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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에 쓰는 어머님전 상서/금태남
어머님께서 저를 낳으실 때 신라고도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 최 부잣집 99칸 뜰 기와집 태실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매월 초하루 보름 삼국통일의 주역이 신 김유신 장군 생가 우물물을 마시고 저를 키우기 위해 4km가 넘는 곳까지 다니셨다 하셨지요! 경주 교천을 중심으로 반월성 큰 숲과 우렁차고 멋진 남산을 배경으로 한 최부잣집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게 해주심에 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버님은 우리나라 서양화 선각자이셨고 교육자이셨던 금 금자 연자 이신 저의 아버지와 결혼하셨지요? 수재만 모인 대구사범 출신이신 아버님과 결혼하셔서 행복을 꿈꾸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일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데 5남매를 두시고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애통하셨어요?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셨으니 그때의 참혹한 어머니 심정은 어떻하셨을까요. 5남매의 어머니로서 혹독한 격동기를 맞아 그 어려웠던 오랜 세월을 오직 자식을 위해 한평생 고생만 하셨지요. 향년 84세에 짧은 인생의 삶을 마감하실 때 얼마나 한 많은 세상을 원망하셨습니까? 제 나이 팔순에야 철이 들어 어머님 생각이 불효자식이 몇자 적어 올립니다.
오늘은 만춘의 봄을 맞아 개나리와 벚꽃이 피고 지고 아카시아 꽃향기가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만물이 생동하도록 하늘의 도움 으로 조용한 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경주 계림초등학교, 경주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 하시던 중 3세 때 어머님의 손을 잡고 경주를 떠났습니다. 아버 지, 어머니 고향인 영양군 수비면의 수비초등학교 교장으로 전출 하시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두메산골로 가셨다고 하셨지요. 왜, 안 가시면 안 되었나요?
경주에서 교직 생활을 계속하셨으면 우리 가정 모두가 촌놈 소 리 듣지 아니하고 고도 경주에서 좋은 학교 좋은 환경에서 공부 열심히 했을 터인데.......
할머니께서는 홀로되시어 시골에서 외롭게 살고 계시니 효성 높으신 아버지께서 학무당국에 시골 어머님을 뫼시겠 다고 주청을 하셨다구요.
수비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부임하셔서 학교 사택에 거주 하면서 저는 천방지축 뛰어놀았지만 어머님께서는 5남매를 키우 시며 아버님 병간호에 얼마나 고달픈 농촌생활을 하셨어요? 애절한 병간호에도 하늘도 무심하게 아버님께서 한 많 은 세상을 떠나셨고 우리 가족은 정든 학교 사택을 비워주고 금촌 마을 도로변 초가집으로 이사를 했지요. 어머님께서 우리 집으로 시집오실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 수재들만 모여 엄격한 시험을 거쳐 입학하였던 관립 대구사범학 교 심상과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시고 조선미술전람회 서 양화 부문에 특선과 입선 6회 이상 수상하셨어요. 천재적인 그림 소질로 당시 우리나라 서양화 도입 초기 선각자적 역할을 하시게 되었구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4기생으로 졸업하신 그때 아버님 동기 동창으로 우리나라 조국 근대화 기치를 올린 주역이신 고故 박정 희 대통령님을 비롯해서 김영희 경북대 총장, 이성조 경상북도교 육감, 왕학수 고려대 교수님을 비롯한 저명인사들과 함께 졸업하 셨는데 아버님만 한 서린 33세의 일기로 요절하셨습니다. 어머님 께서는 얼마나 한스럽고 애통하셨나요?
어머님께서는 수비면 계동 최(경주 崔씨) 한합댁 4남매 중 고 명딸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당시 여성들은 공부를 가르치지 않아 서 오빠들이 공부하는 어깨너머로 한학을 배우시며 집안의 온통 귀여움을 독차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경주로 발령받아 근무할 때 낮에는 학생을 가르치고 저녁엔 그림을 그려야해서 유일하게 전기불이 들어오는 경주 최부자 99칸중 한곳을 구해 입주하셨지요. 어머니께서 경주최씨라 더욱 입주를 받는데 도움이 되었을 줄 압니다. 경주 최부자 집에서 제가 태어나 최부잣집 정기를 받게하셔서 저에게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음해 동족상잔의 6.25가 발발했습니다.
온 마을 주민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피란을 갔습니다. 혹시 헤어지더라도 굶지 말고 목숨을 연명할 수 있도록 없는 양식에 쌀 을 볶아서 두 주머니에 꾹꾹 채워 먹을 수 있도록 주셨는데.... 못 난 자식은 어머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친구랑 들판에서 볼을 차면 서 놀다가 비상으로 준 양식을 다 먹어치웠으니 어머님께서 화내 시고 우리는 벌 받을 만했지요.
