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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도자 앞에 기다리는 핍박
마태복음 10:16~23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참 기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떠나보내기 전에 친히 당부하시는 말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 복음을 전하고자 하실 때 안쓰러움과 염려를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을 세상에 보낼 때 예수님의 마음은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는 것과 같이 염려스러운 목자와 같은 심정입니다. 이는 주님 자신이 자기 백성 가운데 오시고 사역한 이래로 이미 많은 고난과 시련, 모욕과 멸시, 죽음의 위협 등을 심가하게 경험하셨기 때문에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의 길과 동일한 길을 가는 복음 전도자들, 주의 종, 주의 성도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하여 동일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사명이기에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아니 보내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한 가지 총론적인 주의 사항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만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짐승이 뱀입니다(창 3:1). 창세기 3장 1절의 이 단어 ‘간교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룸’으로서, 부정적인 의미로는 ‘간교하다, 교묘하다’라는 뜻이지만, 긍정적인 의미로는 ‘지혜롭다, 총명하다, 슬기롭다’라고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께서 ‘뱀같이 지혜로워라’는 말슴은 핍박과 시험의 경우에 이를 적절하게 대응하라는 조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의 목숨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지혜롭게 처신하여 그 고비를 넘기곤 하셨습니다. 핍박이 고조될 때에는 유다 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주 사역지를 잠시 옮기시기도 하시고, 예루살렘 예배 참석도 조용히 제자들과 은밀하게 올라가시기도 하시고, 때로 일정 기간 이방 지역으로 여행을 나가시기도 하셨습니다.
엘리야도 아합 왕의 박해를 피하여 그릿시냇가에 은신하기도 하고, 저 이방 지역의 사렙다 지방에 숨어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한 후에 다메섹 성에서 본격적인 전도를 나섰다가 체포의 손길이 다가오자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을 토하여 성벽을 내려가 그 손을 벗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노력은 뱀처럼 지혜로움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취할 태도입니다. 복음 전도자가 지혜없이 우직하기만 하면 가혹한 박해에 직접 부딪혀서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나라에 큰 손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순교는 그것을 피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그의 이름에 큰 모욕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을 부인하라는 압력이 들어올 때에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순교를 택하여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지혜롭게 피하여 또 다시 주님이 문을 열어주시는 때에 나아가 재차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찾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복음 전도자는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해야 합니다. 이는 복음 전도자가 핍박을 피하려다가 신앙의 순결성을 훼손하거나 혹은 사람의 숫자를 더 많이 얻으려고 복음의 근본 정신을 일부 훼손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신사 참배와 동방 요배가 십계명 제 1계명, 제 2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해치는 행위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오늘날 세속 사회 속에서 복음 전도자와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는 않지만 세속적인 모습에 전도자가 동참하면 안될 것입니다.
이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복음 전도자의 기본 수칙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복음 전도자들이 사역지인 세상에서 받게 될 여러 가지 핍박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기 시작합니다. 이 핍박들은 첫 번째 선교 여행 중에 열두 제자들이 겪을 단기간의 경험만을 예고하신 것은 아니고, 주님 오실 날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하면서 겪게 될 일들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핍박들을 주님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복음 전도자들이 직면하는 핍박은 종교적 박해입니다.
