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0월 1일 일본 경찰은 서울에서 '조선어학회' 관계자 11명을 붙잡아 이튿날 함경남도 홍원으로 끌고 갔다. 같은 해 음력 11월 19일, 양력 12월 26일에 일제는 만주에서 '대종교' 교주 단애 윤세복 등 21명을 한꺼번에 잡아들였고, '대종교'는 이 검거를 '임오교변'이라 부른다. 만주의 검거는 국내의 학회 간부 검거와 때를 같이했다. 학회와 교단을 이은 사람은 학회 간사장 고루 이극로였고, 빌미는 그가 교주에게 보낸 원고 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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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교변'으로 옥고를 치른 대종교인 이현익은 뒷날 이 일을 '한글어학회 사건이 곧 대교 교변이오, 대교 임오교변이 곧 독립운동실기'라고 적었다. 그는 '조선어학회'가 '대종교'의 비밀 간행물을 펴냈다고 썼다. 교단과 은밀한 연락도 오갔다고 했다. 이극로•최현배•신명균•권덕규•이병기•한징•이윤재를 비롯한 학회 중심인물들이 모두 '대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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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16일 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해 종교를 신도•불도•기독교로 한정했다. '대종교'는 종교유사단체로 밀려나 포교가 막혔다. 그 뒤 '대종교'가 국내에서 비밀결사로 움직였고 '조선어학회'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 시기의 '대종교인'이라는 말에는 그 사정이 담겨 있어, 교단이 뒤를 받치고 일을 맡긴 사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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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는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에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를 함께 넣었다. 교단의 천진전 건립과 관련한 글이었다. 이 원고를 손에 넣은 일본 경찰은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로 바꿨다. 일제가 이듬해 4월까지 붙잡은 '대종교인'은 21명에서 25명으로 늘었고, 그 가운데 10명이 고문 끝에 숨졌다. 윤세복은 무기형을, 다른 간부들은 15년에서 7년까지의 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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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먼저 시작된 '조선어학회' 검거의 발단은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사건과 1942년 9월 5일 일본 경찰의 정태진 연행이었다. 검거 인원은 1943년 4월 1일까지 33명으로 늘었고, 이윤재가 그해 12월 8일, 한징이 이듬해 2월 22일 옥중에서 숨졌다. 법원은 이극로에게 징역 6년, 최현배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고, 1945년 8월 13일 이극로 등의 상고를 기각했다. 상고한 이들은 광복 2일 뒤인 8월 17일에야 '함흥형무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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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와 윤세복이 함께 몸담은 '대종교'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홍암 나철이 단군 신앙을 다시 일으킨 교단이다. 나철이 남긴 말로 전하는 '國雖亡而道可存'(국수망이도가존), 줄여서 '국망도존'은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남았다는 뜻이다. 그 정신을 말과 글에서 찾은 국어학자들이 1910년 무렵부터 차례로 교단에 들어왔다. 그들이 지키려 한 국문은 1894년 고종이 내린 '칙령 제1호'에 따라 법률과 명령의 기본 글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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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국문의 문법을 세우고 사전을 엮는 일에 앞장선 국어학자가 한힌샘 주시경이다. 기독교 세례를 받았던 그는 1910년 무렵 제자들과 함께 '대종교'로 개종했다. 무력 침략보다 정신 침략을 더 무섭게 여긴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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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의 '국어강습소'를 마친 제자들이 1908년 세운 '국어연구학회'는 1911년 '배달말글몯음', 1913년 '한글모'로 이름을 바꿨고, '한글'이라는 이름도 주시경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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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1914년 7월 27일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재건했고, 이 단체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백연 김두봉은 주시경의 제자이자 나철의 제자였다. 그는 1911년 중광절에 '대종교'의 교질 지교를 받았고, 1915년에는 높은 교질인 상교에 올랐다. 그 사이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과 함께 우리말 사전 '말모이' 편찬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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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음력 8월 4일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갈 때 시봉자 6명 가운데 첫째로 꼽히는 사람이 상교 김두봉이다. 