피란길을 떠나면서 아버님의 유품인 완성 또는 미완성 서양화 작품과 유품을 멍석말이같이 둘둘 말아서 처마 밑에 매어 달아놓 았지요. 집으로 돌아왔지만 피란 중 비바람으로 멍석과 작품 및 유품 모두가 퇴색되고 훼손, 오손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이 망 할 놈의 그림 작품 때문에 아버지께서 병나시고 온 가족이 이렇게 어려운 생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화를 내셨습니다. 이종형님에 게 부탁해서 훼손된 아버님의 혼이 담긴 작품과 유품을 냇가 자갈 밭에 내어놓고 불태워버렸다 하셨지요.
어머님, 저희들은 보지 못했지만 어머님께서 얼마나 화나셨나 요. 피란살이와 어렵고 힘든 고생의 문턱에서 가족의 배고픔을 참 고 어머님께서는 몸이 부서져라 중노동을 하셨지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어려움을 이겨내시느라 밤이면 홀로 뒤 껄 축대 장독대 뒤에서 어스름 달 밝은 밤 어머님 홀로 눈물로 흐 느끼며 삶을 한탄하시던 모습을 소자도 보았지요. | 6·25가 끝나고 생활이 막막했지요. 어머님께서는 우리 삼남매 를 살리려고 이웃집 곡식 밭을 매는 품팔이도 하시고 우리 집 텃 밭 600평에 감자도 심고 노력했지만 우리 식구는 헐벗고 어렵게 살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는 전쟁의 혼란 속에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요. 초등학교 2학년 시절 6·25가 터지면서 학교에는 전교 휴학이 결 정됐어요. 운동장에는 인민군이 주둔하면서 마을의 청장년들은 산과 계곡으로 모두 도망가고 면소재지 학생은 학교에 나오도록 독려하면서 학교에서 인민군 노래를 가르치곤 했어요.
우리는 인민군이 있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냇가에 가서 피라미 와 가재를 잡고 전투 비행기 소리가 나면 움푹 파인 웅덩이에 머 리를 박았어요. 비행기 소리가 멀어지면 또다시 다슬기를 줍고 잡 은 물고기를 집에 가져가면 어머님께서 맛나게 요리해 주셨지요. 그리고 저희들보고 학교에 가라는 말씀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인민군이 떠나고 우리 국군이 돌아오자 마을 청장년들이 한 분 돌아오기 시작했지요. 그러던 중 군인들이 왔다 가 모두 가고 전투경찰대가 마을로 왔어요. 우리 집에도 전투경찰 이 와서 방 1칸에 숙박하면서 지역 경계 보초를 보았습니다. 추운 밤 보초 서는 경찰관에게 어머님께서 외가에서 얻어온 대추 한 사 발을 주었지요.
그런데 그 경찰관이 대추를 먹으면서 씨앗을 마당에 버려두어 서 상급자가 알게 되었습니다. 민폐를 끼쳤다고 심한 기합을 주기 에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며 애원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네요.
6·25가 끝나고 1953년부터 농촌의 살림살이는 피폐해져 세계 적으로 가장 가난한 국민이 되었을 거예요..어느 날 어머님께서 교회에 나가자고 하셔서 대한예수교 장로 회 수비교회에 갔습니다. 교회 장로님이 친절하게 해주셔서 찬 송가도 배우고 또 미국에서 건너온 구호물자(옷가지, 옥수숫가루 등)도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 가정은 아버님이 안 계셔서 그 생활 의 어려움을 잘 아셨던 장로님 덕택에 우리 집은 특별히 많은 구 호의 혜택을 받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어머님을 따라 교회에 나가 게 되었으며 어머님께서는 매일 새벽기도와 집에서도 홀로 자식 을 위해 잘 자라게 해달라고 울음 섞인 통곡의 기도를 하셨지요.
세월이 흐르고 1960년 5월 16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초 들을 구하기 위해 박정희 장군을 선두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고
혁명공약을 발표하면서 썩어빠진 정치를 혁명정부가 새 로운 국가를 재건한다는 것이었어요. 특히 농어촌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 영농기법 개선을 위해 청소년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우리 가정은 형님께서 상급학교인 대구신학대학을 준비할 무 렵이었습니다. 나는 농촌 영농개선 사업을 위해 4-H클럽을 조직 하여 오늘의 영농기법을 새로운 농업기술로 소득 증대를 이루어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고 다짐하는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지요..
