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암(素菴)은 부친 해암(海菴)이 지어준 아호로 첫 개인전(1971년)부터 사용했고,
그 전은 녹담(鹿潭)이라 자호했다. 칠순이 넘어 소암과 소암우인(素菴迂人)을 소옹(素翁)
또는 서귀소옹(西歸素翁)으로 낙관하였다.
소암은 1907년 제주도 남녘 범섬과 문섬을 눈앞에 둔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17살까지 화목한 가정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성장했으며,
“내 고향은 생활이 여유가 있어서인지 추사 등 명필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했으며
글씨 잘쓰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크게 돋보여 집념을 키우게 됐다.”고 회고했다.
선친은 한학자이며 의생으로 초대 서귀읍장을 지낸
해암 현지준(海菴 玄至濬, 1888∼1964)이고, 모친은 주로 자급자족하는 농업에 종사했다.
그는 제주농업학교를 1학년 말 섣달에 중퇴하고 화객선 하급선원 노릇을 하다,
쓰던 붓 한 자루 들고 도일하여 인생의 초반 49세까지를 고행과 면학의 정열로 불태웠다.
일본에서 도산(桃山)중학교, 백강(白剛)학원, 야간 소압(巢鴨)상업학교,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를 고학으로 졸업하고 백화점 점원, 필경사, 영화 회사 도안사, 국회의원 수행원, 광산회사 사무원, 동경 대정(大正)중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였다. 광산회사 재직 중에 소암은 자원하여 구성궁체(九成宮體)를 잘 쓰던
마쓰모도 호오수이(松本芳翠) 선생을 따랐다. 그러나 소암이 서예의 대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스승은 육조체(六朝體)의 대가 쓰시모도 시유우(饉本史邑) 선생이었다.
소암은 1955년 중반까지 일본에 살았다.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면학 정신으로 결국 그는 서예를 평생 직업으로 택했다. 엄친의 교화, 젊은 시절의 수많은 경험, 그리고 두 분 사부의 전법(傳法) 등으로 인해 그의 인생 여정은 명예도 권세도 없는 예술의 길로 결정된 것이다. 그는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이미 글씨로 이름을 빛내고 있었다. 매일전(每日展), 전일본서도전(全日本書道展)을 비롯하여 민전(民展) 등에 8회나 입선 또는 특선을 하여 일본서도원(日本書道院) 대의원과 동경대동서도연맹(東京大東書道聯盟) 상무이사 겸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녹담서원(鹿潭書院)을 설립하여 일본인을 지도하기도 했다. 재일(在日) 30여 년을 조선인이란 이유로 핍박받으면서도 그는 결코 한국인의 면모와 기개를 잃지 않았으며,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한라산 백록담을 뜻하는 첫 아호 녹담(鹿潭)도 그런 이유에서 취한 것이다.
종전 후 쓰시모도 선생은 “내가 보기에 그대는 조선인으로 내 문하에 가장 글씨가 뛰어난 사람이오. 이제 귀국해서 좋은 글씨를 널리 펴는 일을 해야겠소.”라고 권했다. 소암은 49세에 그간 수집한 법첩집(法帖集) 꾸러미를 들고 고베(神戶)항에서 석탄 화물선을 타고 단신 귀국했다. 마침 고향의 고모부인 강성익(康性益)이 서귀포에 남주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와달라 청한 터였다. 그러나 남주학원은 건물만 지어놨지 일을 시작할 단계는 아니었다. 귀향 후 그는 제주 유일의 교원양성학교인 제주사범학교에 한문 서예교사로 취직했고 제주대학에도 출강하여 윤리학을 강의하였으며, 1968년까지 11년간 서귀중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제주에 전통 서예의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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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虛休靜 詩 (1983년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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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의 서사(書史) 계보를 보면 스스로도 ‘나의 원류는 중국’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예 학습은 마쓰모도 선생에게 시작했으나 대부분은 쓰시모도 선생을 따랐다.
