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화를 걷다] 아나키적 고대 그리스 사회
특정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았던 ‘추첨제’의 효력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체제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하나는 권력구조의 문제이다. 오늘날은 국가의 존재나 그 권력의 행사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권력의 주체가 성립돼 있지 않았다. 시민단으로 구성된 폴리스에서는 시민들이 모여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런 시민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 민회(ekklesia)였다. 민회 장소는 아크로폴리스의 서쪽 편 언덕 프닉스(The Pnyx)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편의상 어디서나 열릴 수 있었다. 오늘날도 그리스에는 동네 곳곳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다.
흔히들 이런 그리스 폴리스의 직접민주정치 체제는 나라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렇지 않다. 핵심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것이다. 시민단의 폴리스에서는 각자가 무기를 소지했으며, 권력이나 무력이 한곳에 집중되거나 조직화돼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 비겨서 말한다면, 고대 폴리스는 권력과 무력이 외부로 넓게 확산돼 개인이 소지했으며, 국가의 조직적 군대나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아나키(nanrchy)적 사회였던 것이다. 시민의 자유란 노예노동에 반대되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국가가 행사하는 정치권력과 조직적 무력에서 자유로웠음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국가의 권력에 복속된 동방의 농민들을 ‘왕의 노예’로 불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근대국가에 소속된 우리를 본다면 ‘국가의 노예’로 칭했을 법하다.
권력, 무력도 개인이 소지한 고대 폴리스
폴리스는 동방의 군주제나 오늘날 근대국가 같이 다소간에 일률적으로 편제된 행정조직 같은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집합 또는 각종 하위 공동체 집단을 중심으로 다핵적이며 원심성이 강한 사회였다. 부족, 씨족, 가문 혹은 촌락공동체 등 폴리스의 하부조직은 다소간 후대보다 공동체성이 더 강했고, 폴리스의 기능에 유사한 자체의 조직 및 기능을 갖췄으며, 폴리스와 상호 협조체제를 이룬다.
특히 폴리스의 사회신분과 관련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크게 잘못 이해되고 있어서 시정을 요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폴리스의 구성원이 시민과 노예로 나뉘어 있고 시민은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해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 또 남성은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여성은 시민권이 없어 거류외인이나 노예에 유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점 등이다. 그런데 시민은 노예에 대조되는 개념이 아니고, 또 여성도 시민으로 불리었다.
노예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시민의 개념은 성립한다. 이때 시민이란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만이 아니라 가문이나 씨족 등 혈연공동체 내의 권한 및 지위와도 연관이 있다. 그래서 투표권이나 군역복무와 무관하게 여성도 시민권자로 규정된다.
한편, 시대에 따라서는 시민과 비시민의 구분 자체가 명확하지 못한 경우도 있는데, 솔론(Solon, 기원전 638-558)의 시대에 아테네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솔론은 재산등급에 따라 4계층으로 구분하여, 부자에게 국가의 부담을 부과하고 빈자는 면제했다. 이때 폴리스의 구성원은 부유할수록 부담이 늘고 가난할수록 부담이 줄어드는 상황이니, 반드시 어떤 특권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시민’개념과는 무관하다.
이 능력자 부담의 원칙은 훗날까지 남아 아테네 민주정의 주요 원리가 됐다. 아테네에서는 국가의 행사나 전쟁을 치를 때에는 그 경비를 부자들에게 부담시켰다. 이때 국가는 필요한 전선만큼 부자 가운데서 선주를 지명하고 해마다 다른 사람을 교체했다. 선주에 지명된 부자들은 적지 않은 경비를 사재에서 지출해야 했으므로 전쟁 자체를 기피하려는 경향까지 있었다. 많은 돈을 써야 되는 전쟁을 계속하기보다 차라리 항복해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재산 바꾸기 소송’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한 번 선주로 지명된 사람이 그 부담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은 주변에 자기보다 더 부유한 사람을 찾아내어 자신의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엉뚱하게 ‘찍혀온’ 사람이 고분고분 그 부담을 넘겨 받는 일은 흔하지 않고, 양자 간에는 자연히 소송이 일게 된다. 토지도 값을 측정하기 힘들 때가 있고 또 여러 형태의 재산권이 있어 재산의 크기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 재판관들은 마침내 ‘재산 바꾸기’의 방법을 택하도록 한다.
이것은 운 나쁘게 고발당한 사람이 그대로 부담을 떠안든지, 아니면 그것이 억울하다고 판단되면 자기 재산보다 더 많다고 생각되는 상대편의 재산과 맞바꾼 후 국가의 부담을 떠안든지, 양자택일 하는 것이다.
능력자 부담원칙을 반영한 ‘재산 바꾸기 소송’
이 ‘재산 바꾸기 소송’은 국가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경비를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부담시키는 민주적인 원칙에서 비롯한다. 수혜자가 아니라 능력자가 부담하는 이런 원칙은 이미 솔론에 의해 그 초석이 마련된 것이었다.