어느 날 대구에서 경북도교육청 초등교육 유만식 과장님이 저 의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마을에서 놀다가 집에 오니 어머님께서 마루에 앉아 계시는 분에게 인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분 의 말씀이 자네 아버지와 현 우리나라 영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 이 대구사범학교 동기동창이라고 하셨습니다. 며칠 전 박정희 대 통령께서 대구에 오셔서 우리 사범학교 재학 시절 그림도구를 들 고 밤낮으로 기숙사에서 그림만 그리던 서양화가 금경연 학우는 어디서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고 하셨습니다. 수년 전 작고하시고 그 가족은 고향인 영양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대 통령께서 그 가족을 한번 찾아보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 라고 해서 오늘 이렇게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형님께서 대구신학대학 재학 시절 청와대에서 얼마 정도 의 학비를 보내왔다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저는 외종형님의 도움으로 면사무소 임시 직원으로 근 무했는데 아침 출근할 때마다 어머님께서는 기분 좋게 잘 다녀오 라고 하셨습니다. 형님이 군에 입대하고 누나가 시집가고 어머님 이랑 저와 단둘만이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 어쩌다 부엌에 식후 냉수라도 한 그릇 먹으러 부엌에 가면 어머님께서 크게 꾸지람을 하셨지요. 남자가 함부로 부엌에 들어가선 안 된다고요. 나의 어머님은 그런 분이셨지요.
6·25 동족상쟁의 전쟁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갔 초가을 어머니께서 덜익은 콩을 한 소쿠리 꺽어오셔서 잎만 떼어내고 콩 고투리와 줄기를 그대로 가마솥에 삶으셨지요 어스름 달밤 동마루에 온가족이 앉아서 콩대를 들고 햇콩을 까먹으며 웃음 꽃을 피우기도 했지요. 그해 가을 청천병력 같은 일을 직면하게 되었지요. 라디오도 없어 일기예보를 들을수도 없었는데 한반도에 그 악명높은 ‘사라호’ 태풍이 온산하를 핣혔지요. 그날이 바로 1959년 9월17일이었어요 앞개울물이 불어나 집마당까지 차올랐지요 어머니께서 이방저방 자고 있는 5남매를 깨워 옷가지와 몇가지 끓여먹을 그릇만 챙기고뒷산 언덕빼기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갔었습니다.
어머님 그 시절 어떻게 생활하셨는지요? 태풍사라호 밤새도록 장대비를 퍼부었지요. 밤새 한숨도 못자고 새벽녘이 되어 바람이 잦아들자 내려가보니 온마당엔 떠내려온 나뭇가지며 온통쓰레기 더미였지요. 그때 처마끝에서 말없이 눈물짓는 어머니를 보며 우리도 따러 울었지요
집앞 300년 넘는 마을 수호목인 느티나무가 흔적없이 뽑혀 사라졌습니다.우리집 본체 뒷담장도 무너지고 우리 콩밭에 있던 콩도 흔적도없고 생명줄인 뒤주에 넣어둔 감자도 다 쓸려 내려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논바닥에 뭍혀있는 감자를 한 톨이라고 건지려고 호미를 캐기도 했습니다. 온식구 겨울을 나야할 식량인데 아버지도 없는 5남매의 자식을 거느리는 가장으로 그때 그처참 한 상황을 어떨게 넘기셨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엎친데 덥치는 격으로 큰딸과 막내 아들을 여의 였지요
그때 그심정은 하늘이 땅이 우는 심정이었겠지요
큰 누나는 인물도 예뻐 모두가 칭송하였다지요. 우리 자녀중 아버지의 교훈을 제일많이 받은 큰 누나였지요. 늘 조용하면서도 어머니 뒷바라지를 혼자 도맡을 정도로 큰 누나는 살림 밑천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때 까지 전교 수석자리를 놓지지 않았다지요
그런 큰 누나를 참으로 야속하게 하늘이 큰 누나는 데려갔습니다? 그후 2년후에 또 막내 아들이 불의 사고로 이 세상을 하직했으니 어머니께는 하늘도 울고 땅도 우는 절망감이었겠지요. 막내 동생은 인물도 잘나고 명랑해서 온동내 칭찬이 자자했었지요. 어머니께서는 막내 아들을 항상 품안에 안고 주무셨지요. 그 총명하던 동생이 마로 표현할 수 없는 사고로 오랜기간 고생하다가 그만 한세상 즐거움도 귀여움도 받지못하고 아버지 곁으로 가버렸지요.