쓰시모도의 선생은 한국인 변씨(卞氏) 후계인 꾸사가베(日下部鳴鶴)로, 중국서예가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의 대표적 제자였다. 당시 일본은 중국 어가류체(御家類體)가
유행했는데 육조체(六朝體)를 쓰던 양수경의 등장은 일본 서예계에 획기적인 충격을 주었다. 육조체를 전수한 쓰시모도는 대판에 살면서 관서지방 서도의 맹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양수경은 육조의 여러 비첩(碑帖)을 연구 중 1880년 중국 대사관 직원으로 도일하여
육조의 비각서(碑刻書)를 일본에 소개하였고, 꾸사가베 등에게 자극을 주면서 일본 서도계에 막대한 족적을 남겼다.
소암은 6살 연장인 쓰시모도 선생의 괴벽과 호방한 훈도 밑에서 서예와 인생의 정도를 깨닫고, 육조체 행초서(行草書)의 참맛을 느끼게 되었다. ‘서도는 역사를 태동시킨 상형 문자와 더불어 시작된 유구한 예술’임을 확신한 소암은 오늘날 한문서예에서 한·중·일을 구분하는 국수주의적 의식은 무의미하며, 서예 초심자는 당대(唐代) 이전의 육조체로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법(古法)과 고전의 부단한 임모연찬(臨摹硏鑽)이 소암을 대성시킨 것이다. 소암은 서체(書體)를 고루 잘 쓰고 각 방면에 뛰어난 경지를 보여준다. 노을진 한라산 경치를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사람마다 좋아하는 한라산 모습이 있고, 지역마다 바라보는 산경(山景)도 틀리다. 그러나 삼사방(三四方)으로 보아 익힌 모든 것이 한라산의 참모습임을 알라. 서예도 이와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두각은 자천(自薦)에 의한 것이었다. 목포 여행 중 국전제도가 있음을 처음 알고 ‘걸어만 다오’ 하는 심정으로 1957년 9월, 제6회 국전 서예부문에 <십오야망월(十五夜望月)>을 처음 출품하여 평입선(平入選)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 표구비를 못내 지체하다 분실되었음). 이 국전을 참관하면서 김충현(金忠顯)·손재형(孫在馨)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김충현은 평입선 처리를 매우 안타깝게 여겼고, 소전도 ‘녹담(鹿潭)’이라는 전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심사위원들 간 논란이 많았음을 후일 인정하였다. 1959년 소암은 추천작가로 추대되었음을 해정 박태준(海丁 朴泰俊) 선생의 편지를 보고서 알았다. 그리하여 9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금강산헐성루(金剛山歇惺樓)>를, 10회에는 <서산대사시(西山大師詩)>를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1963년 9월, 12회 국전 서예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유금강산등산영루(遊金剛山登山映樓)>를 출품했다. 이후에도 네 차례 서예부문 심사를 맡았고, 다른 해에는 추천작가로 독특한 서체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소암은 한때 서울에서의 활동도 생각했으나 이내 낙향하고 말았다. 더욱 정진하기 위함이었다. 68년 이후 광주·목포·제주·마산·익산 등 지방 초대전을 10회 이상 가졌고, ‘청림동인전(靑林同人展)’, ‘원로작가전(元老作家展)’ 등 중앙 서단과의 교류도 사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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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가을 제주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소암은 학생들의 서예전을 지도하였다. 관덕정(觀德亭)에서 열렸던 이 전시는 이 지역 최초의 서전(書展)으로 알려졌다. 그때 학생이던 출품자들은 지금 교단에서 학생 서예지도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69년 한라문화제 초대전으로 제주시내에서 가진 소암의 첫 개인전은 70년대 서예 열풍과 함께 제주도에서의 본격 서예전의 효시가 되었다. 소암은 이렇듯 제주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 78년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공익 사업을 위해 무수한 작품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국제적 활동으로는 77년 한일전(韓日展) 출품 이래 대만 기륭시서법회(基隆市書法會) 주최 국제전, 대북 서법계 순방, 안진경(顔眞卿) 서법회전 등에 초대출품한 바 있고, 중화민국 국립역사박물관 초청서법전은 큰 호평을 받았는데 이 작품들은 귀국 후 고향에서도 전시되었다. 이때 중화민국의 사종안(詞宗安)은 ‘주필요기취 흔염절속정(走筆饒奇趣 髥絶俗情)’이라 평하였다. 소암은 소묵회 지도에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1985 및 1987, 1991), 한국서예 백년전(1988), 국제 현대서예전(1988), 한국서예 국전 30년전(1990) 등에 부단히 출품했다.