나철은 11일 뒤인 음력 8월 15일 유서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같은 해 김두봉은 스승 주시경의 문법을 이어받은 '조선말본'을 펴냈고, 1919년 상해로 망명한 뒤에는 1921년 그곳 '독립신문'에 '개천절력'이라는 글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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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는 1910년 봄부터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에게 배웠고, '한성고등학교'에 다니던 때 '대종교'에 나갔다. 일본인 담임 다카하시가 그만두라고 했으나 그는 그만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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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는 1912년 같은 강습원에서 배웠고 1920년 무렵부터 '대종교'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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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가 1928년 펴낸 잡지 '한빛'에는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의 글이 실렸다. 1933년 공표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원안을 만든 위원 12명 가운데 이극로•최현배•이윤재 등'대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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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가 윤세복을 만난 곳은 1912년 서간도 환인현 '동창학교'였다. 그는 그곳에서 역사가 박은식과 주시경의 제자 김진도 만났다. 백산 안희제 등 부산 '백산상회' 사람들은 1919년 11월 장학재단 '기미육영회'를 만들어 이극로를 안호상과 함께 독일로 유학 보냈다. 이 유학이 윤세복•신규식•안희제로 이어지는 '대종교' 인맥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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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는 1923년 8월 '베를린대학 동양어 세미나'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할 허가를 받았고, 1927년 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9년 1월 귀국한 그는 그해 4월 '조선어연구회'에 들어갔고 뒤에 간사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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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그는 자신에게 가장 큰 감화를 준 어른으로 윤세복을 꼽았다. 1942년 6월 10일 나온 '대종교' 노래집 '한얼노래'는 교주의 의뢰로 이극로가 엮었고, 노랫말 대부분을 그가 지었다. 발행인은 백산 안희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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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기록인 '대종교중광육십년사'는 안희제의 입교일을 1911년 10월 3일로 적는다. 그가 1914년 부산에 차린 '백산상회'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 기관이 되었다. 1939년 그는 교적 간행 조직을 꾸렸다. 1941년에는 '삼일신고'•'신단실기' 등 교적 6종 1만 500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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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총본사' 전강과 교적간행회장을 지낸 안희제는 1942년 10월 3일 '천전건축주비회' 총무부장이 되었고, '임오교변'으로 붙잡혀 1943년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목단강의 병원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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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예심 판사는 '조선어학회사건' 결정문에서 사전 편찬을 조선 민족정신을 지키는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이 결정문에 비추면 회원 개인의 신앙은 일제가 3개월이 채 못 되는 사이에 학회와 교단을 잇따라 검거한 까닭을 설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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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 윤세복이 1912년 '동창학교'에서 만난 청년 이극로를 안희제 등의 장학회가 유학 보냈다. 돌아온 그는 학회를 이끌면서 노래집을 엮었고, 교단 사업을 두고 교주에게 보낸 편지가 교단 지도부 검거의 빌미가 되었다. 이 시기 독립운동사에서 '대종교인'이라는 말은 교단이 그 사람에게 돈을 대고 일을 맡겼다는 뜻이다. 청산리 전투를 치른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도 '대종교'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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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2조는 10월 9일 한글날을 5대 국경일에 넣었고, 현행 '국어기본법' 제20조는 정부가 매년 한글날 기념행사를 하도록 정한다. 올해는 한글 반포 580돌이다. 다음 달 4일은 '조선어연구회'가 '신민사'와 함께 첫 '가갸날' 기념식을 연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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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념식을 처음 연 학회의 사람들이 16년 뒤 감옥에 갇혔다.
이극로가 교주에게 보낸 '널리 펴는 말'을 일본어로 옮기면서 일본 경찰은 원고의 한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바꿔 적었다.
원고에 적힌 원래 구절은 '일어나라, 움직이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