17절 말씀에,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도할 당시 유대 사회는 전통적 유대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종교계의 주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땅에 오셔서 진리를 증거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말씀을 확증하자,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라고 몰아붙이고 신성 모독자요 모세를 비방한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앞장선 자들은 바로 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고 그들을 추종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제국의 넓은 이방 지역을 다니며 전도할 때에도 가장 격렬하게 그를 핍박한 자들이 바로 유대인 동족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다행히 본래 강력하던 유림과 불교계의 세력이 약화될 때였기 때문에, 이러한 종교적 박해가 약했습니다. 중국도 청나라의 국력이 약화되고 국내외 사정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유불선 종교의 힘이 약화되어 선교사님들의 전도가 박해가 많이 있었지만 그나마 널리 전파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복음이 일찍 전파되었지만 계속하여 섬나라 특유의 지리적 정치적 종교적 특성상 전통이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갔을 때 저항이 남달리 컸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성장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향후 직면하게 될 종교적 박해의 모습은 외부 종교의 경쟁과 박해는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교회 내부의 정체성의 갈등에서 비롯된 종교적 갈등과 박해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유럽 교회와 미국 교회의 선례를 보면, 한국교회에서도 벌어질 것으로 예견되는 염려꺼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 교회로 나뉘어져 낙태 문제, 동성애 문제, 환경 문제 등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교회 간에 갈등과 박해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을 믿고 따르는 복음주의 교회와 이를 상징적으로만 믿는 자유주의 교회로 나뉘어 서로 갈등하고 박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교회, 편의주의적인 교회, 세상 친화적인 교회와 이를 거부하는 순수 진리주의 교회,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는 참 교회가 대립하면서 세속적인 교회가 참 교회를 박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다원주의적 흐름도 교회 운동을 박해하는 요소로 등장할 가능성이 큽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분위기를 따라서 타 종교에 대한 비판이나 이단 사이비에 대한 비판이 막혀가고, 복음 전도 자체를 불법화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이 기승을 부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하면 앞으로 전도 길이 많이 막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핍박과 방해를 물리치고 참 교회를 세우고 영혼들을 건지려는 전도자들이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주님의 가르침은 17절에 일러주신 말씀대로, “사람들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삼가라’는 ‘프로세코’라는 헬라어 단어는 ‘말을 주의하다, 조심하라, 집중하다, 끈질기게 청종하다, 기꺼이 따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참 신앙을 무력화시키고 참 교회를 혼잡케 하고 세상으로 끌어들이며 복음 전도를 가로막는 자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니, 복음 전도자들은 정신 차리고 사람들을 정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삼가라’는 말씀의 원문적 의미는 “사람들을 조심하라, 사람들로부터 말을 청종하는 것을 멀리하라, 사람들을 가까이 따르는 데서 떨어지라, 사람들을 집중하는 데서 멀어지라”는 뜻입니다.
교묘한 종교적 술수와 계책과 오염된 말로 참 신앙을 더럽히고 약화시키려는 자들을 멀리하고 그들의 말에서 돌이키고 그 대신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오직 성령의 거룩한 감화 감동만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종교적 박해 상황이 점점 강렬해질 터인데, 우리 모두 주님의 경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따라고 참 복음 진리의 말씀만을 증거하는 사명자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복음 전도자에게 닥칠 박해의 영역은 정치적 박해입니다.
18절에 이르기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 하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 예고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의 재판정에서 심문당하시고 십자가 형에 처해진 이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헌신한 열두 제자들이 다 당시의 임금들과 총독들과 같은 정치적 지도자들 앞에서 박해받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성경과 전설에 비추어 보면, 최초로 야고보 사도가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 칼로 목베임을 당하여 죽었고, 베드로 사도도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 직전에 천사의 구출로 간신히 옥에서 나와 전도하다가 나중에 네로 황제 때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도 도미티안 황제 때에 지금의 터어키 서남부 지역에 있는 밧모 섬에 귀양보내어져 고생하였고, 안드레 사도도 그리스 아가야 지방에서 전도하다가 총독에게 체포되어 십자가 형에 처해져 순교했습니다. 빌립 사도는 소아시아의 히에라볼리에서 선교하다가 십자가 위에서 순교했고,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인도의 왕에 의하여 핍박을 당하여 결국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듯 거의 다 고위직 정치 지도자들의 핍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핍박 과정에서 많은 이적이 나타났고 담대한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던 이야기는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영국 에이레 지방 출신의 토마스 선교사님이 대동강변까지 와서 목베임을 당해서 순교한 후에 그 평양으로부터 강력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참으로 간절한 열심을 품고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를 타고 평양까지 오는 도중에도 이 나라의 많은 백성들을 접촉하며 성경을 나눠주었고, 죽는 그 당일에도 자기를 죽이는 자에게까지 성경을 내밀어 주면서 칼에 죽어갔습니다. 그 결과 토마스 선교사님이 준 성경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우리나라 초대 교회 역사를 연구하여 기록된 토마스 선교사님의 전기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렇듯 복음 전도자들이 정치적 박해 상황을 맞이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 때 우리 주님은 전도자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러한 과정에서 성령께서 복음 증거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가신다고 주님은 약속해주셨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9,20절)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우리가 앞으로 전도할 때에도 핍박과 시험이 다가올테지만, 그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전도를 위하여 입술을 열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사 복음을 담대히 술술 막힘없이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세 번째, 복음 전도자들이 당할 고난의 또 다른 상황은 가족의 핍박입니다.
