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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Freeman 원문보기 글쓴이: Andreas
성소피아 대성당 (The Church of St. Sophia, Ayasofya Museum)
‘성스런 지혜’라는 뜻의 아야소피아는 라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의 상징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동로마 제국 시대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인 성당이었다. 그 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점령하여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 이들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사원의 내부에는 비잔틴 문화를 상징하는 다수의 모자이크 벽화가 남아 있는데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 벽화나 휴스티아누스 대제가 화려하게 묘사된 그리스도 좌상은 특히 유명하다. 본당의 넓이 75m X 70m 로 7,570 평방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성서의 '40'이란 숫자는 준비, 고통, 방황의 시간을 의미 하므로 이 시간이 지나면, 희망의 새출발이 있음을 의미한다.)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장대한 구조이다.
이 건축에 동원된 장인은 100여명, 노동자는 만 명이 넘는다. 이 성당은 5년 10개월 만인 537년 완공이 된다.
그 후 지진과 보수를 겪으며 비잔틴 역사를 통 해 황제 대관식과 같은, 또는 여러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쓰였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군들의 약탈의 대상이 되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그 후 1453년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정복자)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바뀌게 된다. 그 후로 터키인
들에게도 유명한 예배장소가 되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여러 왕들이 이곳의 투루베(무덤)에 묻힌 것만 봐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천정에 보이는 것은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앉고 있는 아기 예수와 오른쪽으로 가브리엘 천사, 그리고 왼쪽
으로는 미카엘 천사장의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그만 부분만 남아 있다.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
어진 모자이크이다.
황금빛 천장
옛날 유스티니안 황제는 성 소피아의 건축을 마치고 헌당예식를 올리던 도중 흥분을 참지 못하고 교회 안
으로 뛰어 들어와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서며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능가하였도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과연 입이 절로 벌어지고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거대한 대
리석 기둥들과 항아리, 이슬람 사원의 코란 문구와 더불어 화려한 금빛 모자이크들과 성화가 군데군데 벗
겨진 회칠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내부는 보수를 위해 세워놓은 철탑들 속에서도 충분히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두 종교가 훌륭한 건출물이라는 한 공간 안에서 오랜 세월을 지나며
서로 인내하고 포용한 흔적들이 감동적이었다
디시스
비잔틴 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자이크 "디시스(Deesis, 간청)"가 바로 이것이다. 황금으로 된 벽면을 배
경으로 예수님은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그의 왼편에는 세례자 요한이, 그의 오른편에는 성모 마리아가 서 있다.
마지막 심판의 날 세상을 심판하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수님을 낳았던 마리아와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던 세례
자 요한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비를 베푸시기를' 간청한다는 내용으로, 그들의 얼굴 표정은 디시스의 주제에 걸
맞게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예수님의 모습은 단호하면서도 따스한 인간애가 엿보인다. 불행게도 하
단 부분은 손상을 입었는데, 소피아가 지금처럼 잘 보전되기 이전에 이것을 떼어가서 목걸이를 만드는 사람이 많
았다고 한다.
황금 모자이크화
예수님과 황후 조와 콘스탄틴9세인 모노마쿠스가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왼손에 성경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그의 오른쪽으로는 황제가
돈 자루를 바치고 있고, 황후는 손에 두루마리(기부자 명단이 기록된)를 들고 있다. 황제의 머리 위에는
"로마의 군주 콘스탄틴 모노마쿠스"라고 새겨져 있고, 황후의 머리 위에는 "조(Zoe), 가장 독실한
오거스타"라고 적혀 있다. 이 11세기의 모자이크화 속의 황제와 황후는 모두 의식용 의복을 입고 있다.
조는 세 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이 그림에서 이전 황제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 세번째 남편인 모노마쿠스가
대신하고 있다.
성모화
성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뀐 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두께 5Cm 이상의 회색 회칠이 더해지게 된다.
