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3 익산철우회 2018철도선후배 추억영상
자유인 조동화는 영상을 통한 인간의 삶을 구현하면서 자연과 벗하며, 걷는일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하루 1만보를 실천하며 보낸답니다.
화무십일홍!
청춘은 감쪽같이 지나가 옛시절이 그리워, 철우회 선후배님께서 코로나시대에 만날 수 없어 지나간 영상을 소개 해 올립니다.
매달 10일이면 철우회원들 만나 추억을 이야기하고 간소한 식사를 하였지만, 지나간 영상을 보니 십여명이 순서도 없이 이세상을 떠나가고 없네요.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네요.
이제는 이세상에 없는 그사람들 이름을 나열하기도 힘이 듭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추억이란 잊어버리려 해도 잊을 수 없어 평생토록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마음속의 일기장이며, 추억은 지나간 그리움의 시간들이기에 추억을 더듬어 봅시다.
조동화의 벗님들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익산철우회 이사회 개최===
▶일시 :2018년9월10일 11:00
▶장소 : 익산 철도회관
익산철우회는 이사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8.9.10 익산철도회관에서 단합과 친목을 다지고 현안사항 토의를 진행했다.
김병철회장님과 권태군상무이사의 열정어린 노고에 힘입어 사단법인 익산철우회는 매월 10일 이사회가 열리고 있다.
김병철 철우회장님은 오늘 이사회에서
재능나눔활동에 참여하신 회원님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으며, 김경수회원님께서 마한서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삼채상을 수상한것을 치하했으며, 서정만이사님께서 건강한모습으로 이사회에 참석한 것을 환영감사인사를 표했으며, 김병철철우회장께서 대한노인회 장기대회에서 준우승을 수상하여 전국대회출전권을 획득하였음을 보고 드렸고, 박득권전임회장님의 대한노인회 활동상을 소개하였습니다.
세월의 노를 저으며 현업을 은퇴하고 철도를 퇴직한 선후배님들은 한분 한분이 자긍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으며, 한평생의 직장 철도의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회원님들의 마음이 베어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철도인이 가슴으로 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산길 물길을 돌고 돌아 드넓은 대지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젊음의 가속페달을 힘차게 밟았던 지난시절
꼬불꼬불 가파른 고갯길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철마에게 고운모래 뿌려대며 거북이걸음으로 기어올라 고갯길을 넘고 넘어 긴 숨을 달랬던가!
오직 희미한 유(油)등 신호기에 의지하며 작은 눈 크게 뜨고 고요하기만 했던 어느 시골역에 정적을 깨뜨리며 철길을 누볐던 아련한 추억들
천둥 번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레일이 녹아내리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도
폭설에 기찻길을 하얗게 덮어버린 길 없는 철길을 오직 철마에 의지하며 용케도 철도인은 신이내린 천직이라고 자랑 했었던가?
증기기관차가 시커먼 연기를 토해내며 칙칙폭폭 애환서린 기적소리와 디젤기관차의 경적소리는 유수같이 흐르는 세월속에 세상을 많이도 바꾸어 놓아 장엄하고 영원한 추억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한밤의 정적을 깨며 울렸던 기적소리에 시골농부들은 사랑을 나누었겠지요.】
이사회를 마치고 영빈회관에서 홍어탕으로 점심식사를 하며 선후배간 담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담소 중 누군가 70년대에는 철도가족패스 보여주고 무임으로 기차 타시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셨다던 아버님얘기가 어디서 들렸다.
시골농부의 아들도 철도에 입문하여 철도가족패스를 볼일이 있어 서울가실적에 끊어드리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자랑하시던 아버님 생각이 난다.
세월의 여로에서 한평생 청춘을 불살랐던 선배와 후배님께서는 철도를 따뜻한 어머님의 고향으로 간직하시고, 건강100세 시대에 더욱 더 건강관리 잘하여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철도선배님 후배님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본인이 1970년에 철도에 입사했으니 50여년전 이야기라면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야기가 될 것 같아 어느 철도원의 이야기를 수필로 읽으면 될 것 같네요.
이 이야기는 오직 사실이 아닌 것을...........
1970년 철도청 침대원 이야기
야간열차에는 침대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야간에 편안히 잠을 자면서 여행목적지까지 가려는 사람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침대차에는 상단과 하단이 있으며, 하단이 상단보다 요금이 비싸다.
상단은 열차운행시 차의 흔들림이 심하다.
반면에 하단은 상단보다 안정적이며, 위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불편이 없다.
침대차를 처음 이용해 보는 사람은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 덜그락대는 열차바퀴 소리와 고속으로 달리는 진동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잠을 잘 자는 사람도있다.
