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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목민들 원문보기 글쓴이: 오지리
인드라, 인드라얄라, 인다라망[因陀羅網, indrjala]
---박남철 시집 『제1분』 서평
민 경 환
1 匠人
시인에게 장인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박남철 시인의 시집 『제1분』을 받아 읽고 그런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장인의 삶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어떤 일에 모든 것을 바쳐 거기에 모든 정열과 혼을 담는다는 뜻에서라면 시인 박남철은 틀림없이 ‘시의 장인’이라 말해야 맞다. 자신이 하는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채, 어쩌면 백척간두에 서서 자기 파괴와 도전과 응전의 온갖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시의 밭을 일구었다는 것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시단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그러한 것은 아니리라고 본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의 삶은 ‘문학 그 자체’이고, 문학이 ‘삶 그 자체’인 채로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상처투성이인 전신을 밀어붙이며 이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존재 증명해 보여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대다수의 시인들은 후기산업사회의 극렬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것에 적응 내지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거부했을 때 닥쳐올 가난으로 인해 당하게 될 굴욕과 치욕은 적이 괴로운 일인 것이다. 우리는 그간 현실적 모순과 부조리에 백치처럼 맑은 영혼을 접붙이지 못하고 자신의 수명을 줄여나간 시인들을 여럿 보아왔다. 그런 분들을 욕되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남철처럼 자신의 남루와 치부를 부끄러워하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며 끝내 살아내어서 현실을 증언하는 일이 어쩌면 더 힘이 드는 일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왜 수오지심이 없을 것이겠는가. 그러나 여기,
“한때에 붓다께서는 큰 비구 무리 1,250인과 더불어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 오전에 공양 때가 되어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드시고 사위대성으로 들어가시어, 걸식을 하시었다. 성 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다하셔서는, 다시 본처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마치신 다음에,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뒤에 자리를 펴고 좌정을 하시었다.”(「제1분」 부분)
라는 『금강경』의 첫 장을 접하고서는 벼락 치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붓다가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걸식을 하는데, 그 자신의 삶은 차라리 그다지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는, 오히려 그 자신의 삶을 “나의 이따위 호화판 현실”이라고도 여겨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그것은 그의 삶에 드리워진 유리걸식과 다름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신용불량한 생활에 대한 부끄러움을 대한 각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너무나도 점잖고 표리부동한, 작품과 현실이 많이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한국의 대부분의 시인들, 게다가 보여지는 시편들마다 왜 그렇게들 깨달음들이 많으며 그 자신들 또한 그토록 도사연들 하시는지,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안 되나? 벌어진 일들을, 그 천박과 비루를, 그 삶들에 대한 부끄러운 진정성을, 또는 그 위선을, 그 모든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이때에, 카테고리에 얽매어 변화하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또 어떤가. 게다가 그 수많은 문학상들은 도대체 누가 다 가져가는가. 문학상들을 무슨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고서, 그들이 정작 얼마나 한국 문학판에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을 보여온 것일까.
박남철 시인은 그간 다분히 위악적인 모습으로 온갖 기행과 황음과 공격성을 통해 작품 세계와 현실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충분히 보여주어 왔다. 그는 저 시「제1분」을 위해 일부러 한국에서 문인으로 명성과 부를 거머쥔 분들에게 찾아가거나 연락해 구걸도 좀 해보았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얼마간의 금원을 내놓거나 보내온 분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가 왜 그랬었는지를? 정말 무서운 일이다. 시 한 편을 위해 거지 꼴로 유리걸식을 감연히 감행해본 셈인 그. 그는 그들을 시험해보았던 것이다. 그는 한 편의 작품을 위해 칼끝 같이 위험한 극한의 사유와 행위를 추구해왔던 셈인 것이다. 이것은 그의 한 방편이다. 그러면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인가? 아니다. 시집 『제1분』을 읽으면 단박에 그를 알 수 있다. 그의 악명은 명백히 과장되어 있다. 그는 대단히 용감하고 점잖고 다정다감하며 치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할’[喝]을 인정할 준비가 안 되었거나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던 것일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간에 그가 평생을 가로질러 이룩한 문학적 성과가 적지 않으나,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그의 깊이와 넓이는 차라리 장인의 길보다는 구도의 길을 가는 행자의 모습을 보는 듯도 하다.
