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화와 기계화에 따른 대량생산 시대에도 오직 사람의 손으로만 할 수 있는 작업은 여전히 유효하다. 수공예는 제작기간이 다소 걸리고 제작량도 소량이지만 그 가치는 더 크다. 손이 가진 고유영역을 고스란히 지닌 공예품 중의 하나가 매듭이다. 매듭 연구가이자 혼수 전문점 ‘소유’ 대표 성낙윤 씨의 손은 40여년간 함께 해온 선 고운 매듭을 닮았다. 지난 8일 ‘소유’서 만난 그녀는 “매듭작업을 해 온 과정은 내 안의 불성을 발견하는 작업과도 같았다”고 회고했다.
“알알이 맺힌 염주에 신심 매듭 엮어냈죠"
전통 형식을 염주 단주형태로…소박한 자연미 ‘눈길’
“수행하듯 작업삼매…완성작 주변에 보시할 땐 행복”
성철스님 주신 ‘콩 서말 인데…’화두, 평생지침으로
“저는 사실 손재주가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손은 쓰면 쓸 수록 능력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예요.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연습을 통한 숙련된 사람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다 보니 새로운 문양도, 기법도 생겨나는 것 같아요.”
전통매듭의 계승과 동시에 현대화 작업에 두각을 보인 것도 모두 꾸준하게 매듭실을 꼬고 당겨온 그녀의 결과물이다. 최근 ‘불심으로 엮은 오색매듭염주전’을 연 것도 그녀만의 색다른 시도였다.
한복의 장신구나 전통공예품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전통의 매듭이 염주로 다시 태어난 것. “특히 전래되던 구슬형태의 가락지 매듭을 보면서 이를 염주나 단주의 형태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하고 생각한 것이 매듭 염주의 시작이었죠. 항상 휴대하면서 일상 속에서 신앙심도 알알이 맺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지요.”
가락지 매듭에 의해 만들어진 염주나 단주는 통상적인 그것과는 달리 다양한 색상과 형태를 현시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 또한 단단한 느낌이 아닌 부드럽고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우러난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처럼 늘 창조적 작업을 즐기는 그녀의 원래 직업은 교사였다. “15여간 중.고교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늘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듯하고 바른 삶을 남과 자신에게 강요하는 틀에 박힌 규제가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1975년 당시 한 일간지에서 매듭장에 관한 기사를 본 것이 이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 그 길로 인간문화재 최은순 씨를 찾아가 매듭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어 인간문화재 김점순 씨에게 삼베, 길쌈을 배웠다. 이도 모자라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쥬 공예학원 초등과를 마쳤다.
“제가 사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배움에는 끝이 없잖아요. 하지만 스승님들께 어렵게 배우는 과정 속에서도 늘 창의적이고 색다른 것을 구상하곤 했지요.”
그래서일까. 1980년 롯데화랑서 첫 매듭개인전을 열었고, 당시엔 파격적이랄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매듭을 벽걸이, 벨트, 항아리에 장식하는 등 새로운 시도가 돋보였던 작품들을 전시했다. 이후 ‘성낙윤 매듭 연구실’을 열어 매듭 지도와 강의 등을 통해 한국 매듭을 대중에게 보급시키기 시작했다. 매듭을 노리개나 장신구에 국한 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대 주거 생활에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후 침구와 혼수 용품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지금은 색색의 조각 천을 덧대 만든 조각이불 등 그녀만의 솜씨를 펼쳐보이고 있다.