침대차에는 침대차를 관리하고 승객을 안내하며, 차내에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도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침대원이 불침번을 선다.
침대차에는 절대로 동침은 안된다
다만 6세미만의 유아만 가능하다.
1970년대 초의 일이다. 강릉에서 청량리까지 운행되는 열차의 침대차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침대원의 이름은 황모씨 였다. 황모씨는 걸국 서울지방철도청의 징계를 받고 파면되었다.
침대칸에 돈을 받고 동침을 허용했다는 것이 그의 죄명이다.
당연한 죄값인지도 모르겠다.
청와대 모 비서관이 강릉에 출장을 갔다 돌아올 때 침대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침대차에서 편히 잠을 자고 내일 근무에 임해야 했던 비서관은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윗간인지 옆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둔다한 열차소리와 더불어 이상한 남녀간의 소리가 들려와 신경이 날카로워셔 버린 것이다. 애써 귀를 막고 잡을 청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밤새 화기 나있던 그는 새벽에 청량리역에 도착하여 침대차에 서 내리려다 안녕히 가라고 인사하는 침대원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는 밥새 잠음못 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침대원이 오히려 화를 내듯 말하였다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그 비서관은 침대원의 항변이 괘씸하기도 하고 은근히 화가 치밀어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아침에 출근하자 말자 철도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침대원을 피면시기라고 요구했다.
그 침대원의 이름은 황모씨 였다.
황모씨는 결국 서울지방철도청의 징계를 받고 파면되었다.
침대간에 돈을 받고 동침을 허용했다는 것이 그의 죄명이다.
부정을 저지른 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죄값인지도 모르겠다.
비서관은 그 후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비서관은 아침에 출근하다가 이상한 광
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허름한 옷차림에 한 손에는 깡통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을 매일 보게 된 것이다.
수상하게 생각한 비서관은 어느 날 그 사람을
불러 물어 보았다.
“당신은 왜 내일 여기 서있는 거요?"
그러자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밥줄을 끊어 놓으니, 내가 같곳이 어니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소리를 들은 비서관은 내심 뜨끔 했으리라.
자초지정을 알게 된 비서관은 고심끝에 그에게 야단도 쳐보고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 침대원 황씨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어느 날 비서관은 고심 끝에 부인과 상의하여 부인이 잘 설득해 보기로 했다.
비서관이 출근하자 부인은 황씨를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권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10만원짜리 수표 3장을 황씨의 손에 쥐어 주면서 생활에 보태 쓰라고 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황씨는 부인에게 물었다.
“이 돈을 정말로 저에게 주시는 것 입니까?"
“물론이지요. 가져다 생활비에 보태쓰세요."
"정발 저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정말 저에게 주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반복해서 재차 3번을 묻고는 그 아까운 수표를 갈기갈기 찢어서 마당에 화 뿌리고 마루에서 일어나 대문으로 향하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저 아이들이 불씽 하구먼.
마루에서 놀고있는 두 아이들을 두고 한 말이다.
부인은 깜짝 놀랐다.
수표를 찢어버린 행동이며,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더욱이 황씨가 들고 있넌 깡통에서 휘발유 냄새가 역하게 풍기던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혹시나 밖중에 우리 집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이라도 지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을 지울수가 없었다.
운수 계통 열차승무원들 사이에 주고받는 말이 있다. “죽어도 꽥하고 죽지 그냥 죽지 않는다"고.....
하루에도 수백명씩 여객을 상대하고 항상 자신들의 행동과 일처리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철도청 윗분들이나, 감사관실 사람들, 심사사무소 직원들, 공안원들, 그뿐인가 지방철도청 감사실, 운수과 직원들, 심지어는 역 주재 형사들, 군 보안대 직원들, 어쭙잖은 신문기자들까지도 승무원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돈을 뜬어 내려는 무리들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히 대항 수단 또한 강해지지 않을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승무원들은 닳고 닳은 사람이 되어가고, 자기 나름대로 뒤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소위 백을 만들어 놓곤 하였다.
누군가 돌보아 주는 사람없이는 승무원 생활이 어려웠다.
아무리 맑고 깨끗하게 일하려고 해도 사회가 용납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봉급만 가지고는 생활이 어려웠고 먹고 살 수는 있어도 체면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승무를 나가서는 밥도 사먹어야 하고, 승무원 숙소에 쳐
박혀 있기가 무료하여 다방에 가거나 술이라도 한잔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승무를 마치고 사무소에 들어와서는 열차조역이나 교번원 또는 회계담당자에게 얼마씩을 주어야 하는 것이 당시에는 관행이었다.
황씨는 얼마 후에 그 비서관이 마련해 준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