참고로 이슬람교는 일체의 우상 숭배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원 에서는 어떠한 그림도 조각상도 찾아
볼 수 없다. 다행인 것은 1931년 미국 고고학팀이 청소작업 중 우연히 회칠을 벗겨내면서 발견하게 되어 비교
적 원형에 가까운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림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고, 그 옆에 존 코뮤네스 황제와 헝가리의 왕 라디슬라우스 1세
의 딸로 그의 부인이자 황후인 아이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황제와 부인은 아주 독실하고 자비로운 신자들로 알
려져 있다.
성당봉헌화
소피아를 나가기 전 큰 거울 앞에 있 는 모자이크...
중앙에 성모마리아와 예수님, 왼쪽에는 성 소피아를 들고 있는 유스티니안 황제,
오른쪽은 콘스탄티노플 들고 있는 콘스탄틴 황제이다. 오른쪽이 왼쪽의 아버지로 둘은 부자지간이다.
블루 모스크 (술탄아흐멧 자미, Sultan Ahmet Camii)
오스만 시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1600년대 초에 세운 이슬람 사원으로 종교적으로 중요한 결정사항이나 축제, 집회와 같은 행사들이 치러진 곳이다.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 아흐멧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내부의 푸른색 기둥과 타일장식으로 어우러진 조명으로 블루 모스크란 애칭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블루 모스크 내부
에페소의 사도요한과 함께 사셨던 성모님의 집
에페소 3차 공의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의 남은 여생을 위해 산(크레소스 산; Mt. Korssos, 뷰불다; Bülbüldağı) 위에 작은 집(메르예마나 에비)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집은 후에 찾는 이가 없어 잊혀졌다.
전승되어 내려온 내용에 따르면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피해 이곳 터키 에페소로 피신해 와서 숨어 살았으며 당시 거처는 에페소 인근의 뷰불다 남쪽 기슭이었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이곳 뷰불다 남쪽 기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
현재 에페소에 가면 실제 뷰불다(크레소스 산)를 구불구불 오르는 도로를 따고 올라가면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임종을 거둔 기억자형의 토담집이 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이곳이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어을까 의문이 들 것이다. 여기에는 신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상기했듯이 베일 속에 가려진 채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임종 장소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져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독일 베스트팔렌주의 돌멘이라는 시골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수녀 캐더린 에메리히(Emmerich)가 1878년 환시(Vision)을 보게 되는데 그 환시에 예수님 승천 후의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의 에페소에서의 생애가 생생하게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점은 에메리히 수녀는 12년이나 병상에서 보낸 사람이었으며 에페소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시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당시 시인 클레멘토 브렌타노는 에메리히 수녀의 환시(Vision)에 기초해서 '안나 캐더린 에메리히의 비젼에 의한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자를 펴내게 된다.
1880년 이 책이 터키 이즈미르에 있었던 라자로 수도회의 신부 줄리앙 구예에게 전해졌고 그는 책에 근거해서 성모 마리아의 집을 찾아내게 된다. 1891년 5월 우애곡절 끝에 마침내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발견된 곳이 바로 지금의 장소이며 후에 교황 요한 23세가 1961년 이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와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함으로써 성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현재 이곳은 그리스도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의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매년 8월 15일에 그리스도교인에 의한 기념 제전이 이곳에서 열린다.
성모마리아의 집 내부-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음
성모마리아의 집에서 나오다 보면 이렇게 기도문을 매다는 것을 볼 수있다.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 큰 돌틈 사이에 접고 또 접은 기도문을 끼워둠과 같이...
모든이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 지기를...
700년된 식당(실크로드 무역상들이 머물던곳)
카파도키아-파샤바
수도승의 계곡으로 알려진 파샤바는 원래 터기어로 "장군의 포도밭"이란 뜻이다.