전시회가 끝난 요즘도 그녀는 3년 전부터 시작한 매듭 염주 만들기에 푹 빠져 있다. 단주, 108염주, 1080염주 등 매듭염주를 만들다 보면 날을 새기도 부지기수다. 매일 오후 10시부터 새벽 1시30분 까지 마치 수행자가 가열찬 정진을 하듯 TV 등 모든 방해 요소를 배제한 채 작업삼매에 빠진다. 밤을 낮 삼아 일념으로 엮는 동안은 무아의 세계를 거니는 것과 같았다. “부처님 오신날에는 부처님 전에, 스님들께는 보시 하시는 분들에게 보답하라고 매듭염주를 선물하는 것이 저의 오랜 즐거움이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재주로 주위의 분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인데 저에게도 나름의 수행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주위사람들의 건강, 행복 등 이 매듭염주로 기도하시는 분들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을 염주 한알 한알에 담아냈다. 이는 자신의 업을 소멸해 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불구점에 가보면 중국산 염주 등 질이 떨어지는 물건이 너무 많아서 안타까웠거든요. 사소한 것들이 모여 불교문화를 이뤄가는 것인데 소중하고 숭배할 수 있는 불구를 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녀의 염주매듭은 천연염색한 실크매듭에 자만호, 밀화, 산호, 비취 같은 귀한 보석을 매치해 장식되어 있다. 이와함께 불자들을 위한 실크 절 수건, 염주를 담을 실크 주머니 등도 함께 제작했다. 재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매듭 색깔의 조화를 이루고, 매듭과 더욱 잘 어울리는 재질의 보석을 찾기 위해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이토록 정성과 기도로 영글어낸 특별한 염주 작품들의 전시 수익금을 다시 부처님 법을 펼치는 불사를 위해 회향한 그녀. “부끄러워요. 사실 더 많이 보시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앞으로 더 많이 노력하고 정진해야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영월 법흥사, 강남 봉은사 등을 다니는 틈틈이 그녀는 아침에 향을 켜놓고, 천수경을 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70년대 이기영 박사님을 따라 통도사 수련회를 다니게 된 것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계기였죠. 그 때 참선하고 법문 듣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수련대회에서 경봉스님을 뵈었는데 당시 스님은 ‘이 세상을 무대 삼아 한판 멋있게 놀다가라’는 법문을 해 주셨지요.”
이후 성철스님을 만나 3000배를 하고 법명도 받았다. “당시엔 큰 스님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큰 인연인데 말이죠. 하지만 스님이 주신 당시의 화두만큼은 잊혀지지 않아요. ‘콩 서말’ 인데… 아직도 그 화두를 풀지 못했지만, 사는 동안 마음의 지침으로 삼도록 해야죠.” 이후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에게 받은 법명은 ‘오도성’. 생활 속 깨달음을 위해 화내고 불평할 때마다 자신을 다독이라는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그녀는 외국인 스님들을 지원하는 ‘무량회’ 회원이기도 하다. 방송인 교수 작가 등 30여명의 회원이 모여 현각스님, 무량스님, 청안스님 등의 포교 활동을 돕고 있다. “불교가 좋아 멀리 한국에서 출가한 그 스님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그래서 회원들이 스님들을 돕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성 씨는 올해 말 일본에서도 매듭염주전을 열 계획이다. “앞으로도 ‘매듭염주 보살’로 불렸으면 좋겠어요. 점차 소외되어가는 전통매듭의 계승과 현대화를 위해 앞으로도 새로운 것을 늘 구상할 거예요. 매듭 만드는 법을 기호화 하고, 새로운 문양을 고안해 내야겠지요.” 일하는 건강한 ‘손’과 매듭염주처럼 옹골찬 ‘불심’을 가진 그녀는 그래서 오늘도 부지런히 매듭실을 잡아당긴다.
성낙윤 씨는…
성낙윤 씨는 중앙대, 숙명여대 대학원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했으며, 신광여고.성동여실고 가정교사로 15년간 근무했다.
1975년 인간문화재 최은순 씨에게 매듭을 사사 받은 후 1980년 첫 매듭전시회를 열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한국문화원, 하와이대학서 다수의 전시회를 열고, 1996년 ‘성낙윤이 만든 혼수전’을 열어 호응을 얻었다.
이후 ‘성낙윤 매듭연구실’을 열고 매듭 연구의 맥을 잇기 위한 대중화 및 보급화에 힘썼다. 또 매듭 이외에 침구 한복 혼수소품 등으로 작품 영역을 확대해 1985년 압구정동에 ‘성낙윤이 만든 혼수’로 새롭게 오픈했고, 이어 1999년 청담동에 혼수 전문점 ‘소유’를 새롭게 단장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혼례용품, 함, 장신구, 침구류 등 전통의 멋에 현대적 감각을 더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유명하다. 소량으로 제작해 나만의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작품 특징이다. 노력하고 부지런해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에서 상호를 지었다.
첫댓글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