2 喝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한다. 앞으로는 더욱더 그것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에 맞물려 그가 실행한 이러한 시도는 그야말로 세계 최초이다. 누가 이러한 시도를 했었던가. 그의 시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각종 인터넷 명령어와 그런 류의 지시어들, 아이피 숫자와 날짜들 및, 사진이나 그림과 음악의 주소들, 그는 직접 인터넷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그대로 시첩에다 옮겨 놓는다. 한 편의 작품을 인터넷상의 다른 사이트 또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날짜가 다른 작업을 순차적으로 두고두고 완성하기도 한다. 때로는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논쟁이며, 채팅 내용마저도 시적 내용으로 변신한다. 이런 인터넷의 속성과 동시성뿐만 아니라 그렇게 소통하는 각자들의 고립된 유목성들은, 인터넷이라는 현대성이 제시하는 강력한 징후들일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 서평의 제목을 「인드라, 인드라얄라, 인다라망[因陀羅網]」이라 잡은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왜 그의 이런 작업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에 대해서 이번 시집 『제1분』의 말미에 수록된 해설을 통해 이수정 시인은 이러한 형식-방법(론)적인 시쓰기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시적 자아는 자신을 ‘신용불량자’(『제1분』)라고 명명하는데, 어찌 보면 이 호칭은 오늘날의 대부분의 시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현실적인 경제적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산난 언어와 비루한 인식과 파탄난 세계의 잔고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창조-생산하여 인식과 감각을 새롭게 하고, 이 새로이 닦은 두 개의 렌즈로 힘겹게 세상을 바라본다. 다시 말해, ‘언어-인식-세계’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피라미드의 바닥을 지지하고 있는 ‘언어’는 언제나 신상품으로 재고가 가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많아도 역시 쓸 만한 언어는 언제나 부족하다.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는 새로운 언어는 부족하고 피라미드는 자주 역 피라미드의 비극[“顚倒夢想”]을 낳게 된다. 거대한 세계를 인식할 능력은 부족하고 그 인식력을 일깨워줄 언어는 희소하여 뾰족한 피라미드에 찔린 시인은 고통스럽고 비대한 세계는 기우뚱거리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을 이야기하였지만, 언어를 통해 인식을 새롭게 하고, 그것으로 다시 세계에 새롭게 다가가려는 방법은 사실 소모적이고 소비적일 수가 있다. 그것은 세계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주관의 끝없는 도전일 것이다. 실체화라는 명목으로 붙잡아낼 수 없는, 입체적이고도 변화무쌍한 세계에 끝없이 새로운 언어-인식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관의 그물로 계속 덧씌우거나, 새로운 언어로 포장하고, 벗기고, 포장하고 벗겨지는 소모적이고도 소비적인 수사의 남발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막대한 소비를 감당할 만한 잔고를 가진 시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수정, 『제1분』 해설 부분)
2.
화엄철학에서 말하는 “인다라망[因陀羅網, indrjala]”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보고 착상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물론 “인다라망”은 순수하게 화엄철학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고대 인도 신화에서 나온 것이고, 나는 또 이를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internet]"이 그것의 한 현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인드라, 인드라얄라」 부분)
묘하다. 그냥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터넷의 네트워크 안에서는 동시간대에 소통한다. 전 지구인이 저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 들어가서 서핑을 즐긴다. 주식시황이건, 금융거래건, 쇼핑이건, 게다가 얼굴을 마주하고 안부를 묻거나 수다를 떨 수도 있다. (컴퓨터가 없는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얼마간의 비용을 지불하면 그러한 판에 뛰어들어 당당하게 계급 없는 세상을 누릴 수가 있다.)