1989년에 『素菴玄中和書集』(동산출판사)이, 1992년에 『素菴玄中和』(삼화출판사)가 나왔다. 그 해 ‘소암 현중화 서예전’(예술의 전당)은 86세 소암의 마지막 전시로 호연한 필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95년 이후 소암은 조범산방(眺帆山房)에 칩거하여 임종시까지도 임서를 통한 서법연마와 작품창작에 전념했다.
소암은 일찍이 동향 서예가 강용범(康用範), 조천의 고순흠(高順欽, 독립운동가)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화북(禾北)의 청탄 김광추(聽灘 金光秋, 1904∼1983)와는 남다른 친교가 있었다. 소전 손재형과도 교류가 많았으며, 가파도의 김성숙(金成淑, 독립운동가)과 조천의 김명식(金明植, 독립운동가)을 존경하였다.
서예가 김광추는 생전에 필자와의 대담에서 “소암과는 해방후 사범학교 재직 중에야 알았지만 소묵회(素墨會) 창립은 내가 권했던 것이지. 소암은 일본에서 귀국 후에 공부 많이 한 사람이야. 내보다 두어 살 밑이라 하나 그대들이 언제까지나 지도받을 수 있을 지… 소암 떠나버리면 붓들어 제대로 가르칠 분 없어. 고집이 강한 어른이지. 전국에 한다하는 사람 많으나 그처럼 고집스럽게 꾸준히 지도하는 이 없어. 그냥 예채나 받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소암을 평했으며, 영주연묵회(瀛洲硏墨會)를 통하여 수년간 회원활동을 함께 하기도 했다. 제주 여행 중에 글씨를 함께 겨루기도 했던 소전은 행초서에 소암 따를 사람이 없다며, 추사가 바라보았던 달이란 뜻의 탐라호루(耽羅胡樓)라는 옥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소암은 후일 스스로 지은 조범산방(眺帆山房)의 옥호를 의재(毅齋)의 글씨로, 의재는 무등산 그의 옥호 춘설헌(春雪軒)을 소암의 글씨로 써서 걸었다. 어수룩한 노미(老美)에 넘친 의재의 글씨는 양각(陽刻) 현판으로 범섬 맞은 편 언덕받이 소암댁 조범산방의 묵직한 상징물이 되었다. 소암은 의재를 예도(藝道)의 선배로서 대단히 존경하였다. 의재가 세상을 뜬 후에도 춘설헌을 찾아보는 그의 감회는 유별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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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이 처음 성인들에게 글씨를 가르친 것은 한국은행 제주지점 직원들을 위한 취미강좌였다. 곧 소문이 나 59세(1965)에 주위 권고로 청탄 김광추(聽灘 金光秋)와 함께 영주연묵회(瀛州硏墨會)를 발기하여 활동했다. 1973년 소암 문하생들의 공부처란 뜻의 ‘소묵회’는 그해 5월 6일 정식 발족되었다.
소묵회는 74년 3월 24일 제1회 회원정서전(淨書展)을 가진 이래 연 2회 합동전이 열리고 있다. 소묵회는 한때 제주에만 1백명 이상의 회원을 헤아리기도 했으며, 별도의 회칙으로 운영되는 지역별 소묵회가 조직되어 있다. 소암은 “여러분 중에는 도전·국전 등의 입선이나 노후 오락을 위해 글씨를 배우는 사람이 있으나 나의 목적과는 틀리다. 또 소묵회가 나의 생활수단이 아니다. 글 쓰고 안 쓰고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됨이 문제다. 좋은 글귀, 고인(古人)의 글씨, 꾸준한 연마를 통해 조금이라도 무언가 얻게 하자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은 내 책임이나 배우고 안 배우고는 그대들 책임이다.”면서 인격 수양을 강조했다.
