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MG로 헬기 공격
증언자: 조인호(남)
생년월일 : 1960. 1. 29(당시 나이 20세)
직 업 : 다방 주방장(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전남대 의과병원 오거리에서 시민과 전경이 대치하는 걸 목격하였으며, 시민들이 학동 파출소를 태우는 것을 목격. 계엄군이 청년 1명을 때려죽이는 것 목격. 이후 화순으로 다이너마이트 가지러 가는 데 동참하였으나 분진 마스크만 가지고 왔으며 지원동에서 무기 나눠주는 것과 시민군이 헬리콥터를 향해 사격하는 걸 목격함.
살릴 수 있었던 청년은 죽고
5월 18일 오후 3-4시쯤 전남대의대 앞 로터리에서 30여 명의 공수부대원을 태운 트럭이 양림다리 부근으로 가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철모를 쓰고 M16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붉었으며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트럭이 양림다리 부근에 이르자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을 본 계엄군들은 트럭을 세우고 내린 뒤 열을 맞추어 시민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들이 위압감을 조성하며 걸어오자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시민들처럼 공수부대를 피해 주방일을 맡고 있던 지하다방에 갔다. 그곳에 있는데, 보건전문대에 다니던 친구와 서강전문대에 다니던 친구가 왔다. 그들은 밖에 나갔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았다며 잔뜩 화가 나 있었다.
19일 오후 5시경에 전대의대 오거리에서 도청으로 가는 골목에서 전경과 시민이 대치하고 있었다. 전경 30-40명이 이미 탈진상태에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앉아 있고, 시민들은 전면에서 지켜보며 야유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시민들 중에 한 명이 구호라기보다는 분노의 감정이 가득 담긴 욕설을 하며 전경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다. 전경들은 너무나 지쳤는지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20일 밤 8시경 거리에 나와보니 4, 5대의 국방색 전경 버스가 전대의대 로터리에 세워져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둘러보니 전경 1백여 명이 남동성당과 전남대 의대 오거리 사이에다 버스 2대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양쪽 바리케이드 사이의 1백 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 너머의 골목 등에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전경들은 1시간 정도 있다가 철수했다. 전경들이 철수하자 1백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이 동네 사람들이었다. 시민들은 데모를 하다 바로 위의 학동 파출소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동 파출소가 불타고 시민들의 함성이 들려 왔다. 얼마 후 소방차가 종을 난타하면서 왔다. 그런데 차에 탄 사람은 소방관이 아니고 시민들이었다. 소방차가 오자 시민들은 합세하여 차를 앞세우고 노동청 쪽으로 나아갔다. 그것을 보고 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지하다방에서 친구인 태수(당시 숭실고 3년)와 동네 청년들 3명과 이야기를 하다 우리도 밖에 나가기로 했다. 맨몸으로 나가면 위험할 것 같아 각자 쇠몽둥이, 각목 등을 들고 나갔다.
이미 시민들은 2백-3백명 정도로 늘어 있었다. 조금 전 파출소를 불태운 시민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행열이 점차 줄어들었다. 다시 지하다방으로 가는데 국민학생, 중학생들이 군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린애들에게 왜 집에 가지 않냐고 했더니 "우리도 데모 해야죠"라고 말했다.
밤 11시경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옥상으로 갔다. 노동청 쪽에서 시위를 하던 시민들이 도망가고 있었다. 2백여 명의 시민들은 주변 골목으로 피했고, 일부는 의대 오거리까지 도망갔다. 그때 추격하던 공수대원은 30여 명이었으며, 페퍼포그차량 1대가 그들을 따라왔다. 그런데 의대 오거리에서 양림동 쪽으로 난 길로 도망가던 23세 안팎의 한 청년이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졌다. 그 청년이 넘어지자 공수 4명이 달려들었다.
"이놈들을 안 죽이면 우리가 죽어!"
이렇게 소리치면서 청년의 몸을 대검으로 몇 차례 찔렀다. 그러고는 시위대열을 추격하러 올라갔다.
옥상에서 그 광경을 본 나는 청년을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아 친구, 그곳에 있던 시민들과 함께 그 청년을 업고 대우병원으로 갔다. 병원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의사와 간호원이 나왔다. 그들은 환자만 두고 가라고 했다. 그때 남광주역 철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피우며 바리케이드를 쳤던 시민들의 여세에 눌린 탓인지 학동 파출소 쪽으로 시민을 쫓아갔던 공수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가던 우리들과 공수들이 맞부딪쳤다. 그들은 "저놈들 잡아라"고 소리치며 쫓아왔다. 우리는 대우병원 차고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여기로 들어갔다고 수근대는 공수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워낙 한밤중이라 지하차고는 깜깜했고, 그들도 두려웠는지 차고로 들어오지 않고 최루탄을 쏘았다. 몇 분 있으려니 그대로 질식할 것 같아서 기왕 죽을 바엔 맑은 공기나 마시고 죽자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공수대는 가고 없었고 거리는 온통 최루탄 가스로 자욱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가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던 청년을 의사와 간호원이 안으로 옮기려는데 병원 앞에 온 공수들이 현관으로 최루탄을 던지는 바람에 환자를 팽개치고 병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잠시 후 나와보니 그 청년은 죽어 있었다고 했다.
