나 정복하지는 못하고 조공을 받아내는데 만족
하는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바일로가 신의 계시로 몽고 놈들을 격퇴
시키겠다며 의용군을 조직해 몽골군을 도나우강 이북으로 쫓아내고 안정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몽골의 유럽 침공에 대해서는 오고타이 칸이 유럽원정군으로 보낸 장수만 해도 바투에다가,
이후 대칸이 되는 자신의 아들 구유크, 역시 훗날 대칸이 되는 몽케, 사준사구의
일원이자 백전 노장 수부타이 등에 병력이 7만-15만명 수준이었으니 대단한 규모였습니다.
헝가리를 점령한 몽골군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북부를 정찰하며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이려 했는데...
그러나 1242년 돌연 헝가리에서 철수함으로써 고금의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으니 가장
유력한 설은 본국의 오고타이 칸의 사망 이후 벌어진 후계자 계승 문제인 쿠릴타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이런 사실을 알리없었고, 자신들이 침입자들을 격퇴한 것이라 믿게 되었으니.... 이 사관은
이후로도 수백년을 이어져 에드워드 기번의 경우 오스트리아의 노이슈타트에서 50명의
기사와 20명의 석궁병이 몽골군을 격퇴한 사건을 들어 "몽골인들은 프랑크인의
무용을 두려워 해 물러났다!“라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르렀는데 기번은 18세기 사람이니 무리도 아닙니다.
유럽은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지만 몽골은 성연이 된 아들에게 양과 말을 주어 분가를 시키니 막내
가 부모를 계승하는데.... 오고타이칸이 죽은후 아들은 칸을 계승하기에는 너무 어렸으니
삼촌 툴루이가 유력했고 그는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에 아릭 부카등 쟁쟁한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바투도 저 몇 개월간 이어질 쿠릴타이에 참가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칸이 되도록 힘을 보태야
하니 철수한 것인데... 이는 마치 정유 재란에서 천안까지 북진한 일본군 중에 구로다 1만이
진격해오자 겁에 질린 조선군은 모두 도주했고 명군 기병 해생과 파새 4천이 1597년
음력 9월 7일 직산에서 저지하다가 후방에서 모리군 3만이 포위를 시작하자 수원으로 도주합니다.
명군 양호는 마귀를 시켜 한강방어선을 쳤고 조정에서는 왕비와 왕자들을 황해도로 피란시키니
서울은 혼란에 빠졌는데....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은 장기전을 택하니 울산에서 순천까지
28개 왜성을 쌓고 늦은 봄에 출진해 경상, 충청, 전라도를 유린한후 음력 10월 2일
(양력 11월 초순) 까지남해안 왜성으로 물러나 겨울을 보낸후 다음해 늦은봄에 재출격을 명합니다.
따라서 일본군은 10명의 장수 14만 중에서 천안까지 북상한건 모리와 구로다 2명 4만에 불과
했고 며칠간 천안일대를 약탈하다가 9월 11일 물러가니 처음엔 왜군의 계략으로
생각해 한강 상류로 도하하는가 살폈던 조정은..... 이후 왜군을 추격하면서
낙오병을 약간 죽인걸 두고 조명연합군이 직산 전투에서 승리해 왜군이 달아났다고 생각합니다.
12만 일본군이 북진할 때 맞선 조선군은 황석산성에 5백과 남원성에 1천등 1천 5백에 불과했고 모두
숨거나 도주했으며 9월 7일 직산전투는 명군 4천만 참전했는데 숟가락 하나 얹는다고 슬쩍
조명연합군이 이겼다고 말하고, 9월 16일 벌어진 명량해전 패배 때문에 바다로 보급이 끊겨
일본군이 후퇴했다는데.... 9월 11일 철수한 일본군이 9월 16일 명량해전 전투 패배 때문에 달아났다니?
중세 유럽인들에게 있어 몽골군은 어느날 갑자기 동쪽에서 나타난 미지의 존재들이었으니,
13세기 초엽에는 “프레스터 존”신화와 엮여 '동방의 기독교 국가' 에 대한
환상이 널리 번졌으나, 바투의 원정으로 그들이 자신들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유럽인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추론해 내려고 했습니다.
독일 지방에서는 그들이 동방박사의 후예라는 설이 퍼진 일이 있었으니, 1164년 십자군 원정에 참전했던
기사들이 '동방박사의 유골' 로 추정(?) 되는 인골을 가져온 일이 있었는데, 지금
동방에서 온 무리들은 그들의 후손이며 탈취당한 선조들의 유골을 되찾으러 온 것이라는 얘기 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마땅히 유골을 돌려줘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것. 또한 몽골인들이 유대인의 후손이며, 유대력
5천년을 맞아 다윗의 재림을 앞두고 유럽인들을 학살하러 왔다는 풍문도 있었습니다.
가장 자주 접할수 있던 이야기는 "이들은 인간이 아닌 악마이며, 인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악한 존재"
라는 식의 소문이었으니, 편집증적인 몇몇 기록에는 이 악마들이 벌이는 광란의 살육과 취미에
대한 서술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타르타로스 지옥의 문을 열고 무저갱
에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나타났으며 말세가 임박하였다는 종말론으로 까지 번지게 됩니다.
실은 이런 주장들의 상당수는 교묘한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재생산된 측면도 있는데..... 예를 들어
유대인에 대한 낭설은 몽골인들을 막아내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나 민심을
선동하여 부유한 유대인 세력을 공격해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