어머니께서는 두 자녀를 먼저보내고 살아 남은 세 자녀를 위해 몸과 마음과 정신을 모두바쳐 굳굳하게 우리를 길러 내셨습니다. 세월따라 인생사가 너무나 험난하고 행복을 찾을수없었던 그 암울한 시대를 훌륭히 살아내셨습니다. 모든 여건이 어려워 자포자기 할수 이었을텐데 어머니의 위대한 힘이 남은 삼남매를 설 수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형님과 저는 두 살 차이였지요. 3살 차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형님께서 군 제대하기 전 저도 입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입영일 자를 6개월 연기했으나 제가 입대 후 형님께서 6개월 지나서 제 대하게 되었습니다. 논산훈련소로 향하던 날 홀로 계시는 어머님 의 손을 잡고 놓지 못해 울먹이다가 “어머님 곧 다녀올게요. 안녕 히 계십시오.” 했지요. 둘째 누나 결혼하고 형님 군 입대하고 막내아들마저 군에 간다고 하 자, 마을 앞 솔밭정자(약천정) 둥천에 나오셔서 손을 흔드시며 행 주치마에 눈물을 닦으시던 어머님 모습 지금도 선한데 84세가 뭘 그리 많은 연세라고 일찍 떠나셨어요. 너무나 보고 싶네요.
군 입대 후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3일이 멀다 하고 어머님께 편지를 띄웠어요. 막내아들 밥 잘 먹고 용감하게 군대 훈련 잘 받고 있다고 편지를 전했지요. 그런데 그 편지 덕분에 중대본부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 다. “넌 부모님께 편지도 자주 하더라. 그리고 글씨도 잘 쓰고 하 니 중대본부에 와서 업무 보고 차트도 좀 쓰고 서류 정리도 하면 서 정규 훈련 외에는 이곳에 와서 일 좀 해라.” 하시는데 거절하지 못했지요. 거의 매일 일과 후에 타 훈련병은 노무직 사역을 하는 데 저는 중대본부에서 행정보조 역할과 간식도 얻어먹게 되었습 니다. 정규과정인 사격시험 볼 때는 분대별로 경쟁을 붙여서 낙방하 는 분대는 전체 기합을 주고 노동적인 사역을 시켰어요. 저는 분 대장으로서 전 분대원에게 협력토록 지시했습니다. 우리 분대원 중 기록 사격 시 각자 감적호에 사격 성적 표시 표적란에 합격한 대원은 불합격한 대원의 사격 성적판에 명중 사격토록 하여 다 함 께 합격토록 하자고 독려했지요. 다행히 우리 분대원들은 모두 합 격하여 훈련소 졸업 시 중대장으로부터 특등사격 표창을 받았으 며 그 사실을 어머님께 알려 기쁘게 해드리려고 편지를 썼지요.
훈련소에는 매일 700명이 입소하고 700명이 퇴소하는데 전반 기 6주를 졸업하고 부대별 배속 발령이 날 때 700명 중 종합성적 3등을 차지했지요. 1등부터 5등까지는 본인이 희망하는 부대로 배속시켜 준다고 해서 1희망을 서울육군본부, 2희망을 부산군수 기지 사령부, 제3희망을 대구 제2군 사령부로 정했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는 전 병력 배속 명령서를 받고 부대 배치 지역 으로 떠나는데 저와 3명만 남았습니다. 선임하사가 오더니 “너희 들은 스스로 배속된 부대를 찾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배속 부대 는 대구에 있는 육군 제2군 사령부였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야 간열차를 타고 밤중에 대구에 도착하여 제2군 사령부 본부 사령 실에 신고하였습니다.
본부사령 선임하사관이 7명의 대기자를 불러 세우고서 이 선발면접을 하는데 저만 남도록 하고 다른 병사들은 내무반으로 가게 했습니다. 선임하사관은 저에게 “넌 인마, 운 좋은 놈이야. 군복 새 옷으로 교체, 신발도 새 군화로, 계급장 이등병이 뭐야? 장군님 모시는 병사가. 상병 계급장으로 교체해.”라고 하였지요. | 다음 날부터 육군 제2군 사령부 작전참모부장 육군준장 당번 병으로 배속하게 되었습니다. '원스타(별 하나), 말만 듣던 장군님 을 직접 모시게 되어 걱정도 되었지만 부관 장교에게 묻고 열심히 하여 신임도 얻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 습니다.