불교를 얘기하면서 연기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들뢰즈/가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말하는 “리좀[rhizome, 뿌리줄기]적 사유”도 저 불교적 인다라망에 연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의 외부』에서 이진경은「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 동양적 사유」라는 글(『오늘의문예비평』에서의 정형철과의 서면 대담)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금강경』을 통해 불교를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붓다를 말하며 21세기의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가 보여주는 창작 행위의 일부인 인터넷상에서 벌이는 자신의 행위가 인간 사회의 독립된 개인이 어떻게들 이어지고 있으며, 서로에 대해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어떠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게다가,
1. 그리하여, 결론은 바로 또한 이러한 것이다.
너나, 너 이전의 선불교의 세계에서는 브라마니즘 적인 ‘범아일여’ 내지는 ‘물아일체’적인 각성의 한 표현일 뿐인 ‘나는 너다!’라는 명제 자체가 주체인 ‘나’만이 강렬하게 노정되고 마는 비논리적인 명제라는 사실을 나는 바로 ‘언어 논리’ 그 자체로써 반증해내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네가 그 후 바로 ‘문학의 귀족주의’를 노골적으로 강하게 주장하게 되고, 나는 보다 더 ‘천민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피시통신과 인터넷의 거치른 일상선의 세계’ 속으로까지 거침없이 뛰어들게 된 일과도 매우 관계가 깊은 일이라고 아니 말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정리 Ⅱ」 부분)
필자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처럼 위 시에서도 시인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문학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해놓고 살아내고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를 있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이러한 삶을 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은 항상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변화해왔으며 앞으로도 더더욱 그러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러한 자들에게 그만한 예우를 해줄 수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2. 붓다는 저것에서 이렇게 말해놓았다고 전해진다. “나는 나를 붓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내가 붓다라는 나의 이 말에(‘붓다’라는 말 그 자체의 의미에!) 결코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붓다라는 것은 다만 그 이름만이 붓다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니까, 그렇다면, 2500여년 전의 붓다는 아주 훌륭한, 제대로 된, 뛰어나게 정직한 붓다였던 셈인 것이다!
* 나의 ‘썰’이다![박남철,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현대문학』(2007년 7월호)]
3. 그런데, 그 이후에는 또 어찌된 일이었던지, (일부) 중국의 선종과 (일부) 한국의 통불교 및 (‘일부, 몰지각한!’) 그대 이전에 있어서까지는―바로 ‘나는 너다!’라는 이 무지막지한 말까지도 거침없이, 마구 내뱉아대고 말았던 셈이었다는 것이다! (오, 1994년도발, ‘제8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해버렸다’는 그대의 그 안쓰러운 「뼈아픈 후회」여! * ^)))!
4. 그러니까, 나의 요지는 바로 말 그 자체의 말보다도 훨씬 더 명백한 그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말 그 자체의 말보다도 더 명확하게 붓다의 사상을 더 잘 정리해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너다, 가 아니다. 나는 너다, 라는 것은 틀렸다. 오로지 나는 나다, 일 뿐인 것이다.”라고!
그러니까, 나의 이 주장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나는 너다, 라고 말해버리면 이미 나는 너다, 가 아니라는 것인 것이다!”
즉, 이는 바로 (화자가) 발화하는 그 즉시로, ‘형식 논리’로 미끄러져,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며, 진정한 ‘나는 너다!’는 분리되어 ‘나’와 ‘너’가 떨어져 나가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체적인 ‘진정한 논리’란 것은 (바로, 화자가)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또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결국은 ‘무의미한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까지도, ‘침묵’으로까지도 통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며, ‘진정한 언어로부터의 해방’까지도 획득해낼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인 것이다!
