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킹이 분과 임철준씨 말에 의하면
양원리 수철성에 가면 조선시대때의 봉화대가 남아 있다고 하여
자료 수집차 길을나섯다. (7.15일 오전)
양원리 길옆 수원고물상을 지나 경기도지정문화제 209호인 양원리 고인돌을 거처
자동차로 5분정도 올라가니 길 끝이다.
차에서 내려 30분가량 산길을 걷자니 길을 잘못 들어단다.
30년만에 오는곳이라 자기도 헷갈린다고 한다.
반대방향으로 올랐지만 역시 허사
내려오는 길에 애꿋은 영지만 채취했다.
길을 오르다.
갈림길
수철성 답사에 나서다
영지
제법 큰 영지
채취한 영지를 헤아리는 간사
답사길에 동네 개도 따라나서고..
###########################
수철성 답사는 실패했지만
수철성에 대한 자료을 모은것입니다.
양원리 녹색농촌마을 문화유산 홈피발췌
http://cafe.naver.com/yangwon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50
○ 소재지 : 전곡읍 양원리
양원리에서 368번 지방도를 따라 남쪽의 간파리 방향으로 접어들면 왼쪽으로 가
장 높게 보이는 해발 398m의 무쇠봉 정상이 나타나며 그 정상부에 퇴뫼식 석축성
인수철성이 위치한다.
성벽은 천연암벽을 이용한 서쪽면을 제외한 동 . 남 . 북쪽의 급한 경사면에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북벽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허물어져 석재의
일부분만이 수풀사이로 노출되어 있고, 남벽과 동벽은 붕괴되어 유실된 일부구간
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도 4개 부분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다. 전체
서고동저형(西高東低形)에 타원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전체둘레 250m,동서 90m.
남북 25m 규모이다.
산 정상부 남쪽 아래에 남아 있는 성벽 1은 길이 20m, 높이 370cm 규모로 자연
암반 위에 기단석을 두었고, 그 위에 3~5cm 안물림하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50×17cm, 60×20cm, 40×15cm 크기의 변성암재 할석을 수직에 가
깝게 점판암쌓기로 12단을 축조하였으며, 성벽 1에서 등족으로 이어지는 성벽 2는
붕괴된 성의 양측면에150cm 깊이로 내탁이 들어나 있으며 23단을 축조한 4m 길
이가 남아 있다. 성벽 3은 길이 14m로 8m가 원형으로 남아 있는데 70×20cm, 35
×30cm, 30×28cm, 60×10cm 크기의 석재로 350cm 높이를 25단으로 축조하였고,
동쪽 끝부분에 위치한 곡성 (曲城) 형태의 성벽 4는 길이 16m, 높이 5m 규모이며
자연 암석을 기단으로 축조한 면석이 지금까지도 완전한 형태로 잘 남아 있어 축조
양식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 내부의 평탄면은 건물지가 있던 것으로 보이나 최근에 군 부대에서 진지 및
헬기 이착륙장을 개설하면서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게 변해 버렸으며 문지
(門址) 및 수구(水口) 등 기타 부대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수철성은 현재 남아 있는 성의 형태와 축조기법으로 보아 1.3km 서쪽에 마주대하
고 있는 고구려계통의 산성인 눌목리 노고성(老姑城)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
으나 성 내부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통일신라 초기의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반원권무
늬(半員圈文)가 시문되어 있는 유개호의 덮개편이 소량 수습될 뿐 노고성에서와 같
은 고루려계 유물은 수습되지 않아 축성 주체세력에 대한 의문점을 남겨두고 있어
축조시기를 정립할 수 있는 정밀조사가 선행되어야 하겠다.
성의 정상부에서 남쪽으로는 야주군으로 통하는 268번 지방도와 연해 있는 간파
리와 늘목리가, 서쪽은 늘목리 노고성, 북족은 양원리와 전곡시가지, 파주군 적성면
적암리가 조망되는 것으로 보아 미산면 마전리 소재 당성(堂城)을 거쳐ㅜ임진강을
동강하여 삼화리 → 어유지리 → 적암리로 남하하는 세력과, 전곡리 → 고릉리 →
양원리를 거쳐 어유지리 방향 도는 268번 지방도 측선인 간파리 방향으로 남하하는
북쪽세력을 방어할 목적으로 축조된 성으로 보여진다.
≪신증등국여지승람≫ 양주편 고적조에는 이 성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 양주 수철성과 적성의 수철성에 대하여.....
양주군과 적성군의 일부 옛지리지에는 예전 두 고을의 경계에 입지하고 있는 수철성과 노고성을 서로 마주대하고
있는 적성의 수철성과 양주의 수철성으로 표기되어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관찬읍지들이
≪신증등국여지승람≫ 의 오기를 그대로 답습한 편찬기록자의 오류로 인한 것이며, 영조 때 편찬된 적성현 편에는
적암리의 노고성(=아미성)을 수철성으로 편찬기록자가 오기한 것' 이라는 명백한 수정기록이 수록 되어 있어 지명혼등을
바르게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이 두 성의 부근 마을에는 아래와 같은 축성 설화가 전해 온다.
아주 옛날 할미와 할아비가 두 고지의 정상에 각자 성쌓기 내기를 시작하였는데 할미가 먼저 성쌓기를 끝마쳤다 한다.
이에 할아비는 할미에게 "성돌이 모자라니 돌 좀 같다 주시오!"라고 부탁을 했다 한다. 할수 없이 할미는 치마폭에 돌을
가득담고 수철성 정상으로 올라가는데 마침 성을 다 쌓은 할아비가 할미에게 "성을 다 쌓았으니 안고 오는 돌이 필요 없소!"
라고 하자 할미는치마폭의 돌을 산 중턱에 버렸다 한다. 이설화로 인하여 양원리는 '할아비성', 늘목리는 '할미성'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양원리 녹색농촌마을 문화유산 홈피에서 발췌
양원리 녹색농촌마을 문화유산 홈피에서 발췌
첫댓글 답사기를 조금더 자세하게(읽을거리와 흥미가 진진하도록) 글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름다운여행 연천 편집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