화산 폭발로 인해 형성된 응회암이 오랜 세월 동안 빗물에 의해 침식되고 풍화 되면서
바위 윗부분의 주성분인 현무암과는 침식과 풍화의 속도 차이로 버섯모양으로 변했다.
카파도키아
'괴레메'는 카파도키아의 중심도시로 카파도키아의 관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놓는 명소이다. 카파도키아 투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인지 주변은 온통 여행사와 호텔이 많이 있다. 한편 괴레메는 비잔틴 시대의 성당과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마을 외곽 2km에 자리한 괴뢰메 계곡에는 야외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한 벽화가 있는 사과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성 헬레나의 초상화가 있는 뱀 교회, 최후의 만찬이 벽에 그려져 있는 카란르코 교회, 그리고 괴레메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화려한 실내장식과 뛰어난 보존상태로 사랑받고 있는 바클 교회가 있다. 교회입구에 사과나무가 있었다는 "사과교회", 벽화에 그려진 사람이 샌들을 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 "샌들교회", 그리고 특히 푸른색의 벽화가 아름다운, "토칼르 교회" 등, 수 없이 많은 교회가 있다.
괴뢰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으로 환상적으로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은 데린구유나 카이막카르 지하 도시와는 달리 지상에 있는 바위 동굴 속에 프레스코로 그려진 성화들이 교회마다 장식 되어 있다. 성화들이 많이 파괴된 곳도 있으나 토카트르 교회 같은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 되어 있다.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회교인들과 어린이들의 장난으로 초기 성화들이 많이 파괴 되었으나 당시 비잔틴 예술을 이해하는데는 많은 도움을 준다. 어두운 교회의 천정과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등이 그려져 있다. 사과교회, 집시교회, 토칼르교회, 성 발바라 교회 등 수 많은 교회 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등을 주제로 성화가 그려져 있으며, 천정 모퉁이에는 성경 기록자들의 성화도 그려져 있다.
괴레메 동굴교회
괴레메 동굴교회내 벽화
젤베계곡의 동굴 거주지
젤베계곡의 수도원
지하성당
데린구유(Derinnkuyu)지하도시
동굴식당
트라얀황제의 숭배신전
하느리아 사원
히에라폴리스 원형극장
히에라폴리스는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이다.
기원전 190년경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에 의해 발전하게 된 이 도시는 로마와 비잔틴을 거치면서 번성하였으나
셀주크투르크로 인해 정복당하고 14세기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로마 시대의 공중 목욕탕이나 원형 극장,교회터와 바실리카,광장 등이 남아 당시 영광의 흔적들을 엿보게 한다.
공중화장실
비대시설과 이상한 소리 들릴까봐 분수시설과 음악까지 갖추어진
공중화장실이다. 단 여자는 입장불가!
히에라폴리스의 파묵칼레
이곳의 온천물은 섭씨 35-50도 의 탄산수로서 특히 심장병, 소화기장애,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
고 전해져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을 찾아왔었다고 한다.
히에라폴리스의 파묵칼레
사우나의 이벤트탕 같은 모습인데 위험하여 들어갈 수는 없다.
성 발바라 교회
셀수스 도서관
우리나라에선 두란노도서관이라고도 한다. 도서관 정면에는 지혜, 행운, 학 문, 미덕의 네가지 의미를 상징하는
여신의 동상이 있다. 그곳에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이중벽으로 되어 있어서 수 천권의 책을 보호하도록 했다.
로마제국의 주집정권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묘 위에 세운 기념물이 이 도서관이다.
도서관앞을 조금 지나가면 창녀촌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시판이있다.
옛날 창녀는 정치에도 참가할 정도로 권리와 지식을 갖추었다고 한다.
원하시는 사람은 발바닥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되 단, 발 크기가 이보다 작은 사람(즉, 미성년자)는
입장불가라 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단다. 발 큰 미성년자는 어쩌지?
아크로폴리스
구 시가지 상가
천만 루불 주고 구두닦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