* 보라, 누천 년을 통과해온 이 위대한 동어반복, 을! [“I am who I am.", 「EXODUS 3:14」, 『The Old Testament』/"如來Tathagata", 「善現起請分第二」, 『金剛般若波羅密經』]
그리하여, 이로써 비로소 우리는 반문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붓다가 말하는 진정한 [“諸法無我”]의 경지가 아니면 과연 그 무엇이 될 수가 있을 것인가, 라고! 2007/08/07
5. 소심했던 자, 나:
2500여 년에 걸친 한 ‘위대한 인류적 각성’을 다시 조금 더 풀어서 논증해본 이 덧글을 다는 한 ‘소심한 자’의 가슴은 그 어렸을 때처럼, 다시 ‘죽음의 공포’를 느끼려다가 이젠 그만 둔다. 붓다도 말했듯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죽음 따위는 기껏해야 두려움의 대상 따위도 못 되는 것이라고! 공자도 말했듯이, 아침에 도를 얻으면 이제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것이 바로 ‘언어의 논리’까지도 벗어나버린 자, 즉, ‘진정으로 포월(匍越)*해버린 자’가 아닐 것이냐고! 이상이다! [시인, 박남철] 2007/08/08
* [김진석, 『초월에서 포월로』(솔, 1994); 『포월과 소내의 미학』(문학과지성사, 2006)
(「정리 Ⅱ」일부)
위에 인용한 시 자체가 좀 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시편을 말하지 않고서는 이 서평을 써야할 이유가 없겠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저토록 오만하고 자유로우며 “觀自在”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의 시를 보면 시는 어떠해야 한다는 중독에서 바로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란, 버스터미널 화장실에 휘갈겨진 낙서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어떤 저급한 자들의 문자로라도 그것은 그렇게 드러낸 그 자체로서의 정서적 결정체일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서 발화되는 그 모든 것이란 “觀音으로써의 아포리아의 세계”이다. 인용한 시편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면 간단하다. 바로 ‘나는 나다!’라는 것일 것이다. ‘天上天下唯我獨尊’?. 천상천하에 그 자신만이 오로지 존귀하다는 말일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다 각기 개인은 하늘땅 위아래를 통틀어 스스로 유일무이하게 존귀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원형질에서 출발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 중의 하나인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서 이러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간 한 번도 그 생명의 줄기가 끊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줄기가 단 한 번이라도 끊어졌다면, 나는 지금 도저히 이러고 있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당당한 목숨일 것인가? 그래서 “나는 나다!”가 맞다, 는 것이다. “나는 너다!” 라는 것은 틀렸다, 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미숙하게 위장된 오만함의 한 발로라고 할 것이다. 정작 입만으로 이타적인 척하는 것은, 사실은 지독한 이기의 한 배설적인, 조루적인 사정의 다른 이름일런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 자신들은 온갖 부귀와 영화를 다 누리면서 입으로만, 입으로만, “나는 너다!”, 내지는 “너는 나다!”라고 강변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저열한 사기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 죽을 수 있는 표범’이 아니고, 다른 짐승의 사냥감을 빼앗거나 ‘썩은 고기나 즐기는 하이에나’적인, 차라리 시정잡배들의 드잡이 행위들보다도 못한, 어릿광대의 분장된, 아예 정색한 얼굴로 내뱉는 복화술일런지도 모른다. 우리 그것에 이제 더 이상은 속지 말자. 그건 바로 고려청자가 아니고 사기주발일 뿐이라는 것이다.
3 한 대 때리다
[垂示]
앉아서 일체의 시비를 딱 끊어 버리고, 천 개의 눈이 단박에 열려, 말 한마디로 수많은 말을 꼼짝 못하게 하고, 수만 가지 모든 활동이 일거에 사라진다. 과연 이런 일에 생사를 같이 할 사람이 있는가. 눈앞에 드러난 공안을 어쩌지 못하겠거든 옛사람들의 말을 거양해 보라.
[垂示云 十方坐斷 千眼頓開 一句截流 萬機寢削. 還有同死同生底麽. 見成公案 柁疊不下 古人葛藤 試請擧看]
[本則]
정상좌가 어느 날 임제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가장 요긴한 뜻입니까?” 임제 화상은 대답 대신 선상에서 내려와 멱살을 잡고 뺨을 한 대 때린 후 확 떼밀어 버렸다. 정상좌가 멍하니 서 있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왜 예배를 하지 않는가?” 정상좌는 이 말을 듣고 예배하려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擧. 定上座問臨濟 如何是佛法大意. 濟下禪床 擒住與一掌 便托開. 定佇立. 傍僧云 定上座 何不禮拜. 定方禮拜 忽然大悟.]