전남대 의대 오거리에서 LMG로 헬기 공격
21일 아침 9시경에 거리에 나와보니 전남대 의대 로터리에서 택시와 봉고차 2대가 불타고 있었다. 시민들은 웅성거리며 시내를 향해 가고 있었다. 11시쯤 되어서 버스 1대가 지나다니며 시민들을 태워주었다. 나도 그 차에 탔다. 차 속에는 국민학생, 중학생, 어른 등 20여 명 남짓 타고 있었다. 시내로 가는 줄 알았는데 화순 쪽으로 갔다. 우리는 5, 6명의 청년이 외치는 구호를 따라 외치기도 하고 몽둥이로 차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때 외친 구호는 '전두환이 물러가라', '김대중 씨 석방하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등이었다.
화순탄광(정확한 이름 모름)에 이르러서 광부들과 타협을 하여 다이너마이트를 얻으려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광부들이 안 된다면서 분진 마스크 2박스만 내어 주었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그냥 되돌아오는데 점심시간이 임박한 때라서 점심 먹으러 가야겠기에 의대 로터리에서 내려달라고 해 내렸다. 2시경이었는데, 우리들 앞으로 도청 쪽에서 의대 로터리 쪽으로 3, 4명의 시민이 탄 장갑차 1대가 오더니 다시 방향을 바꾸어 노동청 쪽으로 해서 도청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리고 도청에서 총소리가 한차례 들렸다.
도청의 총성이 그친 직후에 화순 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군용 트럭 3대에 30-40명의 시민군들이 트럭 양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이 몰려들자 차를 멈추었다. 지원동 탄약고에서 무기를 가져왔다고 하면서 모여든 시민들에게 총을 나눠주었다. 수류탄은 트럭에 탄 시민군들이 2개 이상씩 소지해 버린 후여서 시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카빈총은 내가 본 것만 해도 40여 정이 넘었다. 시민군이 지닌 것과 모두 합치면 꽤 될 것 같았다. 총이 분배될 때 고교생들도 받아가자 다시 회수하여 고등학생들은 갖지 말라고 했다. 그때 시민군 말로는 권총이 몇 정 있었는데 어디로 가버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 먼저 지녔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리고 LMG 2정이 함께 있었는데, 27살 정도이고 키가 작은 청년이 월남전 혹은 군대에서 자신이 LMG 사수였다면서 도청 쪽으로 총을 3발 쏘았다. 총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그 총소리에 이전까지 도청에서 계속 들렸던 총소리가 뚝 그치고 시내는 고요해졌다. 그런데 그때 무등산 쪽에서 군용 헬기 3대가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우리들 상공을 선회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저 녀석도 한패니 쏘아 버린다"면서 헬기 한 대를 향해서 총을 쏘았다. 그러자 총에 맞은 헬기는 비틀거리면서 송정리 쪽으로 날아가고 나머지 2대의 헬기는 아주 고공으로 비행하였다. 그리고 LMG 2정을 어디에 설치할 것이냐는 논란이 오갔다. 의대병원에 설치하려 하니 병원이라서 문제가 되고 개인 건물에 설치하자고 하니까 건물 주인들이 자신의 건물에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나는 어머님 때문에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시내 부근은 위험하다는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백운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22일 백운동 로터리 부근에 군인 트럭이 세워져 있고, 1백여 명의 공수부대원이 철길을 따라서 30미터 정도 간격으로 M16으로 무장한 채 2명이 한 조가 되어 서 있었다.
백운동으로 옮기고는 밖을 거의 못 나가고 이따금 거리의 대자보 정도만 읽고 그렇게 보냈다.
24일 오후 3-4시경 잠자다 일어났는데, 목포 방향에서 요란스런 총소리가 30여 분 동안 계속 들려왔다. 큰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쉽게 나갈 형편이 못 돼서 집에 있었다.
27일 새벽 5-6시경 총소리에 놀라 깨어 창밖을 보니 하늘이 온통 헬리콥터로 뒤덮여 있었다. 헬리콥터에서는 "시민들은 문도 열지 말고, 거리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또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는 방송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많은 헬리콥터를 본 것은 내 생애에 처음이었다. 이렇게 해서 27일 도청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광주항쟁도 마지막을 맞는 날이 되었다. (조사정리 이종인)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이 함께하는 휴일 시간 보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