21절에,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 겪는 가정의 불화 수준이 극심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의 말씀입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가정 내 불화를 일으키는 자라는 비난을 당하게 될 것이요 또 복음 전도를 받아 신앙을 갖게 되는 개종자들도 집안의 무서운 박해를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저 역시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에 집안 식구들의 핍박을 많이 받았던 쓰라린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목해야 할 가족들 간에 알력이 생기고, 명절에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힘들고, 서먹서먹하고 말다툼이 생기곤 했습니다. 게다가 제가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까 더 큰 박해가 식구들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심지어 인도의 선다씽 같은 경우에는 힌두교 집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또 신학교에 간다고 나서자, 그 아버지가 그의 음식에 독을 몰래 타서 길 떠나는 그가 가는 도중에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아주 나중에야 그 아버지가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와 구원받은 후에 세상을 떠납니다. 선다씽의 경우만큼 가혹한 경우는 아닐지라도 신앙을 갖게 될 때, 집안 식구들, 가족들, 친척들, 절친하였던 친구들로부터 미움, 배척, 왕따를 당하는 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일을 겪을 것을 미리 예고하셨으니,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한 것처럼 놀라지 말고 실망치 맙시다. 우리 주님께서 예고한 대로, 이러한 신앙적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좁은 길, 생명 길, 영생 길로 들어선 것을 알리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22절에 이렇게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지금 믿지 않는 남편에게 혹은 부모님과 자식들로부터 신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명절 모일 때마다 힘든 일을 겪고, 직장에서 외톨이가 되는 일을 겪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일을 겪는다면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지금 신앙의 정로를 걷는다고 생각하고 평안을 가지고 박해를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르시기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하셨으니, 끝까지 잘 이기시고 끝까지 가족 전도, 친척 전도, 직정 전도, 친구 전도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힐 날이 다가올 줄 믿습니다.
끝으로, 우리 주님은 복음 전도자로서 박해를 당하 때 도중에 중단하지 말고 게속하여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
이 동네에서 박해 당하면 저 동네로 가서 계속 전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모든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끝까지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가 없어도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의 큰 문을 열었던 허드슨 테일러도 전도하다가 문이 닫히는 경우를 많이 당했습니다. 혹은 몸이 약해져서 고국으로 잠시 돌아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 방해 등이 있었으나 도리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더 많은 열매를 맺히는 길이 펼쳐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도 본래 인도 선교에 나섰지만 인도에서 전도가 막히고 나중에 미얀마로 인도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많은 영혼이 건져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도중에 포기하지 맙시다. 끝까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합시다. 때가 되면 23절 말씀처럼, 반드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의 때가 언제 영광스럽게 마침이 될 지 모르나, 그 끝에서 우리 모두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를 이리떼 가운데로 어린 양같이 연약한 우리를 보내시고 늘 노심초사 염려하시며 늘 함께해주셨던 영적 전쟁의 총사령관이신 우리 주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가 전도의 현장에서 받은 여러 영적 싸움의 흔적들을 보시고 쓰다듬으시면서 “네가 열심히 잘 싸웠구나.”라고 칭찬하시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 모두 여러 가지 핍박을 당하는 중에도 더욱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낙심하지 않는 전도자가 되어서 영혼들을 생명길로 인도하는 일에 끝까지 열심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