[頌]
황벽의 발랄한 선기를 온전히 계승했으니 그것을 가진 임제가 어찌 점잖을 리 있으랴, 거령신이 번쩍 손을 쳐들고 일격을 가하니 천만 겹의 대화산이 단숨에 두 쪽이 났네.
[斷際全機繼後蹤 持來何必在從容. 巨靈擡手無多子 分破華山千萬重.]
[蛇足]
폭력마저 미화되는 곳은 禪의 세계밖에 없다. 선에서 난무하는 폭력은 어디까지나 그 속성이 자비에 있다. 상대를 일깨우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이미 폭력이 아니라 자비로운 교육적 수단이다. 선사들은 툭하면 몽둥이질이고 꽥 고함을 지르거나 뺨을 때리거나 선판과 포단을 집어던진다. 그것은 살인도로서의 폭력이 아니라 활인검으로서의 폭력이다. (후략)
(『벽암록』 제32칙 · 臨濟一掌, 조오현.)
이러하니…… ‘한 대 때리다!’와 같은. 저 같은 선사들의 ‘喝’을 우리가 어찌 감히, 능히 짐작이나 할 수가 있겠는가 바로 그 말이다!
4 진실 혹은, 오해
진실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또한 그것이 거짓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이미 지나간 일이어서만은 아니다. 입에 담기도 거북살스런 한순간의 일로 실로 한 능력 있는 시인을 하릴없이 떠나보낼 뻔했었으며, 그야말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매장시킬 뻔했던 현실이 못내 서글퍼진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한편으로 몰고 가려는 짓거리들은 바로 폭력이다. 그러한 짓거리들은 그 어떻게 하더라도 바로 서글퍼지는 것이다. 그 자신들만이 정의라는 생각들을 했었겠지만 그렇지만도 않음을 이제는 좀 확실히 알겠는가? 깨어 있지도 못한 만인이 깨어 있는 일인을 죽인다는 일이 그 얼마나 몽매한 일인지를 당신들은 도대체 알기나 했었다는 것인가? 이 인간세에 최선은 또 어디 있으며 최악은 또한 어디에 있는가? 또, 최선만의 세상이라면 선은 바로 그 무엇으로 그 자신이 선임을 증명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보통 악이라고 칭하는 것들도 한 사회가 간절히 그 어떤 도덕성을 말하고 싶을 때 나타나는 기현상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최, 선은 아닐지라도 그냥 선, 한 정도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렇게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임을 아는가? 그 어떠한 일이라는 것도 실은 지나친 관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나친 관심을 보여도 그렇고 그 반대였을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그렇다! ‘관심’이 아니고 ‘관세음’이었던 것임을!) 그러니 우리 함부로 말하지 말자! 그간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이들이 나타나 함부로 억압했던 시절 탓에, 정의로와지고 싶은 생각들을 더욱 갖게 만들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기는 해도, 그래도, 그토록 성급하게 선악을 바로 가르지는 말자!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성을 지나치게 폄하해서도 안 될 것이겠지만!) 제발이지 이제는 더 이상은 냄비 끓듯 하지 말자! 긴 세월을 사는 동안 (설혹 그것이 시대성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 할지라도!) 상황은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자신의 책무에 무섭도록 성실한 사람들을 인정해주고 존중하자. 악인이라 불려지던 자들도 그 언제든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으며, 선한 자라 불려지던 사람들도 언제든지 모진 대오에 서게 될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행위를 무조건 선한 역할이라 생각하고 가벼이 날뛰지를 말자. 진중하게 지켜보는 매서운 눈빛들이 있다는,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대해 또한 놀라지도 말아라! 때가 되면 다 그 자신들의 그때의 그 역할들이 후회스러울 수도 있고, 때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가 그 누구를 향해서 함부로 저주를 퍼부을 수가 있을 것이며, 그처럼 함부로 연판장에 넌덜머리나는 서명들을 할 수가 있는 것인가? 시대의 의기에 동조했었건만, 훗날 돌이켜보니 그것이 바로 그 자신만의 천박한 욕망이었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현상들은 다 그 누구의 탓만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인드라망 같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가 감히 나는 절대 그 일과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저지르고 난 뒤에는, 또 함부로 서글퍼하지도 말자. 당하는 자의 입장이라는 것은 바로 천 길의 나락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최근에 이러한 시편을 적어 어느 잡지에 보낸 일이 있다.
