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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마지막 주를 보내면서 즐겁고 기쁜 가정보다도 슬픔가정 소식을 들으면 또 한 가정이 무너졌구나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의정부 일가족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들만 남겨두고 아버지가 아내와 딸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비정한 살인사건은 두고 두고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자기 방에서 홀로 공부하다가 살아 남은 아들! 이제 이 아들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홀로 남은 아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시인이며 소설가인 조지 맥도날드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멋진 길은 가족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이런 소중한 가정을 잃어버린다는 것 비극이요 아픔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창세기 마지막 50장 끝맺음은 회복된 요셉의 가정을 볼 수 있기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면 소망을 가져 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창37장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부인이 넷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사회 문화적인 특성상 여러 부인을 받아드리는 것이 허용되었기에 야곱은 네 부인을 통해 요셉외에 배 다른 아들들이 열 명이 있었습니다. 한 집안에서 대가족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갈등의 싹은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좋은 옷이 있으면 먼저 요셉을 주고 배다른 아들 들은 뒷전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런 아버지행동을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 갈려고 했는데 어느날 요셉이 꿈을 꾼 것이 결정적인 타격이 된 것입니다.
어떤 꿈입니까?........ 볏단과 해 달 별이 요셉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며 그냥 꿈을 아버지 야곱에게 와서 꿈을 말 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이 형들이 요셉을 시기한쪽으로 몰아갑니다. 시기심 하나로 형들이 동생을 죽일려고 하니 요셉의 가정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 한 것입니다. 형들은 아버지 몰래 적당한 기회에 요셉을 죽일려고 구덩이에 가두었지만 죽이지않고 지나가는 미디안 노예 상인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형제 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동생 요셉을 팔아 넘겼으니까 시원할지 몰라도 형들은 일생 동안 죄 의식을 가지며 살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가나안땅에 흉년이 들어 아버지 야곱의 지시로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갔더니 오래전 노예로 팔았던 동생 요셉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보통 놀랜 것이 아닙니다. 형들은 요셉을 판 죄 때문에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죄를 묻지도 않고 형들을 다 용서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기에 형들에게 아버지가 살아 계신지, 안부를 묻고 나중에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모시고 옵니다. 바로왕으로통해 후한 대접을 받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요셉 한사람 때문에 우리 말로 말하면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제 아버지 야곱이 수명을 다하고 죽었습니다. 그동안 형제간에 복잡한 관계들로 얽혀 있는 요셉과 형제들을 연결해 주던 고리가 아버지 였는데 그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제껏 방패막이가 되어 있던 아버지가 죽자 형들은 다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죄의식이 이렇게 힘들고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15절.....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 없이 다른 형들이 가족회의가 있었을까요? 형들이 동생 요셉의 대해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과거 아픔을 주었던 깊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요셉의 가정은 오늘의 가족현실에서 얼마든지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이 가있는 가족의 관계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개인이 회복되고 우리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도 나라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회복이란 전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되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금이 가 있는 요셉의 가정이 회복된 가족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야곱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요셉의 행동 하나 하나 말 한마디가 이 가정을 회복되게 한 것입니다.
가정이 다시 회복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의 한 마디 속에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19절.....내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습니까?....... 20절......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24절.... 나는 죽을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십니다. 요셉에게는 오직 한분 하나님 외에는 없어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회복이란 어떤 전문적인 프로그램이 우선이 아닙니다.......교회마다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제자 훈련 수료 했다고 해서 100%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영적 키가 있어요 요셉의 고백을 보십시오 오직 해하려 함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신앙고백 한마디가 이 가정을 완전히 회복시킨 것입니다. 형제들을 돌보며 강력한 신앙고백 한마디 해 됨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가정회복이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회복이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졌는가?
1. 요셉은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드렸습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우주의 모든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인생의 키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을 보면 시작 될 때 여러 가지 사건들과 장면들, 대화들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할 때가 있습니다. 그저 주인공에 집중하여 일이 잘 되어 가면 좋고, 상황이 애매해지면 안타까워하고 그렇게 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자하는 “오두막”도 행복한 한 가정에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막내 딸이 유괴를 당하고 아버지가 현장을 찾는데 눈 덮힌 오두막 집에서 피묻는 딸의 옷을 발견하고 주인공이 오두막에서 정신을 잃습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세계가 그려집니다. 주인공 아버지가 꽃밭이 아름답게 정리된 평온한 오두막 집이 보이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파파'로부터 초대를 받습니다. 파파라는 주인은 주인공의 삶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여자가 주인공을 평안하게 해 주고 또 다른 남자도 주인공과 함께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함께 동행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주인공이 가졌던 깊은 고통이 세 사람을 만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서서히 치유되는 과정이 그려지는 영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영화든 감독이 영화의 흐름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의 드라마가 그렇습니다. 19-20절을 다시 볼까요?
19-20절.....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이 고백 속에는 아픔의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있기에 형들이 해하려 했다고 고백 한 것입니다. “해”하려 했다. 요셉에게는 지울수 없는 상처입니다. 남도 아니고 가족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그 흔적을 가슴에 안고 있기에 형들앞에 말한 것입니다.