소암은 노후까지 불도 안 땐 조범산방에 꼿꼿이 정좌하고 법첩 임서에 주야정진했다. 연습지가 앞뒤로 새까맣도록 거듭 쓰고 천장에 닿도록까지 쌓아둔다. 연습지가 천장에 미치면 정방(正房)폭포 옆 소남머리 바닷가에서 태워버린다. 궁행정진(躬行精進)을 몸소 실천하면서도 서학이론(書學理論)을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초학자에게 서론이 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모전 입선도 권장하지 않았다. 하고싶으면 자력으로 도전하라는 것이었다. 실력이 있고 작품만 좋으면 반드시 성가(成家)할 날이 있는 것이며 실력이 있음에도 낙선이면 오히려 떳떳한 것이 아니냐고 평소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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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필봉청(運筆奉請)이 그에게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들어오면 그는 ‘알아서 써달라’는 부탁이 어떤 때는 짐이 되기도 하나 속은 편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글 쓰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쓰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필료에 대한 소암의 생각은 단호하였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너무 많았지만. 그는 예전에 비석이나 입춘방(立春榜) 같은 휘호 청탁에 기껏 담배나 박주(薄酒)로 사례하였음을 회고하면서, 그러한 향리민의 우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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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식을 대뜸 바꿔놓았다. 그는 욕하던 말던 자기의 길을 갔다. “그래서야 어떻게 예술인들이 작품활동을 천직으로 삼으며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응분의 운필료는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널리 알렸던 것이다. 그러나 때론 그 자리에서 지필묵을 내어 글씨를 썼다. 그의 글에는 흥취가 있다. 의기상통하면 밤새껏 거리낌없이 쓰고는 훌훌 나눠줘 버린다. 옛날에 서귀포 주점(酒店) 벽과 김사장댁 안방 벽을 가득히 써버린 ‘취이선(醉以仙)’이며 ‘유(遊)’란 글씨, 여인의 치마폭 휘지일필(揮之一筆)같은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소암을 말할 때 술 이야기를 뺄 수 없다. 60대까지 무진장 마셨으며, 산수(傘壽)를 3년이나 넘길 때까지도 젊은이들과 주석에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구하기 어렵고, 비싸기’ 때문에 코냑을 택했고,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기에 젊은 ‘친구’를 좋아하면서, “술은 정의(情誼)를 나누 |
는 중매요, 여기에 내 말을 들어줄 좋은 벗들이 있으니, 술이 있음으로 좋은 말을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소암에게는 작취미성(昨醉未醒)이란 없으며, 여가에 곧잘 산수 좋은 곳에 모여 한 잔 술에 한 수 시를 읊고 흥에 겨우면 종이를 펼쳐 놓곤 하였다.
주위에선 이구동성으로 소암을 ‘이 고장에서 지금까지 태어난 가장 큰 예술가요, 근대 한국서예계의 거성(巨星)’으로 이야기한다. 소암의 말대로 먼 후대가 지나야 제대로 기록될 것이나 당대의 명필로서 서도(書道) 외길의 달인이며 그 나름의 철학과 멋을 아는 예술가였음은 틀림없다. 그는 서예를 위해 태어났고, 서예를 위해 살다갔다.
1997년 12월 3일 미명에 나는 부고를 접했다. 0시 25분에 운명하셨다 한다. 의재의 선물인 제3회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練) 예술상(1997.11.28) 수상의 인연을 마지막으로 서도의 길을 마감하고 한껏 살아온 세상과 하직했다. 소암은 후학과 시민들의 애도 속에 서귀포시 사회장(社會葬)으로 서귀포시 서홍지경 대교곡 세장산 유좌(酉坐)에 안장되었다.
서옹스님이 소암을 위하여 게하기를 “단정하고 진실하며 해맑은 바탕에 / 긴 수염 휘날리며 휘두르는 붓은 / 마치 하늘의 신선 같아 / 봉래에 귀양온 듯 하여라 / 어려서 일찍 부친의 가르침으로 / 예천(醴泉)의 연원 깊고 / 경사(經史)를 스스로 깨달아 / 대학 중용에 마음 기울였네 / 약관에 도일(渡日)하여 / 예술 바다에 배띄우니 / 용들이 붓을 다투고 / 회소(懷素)와 짝할 만 했네 / 노년에 귀불(歸佛)하여 / 시끄러운 세상 마다하니 / 훤칠한 대장부 / 마음 뿌리로 돌아갔구나”며 슬퍼하였다.