그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내 이마의 주름과 그의 쌍꺼풀은 소통한다
그를 사모한 나는 이제 그를 시뻐한다
그의 살신은 맹독을 뿜는다, 성인은 한 톨이라도
노동의 대가를 받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정한, 아니 그들이 허락하는 것 이상은 죄가 됨이다
내 고향 꼴두바위와 부엉이바위는 꿋꿋하다
모내기 끝난 저 논바닥의 어린 모들이여
무럭무럭 자라거라 자라고 자라서
충분히 영근 알곡들이 되거라
고개 숙인 채 일렁이는 들풀들이 되어라
그래선 가끔은 가슴 서늘한 울렁증을 겪어라
그는 나의 채무를 포기했다 그러나
갚아야 할 것이 있는 자는 결코 잊지 않는다
아아 고민이다 변호사가 포기한 온갖 걸
내가 무슨 수로 갚을 수가 있을 것인가
1993년도 춘천에서 나눠먹은 설렁탕 국물이,
그의 뚝배기 같은 우직함이 피처럼 이슬처럼……
(졸시, 「고민이다---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며」 전문)
현 정권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이런 시를 쓴 필자는 물론 박남철 시인과도 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셈인 것이다. 그는 목하 저 한 십 년의 세월을 저러히 벼랑에서 떨어져 버리고 싶은 모진 심정으로 살아냈을 것이다. 허니, 문학아! 예술아! 이제는 제발 정치에 종속되지는 말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일어나요!”라는 낯 간지러운 소리들도 제발 더 이상은 하지도 말자. 다시, 되풀이하여,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는 함부로 슬퍼하지도 말자. 함부로 휘둘리지도 말 것이며, 그럴수록 더더욱 냉정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들을 각성시키고 그들의 잘못을 꾸짖을 수 있는 것이 예술의 위의와 예술인의 존귀함을 담지하는 일일 것이라는 것이다. ‘귀족문학’을 말하고 싶은가? ‘예술의 위의’를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고도, 처절하게 온 전신을 밀어가며 먼 길을 한번 가보도록 하자. 오로지 시만을 양식으로 삼아 고독하게 그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한 투철한 시인을 향해 그 누구가 감히 자신 있게 나서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할 수가 있겠는가 바로 그 말이다! 몽매한 자들이여, 이제 함부로 무리지어 횡행하지도 말 것이며, 진정으로, 문단을 함부로 농단하지도 말자. 여기 오로지 평생을 헤매도 그 수많은 문학상 하나 제대로 얻어 걸리지도 못한 채, 서툴고 어리숙하게도 (괜히 들키기나 하면서, 또는 감추지도 않으면서) 홀로 그 자신 본래면목을 지닌 채, 때로는 이와 같은 사자후를 내뿜으면서 묵묵히 그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한 “자연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가 그 자신들에게 혹시 해가 되지나 않을까 하여, 괜스레 움추려들기나 하면서, 당신들은 먼발치에 서서 수군거려대고들만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약한 것들일수록 괜히 무리나 짓는다지를 않던가?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진정 그 중의 하나는 혹시 아니겠는가? 아니 그러할 것인가? 喝! 또, 一喝!
작가정보: 민경환(閔慶桓)
1957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
2003년 계간 『애지』신인문학상으로 통하여 등단.
2008년 제6회 ‘애지문학상’ 수상.
2009년 첫 개인시집 『탈주냐 도주냐』(종려나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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