이런 가족을 통해서 받은 상처외에 애굽나라 노예로 팔려왔는데 어떻게 애굽의 높은 권력의 집안의 노예가 됩니까?......보디발 장군집에서 살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데 시위대 감옥에서 갇힌 두 사람의 꿈을 해석해 주는 기회가 주어집니까?........ 꿈 해몽대로 어떻게 술 맡을 관원장이 복직되어 어떻게 바로 왕의 꿈을 요셉이 해석하는 기회가 주어집니까?
요셉이 30세 총리가 될 때까지 사건들을 하나하나 따로 보면 너무나 어이없고 마치 꾸며 짜 맞추는 소설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아요 그런데 요셉이야기를 길게 연결 하여 보면 볼수록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그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요셉은 상황이 바꿔질 때마다 그의 고백 속에는 오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그 고백이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우리의 삶도 오늘 현실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길게 보는 영적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했던 많은 일들을 하나씩 떼어서 보면 상처가 더 많아집니다. 나를 괴롭게 했던 사람들이 용서가 안 되기도 하고, 힘들었던 시간들이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면 그런 사건들을 길게 봐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변하여 있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었는가?........ 비록 내가 잃은 것도 있지만, 그 잃은 자리에 하나님이 대신 채워주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나에게 어떤 은혜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가를 볼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 말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요셉은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17-18....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형제들이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유언을 요셉에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 요셉 앞에 엎드리며 이제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요셉이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용서한다고 말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고 형제를 끌어안고 사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19절 하반절에......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은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드렸기에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만약 나 같으면 당장이라도 욕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바보가 되셨습니다. 그냥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고난을 이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53:6-7......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의 깊이를 아시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까지 용서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예수님을 바라보면 용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가족들의 허물과 약점과 죄를 다 용서할수 있습니다. 용서가 없으면 화목할 수 없고, 용서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래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살인범이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의 형이 공직에서 오랫동안 일한 공이 있었기에 주지사에게 사면을 요청을 간청했습니다. 주지사는 형의 간곡한 요청과 형이 주 정부에서 기여한 공로를 침착하여 사면장을 내렸습니다. 주지사의 사면장을 양복 호주머니에 넣고 동생이 있는 감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사면을 받고 다시 살아나게 된다면 넌 뭘 하겠니 그러나 동생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습니다. “ 만약 사면을 받고 살아나기만 하면 먼저 네게 사형언도를 내린 그 판사 놈을 죽일 거야 그 다음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놈들도 모조리 죽일 거야.” 동생의 말을 듣고 심히 안타까운 형은 눈물뿌리며 사면장을 가슴에 품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조건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엡4:32.....“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 요셉은 끝까지 돌보며 위로하고 양육하였습니다.
21절....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형제들을 하나님의 섭리로 다 용서했지만 형제들을 바라보니 아직도 두려움이 가득차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다시 두려워하지 마소서 재차 위로합니다. 이런 진심어린 배려와 위로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형님들의 자녀들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조카들 양육까지 돌보겠다고 형님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22절-26절에서 알 수 있듯이 요셉은 애굽에서 110세를 살다가 죽기까지 형제들에게 말한 대로 지극 정성으로 조카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요셉이 30세에 국무총리가 되었으니까 110세 죽는 그날까지 80년 동안 형제를 돌보고 그의 아들인 에브라임이 3대까지 혈통이 이어갔으니 요셉은 대가족을 돌보는 책임 있는 가장이 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이 양육되었더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마길의 아들은 대상7:14절에 보면 이방 첩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므낫세의 아들들 그 처의 소생은 아스리엘이요 그 첩 아람 여인의 소생은 길르앗의 아비 마길이니....
아마 요셉은 마길의 아들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첩의 아들까지도 돌보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진정성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24절.......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시고
요셉은 마지막 유언하는 그 순간까지도 오직 하나님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는 책임 있는 가장이었습니다. 요셉의 일생 아름다운 끝은 진정으로 가족을 회복시키고 가족에게 인정받으므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은퇴를 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을 하여도 가정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참다운 성공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지 못했다하더라도 가정에서 성공한 사람이 참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제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간 후 자녀들이 아버지의 생을 돌이켜 보며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가정에 실패한 아버지다라고 말한다면 저의 삶은 아름다운 삶이 아닐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홀아비 과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 시기와 기간을 모르지만 같이 살다가 홀로 살 때가 옵니다. 그 때 남편은, 아내는 나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영락 교회 모 장로님의 장례를 치른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장로님은 6.25 때 월남하여 열심히 사업을 하여 큰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초대 장로로 열심히 수고하여 큰 교회도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장로님께서 별세하셔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 장례식에서 손녀가 나와 추모사를 읽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는 할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진실과 겸손과 바르게 사는 길의 표본이 되어 주시고 말없이 실천해 주신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모신 것을 저는 행복하게 생각하고…할아버지, 우리가 할아버지 같은 신랑 얻게 해 달라고 소원했던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죽은 후 할아버지와 같은.... 할머니 같은...... 아빠 같은 삶을 나도 살아야겠다고 하는 자식들이, 손자 손녀들이 있다면 가장 아름답게 살다가 천국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회복된 우리 가정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