6개월 후 또 근무처가 변경되었습니다. 작전참모부 행정실장 이 "금 병사, 너는 논산훈련소에서 이곳에 올 때 작전처 작전계획 서기병으로 특별 전입했었는데 다음 주부터 작전과에서 근무토 록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작전참모님께 보고 드리고 내가 왜 그렇게 되었냐고 행정실장에게 문의했더니 군 입대 전 행정 경험 이 있는 사병을 전입받기로 되어 기록카드를 보고 차출했다는 것 입니다. 작전과에는 장교가 7명, 사병 3명으로 장교가 더 많아 사 병으로서 근무에 군 행정과 문서 전달 등 편한 군 생활이 연속되 었습니다. 군 입대 후 10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첫 휴가를 가게 되었지요. 깨끗한 군복을 입고 제2군 사령부 마크에 본부 사령실 근무 배지 를 달고 두메산골 수비에 도착하여 어머님을 뵙고 큰절로 인사를 드리니 어머님께서 크게 반겨 주셨지요. 그리고 친구들도 이쁜 군 인이 되어 왔다고 남녀 친구 모두 나와서 환영해 주었지요. 즐거움도 잠시 정기휴가 기간이 모두 지나 귀대하던 날 어머님 과 함께 수비 시외버스정류장에 나갔지요.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친구 후배가 공기산탄총을 메고 와서 꿩과 비둘기를 잡겠다 고 자랑하다가, 공기 압축 실험을 하겠다고 총을 만지더니 방아쇠 를 잘못 당겨 나의 넓적다리를 쐈습니다. 섬뜩한 기분이 들더니 잠시 후 군복에 붉은 피가 비치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급히 옆에 있는 보건지소에 가서 진찰하니 우선 시각적으로 보 이는 납으로 된 산탄총알 5개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의사의 말씀 이 지금 급히 큰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산탄총알이 더 있 을 수 있으니 정밀검사를 하고, 산탄총알은 납으로 된 것이라 납 중독으로 파상풍이 올 수 있으니 예방주사와 함께 긴급히 제거 수 술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영양에서 안동까지 어머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안동도립병원에 갔습니다. 넓적다리 깊숙이 산탄총알 3개가 더 있음을 엑스레이 사진으로 확인했습니다. 급히 제거수술을 했는 데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되었지요. 그날 밤 11시까지 부대에 귀대 신고를 해야 하므로 의사의 진단서를 보내고 제2군 사령부 작전 과장 선임하사에게 전화로 사고 내용을 신고하고 우선 1개월 정 도 휴가를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수술 후 수술 부위에 세균감염 문제가 있어 재수술을 하였고, 1 개월 휴가 기간이 지나도 완쾌하지 못했습니다. 제2군 사령부로 귀대하여 작전과장(육군대령)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걱 정 말고 치료를 잘 받으라고 했지요. 하지만 저는 귀대하여 경대 의대병원에서 통근 치료를 받았고, 3개월 만에 완쾌되었지만 커 다란 흉터가 남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님께 얼마나 큰 걱정을 끼치게 되었습니까. 이제야 불효자식이 어머님께 사죄드립니다. 어머님 그때 생각나시지요? 산탄총 메고 온 친구가 불법무기 소지로 경찰관에게 입건되어 울고불고하였고, 어머님께서는 피해 자인데도 그 친구를 용서해 주라고 경찰관에게 애원하시던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후 군 복무 열심히 하면서 어머님께 편지도 자주 쓰고 외출 겸 단기휴가 명절휴가도 갔었지요. 그때 군 사병 보수가 800원 정도 되었는데 제가 외출 외박 시간을 내어 영양제 한 병을 구입 해서 어머님께 드렸더니 용돈도 못 주었는데 이 비싼 약을 사왔다 고 흐뭇해하시던 어머님 모습 너무 그립습니다.
어머님, 제가 한평생 제일 잘못한 불효의 사연을 어머님께 굴 복하여 용서를 빌겠습니다.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어머님은 계 시지 않으니 한탄스럽습니다. | 우리나라 군 생활 현실을 아는 사람 중에 제2군 사령부 작전 참모부 근무가 60만 대군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엘리 트 군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을 거예요. | 그런 위치에서 상사의 총애를 받으면서 국방의 의무를 충실하 고 있던 차, 그때 그 시절 우방국인 미국으로부터 월남 전선에 한 국군 파병 요청이 3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30여만 명의 군 병력 이 월남전에 투입되어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서 또한 재건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차출과 지원병 모집을 하였습니다. 1년 단위로 육·해군을 월남 전선에 투입하였 는데, 젊은 혈기와 남아男兒로서 해외 진출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 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군 제대가 6개월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서 슴없이 지원했지요. 어머님의 승낙도 없이 말입니다.
월남전선 투입 전 강원도 오옴리 7사단에서 특수훈련을 받아 야 하는데 그때 출발 전 5일간 특별휴가를 받게 되어 고향을 방문 했지요. 휴가 갔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특별휴가를 가니 어머 님께서 왜 또 왔느냐 하시면서 푹 쉬어 가렴 하셨어요. 그런데 월 남 전쟁터에 참전하기 위한 특별휴가란 말씀 참말로 차마 못 드렸 어요. 어영부영 5일이 지나서 마음속 꾹 참고 어머님께는 잘 다녀 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만 하고 귀대하였지요.