또 아테네의 민주정치 하면 추첨제를 빠뜨릴 수가 없다. 이것은 관리나 민중재판소의 배심원 등을 추첨으로 뽑음으로써 권력이 특정인의 손에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이다. 추첨제의 주요 목적은 필요에 따라 강화되는 국가의 기능 및 중앙권력을 특정한 소수집단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 그것도 무작위 선출에 의해 행사되도록 하는 것이다. 고위관직 선출의 경우 그 추첨 대상은 엄격하게 인선을 해 능력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도록 했다. 이것은 기득권자의 혈연, 인맥 등이 인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재판소의 배심원은 사건 비중에 따라 201, 301, 501, 1001 등으로 그 수가 달랐으나 모두 추첨으로 결정됐다. 추첨대상자들은 당첨 여부를 미리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재판정 가운데 어디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도 미리 알 수 없었다. 재판 당일 재판정 앞에서 추첨으로 재판관들을 뽑고 해당 재판정을 배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추첨제는 이른바 ‘로비’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국가의 기능이 다소간 강화되는 순간부터 그 권력이 불평등하게 행사되지 않도록 재빨리 대응조처를 취했다. 인간이라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빠지기 쉬운 ‘제 팔 안으로 굽기’와 ‘제편들기’에 대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너무 영악해서 인간을 신임하지 않았다. 부자는 물론이지만, 학식 있고 덕성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도 남을 위해 희생하기 보다는 쉽게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점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고대 아테네의 추첨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도 추첨제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그냥 무작위로 뽑는 것이 아니라 각 도별로 유능한 인재를 한 10명 정도 먼저 인선해 그들을 다 합쳐 추첨 대상으로 하고 그중에서 한 명의 대통령을 추첨해내는 것이다. 또 수가 더 많은 국회의원은 그 추첨 대상의 인원을 더 늘리면 된다. 그러면 한편으로, 정치적 조직과 무관하게 유능하고 청렴한 사람이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3선 혹은 4선 국회의원의 딱지를 달거나, 혹은 아버지도 아들도 국회의원이 돼 대물림하는 현상도 쉽게 볼 수가 없게 된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아나키적이고 합리적인 정신 위에 이루어진 것으로, 권력은 시민들 각자의 손에 분산되고, 또 그 권력은 추첨제를 통해 특정인에게 집중되지 않으며, 국가의 부담은 가진 자들이 능력에 따라 지도록 했다.
오늘날의 그리스 민주정치
고대 그리스인의 아나키의 정신은 오늘날의 그리스 사회에서도 찾아 볼 수 잇다. 예를 들면, 그리스인은 문제가 생기면 경찰 등의 국가권력에 의지해서 해결하려는 생각보다는 우선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그리스의 <경찰학 원론>에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될 때는 경찰이 개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른바 ‘시민경찰’이 돼 경찰이 할 일을 도와주는 셈이다. 위정자와 일반 국민을 구분하지 않고, 국민 모두가 사회기강과 법질서를 확립하는 데 직접 동창함으로써 위정자들을 도와 협조한다. 위정자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경찰’이 동참하기 때문에 이 또한 아나키적 권력의 분산이다. 사실 한정된 수의 경찰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이런 그리스인의 자유 시민 정신은 여전히 봉건적인 전통이 강한 우리 한국에게는 다소간 낯선 것이라고 하겠다. 흔히들 119, 112 등에 전화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 같은 생각을 갖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그리스인은 자신 이외의 다른 누구도 자신만큼 스스로를 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왕도 사또도 아니고, 대통령도 경찰도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는 그리스인이야말로 고대 신화의 영웅의 후손이요, 자유 시민의 후예들이다.
그리스 현대사의 비극은 우리와 닮은 데가 있으나 차이점도 있다. 우리 한국과 같이 2차 세계대전 후 외세의 개입과 좌우익 간의 충돌로 인해 동족상잔의 비극(1945-1949)을 겪었다. 그 후 1967-1973년 군부 쿠테타를 일으킨 파파도폴로스(Georgios Papadopoulos)에 의해 우익 독재정부가 수립됐다. 이때 우리의 4.19 학생의거와 같이 1973년 가을 아테네 공과대학교 학생들이 봉기해 흘린 피의 대가로 독재정부가 무너지고, 전통의 왕정이 폐지됨과 동시에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Konstantinos Karamanlis)를 수상으로 하는 우익 공화정부(1974-1980)가 들어서게 된다. 이때 카라만리스는 1949년 이래 금지돼 지하로 들어갔던 공산당(KKE)을 합법화함으로써 이념상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약 25년 만에 민족의 화합을 이루어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오늘날까지 그리스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1990-1995년에도 그리스 제3공화국의 원수(대통령)직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