부인은 셋이니 남형 문영표(文英杓), 일본인 호리우찌(堀內), 김해 김사만(金四萬)의 따님 김덕인(金德仁)이다. 아들은 여경(餘慶), 여훈(餘訓), 영모(榮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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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의 80대 젊음은 여느 40대의 방황하는 젊음보다 더 생기있고 희망적이었다.
그렇지만 서귀소옹(西歸素翁)으로 아호를 바꾸면서는 “서귀(西歸)란 말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키는 고향이요 나의 거처를 나타내기도 하니, 그보다도 내 나이 서방정토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였다. 하루 대부분을 붓과 더불어 생활하면서도 매달 여행을 즐겼다.
그를 ‘푸른 한라산 허리를 돌아 / 제주시로, 목포로, 광주로 /
날개 죽지 펴고 훨훨’ 날아다니는 한 마리 학으로 비유한 시인도 있다.
정말이지 지난 88년 올림픽 성화봉송 때 전세계에 방영된 하얀 모시 한복과
은빛 수염 기른 도인스런 풍모는 여태껏 필묵으로 살아온 한민족의 상징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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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貫 : 延州 |
· 雅號 : 素菴, 鹿潭, 素菴迂人, 素菴樵人, 素翁, 西歸素翁, |
· 堂號 : 鹿潭書院, 眺帆山房, 耽羅胡樓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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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 (1세) - 7월 4일(음) 제주도 서귀포시 법환동(法還洞) 248번지에서 부친 현지준(玄至濬)과 모친 곡 산 강씨(谷山 姜氏)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다. - 의생(醫生)이었고 면장(面長)을 지낸 부친 슬하에서 엄격한 훈도 아래 한학과 서법의 기초 를 익히다.
· 1919년 (13세) - 서귀포공립보통학교 2학년 편입학
· 1923년 (17세) - 서귀포공립보통학교 졸업 - 제주공립농업학교 1학년 입학 - 남평 문씨(南平 文氏)와 결혼, 장녀 성숙(性淑) 출생
· 1924년 (18세) - 도일(渡日) 대판자강학원(大阪自剛學院)에서 중학교 편입 준비
· 1925년 (19세) - 대판(大阪)의 영국 기독교 장로계 사립 도산(桃山)중학교 입학, 3학년 수료
· 1928년 (22세) - 동경으로 옮겨, 동경소압(東京巢鴨) 상업학교에 입학 - 4학년 때 일본인 교장인 문학박사 원등륭길(遠藤隆吉) 선생 담당의 노자 도덕경 수강, 노자 철학에 심취 - 학비 마련을 위하여 변호사 장곡천장차랑(長谷川長次朗, 동양대학철학교수) 집에서 서사 (書士 : 대서나 필사를 하는 사람)를 하다.
· 1932년 (26세) - 와세다(早稻田)대학 행정학과 전문부 입학. 2학년 졸업
· 1934년 (28세) - 동보(東寶)영화주식회사에 취직하여, 자막(字幕)쓰는 일을 하다.
· 1935년 (29세) - 일본 국회사무실, 광산(鑛山)회사 사무원 등을 지내다. - 배구(俳句)작가 굴내(堀內)여사와 결혼, 재일(在日) 동안 2남 3녀를 두다.
· 1937년 (31세) - 일본 서도 대가 마쓰모도 호오수이(松本芳翠) 선생 문하에서 3년간 사사하다.
· 1940년 (34세) - 마쓰모도 선생의 친우이며 일본 관서지방의 대가 쓰시모도 시유우(饉本史邑) 선생 문하에 입문, 8년간 사사. 이때 육조(六朝)와 전·예·해·행·초 등 각 서체를 배우다.