곧바로 강원도 오옴리 7사단에서 4주 동안 전선 전장의 특수 훈련을 받고 월남 전선으로 떠나던 날, 강원도 산골짜기에 첫눈이 휘날렸습니다. 10월 말경 행군하여 강원도에서 군용 열차를 타고 야간을 이용해서 출발, 새벽 4시경 대구역에 도착했을 때 2군 사 령부 장병 여군 등 월남참전용사 환송식에 참석했습니다. 참전 장 교들에게 무운장구의 환송 꽃다발을 주게 되었는데 3년 동안 2군 사령부의 정든 친구 여군들이 대구 시내 기관장급 꽃다발을 걸어 주고 잘 다녀오라고 정감 어린 환송을 받으며 또 한번 눈물을 흘 렸습니다.
정들었던 대구를 떠나 아침 6시경 부산 제3부두에 도착했지요. 남남쪽 월남 땅 이국전선으로 떠나는 파월장병에게 대대적인 환 송식을 거행하였지요. 군 장병은 물론 국내외 귀빈 기관단체장 모 두 태극기 깃발을 휘날리며 맹호부대 노래가 큰 소리로 울려 퍼지 면서 장엄한 환송식이 있었지요.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을 위하여 님들이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길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라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라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용감하게 싸워 대한민국의 육군으로서 맹호부대 용사로서 그 큰 명성을 크게 떨치고 돌아오라는 격려의 말씀이 있었지요.
해가 질 무렵 모든 행사가 종료되었고, 에레스틱 군함이 부~웅 부~웅 구슬프게 울면서 대한민국 부산 제3부두를 뒤로했습니다.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태극기를 흔들어 주시는 환송객에게 손 을 높이 흔들어 답례하였지요.
허망한 심정으로 선실에 들어가서 개인별 침대 기둥을 붙잡고 "어머님 죄송합니다.” 혼자서 흐느끼면서 꼭 승리하고 살아서 돌 아와 어머님께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빌겠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님 보호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서 불효자식 저에게도 모세와 같은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울 고 또 울면서 기도했지요.
어머님이 불효자식을 크게 꾸짖어 주셔요..
월남 전선으로 떠나는 미국 LST 전함에서 3일째 되던 날 그 큰 전함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장병들이 웅성거리고 있는데 선실 내 방송이 전달되었습니다. 중국해협 타이베이 해역 을 지나고 있는데 태풍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장병들 중 기독교인 은 모두 선실 강당으로 나오라는 방송이었습니다.
기우뚱거리는 선실 난간을 붙잡고 대강당에 올라갔습니다. 배 는 더욱 기울어져 장병들이 기도드리려고 앉아 있는 의자 책상 연 대 모두 한쪽 구석으로 넘어져서 어쩔 수 없이 모두 해산하였습니 다. 선실 식당에서 준비한 식사와 주방시설 모두가 배의 한쪽으로 기울어져 귀한 음식물이 쓰레기와 같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지 선실 내 긴급방송으로 태풍이 더욱 심해질 경우 타이베이 해역 에서 태풍을 피해 하루 일박한 후 전선으로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조금이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다행히 태풍 이 지나가고 평온을 찾고 있다고 했지요. 부산 제3부두를 출발 후 7일째 월남 땅 퀴논항'에 정박하였습 니다. 선실 밖은 너무나 더워서 옷을 갈아입고 선실 밖으로 나가 려는데 전함의 상공에 전투용 헬리콥터가 뜨면서 전 장병은 단독 무장을 하고 하선하라는 명령이었지요. 철모와 실탄 200발 수류 탄 4발을 모두 몸에 지니고 하선하니 간밤에 이곳 퀴논항 일대는 적군이 침투하여 전장이 되었다고 했지요.
우리 일행은 군용트럭으로 맹호부대 사단 사령부로 이동했습 니다. 제2군 사령부에 함께 있던 육사 출신 장교 한 분이 맹호사 단 사령부 작전 상황실에 근무하고 있음을 알고 연락하였지요. 오 후 부대 배속 명령이 떨어졌는데 다행으로 기갑연대 작전상황실 상황실 요원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 월남에 도착하여 3개월도 채 안 되어서 맹호 9작전이 실시되 었습니다. 작전상황실은 전투지역에서 300고지 높은 1km 떨어 진 600고지에 설치하고 작전 지휘소 요원으로 최선을 다하여 전 쟁에 임하였습니다..
그때 그 전선에서도 고국에 계시는 어머님께 매일 안부를 묻는 편지를 썼지요. 어느 날 고국에서 서신 한 통이 왔는데 어머님께 서 소자가 월남 땅 월남 전선 삶과 죽음의 전쟁터에 갔다는 소식 을 듣고 편지를 전달한 우편배달부 아저씨에게 찾아와 이 편지를 보낸 곳에 나도 가서 내 아들 태남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 통 곡하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또 한번 어머님께 한 통의 편지로 사죄의 글을 썼지요. 어쩔 수 없는 불효자식이 되었다고 마음속 깊이 흐느끼며 어머님께 사죄했지요.
