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5.수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행 22:4~11
*제목; 사도행전강해(43) 바울의 첫 번째 변론
1. 체포된 바울
사도행전을 계속해서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전하려 했고, 유대인 동족들에게 구원을 전하려 했던 바울이 왜 이토록 공격당하고, 죽음의 위기에 놓이고, 결국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는 일을 당해야 합니까?
대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영적이유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들 뒤에는 이들이 복음을 바로 듣지 못하도록 그래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술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모든 죄사함을 통한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들과 고백들과 사역들 가운데 오늘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영광과 구원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바울의 측면에서 바울은 왜 이러한 고난을 사서하는 것입니까? 혼자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그만인데, 이와 어려운 일을 감당하면서 결국 순교까지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명확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바울은 분명히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이 그의 믿음의 근간이고, 흔들리지 않는 힘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경험을 그의 사명으로 바꾸셔서 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방인의 사도’로 온전히 사역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결과를 아는 싸움을 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과 천국을 이미 온전히 경험했기에 그 힘든 싸움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2. 바울의 첫 번째 변론
로마인인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체포란 명분으로 바울을 붙잡은 천부장은 바울에게 할 말이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고 죽이려했던 동족들에게 마지막 말을 하려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입니다.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행 22:1)
그는 자신을 공격하고 죽이려 한 자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의 동족들을 향한 구원의 열망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회당을 찾고 그곳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천국)을 꼭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애통하는 마음이 부어져, 사랑하는 가족들 중에서 예수를 알지 못하고 혹 예수를 떠난 자들을 회복시키는 역사가 나타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는 “박해자”였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예수님을 향한 박해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 21:22~23’을 봅시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2~23)
율법에 정통하고, 그 율법을 향한 열심이 특심이었던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명기의 기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의 상징인 ‘십자가(나무)’에 달려 죽으셨을까요? 이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이와 같은 죄를 지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이런 ‘저주받은 자들’까지 구원하려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고,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이어집니다.
이런 율법학자였던 그것도 율법에 대한 특심이 있었던 바울이 오히려 자신이 죽이려 했던 그리스도인들을 살리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하게 된 계기를 설명합니다. ‘6~8절’입니다.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2:6~8)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입니다. 이 순간 그의 전생각과 실존 자체가 다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복음의 사도로 살게 됩니다.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키는 “다메섹 경험”(예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다메섹 경험”을 할 수 있습니까?
가장 먼저는 주님이 하십니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구원은 다 주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만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찾아가셔서 만나 주셨고, 그의 모든 것이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바울을 찾아가셔서 만나주신 것입니까? 바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열심”입니다. 그의 열심이 하나님의 눈에 띄고 그를 변화시켜 복음의 사도로 사용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바울처럼 “열심”을 가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실 이유는 다른 것입니다. 바로 “고백”입니다. ‘주님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변화시켜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이 시점에 다시 ‘롬 10:13’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첫댓글 믿음의 힘은 오직 예수님을 만남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이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예수님이 만나 주셔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날 이유가 있는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고백"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주님이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