· 1945년 (39세) - 일본에서 여러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 - 매일(每日)신문 주최 매일전(每日展)에 연 3회 수상(주로 예서) - 전 일본서도전 1회 수상 및 기타 민전에 출품 8회 수상 - 동경태동(東京台東)서도연맹 상무이사 및 심사위원
· 1946년 (40세) - 동경 대정(大正)중학교 3년간 재직. - 녹담서원(鹿潭書院) 개원 - 재단법인 일본서도원대의원 역임
· 1948년 (42세) ∼ 1953년 (47세) - 재일거류민단 동경태동 부단장 및 총무로 재직
· 1953년 (47세) - 대판으로 이주하여 도산병원 등 출장지도
· 1955년 (49세) - 귀국을 결심. 둘째 고모부 강성익(康性益)이 설립한 남주(南州)고등학교장 취임 권유와 노 부모 봉양을 위해 2월에 홀로 귀향 - 고모부의 학교 운영이 뜻에 맞지 않아 4월부터 제주사범학교로 이직 - 제주대학에서 논리학을 강의
· 1957년 (51세) - 서귀포중학교로 이직, 사회·도덕· 한문·서예를 지도하여 학교환경을 개선 - 제6회 국전에 출품한 작품 <십오야망월(十五夜望月)> 입선
· 1959년 (53세) - 제8회 국전 국전운영위원회에서 추천작가로 선정 - 일본 가족의 실종으로 방황, 부친의 권유로 김해 김씨 덕인(德仁)여사와 재혼
· 1960년 (54세) - 제9회 국전 추천작가로 <금강산헐성루(金剛山歇惺樓)> 출품 - 아들 영모(榮謨) 출생
· 1961년 (55세) - 제10회 국전 추천작가로 <서산대사시> 출품
· 1963년 (57세) - 제12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유금강산등산영루> 출품
· 1965년 (59세) - 제14회 국전 추천작가로 <추일우성> 출품 - ‘영주연묵회(瀛州硏墨會)’를 청탄 김광추(聽灘 金光秋)와 함께 발기
· 1966년 (60세) - 제15회 국전 추천작가로 가친(家親) 해암(海菴)의 시를 초서로 <한라산(漢拏山)> 출품 - 제자 박건복(朴建馥)의 주선으로 제1회 개인전 개최 (목포)
· 1967년 (61세) - 제16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해암 시 <정방하폭(正房夏瀑)> 출품 - 남농 선생 초청으로 제2회 개인전 (목포) - 서귀포중학교 퇴임 (11년간 재직) - 부친 84세로 별세
· 1968년 (62세) - 제17회 국전 추천작가로 <삼일포(三日浦)> 출품 - 박건복 주선으로 제3회 개인전 (광주), <10곡병 어부사> 외 42점 출품 -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을 처음 만남. - 의재 당호 춘설헌(春雪軒)과 조범산방(眺帆山房)을 바꾸어 제(題)하다.
· 1969년 (63세) - 제18회 국전 초대작가로 <처세훈(處世訓)> 출품 - 제주도 문화상 수상 - 한라문화제 기간 중 제주시 청자다방에서 초대전 및 서귀포 초원다방에서 재전(再展) 개최
· 1970년 (64세) - 제19회 국전 초대작가로 성삼문 시 <절개가> (한글) 출품
· 1971년 (65세) - 제20회 국전 초대작가로 이순신장군 시 <단장가> (한글) 출품 - 미협 마산지부 초대전 개최
· 1972년 (66세) - 제21회 국전 초대작가로 <정방폭포(正房瀑布)> 출품 - 자당(慈堂) 곡산 강씨 86세로 별세 - ‘제주소묵회(素墨會)’를 창립 지도
· 1973년 (67세) - 제22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고운 시 <가야산(伽倻山)> 출품 - 박건복의 주선으로 개인전(광주), <10곡병> 외 34점 출품 - 여수서도회 기금 조성을 위한 ‘여수전’ 개최 - 제주시 정다방에서 서예작품전 개최
· 1974년 (68세) - 제23회 국전 초대작가로 백헌(白軒) 시 <장안사동구(長安寺洞口)> 출품 - 원로작가초대전 출품(문공부 주최) - 개인전(마산)
· 1975년 (69세) - 제24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진묵선사시(震默禪師詩)> 출품 - 개인전(부산)