그 후부터는 편지에 번호를 붙여 매일 편지를 썼습니다. 10개 월만 있으면 불효자식이 어머님 곁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가겠다 는 편지와 함께 전우들과 찍은 건강한 모습의 사진도 첨부해서 어 머님께 글을 보냈지요.
남남쪽 월남 땅에서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작열하는 열기 속 에 전장을 누비며 적과 대치하였습니다. 죽음과 삶의 외길 속에 밤이면 높은 하늘에 별을 바라보면서 어머님도 저 별을 보고 불효 자식을 걱정하시리라 생각하였지요.
그 어렵고 힘들고 작열하는 포화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어머 님의 염려 덕분으로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귀 국하는 날이 드디어 다가왔지요. 모든 근심 걱정을 다 털어 버리 고 귀국 준비를 하면서 어머님께 월남 땅에서 마지막 서신을 보내 면서 일주일 후 한국 부산항에 도착하겠다고 하였지요.
귀국길 군함은 조용하였고 부산에 도착 일박 후 제가 근무하던 대구 제2군 사령부를 거쳐 1968년 9월 10일경 영양군 수비면 고
향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머님께 불효자식이 모든 임무를 무사히 다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노라고 긴 인사를 하면서 불효 자식이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요. 까맣게 그을린 어머니의 막내아들이 어머님께 큰절을 올리고 뒤돌아보 니 마을 친지 친구 아주머니 등 모두 함께 즐거운 담소를 나누시 며 기뻐하시던 그때 어머님의 모습 지금도 선합니다.
나의 군 생활 36개월 동안 많은 굴곡이 있었지요. 특별히 어머님과 가족 친지 주변의 많은 지인들에게 커다란 은 혜를 입었으며 그 은혜 어찌 다 보답할꼬 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
합니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국방의 의무를 완수하고 이제 어머님의 품 으로 돌아왔지요.
세상은 급변하고 젊은이들은 더 나은 직장을 향해 도시로 해외 로 진출하였습니다. 국가경제도 크게 성장하고 있는데 불효자는 그간 먼 길 전선에서 군 복무 동안 어머님께 효도 한 번 못 하였습 니다. 죄책감으로 어머님의 일을 도우며 5.16군사혁명 이후 시대 적 상황을 살피던 중, 모든 공직자 임용은 공개경쟁 시험을 거쳐 등용하도록 하는 국가적 방침에 우리 영양군에서도 경상북도 지 방공무원 공개경쟁 시험 공고가 있었지요. |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직감하고 공직에 등용하는 것이 우리 지 역과 국가를 위해 이바지해야 할 길이며 나의 장래 직업관과 걸맞 은 직장이라 생각하여 큰 뜻을 품어 보기로 하였지요. | 군 입대 전 면사무소에서 임시로 일한 경험도 있어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지방 9급 공무원(당시 5급을류 공무원) 공개경쟁 시 험 과목에 따른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마을 앞 솔밭 둥천에 증조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약천정藥泉亭 정자에 가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석유 남포등과 촛불을 켜놓고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시험공부 에만 전념하였지요.
시험을 치른 후 발표하는 날 면사무소 친구와 함께 합격자 발 표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 3시경 영양군 내무과에서 수비면 총 무계로 전화가 왔었어요. 금번 9급 공무원 합격자 중 수비면 출신 에게 연락하여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합격 통지와 함께 공무원 임 용 신청서를 제출토록 연락하라는 전화였습니다.
총무계장으로부터 합격자 명단을 전달받고 나의 이름 석 자가 있음을 확인하고 즉시 집으로 뛰어가 어머님께 말씀드렸지요. 나 의 손을 덥석 잡고 “밤잠 안 자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더니 드디 어 합격했구나.”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시던 어머님의 모습 지금 도 선하지요. | 이제 불효자식이 조금이나마 어머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 게 되었으니 새로운 심정으로 어머님께 고맙습니다, 하고 어머님 의 손을 잡았지요.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되기 직전 사랑하는 짝을 만나 청송군 진 보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어머니께서 교회 권사로 계시면서 수비교회 장로님의 소개로 청송 진보교회 목사 따님과 맞선을보시고 어머님이 원하시는데로 결혼하게 되었지요. 결혼식날 진보교회까지 80리길을 승용차를 대절해서 시장으로 운행행하도록 약속했는데 그해 3월26일 봄눈이 폭설이 되어 승용차로 운행할 수없어 공사장 트럭으로 교채해서 결혼식장까지 같던일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돌아 올때도 신부릉 트럭에 태워 시집인 우리집으로 데려왔지요. 지금도 집사람에게 트럭타고 시집왔다고 한번씩 투덜거리기도 합니다. 결혼기장에서 신부의 자매인 내 처제가 수미교회에서 올겐 연주로 웨딩 마치와 찬송가 연주한 것을 어머니께서 자랑삼아 말씀하기도 했습니다.자랑으로 더욱 경사스러운 일은 첫딸 영 숙이 수비에서 태어나고 결혼 후 1년이 지나 대구시 공무원으로 전출되었지요.