· 1976년 (70세) - 제25회 국전 초대작가로 초서 작품 출품 - 목포소묵회를 창립
· 1977년 (71세) - 제26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금강경서 (金剛經序)> 출품 - 전남도전 심사위원으로 석패란 (席佩蘭) 시 <월야(月夜)> 출품 - 한·일 서예 교류전 출품 - 서귀포 소묵회 창립
· 1978년 (72세) - 제27회 국전 초대작가로 <연영춘첩(淵永春帖)> 출품 - 전남도전 심사위원장으로 <추운막막(秋雲漠漠)> 출품 - 한국현대미술대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 초대 출품 - 청림회(靑林會) 창립전 및 상미회 (尙美會) 초대전 출품
· 1979년 (73세) - 제28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고시(古詩)> 출품 - 제2회 청림회 및 중화민국 기륭시(基隆市) 서법연구회전 출품
· 1980년 (74세) - 이해부터 국전에 불출품 - 국제미술교류전 및 제3회 청림전에 출품 - 대구소묵회 창립
· 1981년 (75세) - 제주시 남양미술회관 초대전 개최 - 광주소묵회 창립 - 전(全)소묵회 제주전 지도 출품
· 1982년 (76세) - 서귀포 전시공간 상미(賞美)에서 초대서예전 개최 - 중화민국 서법계 순방
· 1983년 (77세) - 중화민국 국립역사박물관 초대전 개최 - 사적지(史蹟址) 법화사(法華寺) 기금 조성을 위한 찬조전 출품 - 현대미술관 초대전 출품
· 1984년 (78세) - 전소묵회 대구전 지도 출품 - 중화민국 국립역사박물관 초대전과, 재전(再展)을 서귀포·제주·목포·광주·대구에서 각각 개 최 - 추사 김정희 적거지복원(謫居地復元) 기금 마련을 위한 초대전 출품. (예총 제주도 지부 주 최)
· 1985년 (79세) - 전소묵회 광주전 지도 출품 - 현대미술관 초대전에 <퇴계 시> 출품
· 1986년 (80세) - 전소묵회 목포전 지도 출품
· 1987년 (81세) - 전소묵회 제주전 지도 출품 - 현대미술관 초대전에 <서산대사 시> 출품 - 묵적전(墨跡展) 개최 (마산 동서화랑)
· 1988년 (82세) - 전소묵회 서귀포전 지도 출품 - 한국서예 백년전 및 국제 현대서예전 출품 (예술의전당 주최)
· 1989년 (83세) - 서집 발간 (소묵회) - 제1회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 - 전소묵회 마산전 지도 출품
· 1990년 (84세) - 한국서예 국전 30년전(예술의전당 주최) - 전소묵회 광주전 지도 출품
· 1991년 (85세) - 국립 현대미술관 초대전 출품 - 전소묵회 목포전 지도 출품
· 1992년 (86세) - 전소묵회 제주전 지도 출품 - 제11회 전소묵회 제주전 지도 출품 - ‘소암 현중화 서예전’ 개최 (소묵회 주최, 예술의전당 서예관)
· 1993년 (87세) - 제12회 전소묵회 서귀포전 지도 출품
· 1994년 (88세) - 미수전(米壽展) 개최 (소묵회 주최, 세종화랑) - KBS에서 ‘소암의 행·초'가 다큐멘타리로 제작, 전국 방영
· 1995년 (89세) - 제13회 전소묵회전 지도 출품
· 1996년 (90세) - 제14회 전소묵회전 지도 출품 - ’96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전에 <차심별제운(次沈別提韻)> 출품
· 1997년 (91세) - 제15회 전소묵회전 지도 출품 - 제3회 의재미술상 수상 (광주광역시 제정) - 3월 19일 뇌경색증으로 쓰러진 후 9개월간 투병 생활 - 12월 3일 자택에서 별세, 서귀포시청 광장에서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 - 장지(葬地)는 서귀포시 동흥동 가족묘지에 안장
· 1998년 - 의재미술상 수상기념 초대전 개최 (광주광역시 주최, 광주시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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