어머님의 품을 떠나게 되었지만 넓고 큰 대도시 공무원으로 하 위직에서부터 종횡무진 불철주야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노력하 였습니다. 대구시청에서 서구청 총무과로 다시 대구시청 문화 공보실 업무를 수행하다가 대구시청의 제일 핵심부서인 시정과 시정께에 근무하면서 밤낮 가리지않고 시정 주요 업무를 추진ㄴ하다가 예산 담당관실에서 대구시 예산 총괄직인 예산 편성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후 공직자의 핵심 직급인 대구시 행정 사무관(5급) 특별승진 경쟁시험에 합격하여 기쁜 마음으로 어머 님께 제일 먼저 달려갔지요. 승진 소식을 전하고 아버님 묘소에 가서도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행정사무관이 되었다고 큰절하며 신고했지요.
그 후 어머님께서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1993년 아버지의 예술 추모화비를 수비면 발리동 약 천정 뒤뜰에 건립했지요. 제막식 때는 영양군의 기관 단체 대표 와 임원 그리고 서울 금진호 국회의원, 금억연 경무관, 아버님과 대구사범 심상과 4기생 동기 동창이신 유만식 교장 선생님, 대구 시청 선후배 동료 등 500여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성대한 제막식 속에 어머님도 불편한 몸으로 축하 인사받으시면서 함께하셨지요.
어머님께서는 깊은 병환에 더욱 심약해지셨습니다. 불효자식 이 더 큰 직위에서 공직생활을 잘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불효자식 을 꾸짖어 주셔야 하는데, 대구시청 총무과 서무계장 시절 84세 가 뭐 그리 높은 연세라고 빨리 가셨어요.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아들 손자 며느리가 다 울었지요. 이제부터 어머님께 효도 한번 잘해 보려는데 어머님께서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지요. 아버지 예술기념관에는 어머님과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큰딸이 나란히 찍은 사진을 게시 했습니다. 2층 전시실 25평에는 아버지의 예술작품과 평소 아끼며 간직하던 가종자료와 유품을전시하고 조선 미술 전람회 도록 24권 이 모두 전시되어 있습니다. 도록을 펼치면 아버님의 천재적인 그림 예술과 입서 ㄴ특선 작품사진이 모두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계셨으면 그림 작품 한점한점이 추억과 역사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설명해주실 터인데 너무나 안타갑습니다. 그어려웠던 일제 강점기 아버님의 예술작품을 전공하실 때 어머님께서는 아버지를 전폭 지원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어버지 돌아가시고 어린 5남매를 건사하기에여자의 몸으로 너무 쿤짐을지시고 6.25전쟁 사라호 물난리를 겪으며 천신만고를 겪어 왔습니다. 위대한 모성애로 극복하셨습니다. 제 나이도 이제 8순에 접어들었습니다. 제 딸도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파리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우리아라 미술계에서 이름을 내 놓을정도의 화가가 되었습니다. 제 나름데로는 다 이루었습니다. 모든 잡념을 다 버리고 오직 공직에만 열심히 노력한 결과 대구시청 감사과장, 도시정비과장 그리고 수성구 청 총무국장, 행정관리국장까지 지냈습니다. 2003년도에 아버지 예술기념관을 건립하여 지방 관찰사(도지사) 이의근 지사님과 영 양군 기관단체 임직원 그리고 대구시 공직자와 지역주민 700여 명이 참석하여 성대한 개관식을 하였지요. 어머님께서 함께 아버 지 예술기념관을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합니다.
그 후 불효자식은 공직을 은퇴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역 정 치인들의 권유에 못 이겨 대구 수성구 구의회 의원으로 출마하여 어머님 영혼의 후원으로 압도적 당선되어 4년 동안 지역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었지요.
지금도 그 옛날 그 시절 격동기의 보릿고개 시절의 흔적을 생각하면 어머님의 깊은 마음을 애간장이 다 녹도록 아프게 해 드린 못난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소서!!
이제 이 불효자식이 어머님 전 상서를 모두 줄이옵니다. 어머 님 사랑했어요. 감사드립니다.
훗날 불효자식도 어머님 곁으로 가게 되겠지요. 그때 지난날의 모든 것을 활짝 펼쳐 밤새도록 어머님께 고백하 겠어요. 못난 자식을 위해 손발이 다 터지도록 피땀 흘리시며 눈 물로 가신 그리운 어머님.... 그때까지 어머님께서는 주님 곁에서 편안하게 잘 계셔요.
신축년 5월
불효자 막내 태 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